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26
세상에서 가장 깔끔한 책을 구상한다. 앞표지에는 오직 제목만 있다. 출판사 이름도 지은이 이름도 없다. 목차도 없다. 쪽번호도 없다. 대신 비어있는 종이는 있다. 오직 마음만 담았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5월이다. 따라서 오직 진실한 마음만 너에게 보내고 싶다. 뒤표지는 엷은 미소만 담아도 좋을 것 같은데...,
너의 꿈과 삶과 글을 응원한다
1. 나는 이제 너에게 돌아간다
나는 이제 너에게 가야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 돌아간다
나는 이제 너에게 들어간다
나는 이제 너에게 스며든다
나는 이제 너에게 숨을 쉰다
나는 이제 바다로 돌아간다
나는 이제 하늘로 돌아간다
나는 그렇게 파도처럼 간다
너는 그렇게 구름처럼 간다
2. 너에게 나를 보내려고
너에게 나를 보내려고 나를 찾는다
너에게 나를 보내려고 너를 찾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너에게 나를 보내려고 먼저 찾는다
배 가득 나를 찾아서 실어가고 있다
배 가득 푸른 하늘이 실려가고 있다
3. 개구리밥 상에 뜬 연잎 한 상
너를 찾으려고 진흙을 뒤졌다
너를 찾으려고 물속을 뒤졌다
나를 찾으려고 흙속을 뒤졌다
나를 찾으려고 속살을 뒤졌다
개구리밥 상에 달처럼 솟았다
개구리울음소리 환하게 핀다
너의 숨소리가 환하게 보인다
너의 숨비소리 속까지 보인다
아직 홀로 서지 못하는 너와 나
뜬 잎 한 장의 실핏줄이 흐른다
너와 나의 가슴에 거미 한 마리
4. 감귤꽃 속에서 탱자가 보인다
감귤 꽃들이 환하게 피었다
감귤꽃 속에 너와 내가 있다
꽃 속에 글쎄 너와 내가 있다
우리는 저렇게 함께 살았구나
우리는 저렇게 한 식구였구나
감귤꽃 속에서 감귤이 보인다
감귤꽃 속에서 탱자가 보인다
탱자와 감귤이 한 집에 살았구나
너와 나는 처음부터 한 식구였구나
그래서 향기가 저렇게 가득했구나
우리들의 사랑은 천년을 살겠구나
우리들의 향기는 하늘로 가는구나
5. 사랑해서, 덕분이다
사랑이라서 고맙다
그리움이라서 더욱 고맙다
이제 너에게로 간다
푸른 하늘 깊은 곳으로
뱃고동소리 울리며 간다
들리는가 나의 심장소리
둥둥둥 북을 치며 간다
쿵쿵쿵 바다가 울린다
바다를 통째로 이끌고 간다
6. 보려고 하면 다 보인다
보려고 하니 모두 다 보인다
꿈에서 본 것들이 다 보인다
보려고 하니 비로소 보인다
보려고 하니 내가 보인다
보려고 하니 네가 보인다
바다에 숨어있던 것들이 보인다
하늘에 숨어있던 것들도 보인다
외도 앞바다에서 깊이 주무시던
관세음보살님도 서서히 보인다
파도소리가 목탁소리로 보인다
구름의 발자국에서 운판소리 들린다
누워계신 부처님께서 아침 샤워를 하신다
명상하던 부처님께서 저녁 샤워를 하신다
7. 마음을 갈고닦아 빛나는 몽돌들
저 눈빛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라산에서 먼 길을 내려온 돌들
얼마나 많은 모서리들을 깨뜨려
저렇게 둥그런 마음이 되었을까
얼마나 많은 밤들을 어둠으로 울었을까
얼마나 많은 날들을 떠나야만 했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바다에 쏟았을까
오늘도 젖어 있는 마음 말리고 있구나
8. 너의 마음 위에 나의 마음을 올린다
너의 마음 위에 나의 마음을 올린다
나의 마음 위에 너의 마음을 올린다
우리는 그렇게 한 몸으로 하늘이다
우리는 그렇게 푸른 하늘로 올라간다
9. 바다가 벗어놓은 발자국
바닷가 모래톱에 파도무늬가 가득하다
밤새 너를 찾아다닌 발자국이 가득하다
파도의 숨소리가 가지런하게 잦아든다
바다가 벗어놓은 발자국이 가지런하다
내 마음속에도 파도 발자국 선명하다
바닷가 모래톱에서 톱질 소리가 들린다
10. 봄에는 모두가 손을 모은다
봄에는 모두가 손을 모은다
우리는 간절히 손을 모은다
너와 나 간절히 손을 모은다
떡잎도 꽃잎도 손을 모은다
몸과 마음이 함께 손 모은다
하늘도 손을 모으고
공기도 손을 모은다
손을 모으면
껍데기는 스스로 떨어진다
봄은 언제나 기도의 신이어서
모아진 손에서 봄이 피어난다
11.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12.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13. 무화과, 너에게 나의 꽃을 보여줄게
사람들은 꽃이 없는 줄 알지만
꽃이 너무 많아서 숨겨 두었지
꽃이 너무 붉어서 숨겨두었지
너에게만 남모르게 보여주려고
깊이깊이 더 깊숙이 숨겨 두었지
너에게만 살짝이 길을 알려줄게
너에게만 온전히 꽃을 보여줄게
오직 너에게만 나의 사랑을 줄게
14. 무화과, 홀로 익어버린 사랑
너에게만 보여주려고 숨겨둔 꽃
너에게만 열어주려고 닫아둔 문
너에게만 달려가고픈 사랑의 발
너에게만 안기고 싶은 나의 가슴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아무리 기다려도 너는 보이지 않고
새들이 쪼아대고 뱀이 똬리 틀어
홀로 익어버린 사랑 터질 것만 같아
15. 나를 사랑했던 눈사람
내가 사랑했던 눈사람
나를 사랑했던 눈사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강물에 바다에 하늘에
구름이 되어서 흐를까
우리는 어디서 만날까
나를 사랑했던 눈사람
내가 사랑했던 눈사람
16. 한라산의 곰과 사자들은
한라산에 사는 곰과 사자들은
겨울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겨울에만 한라산으로 오는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들을 따라서
