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27
천재작가님의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를 읽었다. 재미있게 잘 쓴 글이다. 의지가 참으로 강한 작가다.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눈물겨운 사연이다. 투고를 100번 넘게 하여 결국 자신의 글을 알아준 출판사와 만났다는 사연이다. 글도 사람도 다 인연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의지의 천재작가님께 다시 한번 축하를 보낸다. 짝짝 짝짝, 천재작가님의 앞날에 무궁한 번영이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천재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더욱 미안해지는 사람이 떠올랐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나에게 좋은 제안이 들어왔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출판 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에게 백지수표를 내민 것이었다. 선인쇄도 좋고 원고료 일시불 지불 방식이든, 내가 원하는 어떤 방식이라도 수용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사장님께서 나에게 정중하게 제안을 하셨다. 나는 거절했다. 출판사가 작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하고 죄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그 충격으로 그 출판사는 기획 시리즈 시집도 접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출판사 사장님은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제안한 것이었다. 내가 큰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런 사장도 모르고 매몰차게 거절을 하였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내민 감사의 손길이었는데 나는 그 큰 은혜도 모르고 그분의 등에 칼을 꽂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다.
여수는 첫사랑이며 마지막 사랑이다
여수의 나비는 영원한 우리의 꿈이다
여수에는 가장 해맑은 시인들이 산다
그리하여 나의 여수는 향일암의 해다
우리들의 고향은 여수 사랑이 낳았다
다음 생의 고향은 여수가 될 것만 같다
여수는 내 문학의 출발지였으며 나의 첫사랑이 묻혀 있는 곳이다. 내가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당선된 곳이 여수였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곳도 여수였으며 나의 첫 시집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가 여수에 있을 때 민음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시인들을 여수에서 만났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 시인들이 동인을 만들어서 시화전을 하고 시낭송회를 하였다. 그렇게 만난 갈무리문학회는 이제 여수의 중심적인 시인들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신병은 시인께서 정자나무처럼 든든하게 서 계신다. 어쩌면 시인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인들이 바로 여수의 시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수는 섬이 많은 도시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들이 별처럼 빛나는 도시다. 제주도는 수평선이 섬을 안아주는데 여수는 섬들이 바다를 안아주는 곳이다. 여수는 섬들도 정답고 수평선도 정겹다. 여수의 수평선은 섬과 섬이 마주 잡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줄넘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파도가 고무줄 위로 오른쪽 다리를 훌쩍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힘차게 올린 오른쪽 발끝에 고무줄을 걸고 내려와 몸을 반대쪽으로 뛰어 도는 모습도 보인다. 바람이 좀 있는 날은 섬과 섬이 밧줄을 마주 잡고 둥그렇게 돌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돌아가는 밧줄 속으로 여러 명의 파도가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 많은 섬들이 아름답게 모여서 거대한 나비 한 마리 낳아서 날려 올리는 고장이 바로 내가 최애 하는 여수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나의 첫사랑은 동백꽃이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게질을 하였다. 지게질을 하면서 사랑도 시작되었다. 내가 사랑했던 선생님께서는 여름방학 때 여수 오동도 앞에서 동백꽃으로 떠올랐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사랑의 설렘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별의 아픔으로 남아 영원한 그리움이 되었다. 그런 여수에서 나는 다시 부활하였다. 내 문학의 부활을 알리는 『이어도공화국 5 우리들의 고향』은 사실 여수의 사랑이 낳은 책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수 오동도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곳이었고 나는 향일암을 가장 좋아했다. 향일암 앞으로 떠오르는 해를 생각하며 내가 좋아하는 여수의 아름다운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신병은, 강성재, 임호상, 박해미, 최향란, 박혜연, 하병연, 이생룡, 우동식, 황영선, 송정현, 김민영, 성미영, 서수경……,
* 사진자료는 여수관광문화에서 가져왔습니다 - (관광사진 다운로드 페이지에 있는 사진들은 자유롭게 수정, 이용 가능 하다고 합니다.)
