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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Aug 30. 2020

종석산이 나에게 왔다






종석산 정읍사    


 

종석산에서 정읍사(井邑詞) 

노래소리 들린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

범종소리 들린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모든 것이 선(禪) 아닌 것 없다

내 가슴 속으로 들려오는

달빛 종소리, 요것은 도대체 뭣이다냐  

   

옥정호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발자국소리다냐

참나무 숲으로 숨어드는 밤의 숨소리다냐

참나무 그늘을 덮고 잠든 산삼들의 잠꼬대다냐

홀로 달아오른 산삼 열매들의 후끈거림이다냐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떠돌았던 장돌뱅이였구나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보지 못한 청맹과니였구나 

    

제주공항에서 여수공항은 바로 코 앞 이었구나

이륙하고 추자도가 보이더니 바로 착륙이구나

여수에 도착한 나비는 연어의 종착역을 지나

옥정호가 있는 숲으로 날아가는 구나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 참으로 먼 세월이 한 순간이구나

종석산에서는 정읍사(井邑詞) 후렴소리 들리고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는 운판소리 들려오는데

나의 지친 가슴 속에서 환하게,

꿈꾸던 숲에서 드디어 산삼 꽃이 함께 영그는구나      


                   




종석산이 나에게로 왔다. 아니, 나는 어쩌면 먼 옛날부터 종석산으로 가고 있었다. 인연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고 인연이 있는 공간 또한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다. 나는 아직 종석산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종석산과 깊은 인연이 있음을 느낀다.


종석산은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산이다. 나는 아직 정읍도 잘 모른다. 내가 종석산과 만나고 정읍을 만나면서 자꾸만 정읍사(井邑詞) 노래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아직은 보이지 않는 정읍사(井邑寺)의 범종소리도 들린다. 나의 꿈과 현실이 이렇게 만나고 있다.



정읍사(井邑詞)는 백제시대부터 구전해 온 민간전승의 가요로 알려져 있다. 역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박병채 선생님께서는 현대어로 다음과 같이 풀이 하셨다.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세상에는 참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소나무 같은 사람도 있다. 참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함께 살기를 꿈꾸는 나무다. 그에 비하여 소나무는 독립심이 강한 나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나무는 독이 없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 온갖 생명을 키우는 나무이다. 그에 비하여 소나무는 독이 있는 나무다. 한 마디로 독한 나무다. 소나무 잎에는 다른 식물을 죽이는 독이 들어있다. 그래서 소나무 주위에는 다른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참나무는 잎 뿐만 아니라 열매며 나무 자체에도 독이 없다. 그래서 참나무는 다람쥐 뿐만 아니라 온갖 생명을 키우는 자연의 밥상이다. 그리하여 소나무 숲보다 참나무 숲이 더욱 건강하고 더욱 풍요롭다.


대부분의 숲이 참나무인 산이 있다. 정읍에 있는 종석산이 그렇다. 그래서 종석산은 우리나라 약초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이다. 그 아름다운 종석산에서 산양삼을 비롯한 여러가지 약초 농사를 짓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종석산 일부를 팔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갑자기 친구를 돕는 마음으로 종석산 일부를 인수받게 되었다. 종석산 중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아름다운 땅을 인수받게 되었다. 내가 몇 년 전에 갔을 때 전망이 너무 아름다워 감동한 곳이었다. 종석산 아래로 펼쳐진 옥정호와 수묵화 그림처럼 펼쳐진 맞은편 산들에게 반한 바로 그 곳 이었다. 그때 마침 그곳에 전망대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종석산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나는 앞으로 그 아름다운 곳에 무료 쉼터를 만들 예정이다. 잠시 소풍 나온 이 세상에서 떠나기 전에 나도 이 세상에 참나무 한 그루 심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름다운 공간 하나 만들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떠나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더욱 확장할 계획이지만 우선은 약 1만 1천 평의 땅에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 약초밭을 만들고 감나무와 밤나무도 심고 그 종석산에서 나오는 참나무와 황토로 황토방을 만들어 무료 쉼터를 만들어볼 예정이다. 그 종석산에서 나오는 자재로 집을 지을 수 있으니 건축비 또한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이미 두 채의 황토집을 지은 친구가 있으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니만큼 서둘지 않고 천천히 꿈의 동지들과 함께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내가 꿈꾸던 이어도공화국이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듯 하다.