겨울에만 내려오는지도 모르겠다
한라산 신들의 허리선이 드러나는
하얀 겨울에만 내려와서
한라산 나무들의 옷이 되어준다
그리하여 한라산에서는
나무들마다
떠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산다
겨울이 지나도 한라산이 울고 있다
17. 꽃과 어머니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 하나
꽃은 모두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18. 모래 한 알
작은 모래알들이 모여
물과 함께
화양연화를 이루었다
우리들의 작은 꿈들이 모여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었다
모래 한 알의 꿈들이 모여
의미 있게 꽃 피어간다
19. 모과 두 개
내 책상에 모과 두 개 있다
한 개는 벌써 검게 변했고
한 개는 아직 향을 뿜는다
나는 지금 어느 쪽 모과일까
나에게 남은 향 얼마일까
나는 이제 참회록을 써야 한다
20. 동백
사람들은 동백꽃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으로만 안다
꽃이 통째로
툭, 떨어진다고 슬퍼한다
하지만
동백의 마음을 알아야만 한다
동백꽃은
튼튼한 씨앗과
튼튼한 갑옷을 만들기 위하여
암술 하나만 남기고
지상의 꽃으로 돌아간다
이제 다시
건장한 씨앗까지
지상으로 돌려보내고
갑옷꽃도 벗는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꽃도 피어나리라
21. 추워지면 피어나는 당신이라는 꽃
추워져서 장갑을 찾고 귀마개를
찾는다
이어도 서천꽃밭에 노란 국화
피어난다
수선화가 피어난다
수선화의 계절이다
동백꽃망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추워지면 생각나는 사람이
피어오른다
22. 빈 집
오늘부터 빈 집이 되었습니다
오늘밤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환하게 밝혀주면 좋겠습니다
따듯하게 안아주면 좋겠습니다
23. 발전소
나의 가장 강력한
발전소는 바로 당신
당신만 보고 있으면
나는 힘이 솟아나요
나의 끝없는 사랑의
발전소는 당신의 마음
당신만 살아 있으면
나의 별빛은 밝아져요
24. 사랑의 온도
안에서 피는 꽃은
계절이 따로 없다
온도에 맞춰 핀다
사랑은 늘 그렇다
25. 초승달
저 뿔은 도대체 누구의 뿔이더냐
내 머리 만져보니 뿔이 사라졌다
저 귀덮개는 또 누구의 것이더냐
내 시린 귀를 만져보니 없어졌다
뿔이 따뜻한 귀덮개로 변하니
내 마음도 부드럽게 잠이 든다
하늘에 떠 있는 당신의 귀에
귀덮개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26. 달문moon
달은 문(聞)이다
달은 나의 귀다
달은 밤새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하여
사랑하는 당신을
따라서
문 밖으로 나간다
달은 당신의 귀다
평생
다른 사람의
입을 따라가는
사랑하는
당신의 귀를 본다
나의 귀는
날이 갈수록 자라나고
당신의 귀는
날이 갈수록 멀어진다
27. 태풍
저는
태풍의 심장 속에 있습니다
용 한 마리
좌심실에서 대동맥 쪽으로
막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용의 꼬리 쪽에
부처님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시고
공자님도 계십니다
저도 용을 따라서
태풍의 눈 쪽으로 갑니다
태풍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더 잘 보일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대의 숨소리도,
그대의 숨결도 보일 것만 같습니다
지금 막 지름길 하나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에움길에 있습니다
지름길을 달려가는 사람들도
모두가 무사하면 좋겠습니다
28. 태엽
누가 저렇게 작은 손으로
동글동글동글동글동글동글
정교하게 태엽을 감았을까
소철 잎 태엽들이 풀린다
태엽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이렇게 큰 손으로
내 마음의 태엽을 감았을까
둥글둥글둥글둥글 둥글둥글
내 마음의 태엽이 풀리다가
철커덕 걸려 풀리지 않는다
태엽 풀리는 소리가 안 들린다
29. 삶
나는 함께 사는 식물들이
기지개를 켜는 새벽이 좋다
나는 함께 사는 식물들이
하늘을 들어 올리는 아침이 좋다
나는 이슬방울 터는 죽순도 좋고
스프링 펼치는 소철도
참 좋다
나는 아침을 준비하는
코스모스꽃도 좋고 낮달맞이꽃도
참으로 좋다
나는 키가 작아도 불평하지 않는
채송화도 좋고
죽순시절에 허리가 묶여서
휘어버린 대나무도 참 좋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이 와도
떠나지 않고 제 자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식물들이
나는 늘 고맙고 경이롭다
해가 떠도 찡그리지 않는
해바라기꽃들이 존경스럽고
별과 달이 모습 보여주지 않아도
돌아서지 않는 달맞이꽃이
사랑스럽다
나는 언제나 함께 사는 식물들에게
근면하고 성실한 사랑을 배운다
오늘 아침에도 호박줄기가
제 사랑을 이웃에게 손을 뻗어 나아간다
30. 길 끝에 서 있는 길
길 끝에서는 언제나
또다시 길이 열린다
길을 찾아가는 길
나는 언제나 그렇게
길이 있으면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
희망은 늘 그렇게 있다
31.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32. 땅 냄새
