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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Sep 02. 2020

청산별곡






청산별곡(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울어라 울어라 새야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호리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어듸다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사미 짐사대예 올아셔

해금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주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매와

잡사와니 내 엇디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靑山別曲]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2010. 1. 29., 배규범, 주옥파)





사노라면 님의 포스트에서 빌려온 이미지 입니다





청산별곡은 간단한 노래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연만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쉬운 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8연까지의 내용을 다 알고 나면 결코 만만한 노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어떤 젊은이가 속세를 떠나 청산과 바닷가를 헤매면서 자신의 비애를 노래한 것으로서, 당시의 생활감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가시리 《서경별곡》과 아울러 가장 뛰어난 고려가요의 하나로 꼽힌다. 또 ‘ㄹ’음이 연속되어 가락이 아름다운 것도 이 노래의 특징이다. 그리고 작가의 신분계층이나 제작 동기, 작품 성격, 작중 화자 등에 대해 이렇다 할 정설이 세워지지 않은 채 논란이 거듭되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애정을 주로 다루었던 다른 고려가요에 비해, 삶의 비애와 고뇌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 내용들 중에서 나는 특히  <몽골에 억눌린 시대의 저항의 노래>로 읽고 있는 임주탁 교수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


청산별곡 / 임주탁

몽골에 억눌린 시대의 저항의 노래


'청산에 살어리랏다'와 '금강에 살어리랏다'의 차이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靑山)애 살어리랏다.

이렇게 시작되는 「청산별곡(靑山別曲)」은 일찍부터 고려가요의 백미(白眉)로 평가되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청산별곡」은 여느 고려가요에 비해 텍스트를 이루는 어휘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우선 위의 인용 구절부터 명확한 뜻을 알기 어려운데, 그러한 사정은 학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 이은상(李殷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노래 「금강(金剛)에 살어리랏다」의 노랫말을 지었다. 금강산에 살고 싶다는 욕망을, 죽어 넋이 되어서라도 금강에 살겠다는 의지로 표현한 이 노래는 「청산별곡」의 해석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강에 살어리랏다」는 번뇌(煩惱)로 점철되는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 이 욕망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인 '게으르게 살고 싶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 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이란 이상향을 상징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청산별곡」의 청산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특히 현행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이러한 이해가 적극 수용되어 있다. 하지만 「청산별곡」의 청산과 바다는 금강(=금강산)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작품 속의 공간 구조와 갈등 구조