  

나는 이제 겨우 꿈의 동지를 만났다. 꿈의 동반자를 만났다. 내가 잘 아는 아주 좋은 친구를 만났다. 정읍의 종석산, 그곳에 아름다운 명상센터와 의미 있는 무료 쉼터를 함께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기지 않고, 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공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물려주기로 합의 하였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가장 적당한 후계자들에게 공동으로 넘겨주기로 하였다. (물론, 우리들의 자식들 중에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적당한 후계자가 나올 수 있으면 이 또한 의미 있고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나는 30년 전에 이어도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다. 내가 꿈꾸는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산이나 아름다운 섬이 필요한데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작은 밭과 작은 논을 구입해서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숲을 밭이나 논으로 개간을 하는데 나는 거꾸로 비싼 밭을 사서 아름다운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중에 숲이나 섬을 구하면 이어도공화국을 만들 수 있도록 미리 숲농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이어도공화국이 아니라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 함께 가꾸기로 한 종석산 땅은 내 꿈을 실현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다. 하지만 우선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우선은 1만 1천 평으로 시작하여 주위의 산들을 기회가 되면 추가 매입을 할 생각이다. 또한, 또 다른 꿈의 동지들을 만날 수 있다면 정읍 뿐만 아니라 곡성의 반월산 등 전국 어디라도 함께 추진할 생각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나는 쉬지 않고 꾸준히 확산시킬 예정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좋은 씨앗 하나 남길 수 있기를 오늘도 꿈꾸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종석산은 전북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와 장금리와 매죽리가 함께 모여있다. 531.8 미터 높이의 종석산 정상에서 북쪽은 능교리, 동쪽은 장금리, 서쪽은 매죽리로 나누어 진다. 남쪽은 매죽리와 장금리가 나란히 다리를 뻗고 있다. 내가 우선 장만한 땅은 종석산 정상 부분의 능교리에 조금 있고 종석산 정상에서 약간 아래쪽 장금리에 대부분의 땅이 있다. 그러니까 종석산 동쪽에 있는데, 옥정호와 여러 산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 종석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모습에 반해서 나는 이 종석산을 선택했고, 많은 참나무들과 많은 산삼들과 많은 약초들과 함께, 나는 이곳에서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들을 심고 가꾸기로 하였다.


나의 좋은 친구는 지금 여러가지 사정이 생겨서 종석산을 내려와 있다. 정읍 시내에서 작은 산약초 가게를 하며 웹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종석산에 약초꾼 임영규씨와 그의 쌍둥이 아들 둘 그렇게 셋이서 산양삼 농사를 짓고 있다.


나는 지금껏 종석산이 오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방송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오지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하였다. 2020년 6월 4일에 방송을 하였는데 종석산 정상에 살고 있는 약초꾼 임영규씨와 그의 쌍둥이 아들 둘, 그렇게 셋이 함께 출연을 하였다. 해발 450미터에서 500미터 사이에서 사는 그들은 정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였다. 약초꾼 임영규씨의 말에 의하면 1920년대는 화전민들이 살았고, 그 전에는 고려시대부터 그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곳에 좋은 우물물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곳 우물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잘 나온다고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의 깨달은 듯한 모습이 참 안정적이고 깊어 보였다. 그는 종석산 바로 아래 마을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계속 살다가 잠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12년 전에, 홀로 다시 종석산으로 내려와 산양삼 농사를 지었고 7년 전 부터는 아들들과 함께 산양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하였다.

 

앞으로 내 삶의 중요한 공간이 될 종석산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미 종석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종석산에는 이미 임영규씨와 그의 쌍둥이 아들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는 어쩌면 이방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꿈과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성향을 미리 알아야만 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고민을 혼자 하다가 나는 며칠 후 조심히 그리고 신중하게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카톡을 시작했는데 진심은 역시 통하는 모양이다. 우리들은 곧 바로 서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였고 우리들은 의기투합하여 종석산에 의미 있는 공간을 함께 만들고 아름다운 꿈을 함께 실천하기로 약속하였다. 임영규씨는 이미 

아름다운 숲 종석산에 <자연 치유 문화공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꿈꾸는 <이어도 공화국 종석산 정읍사>와 많이 닮아 있었다. 약간의 결은 다르지만 크게 생각하면 공통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앞으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아름답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갈 작정이다. 