비가 개인 다음날
아침
마당이 없어지는 시대에
마당에 나갔다
확
덮쳐오는 땅 냄새
아,
어머니
우리들의 봄은
어머니 같은
사철나무 울타리 안으로
벌써
들어와
피어나고 있었다
강은 그렇게 땅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33.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34. 소망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여행하고
만 명의 친구를 사귀어라*
하지만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단 한 곳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만을 사귀고 싶다
나는 평생
단 한 권의 당신을 읽고
단 한 곳의 당신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만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망이다
※ 讀萬券書 行萬里路 交萬人友
35. 등나무
당신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버린 등나무였다
등만 보이던 그 등나무가 오늘은 등꽃을 켜고 있다
36. 등이 환하다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복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37. 고구마 순
고구마 순을 붙인다
촉촉이 적셔주는
비 오는 날의 틈바구니에
고구마 순을 꽂는다
아침을 안쳐놓은 어머니는
텃밭에서 줄기를 베어오시고
서너 마디씩의 이야기를
뚝 뚝 분질렀다
물러나는 구름을 따라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뒷산을
올랐다 날마다 밤마다
애통 터지게 싸우던 강 씨 아저씨가
둥그렇게 묻혀있는 산밭을 돌아
거름 가마니를 이고 기어 올라오는 아주머니
어머니는 차라리 그녀를 부러워했고
어젯밤의 시끄러웠던 이야기를
되돌려 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만든 밭두렁에 조심히
손가락으로 쑤셔 넣고 다독였다
손톱 속으로 파고는 흙
애통 터지게 그립던 아픈 날들
나는 하늘 그늘에서
허리 굽혀 고구마 순을 붙인다
끈질긴 순을 붙인다
38.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섬진강을 따라 달이 흘러내렸다
달 속에 내가 있고 바람이 불고
물소리가 들렸다
깊게 뚫린 하늘 타원형
그 속으로 빠져드는 내 죽음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며 귀향하는
강물소리 곁에서
달빛 속으로 젖어든다
깊게 가라앉는다 언뜻언뜻
언뜻 뒤집히는 물빛을 헤아리며
들판을 건너는 바람
그 발걸음에 맞추어 나도
내 겨울을 건너뛰고 싶다
남도의 섬들처럼 서로를 못 잊어
돌아앉은 그리움이고 싶다
달이 쿵 쿵
하늘을 갈아엎으며 간다
가로수들이 우우 깨어나 쓰러지고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몸을 움츠려도 풀리지 않는 그러한
겨울 속을 강물 따라 흐르고 있다
39. 사람이 사람을 벗는 시대에
벗는다 사람들이 서둘러 벗는다
하늘을 벗고 산을 벗고 바다를 벗고
강을 벗고 강물소리까지 벗는다
벗는다 여자들이 벗고
남자들도 서둘러 벗는다
겉옷을 벗고 속옷을 벗고 살을 벗고
속살을 벗고 뼈를 벗고
목숨까지도 쉽게 벗어던진다
벗어야 할 것은 벗지 못하고
자꾸만 입으면서 욕심을 입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죄를 껴입으면서
이데올로기 전쟁 종교전쟁 폭력
현실과 거짓 그리고 빚더미와 어둠
벗어야 할 것과 벗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생각을 벗어 버리고
자꾸만 자꾸만 성급하게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몸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넋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양심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고향을, 땅을, 인정을,
이웃을, 뿌리 뽑아 내팽개쳐 하수구에 버린다
쉽게 벗고 쉽게 다시 입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벗어던져 버린다 떠나버린다
사람이 사람됨을 벗어던져 버리는 시대에
나는 고향 여울물 소리를 추억처럼 입는다
40. 팽이
헛발 딛는 내가 넘어지려 하면
곁에서 어머니는
옷고름 풀어 만든 팽이채로
아픈 허리를 감아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지쳐 쓰러진 만큼
나는 바로 설 수 있었고
발아래 흐르는 강물 소리에
늘 젖어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러한 겨울은 따뜻하였고
겨울 밖에서도 오오래, 오오래
무지개를 감아 들이며
제자리 서기로 돌고 싶었습니다
41.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꽃
당신과는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해는 서산마루를
붉게 걸어가고 나는 잠을 깬다
밤에만 피는 꽃잎 속에서 나는
살아있다 어둠은 나의 집이다
그 집에는 천년을 열어도 다
