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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an 02. 2021

주식 명상 30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 김도수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 김도수

그의 첫 번째 산문집《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알면 알수록 더 싫어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중에 어떤 사람일까 생각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 김도수 형님이 있다.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이 있다. 그 형님께서 자신의 책 한 박스를 보내주셨다. 예전에 진뫼마을 형님댁에서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남도기행을 했던 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돌려가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셨다. 이것도 다 인연인 듯 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첫 번째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이 책이 발행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찰지고 구수한 글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읽었다. 아마도 전라도닷컴 사장님 가슴도 나의 가슴처럼 따뜻하게 데워준 것 같았다. 전라도닷컴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김도수 형님 말씀에 의하면 참 좋은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다 인연과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는 2004년 7월 19일 1쇄를 찍었고, 2007년 1월 1일 2쇄를 찍었다. 광주에 있는 작은 지방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이렇게 인기를 얻은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고향을 향한 징글징글한 사랑의 기록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하여 썼고 또한 이 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해졌기 때문에 내가 따로 쓰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쭙잖은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한때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겁도 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박남준 시인, 대학을 졸업하고 돈 한푼 없던 박남준 시인에게, 교편을 잡고 있던 후배가 13만 원을 빌려주어, 그 돈으로 임실의 진뫼마을 빈집 한 채를 사서 일년을 살았다는 박남준 시인, 그 인연으로 이 책의 추천글을 쓴 박남준 시인은 김도수 시인의 고향 사랑을 두고 <강가의 작은 마을을 지키는 징글징글한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 있네. 여기 불이 꺼진 마을에 다시 들어와 따뜻한 불을 밝힌 사람이 있네>라고 말한다. 김도수 시인은 1959년 생이고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생이다. 


5년 / 강산


어제 밤에 대설주의보처럼 꿈을 꾸었다

부처님과 예수님과 주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남은 생명이 5년이라고 말씀 하셨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씀 하셨다 

5년의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꿈속에서 고민을 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새해가 열리는 밤이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낮에 받아서 읽다가 잠든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다시 읽기 시작하니 섬진강이 보이고

진뫼마을이 보이고 반월산이 보이고

연어의 종착역이 보이고 징검다리가 보인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한라산을 넘지 않고

이어도공화국에서 해를 넘기고 있는데

어둠 속으로 새해가 열리듯 방문이 열리더니

반월산에 누워 계신 부모님께서 들어 오신다


아직, 내가 등을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어야 할 흰 소는 보이지 않는다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에 수록된 글과 사진들은 박남준 시인의 말처럼 징글징글한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의 시선을 더욱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글과 사진들이 있다. 김도수 시인의 고향 임실의 진뫼마을과 나의 고향 곡성의 연어의 종착역은 참 많이도 닮아 있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 중에서 나는 <추억의 등교길>이 가장 좋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나로 하여금 가장 많은 반성을 하도록 깨우쳐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추석 연휴 첫날,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아들에게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초등학교 등교길을 체험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딸 가애와 아들 민성이가 책보 둘러메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등교길을 체험하는 이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덕치초등학교로 가던 강변 등교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길과 그의 딸과 아들이 손 꼭 잡고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런 딸과 아들 뒤를 따라서 점심 도시락을 싸서 따라가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도 보인다.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뒤늦게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로 달려가는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 월곡떡도 보인다. 그리고 운동장 앞쪽 모서리에 서 있는 쌍벚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형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과 그의 딸 가애와 그의 아들 민성이가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나는 < 75년 여름 진뫼마을 톱뉴스>에서는 나의 아버지를 보았고 <어머니 사랑비는 언제나 세울까>에서는 나의 어머니 메산이댁을 보았고 <진달래 먹고 놀던 내 친구 현철이>에서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는 나의 아버지 이야기와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현철이처럼 살았던 나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시 쓰여질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어서 고치집 좀 짓거라>에서는 누에 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의 기억과 좀 달라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내 기억에는 일년에 한 번 누에치기를 하였다. 뽕나무가 일 년에 한 번 자리서 나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봄과 가을 이렇게 두 번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봄 누에와 가을 누에가 있다고 나온다. 우리집에서도 누에치기를 많이 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약 한 달가량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밭에 있는 뽕이 부족해서 산에 들어가 꾸지뽕을 따다가 먹인 기억이 선명하다. 