( 우리들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만남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톡 내용을 여기에 기록해둔다.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내용만 그대로 옮겨놓는다. ) 


비가 길게 내리네요. 식물들은 햇빛이 그리울텐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 다녀온지 솔찬히 되었습니다.... 오랜시간 연락도 못드리고 사는데 그래서 더욱 반갑구요. 남들에게 내보일만큼 소중하게 살지못해서 ..... 다른 이들과 다름이 없는 속인이지요. 요즘엔 동양사상쪽의 책들을 조금씩 대하며 주먹만한 병아리들과 놀며 지냅니다. 특별히 활동하는것들은 없구요. 연락주시는거는 제가 영광이지요. 좋은 날에 인연이 되거든 만날수도 있겠지요. 건강은 영혼과의 약속이라지요. 잊어버리지 않고 잘 챙기시구요.


인간의 모습으로만 살면서 어찌 잘못이 없고 실수가 없겠어요. 그러나 그 또한 인간의 관념적 기준에 의한 것일 뿐......... 깨달음으로 가려는 지독한 몸부림을 신은 알기에 신호를 보내는것이겠지요. 자신 탓을 외면하려할때면..... 그래요. 자주는 아니어도 그리하지요. 비가 내리는 날에 또 하나의 인연이 종석산에 함께 내렸습니다.


풀밭으로 기억되는데 새단장을 하였네요. 그곳에 들릴때마다 설레이겠어요.


아하! 그러시구나. 자연속에서의 삶은 우주의 호흡을 따라하기에 참좋지요. 저도 행복합니다.



개울 옆 산길따라 걷고싶은 마음입니다.


그분의 넓은 품에 안겨보고 싶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어 덩실덩실 춤사위가 절로 날듯 싶네요. 전용 산책로라함은 그 또한 인간법칙은 아닌듯 합니다. 이어도 공화국의 향기로움도 그대의 손끝에서 늘 연꽃처럼 피워 나기를요.


떠나 있던 여전히 살고있던 고향이란 늘 설레임이지요. 기억의 좋고 나쁨은 에고의 차이일뿐.. 정읍시 산내면 청정로 1228번지가 태어난 곳이고 현재는 형님이 살고 있지요. 8남매중 여섯째  65년 9월 17일 입니다. 가늠할수 없지만 인연의 작용이 분명 있겠지요. 그러고보니 속인의 셈법으로는 벗이 되네요.


지난시절에 몇번 상여소리를 했었는데 굳게 닫혀있는 문에서 생로병사의 경계임이 문득 스쳐갑니다. 같은 곳을 걸어보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경운기타고 다니면서 콧노래를 퍽도 불렀었는데. 경운기 소리가 커서 잘 부르지 못해도 창피하지 않았거든요.


어느 민초의 삶의 무게를 대신했던 애틋한 존재로 남아있네요. 아직 이곳에는 종종 볼수 있습니다. 자귀나무는 꽃으로 간지럼을 태우네요. 아니 웃을수가 없겠죠.



내려다보이는 섬진강, 집 앞에 작은연못, 화창한 날 종석산 정상부근에서


님의 일기에서 조선전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을 떠올립니다. 어떤 연관성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천지자연의 글이 있고 소리가 있고 몸짓이 있다" 저도 어느날엔가 써봐야겠어요....^^

                  

덤으로 그 추억 속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기억이 멀지 않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시자구요.

    

참 많이도 닮아 있음을 어제 느꼈습니다. 강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었음이 커다란 행운이지요. 

소리 내어 웃기에도 울음 울기에도 딱, 좋구요. 38년 정도 살았던 것 같네요. 제 아이들도 그 곳에서 태어나 초딩 3학년 때까지 지냈구요. 지금은 산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살고 있으니 인연의 끄나풀이 여간 단단한가봅니다.