열지 못할 많은 문이 있다
천년에 딱 한 번 한꺼번에
잠깐 어둡게 열렸다가 스스로 잠긴다
그 속에는 발가락도 닮지 않은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한다
고민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러본다
불러본다 그리하여 나는 울어본다
울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웃어본다
웃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도망친다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진다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본다
돌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기 위하여 저만치
저만치 피어있는 꽃 한 송이
42. 문
사람들은 문門을 믿지 못합니다
자물쇠를 먼저 준비하고 열쇠는
강물에 던져버립니다 문은 너무 잘 열려도
문답지 못합니다 쉽게 열리면 쉽게
낡아 갑니다 너무 열리지 않아도 우리는
질식해 죽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하나쯤의
열쇠는 누구나 갖고 싶습니다
문을 열어줄 때는 언제나 머뭇거리면서
문만 보이면 언제라도 열어보고 싶습니다
문고리만 보여도 열고, 정작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문을 잘 걸어 잠급니다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문 잠그는 소리 속에 번번이 갇히고
맙니다 안에서는 쉽게 열 수 있는 문問도
밖에서는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습니다
도둑들은 열려있는 문보다
닫혀있는 문聞을 더 좋아합니다
문 앞에 서면 언제나 두들겨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문을 함께 열어보고 싶습니다
아무도 열지 못한 당신의 문을,
기꺼이 열어보고 싶습니다 시간처럼
열렸다가 곧 닫혀버리는 문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함께 살 수 있는 문을
열고 싶습니다 문은 낡을수록 사람 냄새가 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잎 하나에도 문이 있고 아침이슬 한 방울에도
그 세계 속으로 열려있는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길은
목숨으로라도 끝내 열어야 하는 문입니다
43. 가난과 자유
난장에 내던져진 삶 속에서도
들풀들은 사랑을 소중히
간직할 줄 압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소하게 만들고
사람을 섬세하게 만들어
기릅니다
가난한 들판에 피어난
제비꽃 가슴의 자유를 보며
삶터와 장터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44.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바람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가을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단풍이 돼라 하네
마지막 남은 목숨 사랑만 하라 하네
오직 사랑으로만 타오르는 꽃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단풍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가을이 돼라 하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돼라 하네
봄으로 다시 꽃 피는 가을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날더러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돼라 하네
45. 바다로 가는 자전거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위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파도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또 다른 파도가
자전거를 밀어주고 있다
그렇게 바다로 가서
바다가 되어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밑으로 달려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닷속 깊은 곳으로 달려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뱀장어처럼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로 가는 뱀장어가 있다
바다로 가는 뱀장어는 강을 닮았다
강에서 강물을 배운 뱀장어가
바다로 가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줄 아는 강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사기와 사랑이 잘 구별되지 않는 이 시대에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다
연어들이 거슬러 돌아오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