비록 난해한 어구가 적지 않지만 「청산별곡」의 갈등 구조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간 지시어의 상호 관계를 따져보면 이 노래가 어떤 문제를 중심에 두고 갈등을 토로하고 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산, 물아래, 바다 그리고 아직 뜻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에졍지'1) 등 「청산별곡」에는 네 개의 공간 지시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공간 지시어들에는 '살다'와 '가다'라는 두 동사가 가장 가까이 결합되어 있다. 즉, 청산과 바다에는 '살다'가, 물아래와 '에졍지'에는 '가다'가 각각 결합되어 있다. '살다'는 '∼에서 살다'와 같이 특정한 공간에 머묾을 의미하는 데 비해, '가다'는 '∼으로 가다'와 같이 현재의 공간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산별곡」은 청산과 바다로 상징되는 공간에 머물러 사느냐 아니면 물아래, '에졍지'로 상징되는 공간을 향해 현재 머물러 살고 있는 청산과 바다를 떠나가느냐는 문제가 갈등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청산과 바다 사이에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징적 세계에서 둘 사이에는 거리가 없을 수도 있다. 둘이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면 '청산에 살다'와 '바다에 살다' 또한 한 가지 의미의 다른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물아래, '에졍지'와 결합된 동사 '가다'의 시제(時制)가 모두 현재가 아닌 과거라는 사실은 현재 화자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와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는 현대 국어로 옮기면 각각 "녹슨 농구(農具)를 가지고 물 아래 갔던 새 보았느냐", "에졍지 갔다가 들었다" 정도로 옮겨진다. 두 진술의 발화자(화자)는 현재 물아래나 에졍지로 이동하고 있지는 않다. 두 진술의 발화자는 현재 청산과 바다에 머물러 살면서 물아래와 '에졍지'에 관심을 표명하며 그 공간으로 이동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계속해서 머물러 살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고 있다. 이동은 과거에 이루어진 행위일 뿐이다.
청산과 바다가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데 대한 역사적 맥락은 박노준(朴魯埻) 교수가 『고려가요의 연구』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찾아 놓았다. 하지만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고려가요가 민요이던 것이 어느 시기에 궁중 음악으로 수용된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청산별곡」은 강화 천도와 함께 발령된 '산성해도입보(山城海島入保)'2) 조치 이후 산성(山城)으로 해도(海島)로 이동하던 백성들이 지어 부른 노래들이 어느 시기에 궁중으로 수용되면서 한 편의 노래로 합성(合成)된 것이라는 추정에 머물렀다. 청산과 바다가 산성과 해도의 문학적 표상이고 '청산에 살다', '바다에 살다'가 '산성에 살다', '해도에 살다'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점을 발견하고도 「청산별곡」은 생성 단계에서 일관된 흐름을 가지지 않은 노래라고 본 셈이다.
산성과 해도 사이에도 물리적 차원에서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찾은 역사적인 문맥에서 산성과 해도는 몽고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 조정에서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킨 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두루 알다시피 그 중심 공간은 강화(江華)였다. 이는 '산성해도입보' 조치에 의해 고려가 강화도 중심의 임시적인 국가 통치 체제를 수립하고 몽고에 맞서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문맥에서 산성에 사는 것이나 해도에 사는 것은 다같이 강화도 중심의 임시적인 국가 체제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을 의미한다. 청산과 바다에 머물러 삶은 바로 그와 같은 임시체제 안에 머묾을 의미하므로 청산과 바다는 한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산성과 해도에 입보(入保)하여 몽고에 대항하는 일시적인 통치 체제의 지속 여부는 강화 천도 이후 집권 세력 내부에서조차 심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핵심 문제로 자리하였다. 그것은 강화 천도 기간 내내 환도(還都)를 둘러싼 논쟁이 그치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물아래와 '에졍지'가 청산과 바다에 대립적인 공간인 만큼 두 공간은 강화도 중심의 국가 통치 체제가 구축되기 이전 삶의 공간이거나 그 체제에서 벗어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청산별곡」의 핵심 갈등은 강화도 중심의 임시적 체제 안에 머무느냐 아니면 거기에서 벗어나느냐는 문제를 두고 겪는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 구조와 갈등 구조를 이와 같이 이해할 때 「청산별곡」 텍스트 속의 난해한 어구들까지도 한층 분명하게 풀이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제1연은 화자 자신이 과거에 청산에 살아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현재까지 청산에 살아왔음을 감동적으로 확인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리랏다'는 그와 같은 화자의 행위와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제6연의 "바다에(바ㄹ.래) 살어리랏다"도 이와 같이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제2연의 화자는 자신이 '울고 있다'고 하는데, 이 행위를 부정적 감정의 표출로 볼 것이냐, 아니면 긍정적 감정의 표출로 볼 것이냐는 연구사적 쟁점의 하나다. 그런데 "울어라,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이 많은 나도 울고 있노라"는 진술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노래하라, 노래하라 새여 너보다 시름이 많은 나도 노래하고 있노라"와 같이 풀이해야 의미가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뒤의 풀이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는 「청산별곡」의 화자를 단일한 인물로 보려는 시각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청산별곡」에서 모든 연의 화자가 같다고 보아야 할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일 화자라야 「청산별곡」이 한 편의 통일성을 갖는 작품일 수 있다는 것은 선입견일 뿐이다. 제4연, 제5연에 나타난 부정적 정서를 고려할 때 제2연의 '울다'를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보다는 슬픔과 괴로움 같은 부정적 정서의 표현으로 보아야 정서 흐름에 일관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단일 화자로 파악한다고 해서 「청산별곡」이 정서 흐름에 일관성이 있는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화자가 단일하다고 볼 때 「청산별곡」 전체에서 정서 흐름의 일관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면 화자가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화자의 단일성 여부가 작품의 통일성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검증이 더욱 어려운 가설을 세우거나 받아들이기보다는 「청산별곡」이 대화적 전개에 의해 구성된 노래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오히려 온당한 태도일 것이다.