   








http://blog.daum.net/jm117/13666361 

진뫼마을 겨울 풍경 |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

김도수 2011. 1. 16. 12:44


▲ 진뫼마을 징검다리. ⓒ 김도수
▲ 징검다리와 홍시. 징검다리에 눈들이 쌓여가고... ⓒ 김도수
▲ 고드름 열린 날. 어머니 홀로 고구마를 삶아 점심을 때우고 계시지는 않는지... (이제는 무너져 다시는 볼 수 없는 문강화네집) ⓒ 김도수
▲ 눈꽃 피던 날, 큰아버지는 먼길 떠나고. ⓒ 김도수
▲ 장독대 한켠에 묻어둔 눈 덮인 김장김치. ⓒ 김도수
▲ 눈 내린 마당. 딸내미가 혀를 내밀어 눈맛을 보고있다. ⓒ 김도수
▲ 우리집 돌담에 얼굴 내밀고 있는 아이들.  왼쪽 딸내미는 벌써 내년에 대학생이다. ⓒ 김도수

          

▲ 김치 내는 아내 눈 내리는 날, 주말에 장독대에서 김치를 내오는 아내. ⓒ 김도수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책 소개) / 채 종 애


올 겨울은 날씨도 춥고 서울 쪽에 몇 십년 만에 최고의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북쪽의 눈 소식에도 불구하고 이곳 여수는 예년과 다름없이 눈 구경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기차를 타고 조금만 위쪽으로 올라가도 산이며 들이며 하얗게 쌓인 눈이 그대로 있는 것이나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걸 볼 때면 이곳과는 정말 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소개 하고자 하는 책<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김도수 지음> 속의 겨울 역시 어느 곳의 겨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최근에 지인들 모임에 갔다가 이 책의 저자를 만났고 서류 봉투에 담겨진 친필 싸인 된 책을 선물 받게 되었다. 제목부터가 남도의 운치를 가득담은 (섬진강)으로 시작되며 푸른 안개 자욱한 표지 그림 역시 도대체 어떤 책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냈고 이틀 밤 꼬박 걸려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고향마을을 잊지 못하고 늘 꿈속에서 헤매던 고향,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뫼마을을 사랑하여 쓴 애향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진뫼라는 이름처럼 산이 길게 둘러쳐져 있고 앞에는 섬진강이 흐르는 참으로 정겨운 곳이다. 이 마을에서의 저자의 삶은 그야말로 행복이요 아름다움 자체였다. 물론 배고픈 어린 시절에 여러 자식들 키우며 고생 하시던 부모님 아래서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하겠지만 그 또한 행복의 요소로 저자를 고향으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할 수 있다.


90년대 말, 저자는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남의 손에 넘어간 고향집을 12년 만에 되찾으며 새로운 고향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지만 주말엔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명예이장으로 고향주민으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고향집을 조금씩 손보고 기름보일러로 고쳤지만 최대한 원형 그대로를 유지했다. 방문 역시 자신의 어릴 적 창호지 문 그대로 두어 외풍에 얼굴이 시리다는 아이들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부모형제와 지냈던 시절을 추억하며 살고 있다. 부모님이 농사짓던 그 땅에 고추 상추 배추 감자 등 온갖 채소를 다 농사지어서 먹는다.


요즘 아이들은 고향이라면 어떤 곳인지 어디냐 물으면 모모 산부인과라고 말한다는 세태에 비교 한다면, 한국전쟁을 거쳐 우리 부모들의 가난하던 시절에 태어난 저자에게 고향은 삶의 이유이며 원동력이고 행복의 근원임이 절절이 드러나 있다.