바람 부는 파도에 현혹되지 않고
바다의 깊이를 간직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빛보다 더 많은 별빛을 싣고 가는
빛나는 자전거가 있다
46. 별빛과 불빛
하늘의 구멍가게 같은 십자가들
붉은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도처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어린 나를 시장에 버려두고
몰래 지켜보던 눈빛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처음 배우던 시장에서도
늘 붉은 십자가로 빛나던
그 깊은 숲 속 고아원에서도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눈빛을 닮은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별을 닮은
불빛을 만들어 나무마다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하늘의 별빛과 지상의 불빛
우리들은 이제 그렇게 늘 반짝이고 있습니다
47. 억새꽃
아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직까지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억새꽃은 억새꽃만큼 울고
바다는 바다만큼 울며 살아간다
오직 사람들만이
슬픔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나에게만 슬픔이 있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누구에게나
그만큼의 슬픔은 있는 법인데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억새꽃이며 바다의 혀들이
오늘따라 너무나 조용히 빛나고 있다
48. 사람의 고향
당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향이 바로 당신 가슴에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무덤입니다
아직은 따뜻한 나의 무덤입니다
49. 횡단보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문이 잠시 열린다
길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밟고 지나간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사다리를 밟고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투명한 유리문이 다시 닫힌다
한 사람이 유리문을 서둘러 통과하려다
유리문과 유리문 사이에 그만 갇혀버리고 말았다
길과 사다리를 함께 지우면서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신발과 타이어 그림자가 켜켜이 쌓이고 있다
납작해진 사람이 그사이에 끼워져 있다
보이지 않는 유리문에 이마를 부딪치고 서 있다
신호등이 유리로 만든 관棺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50. 수혈에 대하여
가슴을 열고 심장에 칼을 대어본 사람은 안다
핏속에는 혈장과 혈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하지 못하는 엽록소가 가득하다는 것도 안다
큰 수술을 받고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인공호흡기와 함께 회복실에서 깨어난 사람은 안다
엽록소 속에는 단풍으로 가득함을 안다
처음부터 붉고 노랗고 푸른 단풍잎임을 안다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 같은 단풍도 다 지고
뼈만 남은 나무는
겨울에 땅속보다 하늘이 더 춥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겨울나무는 하늘에 사는 식구들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 주삿바늘을 꽂고 하늘에 수혈을 한다
땅속의 따뜻한 혈액을 수혈받은 별들이 눈을 뜬다
며칠 후면 고드름도 땅에 주삿바늘을 꽂고
하늘의 영혼을 지상에 사는 식구들에게 수혈할 것이다
그렇게 땅과 하늘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함께 살 것이다
51. 나무 발전소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하고 계신다
땅속 오래 묻혀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52. 액자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가 있다
오지 못할 사람을 대책 없이 기다리는 때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새벽이 액자처럼 걸려있다
방 안에 액자 하나 걸려있다
사연이 참 많은 액자 하나 걸려있다
나무틀 액자 하나 아침처럼 걸려있다
내 왼쪽 가슴속 깊이 박혀있는 못 하나에
액자 하나 지금까지도 걸려있다
그 액자 속에 있던 사람 대신
지금은 내가 들어가 갇혀있다
1986년이었던가 1987년이었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왔던 내가 들어있다
한라산이었던가 어느 오름이었던가
안경 쓴 내 뒤로 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시여, 내가 낳은 시들이여!