    

저희 아버님은 1912년생으로 일제시대와 6,25를 겪으면서 암울한 시기를 살아오셨지요. 그 기억들을 당신은 술로써 지우려고 애쓰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먼저 살림을 차렸던 큰어머니와는

빨치산의 총성으로 사별을 하시었고 40이 훨씬 넘어 두 번째로 어머니를 만나 저희가 세상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식의 순서로는 여섯째이지만 남자로서는 두 번째라 초딩6학년 때부터 지게를 질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농사지을 놈으로 도장이 꾹 찍어졌으니 거부할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책 펴는 것보다 지게를 지면 칭찬을 들었기에 부모님 생각에 어느 순간 몸뚱아리는 앞서 가게 되더군요. 제 나이 또래에 소와 함께 논밭 갈고 써래질 하여 농사지어본 사람들은 거의 없더군요. 그래도 참 행복했습니다. 지금껏 원망도 없구요. 세상에 나온 삶의 무게를 당연히 짊어져야함이 뼈 속 깊이 어린나이에 각인되어버렸기에 그랬나봅니다. 인연과 관계라는 우주섭리가 있어 지금은 이렇게 행복한걸요. 저도 기회 되면 연어의 종착역을 둘러보렵니다.     


칭찬을 들었기에 부모님 생각에 앞서 대목장이셨던 아버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버님 나이로 7살 때 할아버지 여의시고 12살 때 할머니 마져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고아로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것들을 경험하셨다 합니다. 17살 때 권번에 겉보리 한말씩 들고 가 판소리를 배우셨다합니다. 당신 가슴의 쌓인 한을 어떻게든 덜어보려고 그리하셨다합니다. 인근에 초상이 나게 되면

밤중이라도 아버님은 연장을 준비하셨지요. 관을 짜기 위해서 당연히 연장지게지고 동행 할 수밖에 없었구요. 관을 짜고 입관하고 사흘째 상여소리까지 어릴 적 기억 속에 아버님은 너무도 자랑스러웠지요. 나이 많은 탓에 힘없는 것만 빼구서... 그래서 어깨너머 배운 게 그것이라서....  

   

보내주신 사진들에서 속이 울렁입니다. 산속이 터전이어서 가끔은 가까운 부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는데 오늘은 방안에서 제주바다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연 되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비 온 탓에 곧장 답하고 그러지만 일 할 때면 뜸해질 수 있습니다. 늘 좋은날 되세요.  

   

고맙습니다. 속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이지요. 그래요, 그리움이 크지 않아도

홀연히 떠나고 싶을 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자배기가락에 몸을 싣고 둥둥 떠가는 것 같습니다. 네, 이미 행복합니다.

    

사진으로다 아시겠지만 제가 태어난 곳은 1965년 댐이 건설되면서 땅 일구어 살기가 매우 어려웠지요. 제 직업이 한때는 20가지가 넘은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다해봤다고 보아야지요. 40대 초반 그렁저렁 살만하니 Imf가 오고 이곳저곳 보증 서준 것들이 터지면서 얼마 안 된 자산 이자로 다 날려버렸지요. 그래서 45세 되던 해 온가족 이끌고 무작정 서울로 가게 되었지요. 도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김밥 집 배달하면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지요. 그러다 어느 투자자에 눈에 띄어

종로한복판에 가게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수 없듯이 심하게 시골 앓이를 하였답니다. 끝내 옆 지기를 이해시키지 못하고 5년도 안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누구나가 걸어온 길과 다를 게 없지요.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영원한 것들이 없다지요. 이제는 애틋함마저 떠나보냈습니다. 무거운 짐은 빨리 내려 놓아야함을 우린 지게로부터 배웠잖아요. 전생에 작은 인연이라도 있었던 거겠지요.

    


오전에 농장 한 바퀴 돌아봤습니다. 내년에 작은 오두막 형식의 집을 두 채 정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인연이라면 주인이 따로 없겠지요. 내어드리고 말구요.  


주위 분들이 상당수 그러하길 원하지만 새소리 풀벌레소리의 아름다움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그래서 내내 미뤄왔었지요. 물질적인 것은 필요하지만 맘이 통한다면 대수이겠어요. 얼마든지 오시라요.