인간 표상인 새들의 논쟁적인 대화


살아야 할 것, 살아야 할 것이었다! 청산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 제1연3)

노래하라, 노래하라, 새여! 자고 일어나 노래하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노래하고 있노라.
- 제2연4)

제1연의 화자는 청산에서의 삶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하기 시작한다. 그에 비해 제2연의 화자는 새로 비유된 존재가 지속적으로 청산에서의 삶을 즐겁게 받아들이기를 희구하고 있다. 제2연에 드러난 새는 청자 - 제2연의 화자는 '새'에게 명령하고 있다 - 인데, 이 청자가 제1연의 화자와 동일하다고 볼 때 제2연의 화자는 청산에서의 삶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하기 시작한 제1연의 화자에게 자신과 같이 청산에 즐겁게 머물러 살기를 희망하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반성적 사유는 곧 현재의 삶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회의는 당연히 현재의 청산에서의 삶을 괴롭고 힘든 삶이라고 느낀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갔던 새 갔던 새 보았느냐? 물 아래 갔던 새 보았느냐?
이끼 묻은[녹슨] 농구를 가지고 물 아래 갔던 새 보았느냐?5)

위의 제3연의 화자는 청산과 대립하는 공간으로 이동한 새를 보았느냐고 묻고 있다. 여기서의 새가 제2연의 새와 같다고 보면 정서의 자연스런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제3연의 새는 제1연의 화자이자 제2연의 청자인 새와는 다른 제3의 존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제3연의 화자는 제1연이나 제2연의 화자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제4연의 화자가 청산에서의 삶이 지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제3연의 화자는 제1연의 화자가 아닌 제2연의 화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제2연의 화자는 제1연의 화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셈인데,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였으면 근거도 제시해야 한다. 그 근거가 바로 제3연에 제시되고 있다.
제3연의 물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물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물아래 갔던 새 보았느냐"라는 물음은 단순히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물음에 그치지 않고 물아래 공간으로 이동한 새가 직면한 상황을 확인하는 진술이기도 하다. 일찍이 청산에 온 후 생업을 유지하며 살 수 없었다면 가지고 온 농구 - 전쟁 때는 무기로 사용되는 까닭에 한 가지 말이 두 가지 뜻을 가지게 됨 - 에 녹이 스는 것은 당연하다. 제1연의 화자나 제2연·제3연의 화자는 그래도 여전히 청산에 머물러 있지만, 제3연의 새는 그동안 쓰지 않아 녹이 슨 농구를 가지고 물아래로 돌아갔던 것이다. 제3연은 그렇게 청산을 떠나간 새가 '물아래'에서 맞게 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하고 상기시키는 물음이다. 그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1연의 화자와 제2연의 화자가 모두 알고 있는 매우 비극적 상황이었다면 제3연의 물음은 제1연의 화자에 대한 제2연의 화자의 반론에 중요한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제3연의 화자는 제2연의 화자와 동일하다고 볼 때 정서의 자연스런 흐름이 파악된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낮은 지낼 수 있다 손치더라도
왕래하는 이 없는 밤은 또 어찌 할 것이라고 하느냐?6)
- 제4연

어디라고 던진 돌인가? 누구라고 맞힌 돌인가?
호오(好惡)하는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7)
- 제5연

살아야 할 것, 살아야 할 것이었다! 바다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8)
- 제6연