황소의 쟁기질처럼 끊임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강히
자라는 일꾼이길 바란다
이런 글자들도 함께 갇혀서 기침을 하고 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내린다
내 가슴속에 갇혀있던 액자를 꺼낸다
그 액자 안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글자들을 꺼내어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시 비어있는 액자틀만 벽에 건다
그 빈 액자에 느닷없이 새로운 아침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53. 산책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여러 번
정독하는 책은 자연이다
산책은 자연이다
자연은 산책이다
산책은
자연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일이다
산책은 시간을 주고 산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54. 반듯하게 세우다
봄에 고개를 쭈욱 내민다 죽순으로 태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잔뜩 외투를 껴입은 죽순은 눈빛이 순하다 그러던 죽순이 7월 장대비를 맞으며 겁 없이 쑥쑥 자란다 죽죽 자란다 웃통을 벗어던지며 정신없이 쭉쭉 자란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대나무는 그렇게 딱 1년 동안에 모두 자란다 한꺼번에 자란다 마디를 미리 만들고 마디마다 생장점을 미리 만들고 마디마다 한꺼번에 자란다 마디에서 키도 자라고 마디에서 가지도 자란다 그렇게 1년 동안에 모두 자라 버린 대나무는 남은 평생 마음을 다스린다 평생 마음만을 다스린다 비어있는 마음을 더 깊이 비우고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대나무는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느라 등이 굽을 시간이 없다
55. 마중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미리 나와서 기다리면
혹시나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나와서 기다려봅니다
당신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은 벌써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와서
봄을 만나고 있습니다
바람의 숨결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물소리가
한결 힘차게 들려옵니다
어떤 나무에서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복도를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이 움직이듯이
곱았던 나무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서둘러 동구 밖까지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이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기다리면 올 것만 같아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56. 눈부처
나는 당신의 눈부처입니다
당신이 눈을 감으면
나는 곧 없어지고 맙니다
당신은 나의 눈부처입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당신은 곧 내가 되고 맙니다
57. 뼈
뼈가 아프다 사랑이 아프다
아픈 뼈를 가만히 만져본다
내 몸속의 하얀 뼈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뼈를 직접 볼 수 없다
내 뼈들은 모두
나의 살과 나의 가죽에 갇혀있다
나의 살들이 글쎄
나의 뼈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다
뼈의 감옥, 하얀 뼈의 감옥
나는 감옥에 갇혀있으므로 살 수 있다
감옥 속에서 비로소 살 수 있는 나
당신은 나의 통뼈다 아닌가
나는 당신의 통뼈다 아닌가
나는 다시
사랑의 감옥에 갇혀야만 살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감옥 안에서만 살 수 있다
통뼈인 나는