여수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서 쉬어보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발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싸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싸돌아다니는 날파람둥이였다. 나는 여천시 쌍봉동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여천시를 벗어나 주로 여수시 쪽을 돌아다녔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여천 쪽도 많이 돌아다녔다. 한하운 시인처럼 문둥병(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신풍애양원을 비롯하여 사화복지법인 시설이었던 동백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호동 바닷가를 비롯하여 소라면 바닷가를 많이 걸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마을과 날마다 찾아가던 바닷가의 언덕 또한 나의 산책코스였다.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는 주로 여수시로 나갔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이 좀 단순했다. 여천시에서 여수시에 가려면 윗길과 아랫길이 있었다. 나는 주로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오는 노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주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걸어 다니곤 하였다. 숨이 차서 한꺼번에 걸을 수 없으니 자꾸만 쉬면서 다녀야만 하였다.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은 여수항과 서시장 그리고 여수역과 자산공원이었다. 그리고 여수어항단지와 돌산대교 등도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낮없이 여수항 부근에 나타나서 자꾸만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는 바람에 나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철저히 미쳐 있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길에서 시를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로 쓴 시들을 모아 월간지와 계간지에 동시에 투고를 하였다. 월간지에서 먼저 발표하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너무 몰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의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월간지 신인상 발표가 있은 뒤 계간지에서도 연락이 왔다. 계간지에도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월간지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선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우리나라 문단 상황에 대하여 지금만큼만 알았다면 나는 아마 월간지가 아니고 계간지 신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시인만 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인만 되면 원고청탁이 줄을 이을 줄로 알고 있었다. 시인은 그저 시만 쓰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문단활동이나 인간관계가 따로 있지 않아도 그저 시인만 되면 무조건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홀로 시만 쓰는 시인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시 쓰는 방법만 알았지 진짜 시인이 되는 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문학사상에서는 상패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바뀌어서 상패도 주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상패도 없고 시상식도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문학사상 신인상은 문단에서 꽤 전통도 있고 권위가 있는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너무 모른 상태에서 그저 실망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신인상 정도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문단을 너무 몰랐고 몰라서 오히려 용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정리한 시집 원고를 가방에 넣고 문학사상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문단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문학사상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는 그냥 나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시집 이야기는 한 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시집 이야기를 꺼냈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웃음이 나올 일인가. 신인상 당선되고 1년도 안된 놈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타자를 쳐서 나름대로 시집을 만들었는데 시집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어서 타자기로 원고 정리를 하였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다른 일로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기운이 빠져서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 가판대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문에 신춘문예 응모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1부 사서 여수로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질 원고였는데 차라리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시집 원고 표지만 바꾸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발표한 몇 편의 시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아마도 신춘문예 사상 이런 응모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심사평도 이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다른 분들께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렇듯 생뚱맞게 응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좋은 시인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분들의 심사평 한 줄 없었으니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사평 ― 두 심사위원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배진성 씨를 당선 시인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는 두 권 정도의 시집이 될 만한 작품을 투고하였다. 오히려 어려움은 이 많은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결국 ‘길이 있는 풍경’과 ‘밤하늘은 반란이다’ 두 편을 골랐지만, 이 선정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배진성 씨의 작품이,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는 오늘의 범람하고 몽롱하고 막연한 서정시나 비분강개의 시의 언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탄탄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 ―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서정이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에도 흐릿함이 있고 탄탄함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또 고른 수준의 것인 만큼 그의 시가 믿을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수준의 한계가 이미 다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심사위원 / 김우창, 신경림