제4연은 제2·3연의 화자의 반론에 대한 하나의 재반론이다. 하나라 함은 제5연 또한 그러한 반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둔 말이다. 제4연의 화자는 왕래하는 사람이 없는 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제시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청산이 강화도 중심의 임시적 체제라면 그 체제 안에 머물고 있는 그 자체로 매우 불안하였을 것이다. 외부적인 침입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그러한 침입의 가능성이란 낮보다 밤이 더 높았을 터이므로 청산에서의 밤은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1연의 화자는 청산에서의 삶, 곧 임시적인 통치체제 안에 머묾이 옳다고 판단하여 지금까지 머물러 살아왔다. 그런 만큼 밤의 공포나 두려움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밤의 공포나 두려움이 그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금의 판단과 행동을 합리화시켜 줄 수는 없다. 제2연에 대한 반론은 될 수 있지만 제3연에 대한 반론이 되기에는 근거가 미약하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논거를 아울러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논거가 바로 제5연에 제시되고 있다.
제5연은 호오(好惡) 관계도 없는데 돌에 맞아 우는 화자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임시적인 통치체제 안에 머문다는 것이 돌까지 맞아야 하는 비극적 상황이고 또 이것이 지금 새롭게 변모된 상황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청산별곡」이란 노래가 생성되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호오 관계도 없는 자신이 돌에 맞아 울고 있어야 하는 상황, 이것은 제1연, 제4연의 화자로 하여금 청산에서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회의를 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돌을 던지는 행위의 주체 안에 제2·3연의 화자도 포함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상황은 한층 더 강한 반론 근거가 될 것이며, 제2연, 제5연의 화자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제5연의 화자가 제1연, 제4연의 화자와 동일하다고 볼 때 비로소 정서 흐름에 일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
제5연의 화자는 제1연에서와 같이 청산에서의 삶을 반성하고 회의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과거 청산에서 살아야 한다는 판단도 정당한 것이지만 지금 청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제2연에서 제5연까지 이어진 두 화자의 논쟁은 제1연에서와 같은 반성과 회의가 부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제6연이 제1연의 "청산에 살어리랏다"와 같은 의미를 갖는 "바다에 살어리랏다"인 까닭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6연의 화자는 제1연의 화자와 동일하고, 따라서 제4·5연의 화자와도 동일하다. 그는 "청산에 살어리랏다"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강화 중심의 임시 체제 안에 머물러 살았던 지난 삶을 반성하고 그 삶을 미래에도 지속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고 있는 자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생각을 제7연의 화자는 한층 더 강화해 주고 있다.

갔다가 갔다가 들었다. 에졍지 갔다가 들었다!
사슴이 짐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니까 들었다!9)
- 제7연

제7연의 화자는 '에졍지'라는 청산과 바다에 대립되는 공간에 갔다 온 경험을 갖고 있는 새로운 화자다. 그의 말은 물아래의 공간에 대한 두 화자의 선지식(제3연)보다 한층 더 생생한 정보를 담은 증언이 될 수 있다. 그는 증언하고 있다. '에졍지'에 갔더니 사슴이 짐대에 올라 해금을 켜고 있었다고.
물론 이 구절은 「청산별곡」의 이해에서 가장 큰 난관의 하나이다. 청산과 바다, 새 등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듯이 노래의 언어를 축자적(逐字的)인 차원 - 사전적·지시적인 의미를 가리킴 - 에서 파악할 때 이 구절의 의미는 도무지 알기 어렵다. 옛 노래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그 작품이 생성되고 그 작품의 의미가 고스란히 전승되던 시대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슴', '짐대', '해금(奚琴)'이 가지는 의미는 물론 이 세 낱말이 결합하여 이루는 문장이 갖는 의미는 현재의 언어 관습에 의존해서는 파악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산별곡」이 생성된 시대, 청산과 바다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시공에서의 언어 관습을 고려할 때 사슴이 짐대에 올라 해금을 키는 행위는 '호(胡) 황제(皇帝)가 세속의 인간들을 향해 문화적인 통치를 지향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 사슴은 황제를 상징하며,10) 짐대는 신성 공간과 세속 공간 또는 문화적인 공간과 반문화적이거나 비문화적인 공간의 경계에 자리하며 신성한 존재, 문화적인 인간의 메시지를 세속적인 인간, 비문화적·반문화적인 인간들에게 전하는 매개이다.11) 그리고 해금은 문화적인 통치의 수단이며, 많은 악기 가운데 오랑캐 족속이 만들어낸 악기이다. 청산과 바다가 강화도 중심의 임시 체제의 상징이라면 해금을 켜는 주체인 사슴은 고려의 황제가 아니라 고려와 맞서 있는 몽골의 황제를 상징한다.
청산과 바다에서의 삶이 무력적인 힘을 피하고 또 그 힘에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당위적인 행동이었다면 이 증언은 제1연과 제4·5·6연의 화자로 하여금 청산과 바다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청산과 바다에 머묾이 힘들어 견디어 어려웠지만 그곳을 피해 녹이 슨 농구를 가지고 물아래로 돌아간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기 때문에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면, 이제 물아래 또는 '에졍지'의 공간에 문화적인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제7연의 화자의 증언은 제1연과 제4·5·6연의 화자로 하여금 청산과 바다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물아래 혹은 '에졍지'로의 이동을 결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제7연에 이르면 제2·3연의 화자는 더 이상 합리적인 반론을 전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가다니? 배부른 독에 설진강 술을 빚었다!
조롱꽃 누룩이 매워 잡사오니 내 어찌 하리까?12)
- 제8연