살과 가죽이 가두어주어야만 살 수 있다
당신이 나를 가두어주어야만 살 수 있다
뼛속으로 사랑의 피가 흐른다
장대비 철창이 하늘을 가두어버리는
오늘 나는
당신의 따뜻한 감옥 속으로 숨어들고 싶다
58. 집
나는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낡은 집입니다
당신이 돌아와 살지 않으면
곧 허물어지고 말 낡은 집입니다
당신이 끝내 돌아오지 않아도
나는 당신의 체온을 잃지 않는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집입니다
당신과의 아름다운 기억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입니다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사람입니다
59. 천칭
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
천칭자리 별들을 바라본다
새해 계획표를
아직도 작성하지 못했다
계획표에 당신을 넣으려니
눈물이 너무 많을 것만 같다
당신을 아예 빼려고 하니
내가 통째로 없어져 버린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당신 때문에
나는 도저히 계획표를 작성할 수 없다
하늘의 천칭자리 별들을 본다
밤새도록 궁리를 깊이 하여도
하늘의 저울은 기울어지지 않는다
60. 詩와 詩人
言語에 칼질을 잘해서
詩 비슷한 것을
잘 만드는 사람이
詩人이 아닙니다
사람의 길을 찾아
그 사람의 길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그런 사람이 바로
진짜 詩人입니다
그런 詩人의 삶이
바로 진짜 詩입니다
나는 지금 이어도공화국에서
그런
영혼이 맑은 당신과 함께
가장 향기로운
詩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61.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62. 봄
봄이 오고 있다
봄을 본다
봄이 몸으로 보인다
봄이 몹으로 보인다
봄이 봅으로 보인다
해가 조금씩 일찍 온다
해가 조금씩 늦게 간다
해를 보려고 새싹이 돋아난다
해를 보려고 풀들이 자라난다
봄은 봄(春)이다
봄은 청춘이다
봄은 스프링(spring)이다
봄은 통통 튀어 오른다
봄은 봄(bomb)이다
봄은 펑펑 터진다
봄이 왔다
봄이 봄으로 보인다
나도 이제 봄이다
봄이 환하게 핀다
63. 숨결
누워서 가만히 내 숨을 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허공이 가슴속으로 들어오고
나의 숨결이 하늘을 데워준다
당신의 숨결이 내부로 들어와
나의 아픈 어깨를 주물러주고
나의 아픈 심장을 어루만져주고
외호흡과 내호흡으로
나를 오늘도 사랑으로 살려준다
하느님의 숨결과 부처님의 숨결
나무들의 숨결과 풀꽃들의 숨결
우주가 문 없는 코로 들어온다
허파를 지나서 심장을 지나서
혈관을 지나서 세포를 지나서
미토콘드리아를 지나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어지는
깊고 아름다운 우주의 긴 여행
당신과 나는 오늘도 이렇게
따뜻한 우주의 숨결로 만난다
누워서도 앉아서도
걸어가면서도 물구나무서서도
나는 가만히 당신의 숨결을 본다
64. 칡과 등나무
칡꽃이 환하게 피었다
등꽃은 지상을 밝히고
칡꽃은 하늘을 밝힌다
등나무는 시계방향으로 돌며 오르고
칡넝쿨은 반시계방향으로 돌며 오른다
시계를 보니 둥그렇게 돌고 있다
시곗바늘은 어느 쪽으로 돌고 있는가
(시곗바늘은 왜 같은 쪽으로만 도는 것일까)
0시에서 출발하면 오른쪽일까
3시에서 출발하면 아래쪽일까
6시에서 출발하면 왼쪽일까
9시에서 출발하면 위쪽일까
시곗바늘은 그냥 둥그렇게 돌고
칡은 칡이 좋아하는 쪽으로 돌고
등나무는 등나무가 좋아하는 쪽으로 돈다
사람들은 칡과 등나무를 보고
갈등(葛藤)이란 말을 만들었다
갈등이란 말을 만든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고
갈등이란 말을 모르는 칡과 등나무는
지상과 하늘까지 환하게 밝히며 살아간다
65. 몌별
볕뉘 하나 없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음지식물로 자라야만 했던 친구야
성산 일출봉에서 햇빛 한 짐 가득
바지게 넘치도록 짊어지고 가서
너의 아침 앞마당에
환하게 부려놓고 싶은 오늘
나의 낡은 지게가 보이지 않는구나
아버지의 깊은 그늘 짊어지고 가서
아득한 산속에 그냥 두고 왔었구나
그날 받쳐 두고 온 지게 작대기
너의 늦은 소식이 부러뜨리는구나
음지식물 같은 달이 되어 살다 보니
달빛과 햇빛은 서로 만날 수 없구나