나는 이렇게 우연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덕분에 첫 시집을 빨리 낼 수 있게 되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으셨던 김우창 교수님께서 내가 응모했던 원고를 민음사로 넘기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김우창 교수님께서 민음사와 많은 관련이 있었던 탓에 그렇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음사와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글이나 시집은 따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듯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우연히 좋은 인연이 많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좋은 인연들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시를 쓰려면 먼저 대학교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수가 되어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좋은 제자들도 많이 길러내야만 비로소 시인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가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출판시장과 문단풍토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꼭 좋은 시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좋은 조건에서 시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회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꼭 대학 교수가 아니어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고 또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발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학교수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교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방송대학에 편입을 하였다. 우선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병이 나를 가만 놔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망은 30살까지 버티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른 살까지만 살 수 있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몸은 도저히 서른 살까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몰래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시집은 한 권 내었으니 덜 억울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남몰래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전남대학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였다. 때마침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치료비도 많이 저렴해졌으며 또한 심장재단 덕분에 심장수술 성공률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드디어 심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 집에 들렀다. 고향 집에는 아버지께서 늘 아랫목에 누워계셨다. 젊은 시절 방앗간 천정에서 떨어진 이후로 후유증 때문에 언제나 아버지 등은 구들장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길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아는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께 돈을 드리며 내가 떠난 다음에 아버지께 개를 한 마리 잡아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출장을 가기 때문에 당분간 연락을 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고 광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홀로 광주로 가서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심장판막 교체 수술을 하기 전에, 좀 더 간단한 시술을 먼저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나의 대동맥판막이 지금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먼저 풍선 확장시술을 한 번 시도해 보자고 하였다. 그 당시에 막 개발되어 시험 중인 시술법이었다. 우리 인간들의 대동맥은 심장에서 시작하여 양쪽 허벅지 안쪽으로 지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가장 굵은 대동맥이 바로 그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풍선 확장시술은 카테터라고 하는 관을 환자의 혈관 안에 삽입하여 주로 좁아진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인데, 이 시술 방법을 응용하여 심장 판막 확장에까지 이용하는 시술법이었다. 나의 경우는 왼쪽 사타구니 쪽에 구멍을 내어 대동맥을 따라 거꾸로 관을 집어넣어서 대동맥판막까지 접근하게 한다. 그 관 안에는 작은 풍선이 달려 있다. 대동맥판막은 세 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조각들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열릴 때에 세 조각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덜 열리기 때문에, 붙어 있는 날개 안쪽을 강제로 더 찢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대동맥판막 쪽에 풍선을 위치하게 한 다음, 그 풍선을 순간적으로 확 불어주면 자연스럽게 세 조각의 날개가 잘 분리되어 충분히 열어줄 수 있다는 원리였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 심장병의 첫 번째 오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오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선 확장 시술을 받기 전날 밤에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이 다른 가족들에게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시술받기 전날 밤에 주치의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풍선확장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광주에 사는 누나에게만 조심히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에 관한 사실들을 누나에게만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술 도중에 잘못되면 병원 측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자 동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 달라는 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곧 누나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시골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도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것으로 알고 달려오셨던 것이었다. 서울에 출장 가겠다고 떠난 자식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넘게 홀로 앓아오던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큰 충격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시술 동의를 받고 다음날 무사히 풍선확장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진이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며칠 후에 개복수술을 하여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하기로 하고 수술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여수 직장 동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와서 혈액검사를 하였다. 수술하는 날 직접 와서 피를 뽑아주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미리 뽑아놓은 피보다 그날 바로 뽑아서 수혈하면 더욱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찾아온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나보다 먼저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나와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 그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복실에서 그만 잘못되고 말았다. 마취가 풀리면서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인공호흡기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곁에서 당직의사나 간호사가 착 달라붙어서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만 자리를 잠시 비우고 말았다는 것이다. 환자 곁에 아무도 없는 사이에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인공호흡기가 빠졌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그 환자의 가족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병원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는 바람에 병원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서 수술을 담당했던 흉부외과 의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환자들의 수술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마침 그 병원에 먼 친척 되는 의사가 있었다. 그 의사 덕분에 나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곁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목숨을 허술한 그곳에 맡길 수 없었다.