제8연의 화자는 "술이 당신을 붙잡는데 난들 어찌할까?"라고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세 화자 가운데 제2·3연의 화자가 낼 수 있는 목소리이다. 제2·3연의 화자는 더 이상 청산과 바다에 머물게 할 명분을 찾을 수 없으므로 제1연, 제4·5·6연의 화자를 스스로 나서서 적극 붙잡을 수는 없다. 그래도 붙잡아 두고 싶었다면 합리적인 명분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가능한 방법은 달리 강구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8연은 제2·3연의 화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붙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은 술이 당신을 붙잡으니 난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며 제1연, 제4·5·6연의 화자를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이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解決)해 주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해소(解消)해 줄 수 있는 까닭에 술로써 붙잡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청산별곡」은 청산과 바다에 머무느냐 아니면 물아래, '에졍지'로 떠나가느냐는 문제로 갈등하는 화자 A(제1연, 제4·5·6연)와 그가 청산과 바다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희구하는 화자 B(제2·3연, 제8연)가 그 문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적 대화로 전개되고 있는 작품으로 볼 때 합리적인 이해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논쟁은 물아래 또는 '에졍지'에 갔다 온 화자 C(제7연)의 증언에 의해 종결된 셈이지만, 화자 B는 화자 A가 그 결론에 따르기보다는 술과 같은 환각적인 수단으로써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청산과 바다, 곧 강화도 중심의 임시 체제 안에 머물러 있기를 희구하고 있다. 이로써 노래가 마무리된다.


「청산별곡」이 우리에게 던져 놓은 문제


「청산별곡」은 강화도 중심의 임시 체제 안에 머무느냐 아니면 그 체제에서 벗어나느냐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새의 형상으로 등장하여 서로 논쟁적인 대화를 벌이고 있는 작품이다. 그 논쟁적인 대화가 논거의 확실성이나 현실성 여부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청산별곡」은 문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강화 천도와 삼별초의 반란 등 몽골(蒙古)에 대한 저항이 민족을 위한 판단인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신정권의 권력 유지 동기가 한층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송(宋)나라나 금(金)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것과 몽골을 대국으로 섬기는 것이 어찌 다를까마는 몽골을 대국으로 섬기지 않으려는 국가 내부 세력의 움직임은 고려 백성들에게 너무도 큰 비극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 움직임을 민족주의로 옹호하는 것이 진정 민족을 위한 판단인지 「청산별곡」을 매개로 우리는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청산별곡」은 바로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세력들이 강화 중심의 국가 통치 체제를 영속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노래인 까닭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얄리얄라 얄라셩 알랴리 얄라"와 같은 후렴의 반복(8회)과 동일한 선율의 반복이 생각과 감정이 서로 다른 화자의 정서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지 추론해 보자.
「청산별곡」의 각 연은 선후창(先後唱)의 방식으로, 연과 연은 교환창(交換唱)의 방식으로 불린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선후창이란 어떤 사람이 후렴을 제외한 부분을 먼저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후렴을 부르는 방식이며, 교환창이란 선창하는 사람을 바꾸어가며 부르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을 혼합하여 부르면 노래를 부르는 데 참여한 사람이면 누구나 "얄리 얄리 얄라(랑)셩 얄라리 얄라"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동일한 선율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비록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노래를 부르는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면 누구나 동일 집단에 대한 소속감,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

2. 「청산별곡」처럼 8연으로 구성된 노래를 더 찾아보고, 8연 구성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알아보자.
8연 구성으로 이루어진 노래로는 「한림별곡」이 있으며, 「서경별곡」, 「정석가」 등에도 8연 구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 8연 구성은 이 노래가 8방의 세계 즉, 각기 다른 풍속을 가진 세계 - 팔풍(八風) - 를 아우르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 점에서 「청산별곡」은 신성 공간에 대비되는 세속 공간 곧 8방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목소리라 할 수 있다.