언젠가 아픈 고향에서 다시 만나자
너는 또 이어도의 햇빛인지 달빛인지
한 동이 이고 태평양을 건너가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먼 그대가 되어가는가
대추나무에 추억들만 아그데아그데,
66. 하루
하루는 24면의 신문이다
나는 자정이 되면 신문처럼
시간을 접어서 쌓아 놓는다
하루를 접어서 쌓아 놓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문을 맞는다
가끔은
지난 신문 뒤적거려
먼지만 풀풀 날린다
나는 석간신문일까
너는 조간신문일까
나는 구독자일까
너는 발행인일까
내가 신문(新聞) 보다
신문(新門)을 더 좋아하고
신문(新文)을 더 사랑하여
하루가 온통 문과 글로 보인다
하루는 24면의 신문이고
한 해는 365쪽의 책이다
67. 연
오래도록 연꽃을 바라보니
나는 연꽃이 되었다
오래도록 나무를 바라보니
연꽃은 목련꽃이 되었다
오래도록 산을 바라보니
목련은 산목련이 되었다
산목련 아래
따뜻한
나무의자 하나 있다
하늘이 내려와 앉을 때마다
함박웃음소리 남몰래 피어난다
68. 나는 너를 걷는 사람
가을 아침 일찍 곶자왈 숲길을 걷는다
아픈 심장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제 밤에 술을 먹지 못하여 행복하다
하나로 부족하여 발의 심장이 돕는다
빨리 걸을 수 없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오래도록 바라보면 닮아간다고 했던가
나도 이제 곶자왈 맹아림을 닮아간다
저마다 상처에서 다시 태어난 나무들
당당하게 숲을 이루어 버섯들 키운다
나는 순례 중인 낙엽을 밟지 않으려고
돌들을 밟고 시나브로 걸어 들어간다
딱따구리 소리에 올려다보니 낙엽 난다
상록수도 잎과 평생 함께 할 수는 없다
나뭇잎 따라 내려와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뭇잎의 영혼을 들고일어나는 버섯들
고개 들면 양치식물들의 싱싱한 호흡들
아, 나는 오늘도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
아파서 행복한 사람, 죽지 않고 살아서
테우리길 지나서 가시낭 길을 걸어간다
숨골에서 숨소리가 들려온다
은신처였던 유적지에서 숨소리 들린다
숯가마의 거주지에서도 숨소리 들린다
밟고 있는 돌에서 지구 숨소리 들린다
상처도 이렇게 잘 익으면 숲이 되리라
아름다운 숲에서 나도 숲이 되고 싶다
아름다운 고승들처럼 숲으로 들고 싶다
숲의 끝까지 들어가 낙엽을 덮고 싶다
숲이 될 수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
69. 떨켜
나는 이제 발걸음 멈추고 겨울나무가 되려고 합니다 부름켜를 끄고 떨켜를 켜려고 합니다 아픈 심장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꽃과 잎과 과일을 보내려고 합니다 당신은 이제 바람을 따라 나의 뿌리로 또다시 오시거나 다른 나무의 뿌리로 가시겠지요 나도 한 때 당신의 꽃이었거나 혹은 잎이었거나 과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잠시, 찬바람 속 겨울나무가 되어야만 합니다 새로운 봄에 다시 서로의 따뜻한 심장이 되기 위하여 나는 이제 겨울나무가 되어 땅과 하늘을 불러들여 심장을 만듭니다
당신은 이제 발걸음 멈추고 겨울나무가 되려고 합니다 부름켜를 끄고 떨켜를 켜려고 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꽃이고 잎이고 과일입니다 당신은 겨울나무가 되어 땅과 하늘을 불러들여 심장을 다독입니다
꽃을
잎을
열매를 위하여
떨켜를 켭니다
가만가만 심장을 다독입니다
70. 둥근 집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갔다
그에게도 가고
너에게도 갔다
하늘에도 가고
바다에도 갔다
어둠에도 가고
밝음에도 갔다
슬픔에도 가고
기쁨에도 갔다
시장에도 가고
사찰에도 갔다
온 세상 둘러보니
사랑이 제일이다
온 동네 살아보니
시인동네가 살만하다
모든 사람 만나 보니
당신 가슴 내 집이다
71.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의 모든 것은 나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너의 모든 것은 나다
나의 모든 것은 너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나의 모든 것은 너다
너와 나 사이,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