나중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약에 내가 그때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멀쩡한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인공판막으로 교체를 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병은 치료도 되지 않고 멀쩡한 대동맥판막만을 인공판막으로 바꿀 뻔하였다.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정밀검사를 다시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동맥판막은 멀쩡한 상태였다. 대동맥판막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동맥판막 앞쪽에 혹이 하나 있어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혹이 있어서 출구가 좁아진 환자는 많지 않았고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판막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진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많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비후성심근증’이라고 따로 정의를 내리고 치료법과 수술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대병원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나는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서울대학병원에 접수를 하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의 몸은 심각할 정도로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비밀이었던 나의 심장병이 가족들에게 들켜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의 예상대로 가족들은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고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더욱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무작정 회사에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떼를 써서 응급실로 입원을 하였다. 그때는 이미 잘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를 수술할 의사 선생님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주 젊은 의사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그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훌륭한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아주 젊었지만 실력이 매우 좋은 분이셨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나는 우연히 그렇게 좋은 의사를 만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분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1990년 6월 8일에 1차 수술을 받았고 2017년 12월 22일에 2차 수술을 받았다. 2차 수술을 받을 때에도 우연히 한 번 찾아갔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수술날짜를 결정하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은 그만큼 위험한 상태였으나 나는 모르고 있다가 참으로 운이 좋게도 그분을 다시 만나 이렇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돌연사를 당할 뻔했었다. 그분은 나의 수술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야말로 그분은 그렇게 나의 하느님이 되셨다.
서울대학병원에 처음 입원해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걸리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수술날짜가 뒤로 미루어졌다. 그 바람에 나는 더 많은 정밀검사를 할 수 있었다. 정밀검사 결과 심장판막증이 아니라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수술방법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원래는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할 예정이었으나 대동맥판막은 교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에 대동맥판막 아래쪽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것으로 완전히 수술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심장 수술이었다. 아마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젊기도 하고 패기도 있고 실력도 있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수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좋은 의사를 만나서 판막을 교체하지 않고 심장 속에 있었던 혹 하나 떼어내는 수술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수술을 하고 나니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쾌함이었고 가벼움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몸 상태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좋았다. 심장병은 수술은 어렵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면 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수술을 받고 약 한 달 동안 입원을 하였다. 그리고 퇴원해서는 여수로 내려가지 못하고 인천에서 지냈다. 장거리여행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자주 가야 했고 또한 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큰형 집에서 두 달 정도 누워서 지냈다. 2차 수술 때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아니면 가슴을 봉합하는 재료가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개복한 부위를 봉합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새로 도입되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한결 쉬워졌음을 실감하였다. 1차 수술 후에는 꼬박 석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는데 이번 2차 수술 후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번쩍번쩍 들어서 침대를 옮겨주기도 하고 바로 걸어 다녀도 좋다고 하셔서 나는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술하고 일주일도 못되어 퇴원을 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비행기도 바로 탈 수 있다고 하여 제주도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술이 그만큼 발전한 것인지 그동안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당시 큰 형은 인하대 후문에 있는 새마을금고 2층에 살고 있었다. 형과 형수는 둘 다 직장에 나가고 나 혼자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직 철이 덜 든 조카는 누워있는 나를 자꾸만 밟으려고 하여 마음 놓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6월 8일에 수술을 하였으니 그렇게 한 여름 3개월을 불안하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그렇게 심장병 수술에 성공하여 25년 만에 심장병과 이별을 하였다. 그런데 참 인생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심장병이 떠나고 나니 이번에는 간에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아니면 형 집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형과 내가 비슷한 시기에 간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가 병원에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에게 더욱 미안하다. 나는 그 후에 간경화로 진행되었고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치료를 받아 완치가 되었는데 형은 치료가 되지 않아 결국 간 이식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나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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