아시겠지만 승희 떠나보내고 거의 일 년을 종석산 떠나 있었습니다. 스님들을 찾아다니고 때론 폐교에서 머물고 암자 마당을 거닐었으며 비구니스님 옷자락에 퍽도 울었지요. "요중선"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시끄러운 가운데 도를 닦는 거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자연의 호흡을 알기에 승희도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정히나 막상 필요하면 말씀 드릴께요. 저 또한 그곳에 가고프니까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내 안의 神적인 존재가 가르쳐준 하나의 방편이었지요. 지금은 넘 행복합니다.


좁은 소견이지만 다른 분들과의 깊이가 다름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적인 정서가 恨에 기반을 둔 듯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슬픔마저 사랑으로 승화시켜버리는..... 그래서 저는 살풀이 같은 한국무용도 좋아합니다.  


제 사는 곳은 예전에 절터였습니다. 그러니 반은 스님으로 살고 있는 셈이지요.


사천대천 억겁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함을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새벽 명상에 들어설 때면 웃목에 촛불부터 밝히지요.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당연하지요. 6,25때 빨치산 토벌 목적으로 일부로 군인들이 불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소화기도 작년에 큰 거 2개 구해두었습니다.....^^  


아직은 단점이 많을 듯 하여 길포장은 미루었지요. 그리고 아래동네 가까운 곳에 임야 알아보고 있습니다. 생활을 그리 옮기고 지금 사는 곳은 수련장으로만 활용 계획이구요.  


혹시라도 몰라 길을 이곳저곳 내었습니다. 산불차단까지 고려해서....  


모두 다 이유 있음인데 좋은 뜻이지요.   


모르는 분 입니다. 연매출은 상당히 부풀려 있는 것 같구요. 이웃동네에 사는 도반이 온다 해서

저녁식사 하러갑니다. 맛난 식사하시구요.  


난 요즘 이것저것 기웃거리는게 많네요. 중용을 중심으로 "성명쌍수"의 도교 가볍게는 인디언 연설문집 등등 새벽명상은 빠뜨리지 않구요(파룬궁 수련) 많이 고팠나봅니다. 이제 산으로 올라왔네요. 편안한밤 되시구요.     


이미 여러 채를 선물 받은 것 같은데 언제든 필요하면 망설임 없이 말씀드리지요. 이곳에도 구름 가득하고 금새라도 내릴 듯 합니다. 가끔 언론에서 접하는 안덕동굴이네요. 이렇게 대하니 가슴이 아립니다. 제 삶의 여정에서 작은 욕심하나 품고 삽니다. "자연 치유 문화공원" 인간법칙의 형식과 틀이 아닌 자연의 법칙으로만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 인문학적 삶을  살아가는 곳, 나름 꾸준히 준비하면서 2~3년 후에는 본격적으로 첫발을 디뎌볼까 합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가장 근접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참 행복은 누구나가 누릴 수 있으니까요. 이곳에는 굿당도 침쟁이도 역술가도 민중놀이도 함께하는 대동세상이 되리라 믿습니다. 결코 크게 꿈꾸지 않습니다. 씨앗정도의 역할일지언정 만족할 것입니다. 종석산은 명상의 자리이기에 산 아래쪽으로 알아보는 중이고 어느 정도 인적 인프라도 구성되었습니다. 의외로 그런 삶을 원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함께 모여 사는 게 아니라 잠시라도 체험 해볼 수 있는 그런 곳을 꾸미고 싶네요. 많은걸 잊고 (사실 잊어버린 거조차 모르지요) 사는 세상에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곳에서의 님의 손길도 많은 도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늠치 못하는 인연의 연결고리가 있겠지요. 말이 길었네요. 몸을 좀 더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종석산 꼭대기든 월라봉이든 가끔은 달도 따러 가보시게요.


당연 그래야지요.


예전에도 건강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안심이 됩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했으니

그 아픔도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겠지요.


나눌 수 있는 게 물론 많이 있지요.


보다 나은 능력을 주려는 神이 요구하는 수업료 같다는 생각입니다.


간혹 건강 상담자 중에 심장 관련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가까운 도반 중에도 님하고 똑 같은 분이 있구요.


저는 신의 능력을 믿고 삽니다.


님하고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 그럴 것입니다. 네, 그러세요.


고양이들의 업보도 있나봅니다...^^   


고양이들의 보금자리 참 포근할 것 같습니다. 꿈꾸는 세상 함께 만들어 가면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


누가 보다는 함께 입니다. 無는 有와 의존되어 있을 때 드러난다. 님에 능력도 많은 이들의 

울림이 될 것입니다. 먼저 원하는 장소만 구해지면 함께 논의하시게요. 제가 더 기쁨니다.