책속에 소개된 지명이나 사람호칭은 실명으로, 한둘씩 돌아가시는 고향 어르신들의 함자조차도 소중히 기억하고픈 저자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또한 고향의 모든 것을 간직하고픈 저자의 마음은 두 쪽 걸러 한 장씩 실린 아름다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섬진강변에 자리한 고향마을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한 장 한 장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 마을 마니아가 되었거나 이 마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마을 앞 징검다리 사진은 시멘트 다리로 인하여 사라져 갈 위기에 놓인 징검다리를 되살린 그의 노력만큼이나 아름답다.


진뫼마을(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로 엮어진 사연들은 마치 섬진강 푸른 물에 놓인 징검다리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의 노랫소리와도 같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말한다.‘사람냄새 나는 섬진강가에 날마다 서있고 싶다’라고. 세월 속에 사라져간 이 땅의 부모들, 자식들의 삶에 발 딛고 선 요즘 사람들에게 사람냄새 나는 이 책을 나는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다.


 <큰여수 봉사 소식>6호 에 실린 글입니다.




아들 첫 봉급으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나눈 점심... 이런 게 행복이지요 | 진뫼마을 고향편지

김도수 2016. 4. 28. 11:09

http://blog.daum.net/jm117/13666463


아들 첫 봉급으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나눈 점심...

이런 게 행복이지요

16.04.28 09:53l최종 업데이트 16.04.28 09:53l


▲ 고향 진뫼마을의 봄 앞산 절골에서 바라본 고향마을 ⓒ 김도수


2016년 4월 16일, 주말을 이용해 고향 진뫼마을에 달려가니 마을 어르신들은 이미 농군의 옷 벗어던지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계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 꾸러미 내려놓고 고향마을로부터 1.5km쯤 떨어진 중전마을 식당으로 네 분씩 태워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요즘 몸이 편찮으셔서 외출이 뜸한 윗것테 사는 깨복쟁이 친구 현호네 어머니를 먼저 태우러 갔다. 집 앞에 도착하니 소지 당숙모와 택수네 어머니, 세운이네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셔 방안에 계신 현호네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아이고, 뭔 밥을 낸다고 그맀싼데아. 동네사람들 밥 살라면 돈도 많이 들어갈 턴디…. 아들이 첫 봉급 타서 마을분들께 한턱 낸다고 헝게 생각이 참 기특허고만. 도수는 밥 안 묵어도 배부르겄어."


"돈이 들어가면 얼매나 들어가겄어라우. 월급보다는 덜 들어가겄제라우. 그리도 마을 어르신들께 밥 한 번 내야할 일이 생긴 저는 행복허기만 허고만이라우."


"선생되는 시험도 어렵다도만... 큰 복이네!"


▲ 아들과 딸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 농로용 다리에서 딸 가애가 동생 민성이를 꽉 안아주고 있다. ⓒ 김도수


"도수 자네 핀허라고 애들이 취직히서 나강게 얼매나 존가. 우리 손자들은 돈 몽땅 디리서 외국에 유학을 갔다 오기도 힜는디 아직도 취직이 안 돼 저그 아부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녀. 취직이 되면 저그덜도 맘 핀허지만 부모들이 더 존 일이제. 자식 새끼들 집에서 놀고 있어보소. 밥 숟꾸락 입에 떠 넣어도 목구멍에 탁 언쳐부러. 맨날 걱정 머릿속에 담고 사는 거제."


"나보다는 저그덜 핀헐라고 졸업하자마자 취직이 된 것이제라우. 둘 다 취직이 돼아붕게 요즘 맘 핀히 지내고 있고만이라우."


