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42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_ (1936. 추정, 윤동주 20세)
1936년에 쓰인 4행의 아주 짧은 동시다. 화자는 눈 위에서 개가 즐겁게 뛰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데 개의 발자국을 꽃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시인은 1937년 같은 제목의 다른 시인 <개>를 쓴 바 있다.
* 원문표기
- '눈 위에서' -> '눈 우에서'
202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Take /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 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나는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이 거리의 행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행려는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다 담배꽁초에 나의 시간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역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서울역의 시계가 서울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https://youtu.be/bjIKZ_FNm9M?si=OmPtLeHvKrJgG2Bs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은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https://youtu.be/Kxax7WZfOf0?si=0sGCD8bDwAf-cyHm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https://youtu.be/9nEEHhyEtj4?si=m2MGhfnEvMeA-G9u
2024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웰빙 / 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https://youtu.be/rxnn3yxtev4?si=QkyaezOwDL4UeJoY
‘허구’인 은유로 ‘현실’을 새롭게 서술… 내 글에 ‘새로운 은유’를 담는 법
등록 2023-11-10 10:12 수정 2023-11-12 22:32
은유가 뭔지 자신 있게 답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국어 시간에 배웠던 은유의 예를 떠올려보라 하면 틀림없이 ‘내 마음은 호수’라고 말합니다. 한결같습니다. 수십 년 동안 오직 이 시구절만 떠올립니다. 국어 교육이 굳건히 잘됐다고 해야 할지,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국어 교육, 특히 글쓰기 교육에서 놓친 것 중 하나가 은유를 협소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을 멋지게 꾸미는 수사법 중 하나라고 말이죠. 은유를 글을 쓰는 기교나 장식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은유가 장식품이라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 일 겁니다. 하지만 은유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은유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은유와 함께 생각하고 함께 삽니다.(언어 자체가 은유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니체 얘기를 해야 하니 참습니다.)
없는 곳이 없더라
은유는 A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B라는 다른 대상에 빗대어 말하는 방식입니다. 원래 A와 B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기에 같은 자리에 앉을 일이 없었습니다. ‘마음’과 ‘호수’는 전혀 다른 영역의 낱말인데, 이 둘을 강제로 접속시킴으로써 갑자기 둘 사이에 닮은 점을 찾게 됩니다. 이전에 상상해보지 않았던 유사성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은유는 글이 가닿을 수 있는 상상과 창조의 최전선입니다.
흔히 은유는 ‘A는 B다’ 형식을 갖는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어나 구절 속에도 은유가 숨어 있습니다.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유가 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너무 흔해 느끼지 못할 뿐, 은유가 넘쳐납니다.
예컨대, ‘눈사람’이란 말도 은유입니다. 이 말이 은유라고요? 은유입니다. 눈이 사람일 수는 없잖아요. 눈덩이 두 개를 붙여놓는다고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걸 ‘눈덩이두 개 붙인 것’이라 하면 마음이 삭막해질 것 같네요. 사람도 아닌 것을 ‘사람!’이라 부르며 좋아합니다. 눈덩이 두 개 붙인 것과 사람은 전혀 다른 물성을 갖지만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진짜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죠. 은유적 표현에 등장하는 두 요소는 닮음(유사성)과 다름(이질성)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꽃’이 들어간 말도 그렇습니다. ‘벚꽃’이야 식물 이름(벚나무) 뒤에 ‘꽃’을 붙여 만든 말이지만, ‘접시꽃, 제비꽃, 달맞이꽃’은 꽃 모양을 보면서 다른 영역의 말을 끌어들여 이름을 붙였습니다. ‘눈꽃, 불꽃’은 진짜 ‘꽃’도 아니네요. 누군가 가지에 쌓인 눈을 보며 ‘꽃을 닮았군’ 하면서 눈꽃이란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그렇다고 눈꽃을 진짜 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웃음꽃’을 피우거나 ‘이야기꽃’을 피운다고 할 때도 ‘웃음’과 ‘이야기’를 ‘꽃’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과 연결해 붙인 말입니다. 땀에 젖은 옷이 마르면 허옇게 생기는 얼룩을 ‘소금꽃’이라 부릅니다. 꽃이 아닌데 꽃이라 부릅니다. 어떤 대상을 좀 더 친숙한 다른 무엇과 함께 씀으로써 그 대상이 달리 보입니다. ‘땀얼룩’과 ‘소금꽃’의 거리만큼 대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책’에도 ‘책등’이나 ‘책날개’가 있죠. 책에 동물의 등이나 날개가 달렸을 리 없는데도 그렇게 부릅니다. 모두 그 속에 은유가 도사리고 있군요.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욕망
낱말의 뜻은 계속 변하는데, 그 변화의 원동력이 은유입니다. 애초에 쓰이던 영역과 전혀 다른 영역에 그 낱말을 쓰다 보면 뜻이 바뀌고 확대됩니다. ‘먹다’의 뜻이 뭔가요? ‘밥’을 비롯한 음식물을 섭취한다는 뜻이겠죠. ‘먹다’는 음식물과 결합할 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떤 괴짜 하나가 재미 삼아 이 말을 다른 데 써봅니다. ‘욕을 먹었다!’ ‘욕을 들었다’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그 괴짜는 이렇게만 쓰는 게 따분했나 봅니다. 이야기 영역에 속하는 ‘욕’을 ‘먹다’라는 음식 섭취 행위와 결합했습니다. 재미있군요. 은유입니다. ‘나이를 먹다, 돈을 먹다, 겁을 먹다, 더위를 먹다’, 모두 은유입니다.
