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작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 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것일까
하루 종일 내 주위를 맴돈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만 같다
다음날 아침에 어쩔 수 없이
길고양이, 집으로 안고 간다
기운 없어 계단 못 내려온다
두 달 후에 문득 찾아서 가니
이 층 베란다 차지한 고양이
잃어버린 엄마처럼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