3. 삼별초의 대몽 항쟁의 역사와 그에 대한 여러 평가의 실제적 적합성을 따져보자.
삼별초의 대몽 항전 - 몽골은 세조 집권 시기(고려 원종 즉위년)부터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삼별초의 대몽 항전 시기의 몽골은 정확하게 말하면 원나라다. - 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의 발로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항전은 국가 권력이 무신정권에서 고려 국왕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어났다. 또 대몽 항전 초기에 부분적인 지지를 받기는 하였지만 고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이후 역사가들에 의해서도 강화 천도와 대몽 항전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고려 국가의 기틀이 이들의 '반란'으로 현저하게 붕괴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4. 「청산별곡」의 고전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 따져 보자.
고전적 가치는 당대적 가치와 현재적 가치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거나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로 통합된 것이다. 당대적인 가치와 현재적인 가치를 아울러 가져야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산별곡」은 우리 민족이 이민족과의 대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국가적 위기 국면에서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사람들에 의해 제작된 노래이다. 역사적 필연성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대항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청산별곡」은 국가적 위기 국면에서 우리의 선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할 것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고려가요집성』, 김명준 풀이, 다운샘, 2002.    


청산별곡 [靑山別曲] - 몽골에 억눌린 시대의 저항의 노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정출헌, 신병주, 서지영, 이창헌, 임주탁, 조세형, 정재영, 신경숙, 송성욱, 조해숙, 한길연, 김종철, 한형조)







나는 어린 시절 물가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 시절 산촌에서 살았다. 나는 봄 여름 가을에는 물에서 놀았고 겨울에는 산에서 놀았다. 나는 물에서 내가 키우는 오리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고 산에서는 토끼와 꿩과 고라니를 잡으며 놀았다. 토끼와 고라니는 올가미를 놓아 잡았고 꿩은 콩 속에 싸이나를 넣어 잡았다. 잡아온 꿩은 주로 집에서 요리를 하여 먹었지만 토끼는 주로 내다 팔아서 저축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잔인한 살생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통장에 쌓이는 돈에 눈이 멀어서 미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집에서도 나는 토끼를 많이 길렀는데 토끼는 먹이를 많이 먹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면 산을 구입하여 그 산에서 산토끼를 대량으로 길러서 부자가  되고 싶었다. 산에 울타리를 치고 그냥 풀어놓으면 손쉽게 토끼를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청산별곡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벌이 되고 싶었던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시인으로 바뀌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게질을 하였다. 물론 꼴 베기와 나무하기는 그 전부터 하였다. 내가 지게질을 시작하면서 짝사랑도 시작했다. 나는 남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짝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여수 오동도 앞 바다에서 돌아가셨다. 오동도 앞 바다 붉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사랑의 행복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으로 끝장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잘 하지 못했다. 진똘이 놀이도, 나이 먹기 놀이도 잘 하지 못했다. 조금만 달려도 왼쪽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파서 잘 달릴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허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몸을 튼튼하게 하려고 밤이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남몰래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나는 내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참 바보 멍청이였다.     


나는 체육책에서 읽었다. 나처럼 왼쪽 가슴이 아프면 심장병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체육책에서 읽었다. 나는 그때 나의 예금통장이 따로 있었다. 누나와 형님들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꼭 내 힘으로 중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리를 기르고 토끼를 기르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산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서 팔았다.     


나는 나의 통장에서 돈을 찾아서 곡성 읍내 병원에 남몰래 혼자 찾아갔다. 늙은 의사선생님께서 내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시더니 바로 심장병이라고 말씀 하셨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어봐도 잡음이 많고 심장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틀림없이 선천성 심장병이라고 단언 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온몸이 축 쳐지고 말았다.     