추상적 개념은 은유의 도움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시간’을 들 수 있습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로 표현하나요? 흔히 ‘시간이 간다, 온다, 흐른다’고 하지요. 사람도 아닌 시간이 어떻게 오거나 갈 수 있죠? 시간을 마치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 위를 ‘움직이는 사물’로 생각하니 이런 표현을 쓰는 거겠죠. 그러니 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보내기’도 합니다. 만질 수 있는 사물로 생각해 ‘시간이 많다, 적다, 있다, 없다, 남다, 모자라다’라는 표현도 씁니다. ‘귀한 물건’으로도 생각해 ‘시간을 아끼고, 벌고, 절약하거나, 낭비한다’고 말합니다. 은유를 통하지 않고는 시간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상언어에 깊이 박힌 은유이죠.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도 은유가 넘쳐납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발이 달린 것도 아닌 ‘하루’가 어떻게 멀어져 갈 수 있죠? 기억이나 가슴은 그릇도 아닌데 어떻게 채우거나 비울 수 있겠어요. 사람도 아닌 청춘이 어떻게 어딘가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렵지 않게 이해되죠. 우리는 ‘은유로 생각하기’의 달인입니다.
‘비난의 화살, 돈의 노예, 열광의 도가니, 절망의 구렁텅이, 침체의 늪, 상상의 날개’ 같은 말도 은유입니다. ‘비난’을 ‘화살’로 바꿔 생각하는 놀라운 신통력! ‘새까만 후배, 새빨간 거짓말, 눈먼 돈, 무거운 침묵, 뜨거운 박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까만 후배’는 얼굴이 까만 후배가 아니라, 나이 차가 꽤 나는 시간의 영역을 색채 영역으로 전환해 표현한 거죠. 일상언어 속에 은유가 많다는 건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는 뜻이겠죠.
은유는 단어나 문장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글은 추상적 주제를 은유로 손에 잡힐 듯이 구체화해 이해하게 만듭니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 사회를 온도의 차이로 은유화해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로 나눕니다. ‘차가운 사회’는 놀이를 없애면서 제의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정체된 사회이고, ‘뜨거운 사회’는 제의를 없애면서 놀이의 영역을 넓히려는 역동적 사회라는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란 학자는 근대를 ‘정원사의 사회’로, 현대를 ‘사냥꾼의 사회’로 은유해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지금까지 은유가 도처에 널렸다고 했는데, 이게 왜 글쓰기에서 중요할까요? 우리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이유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글을 다시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앞에 열거한 일상언어의 예는 모두 기성품입니다. 신상품이 없습니다. 신상품은 눈길을 끌고 발길을 멈추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 글에 새로운 은유를 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도 글을 쓸 때 은유적 표현을 쓰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은유를 써왔더군요. ‘말은 세계를 베어내는 칼이다’ ‘의미는 팔랑귀다’ ‘가끔 말은 선을 넘는다’ ‘말에도 말썽꾼이 있다’ ‘말은 입에 사는 도깨비다’ ‘말은 일렁이는 불꽃이다’ ‘된소리의 반격이 시작됐다’ ‘말소리는 의리가 없다, 바람둥이다’ ‘어떤 말엔 감정의 손가락이 달려 울음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짧게 인용하느라 문장만 나열했지만, 저 문장이 씨앗이 되어 한 편의 글이 됩니다. 은유는 한 편의 글을 관통하는 관점과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언어(말과 글)는 세계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 아닙니다. 언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어는 세계를 일정한 시선으로 이해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세계를 형성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계를 형성하는 힘을 가졌기에 내 글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되는지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지면 현실에 대한 이해도 달라집니다. 은유를 써보면, 언어란 것이 고착되지 않고 순간순간 생성과 해체가 거듭되는 역동적 성격임을 몸소 느낄 수 있습니다.
글 안 써도 재밌는 시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은유를 적절히 쓰려면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서 그걸 다른 영역에 적용해 보는 겁니다. 은유의 소재는 널려 있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구체적인 사물과 온갖 경험이 은유의 소재입니다. 주변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서 그게 다른 무엇과 닮았는지, 무엇과 잇닿아 있는지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보세요. ‘주변’이란 게 별것 아닙니다. 내가 직면한 모든 구체적인 겁니다. 씻고 밥하고 출근하고 걷고 일하고 만나고 먹고 놀고 얘기하는 모든 일상.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사물. 구두, 양말, 젓가락, 창문, 머리카락, 수세미, 컵라면, 리모컨, 파리채, 바퀴벌레….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은유의 소재입니다. 그걸 다른 영역에 적용해 보는 겁니다.
인생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보죠. ‘내 인생은 고달팠다’고 하면서 고달팠던 이야기를 곧바로 나열하지 말고, ‘내 인생과 닮은 게 뭐가 있지?’라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이런 식이죠. ‘인생은 냉장고다’ ‘삶은 물수제비다’ ‘자동차 바퀴를 보며 산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 반대로도 생각해 보는 겁니다. ‘저 옷걸이는 무엇과 닮았지?’ ‘이 삐걱거리는 대문을 무엇과 연결해 볼까?’ 이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새로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안 쓰더라도 혼자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은유는 허구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허구인 은유로 현실을 새롭게 서술해 왔습니다. 은유를 통해 현실을 다시 서술해 온 겁니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말은 허구이지만 ‘마음’을 새롭게 해석해 줍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내 마음은 선풍기야’ ‘내 마음은 만년필이야’ ‘내 마음은 길고양이야’라고 말한다면, 마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문학에서 다시 찾아오자
우리가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버린 게 바로 ‘은유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걸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문학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생각해 온 은유를 우리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언어가 세계를 건설한다’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이 은유가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은유는 낡은 세계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세웁니다. 은유 없는 글쓰기는 맨주먹으로 못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은유는 새로운 말의 세계를 건설하는 망치입니다(이것도 은유네요).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