뜻을 함께 펼쳐갈 수 있다니....  


제가 더욱 정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일을 핑계로 조금은 나태해졌는데 함께할 분의 기운까지 받았으니 제가 복이지요. 물질적인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차이를 두지 않는(空) 관계가 중요하지요. 이왕 세상에 자의든 타의든 나왔으니 이루고자함이 우리의 업이라면 제대로 판을 벌이자구요. 대승적 삶으로다......  


종석산 아래쪽으로 2만 평정도 임야가 있는데 그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구해진다는 확신적 희망으로 2~3년 걸릴 거라 봅니다. 내년부터는 소규모로 지금 있는 곳에서 출발하려하구요. 혹여 구하지 못하더라도 후회 없으며 그때는 종석산 일부에다 꾸밀 생각입니다. 현재 45,000평 정도이니 어느 한 곳 자연 훼손치 않고도 충분하지요. 우리와 산 아래와 인연되어지기를 가볍게 욕심 가져봅니다.


2만 평 내에는 우리나라 자연약초 동산도 계획 있습니다   


그래요. 함께 원하면 꼭 이루어지겠지요.    


정확히는 모르구요. 5년 전에 제가 1억 정도 제시했는데 그때는 인연이 아니었나봅니다. 그래서 좀 기다렸다가 자금 마련되면 좀 더 높여서 논의해 보려구요. 다른 곳도 차선책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번지는 찾아봐서 보낼께요. 네, 맞습니다.


아뭏든 저 사는 곳 위쪽으로는 활용 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네, 장금리 섬진강 쪽으로도 1만 평 정도 있습니다.


작은 것까지 하면 4필지 임대까지 하면 5필지 입니다. 하우스 있던 땅 포함해서


매죽리 산 146, 장금리 산 157, 능교리 산 361  임대, 능교리 산 354-3 사용가능,

능교리 산 354-2, 능교리 산 355. 이렇게 있네요.  


장금리는 157이 아니고 산148이네요.     


매죽리 산 145번지도 사용가능합니다.


능교리 산 341-1 입니다. 큰 도로에서 접근성도 훨씬 좋고 샘(우물)도 있고 구절초공원과 연계해서 추진할만한 사업도 있고 위치와 이 땅 면적정도면 원하는 것 모두 한곳에 가능합니다.


능교리 산 342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전주에 나왔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톡하겠습니다.


종석산 높이는 540m 입니다.


물론 모두 구입하고 싶은데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부분이라서 못 하는 거지요.


250정도 됩니다.


그리고 지적도상 길은 일제 강점기 때 측량도 거의 않고 그었답니다. 옛 어른들 말씀.

현재 살고 있는 집터는 말로만 사고 팔았던 소유자를 확인 못하는 맹지로 있습니다.

물론 다는 아니구요.


최종적으로 친 작은아버님이 사셨던 곳입니다.  


4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매순간을 자연 속에서 살아가니 축복이지요.


자연을 맘껏 베껴보는 삶. 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연인 이었습니다.    


더이상 짙어질수 없다고 손사레를 치는 숲에 비가 꾸역꾸역 내립니다. 그곳의 파도소리를 처마밑에 풀었습니다. 뒤엉켜 마당을 뒹굴며 화단으로 숨어 듭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사가 절로납니다. 더불어 좋은날 되시자구요.




        




나는 며칠 전에 종삭산에 다녀왔다. 종삭산에 직접 다시 가서 전망대에서 옥정호를 내려다 보았다. 임영규씨는 미리 종이에 써 놓은 <자연 치유 문화공원>에 대한 계획을 청산유수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유명하다는 산외면 한우거리로 가서 점심을 함께 먹고 자리를 옮겨 디저트도 함께 먹으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참 좋은 시간이었고 섬진강과 동진강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섬진강과 동진강처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지금도 같은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어쩌면 곧, 또 다시 옥정호에서 만날 것이다. 우리들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처럼 다시 만날 것이고 아름다운 종석산으로 함께 손 잡고 올라갈 것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날을 오늘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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