나는 며칠 후에 또 다시 남몰래 광주까지 가서 검사를 받았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이라고 말씀 하셨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하셨다. 심장 판막증은 무조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엄청 비싸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가난이 나의 입을 스스로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흑백텔레비전을 사오셨다. 그 당시에는 수사반장과 수사본부, 그리고 전우와 타잔이 인기였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이 너무 자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님께서 어린이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외국으로 데려가서 심장수술을 시켜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화면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볼 때마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 홀로 먼 들판으로 뛰어나가 홀로 펑펑 울었다. 그러면 나를 내려다보던 별들도 눈가에 눈물이 함께 맺혔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의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심장수술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서 수술비용이 엄청 비싸다고 하였다. 집안에 심장병 환자 하나 있으면 집안이 망할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홀로 결심했다.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아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 어쩌면 심장이 아픈 나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안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 혼자 남몰래 아프다가 홀로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은 그래도 나를 잊고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심장이 아픈 것 보다 오히려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몸이 자라면서 내 몸은 더 많은 피를 요구했고 나의 병든 심장은 더욱 힘들어 했다. 나는 계단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하고 계단 중간에서 쪼그려 앉아 쉬어야만 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쪼그려 앉아 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병 환자들이 많다. 심장병 환자들은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호흡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선생님께서 꼭 고등학교는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라며 원서까지 직접 써 주셨다. 학비뿐만 아니라 기숙사비도 모두 무료이고, 옷이며 신발까지 모두 무료인 학교라고 말씀 하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 한, 서울에 있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는 나의 삶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당시 한국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전기공고를 비롯하여 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철도공고 그리고 구미전자공고 등이 있었다.     


나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강남에서 시작되었다. 주위가 온통 배 밭 이었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마아파트에서 걸어가면 중간에 일본인학교 딱 하나만 있었다. 학교 뒤에는 대모산이 있었고 앞에는 구룡 마을과 개울이 있었다. 배 밭 주위에는 작은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우리 학교 강당으로 대피해 와서 며칠씩 지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실습 위주의 공업학교 생활보다 오히려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었다. 완전히 군대식 이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도 무섭고 선배들이 무서웠다. 바로 위층에는 1년 선배들이 있었는데 난방용 스팀라인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면 우리들은 언제라도 바로 뛰어올라가야만 했다.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이었다. 선배는 타오르는 태양이었고 후배는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커다란 돌에 ‘면벽삼년’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우리는 3년 동안 “나 하나는 수도의 전부다”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특히, 매일 밤마다 있었던 저녁점호 시간이 가장 긴장되고 힘이 들었다. 모기가 물어도 움직일 수 없었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먼지 하나라도 발각될까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저녁점호를 무사히 받기 위해서 방 청소를 꼼꼼하게 하고 사물함 정리를 아무리 잘 해도 중대장과 대대장들은 꼭 하나씩 지적을 하였다. 방문 앞쪽 바로 옆, 벽을 등지고 복도에 줄서 있던 우리들은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특히 사물함의 이불뿐만 아니라 런닝과 팬티 그리고 양말까지 모두 사각으로 각이 맞지 않으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지적을 당하고 기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은 아예 사각으로 만들어 꿰매서 점호 때마다 사물함에 놓고 실제로 입거나 신는 속옷과 양말은 가방에 숨겨놓곤 하였다.      


