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길 끝에서는 언제나
또 다시 길이 열린다
길을 찾아가는 길
나는 언제나 그렇게
길이 있으면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
희망은 늘 그렇게 있다
아버지께서는 산책이,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버스가, 나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산책이, 살아있는 책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버스가, 나의 살아있는 책이라고 말씀드린다
아버지께서는 산책이, 시간으로 산 책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버스가, 시간으로 싼 책가방이라고 말씀드린다
나는 오늘도 버스 안에서 창문 안팎의 책에 밑줄을 긋는다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여러 번 정독하는 책은 자연이다
산책은 자연이다 자연은 산책이다
산책은 자연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일이다
산책은 시간을 주고 산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제주에서 제주와 함께 살아보니 이제는 조금 알겠다
1년을 살아보니 감귤나무 발목이 부은 이유를 알겠다
10년을 살아보니 돌들이 왜 검은지 그 이유를 알겠다
20년을 살아보니 돌담에 속삭이는 말들을 좀 알겠다
30년을 살아보니 한라산이 하는 말들을 조금 알겠다
40년을 살아보니 바다의 숨비소리를 조금은 알겠다
50년을 살아보니 폭낭의 통곡소리를 조금은 알겠다
제주에서 제주사람으로 살아보니 이제는 좀 알겠다
제주의 4월은 고사리 장마에 젖는다
동백꽃 떨어지고 수선화 잎도 시든다
밤마다 소리도 없이 다녀가는 발자국
밤마다 아무 말 없이 울다가는 사람들
수의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난 사람들
제주의 사월은 고사리 장마에 젖는다
제주의 사월은 동백꽃도 젖고 수선화
수의도 젖고 어린 것들도 함께 젖는다
저 물음표는 언제쯤 바로 설 수 있을까
제주도에서 보는 수평선은 둥그렇다
백록담도 둥그렇고 오름도 둥그렇다
섬들도 둥그렇고 사람들도 둥그렇다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은 늘 둥그렇다
감귤도 둥그렇고 올레길도 둥그렇다
바람도 제주도에서는 둥그렇게 분다
비가 개인 다음날 아침
마당이 없어지는 시대에 마당에 나갔다
확,
덮쳐오는 땅 냄새
아,
어머니
우리들의 봄은 어머니 같은
사철나무 울타리 안으로
벌써 들어와 피어나고 있었다
강은 그렇게 땅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새들은 열려있는 새집을 더 좋아한다
저마다
가슴 속에 창공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낡아 가고 있다
오늘도 더 낡아 가고 있다
우리들의 창공은 그렇게
열려 있는 새장이다
숲 속의 바람은 언제나 숲 속에 있어야 숲 속의 바람이고 숲 밖의 바람은 아무리 숲을 두드려도 숲이 열리지 않아야 숲 밖의 바람이 된다 그러나 아, 나에게는 오늘도 숲이 없다
― 나는 아직 나의 삶을 유보하고 살아야한다
세상에 비가 내리면
나는 비로소 갭니다
세상이 젖어갈수록
나는 맑게 갭니다
그러다가 세상에
해가 뜨면
나는 너무 무겁게 쓰러집니다
밤새
더욱
투명해지기 위하여,
목숨마저
깍아 내려야 했다
그렇게 길은 열리고
죄를 짓지 않아도 손톱이 쑥쑥 자란다
비가 오지 않아도 발톱이 쏙쏙 빠진다
구불구불하게 길을 구부리며 가는 사람들
저 질긴 꿈은 부러지지 않는다
홀로 일어선 사람은 홀로 걸어가지 않습니다
아!
어둠이 너무 환하다
그래, 이제는
세상이 너무 뻔하다
사람들은
너무 밝아서 탈이다
지평선을 지나
수평선을 걸어
사랑 찾아 흐르다가
산을 보고 웃어주고
섬을 보듬어
없는 사랑 잉태하면
낙태수술받은나는절망들만우글대는하늘을빈가슴으로품는다
나는 따뜻한 밥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
누구나 오셔서 드십시오
식기 전에 잡수십시오
하늘은 나의 밥입니다
마음이 고픈 사람
누구나 오셔서
맛있게 잡수십시오
당신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향이 바로 당신 가슴에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무덤입니다
아직은 따뜻한 나의 무덤입니다
제주도에는 강이 없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더 높은 산이 있다
더 깊은 바다가 있다
강보다
더 긴 이어도가 있다
큰일이다
나의 도벽이
재발할 것만 같다
다시
당신을
자꾸만
훔쳐 오고 싶다
당신의 마음을
통째로 훔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