우리들은 또한 밤낮으로 자주 운동장으로 불려나갔다. 자정에 운동장에 모여 운동장 흙바닥에서 굴러야만 했다. 우리 전교생은 새벽마다 운동장에 모여 대치동에서 오신 태권도 사범의 구령소리에 맞추어 새벽하늘이 놀라 깨어나도록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태권도를 해야만 했다. 새벽 운동이 싫어서 캐비닛에 숨어 있다가 사감 선생님께 걸려 벌점과 함께 심하게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거기가 바로 서울 강남의 개포동 이었는데 우리들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 파일을 쿵쿵쿵 박기 시작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포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유명한 고등학교들이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개들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동네로 바뀌고 말았다.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꿈이 바뀌었다. 고향을 떠나니 고향이 더욱 그리웠다. 나라를 떠나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니 고향을 떠나니 지지리도 못 살고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교과서 외에는 잘 읽을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 점호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소등하고 강제로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남몰래 방과 복도를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나는 그렇게 옥상에서 달빛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달빛과 별빛에 젖어 시인의 꿈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꿈은 재벌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시야가 좀 넓어지고 내 자신을 깊이 돌아보니 재벌보다는 시인이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재벌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결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재벌이 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아예 나의 꿈을 바꾸고 말았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꿈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한 나의 꿈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밤새 코피를 흘린 일이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기숙사 한 방에 여섯 명씩 함께 살았다. 그렇게 열 개의 방에 60명의 한 반이 살았고 한 과는 두 개의 반이었다. 그리고 다섯 개 과가 있었다. 그런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초저녁부터 코피가 나오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베개와 이불이 다 젖도록 많은 코피를 흘렸다. 기숙사와 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양호실은 도서관 옆에 있었다. 낮에는 양호실에 간호사가 있었지만 밤에는 양호실 담당 학생들만 있었다. 그 학생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 이었다. 그래서 3학년 형이 밤새 나를 간호해주셨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함께 지내고 나서 나는 그 형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그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형님은 유행성출혈열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죽음을 계기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시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나는 몇몇 친구들을 모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긋니’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시집을 읽고 인문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일장에도 나갔다. 우리들의 모토는 하나였다. “공돌이도 시를 쓸 수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공돌이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시를 모아 동인지도 만들었다. 동인 중에 글씨를 잘 쓰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우리들의 시를 백지에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대학가 복사기 있는 집에 가서 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고에서 공돌이가 되어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문학 병은 그렇게 더욱 깊어졌다. 나는 나의 심장병을 잊을 정도로 깊숙히 문학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심장병 대신 문학병 환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원로시인’ 이었다. 내가 좀 노티 나게 시를 쓴다고 하여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별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인으로 살고 싶으니까 차라리 ‘원시인’이라고 바꿔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글자 하나를 지우고 원시인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시(詩)는 절(寺)에서 하는 말씀(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로 들어갔다. 해인사로 갔다. 해인사에서 참선과 절을 배웠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인사 위에 있는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백련암 가는 길이었다. 해인사를 막 빠져나와 산을 오르는데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곳은 스님은 스님이되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자포자기를 한 스님들 같았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같았다. 내 눈에는 초라한 양로원 같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큰스님이 되지 못한 스님들 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 스님들처럼 먼 훗날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해인사를 뛰쳐나올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병든 몸으로는 수행이 어려울 것만 같아서, 참선을 할 때에도 그렇고 108배를 할 때에도 너무 많이 숨이 차서 이미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 길로 하산하여 부천에 있는 어느 학생회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그런 복지회가 많이 있었다. 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날짜가 지나버린 주간지를 파는 일을 하였다. 그때에는 서울역에서 입장권을 팔았다. 가족이나 친척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입장권 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입장권으로 기차에까지 올라탔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동안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그때는 홍익회 직원들이 가장 무서웠다. 그 당시 기차에는 홍익회 직원들이 언제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수레를 밀고 다니며 계란도 팔고 김밥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주간지도 파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이었고 나는 불법적으로 몰래 장사를 하는 고학생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 주간의 정식 새 주간지를 팔았고 나는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앵벌이 꾼 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홍익회 직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홍익회 직원에게 잡혀 실컷 혼나고 수원역에 내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유난히 슬프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은 주간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학생회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는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당벌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헌책방에서 <문예중앙>을 읽었다. 이능표 시인과 이창기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시들이 참 좋았다. 나도 그 진짜 시인들처럼 진짜 시를 잘 쓰고 싶었다. 약력을 보니 두 시인 모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출신 이었다. 나도 그 학교를 나오면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용기를 내어 그 학교로 찾아갔다. 문예창작과 교수실에 최인훈 교수님과 오규원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학력고사 시험을 보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꼭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설은 쓰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소설은 거짓말이라서 쓰고 싶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대답을 하였다.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력고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인천에 있는 학원에 잠시 다녔다. 주안역과 동인천역 앞에는 학원들이 많았다. 나는 주안역 학원을 다녔다. 그 학원에서 나는 또 다시 청산별곡을 만났다.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이셨는데 가끔 수업 시간에 청산별곡을 멋지게 불러주시곤 하였다. 보통 대중가요로 부르는 청산별곡이 아니라 그 선생님만의 성악 같은 청산별곡을 불러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나의 애창곡이 청산별곡이 되었다. 이 노래의 장점은 그때그때 때와 장소에 따라서 가사를 바꿀수도 있어서 나는 나만의 청산별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에~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사랑~하는 내님과 함께~ 청산에에~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청산에에~ 살어리랏다


이렇게 나는 인천에서 청산별곡을 부르며 서울 남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1986년 봄이었다. 아마도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그 남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하루 24시간을 온통 시만 생각하고 시만 썼던 시절이었다. 물론 최인훈 교수님과 최창학 교수님의 소설 수업시간에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윤대성 교수님의 희곡수업 시간 또한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를, 2년 동안 4년 치의 수업을 들었고 천 편도 넘는 시를 썼다.




그리고 나는 요즘 본격적으로 청산별곡을 부르며 종석산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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