"큰 복이네, 큰 복이여! 울 아들이 그런디 요새 교대가기 힘들다고 허더라고. 근디 둘 다 교대에 들어가 졸업허자마자 곧 바로 선생으로 나강게 얼매나 좋아. 사는 게 참 재미지겄어. 선생되는 시험도 어렵다도만 단번에 둘 다 붙어 부렀응게 도수는 복 겁나게 받아붕거여."


"다 동네 어르신들께서 성원해주신 덕분이제라우."


식당에 내려드리고 두 번째 어머니들을 실러 왔다. 깨복쟁이 친구 현철이네 어머니, 군대 함께 간 정호네 어머니, 아랫집 점순이네 어머니, 윗집 재섭이네 어머니 네 분을 모시고 간다.


오리주물럭에 술 한잔 대접, 이게 행복이지


▲ 아빠! 올챙이 잡았어요 올챙이가 앞다리가 먼저 안 나오고 뒷다리가 나왔다고 소리치고 있다.  ⓒ 김도수


"애들 갈치니라고 돈도 없을 턴디 머더게 동네 사람들한테 밥을 산다고 그려. 안 사도 암시랑토 안 혀!"


"밥도 명목이 있어야 산디 자식들 취직이 되어 산다고 헝게 저도 기분 좋고만아라우."


마을 어르신들은 식당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기도 하고 또 뒤늦게 오신 분들은 본이 소유의 소형 화물차를 타고 오셔서 네 번 왕복을 하니 개인 사정이 있어 빠지신 분들을 제외하고 스물여섯 분 모두 오셨다.


"익산에 있는 딸은 감기몸살이 너무 심해 도저히 올 수가 없어 못 왔고만이라우. 꼭 와서 어르신들께 아들이랑 함께 인사 드려야 헌디 못 와 죄송합니다. 대신 올해 임용시험 합격히서 기간제 교사로 첫 봉급 탄 아들 인사 올리겠습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아 드시고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따, 적 아부지 탁히서 긍가 눈썹도 시커머니 인물도 훤허네."


아들은 마을 어르신들께 술과 음료수를 한 잔씩 따라 올리며 "건강하세요" 인사 올리고 있다.


"아따, 점심 한 번 잘 묵었네"


▲ 술과 음료수 한 잔씩 권하는 아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인사 드리고 있다. ⓒ 김도수


"도수 아들이 따라준 게 겁나 맛싯네. 쬐깐헐 때부터 딜꼬댕기도만 언제 요로케 커부렀데아. 세월 참 빠르고만. 그나저나 고향 들락거림선 고향집 지키제, 밭이고 산이고 안 묵히고 가꾸제, 하여간 부모님들께서 자네한테 몽땅 복 니리준거여. 그나저나 도수 아들 덕분에 오늘 낮 점심 잘 묵었네."


사는 게 뭐 특별한 게 있겠는가. 나를 키워주고 보살펴주고 지금의 나를 있게 도와준 고향 사람들 잊지 않고 밥이라도 한 끼 나누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올해 초, 아들은 임용시험에 합격하자 첫 봉급 타면 엄마 아빠 주말마다 고향에 가시니 "누나는 첫 봉급 타서 아빠 개량한복 한 벌 맞춰줬으니 나는 진뫼 어르신들께 식사나 한 번 대접하려고요"라고 말했다.


대학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첫 돈을 모두 부모님 손에 쥐어주더니 또 한 번 아들의 고운 마음씨에 볼 발그스레 상기돼 날아갈듯 기뻤다. 저축하고 남은 용돈 자기 쓰기도 빠듯할 텐데 기특한 마음 가지고 있었던 건 어린 시절부터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숨 쉬며 살아왔던 '고향의 순'이 몸 속에 새순을 틔우고 있었던 거 같다.


첫 봉급 탄 이후 마을 이장님과 날짜를 협의해 오던 중 이날 날을 잡아 마을 어르신들이 평소 좋아하는 '오리주물럭'을 시켜 술 한 잔씩 나누게 된 것이다.


▲ 이게 뭔지 아니? 딸 가애가 동생 민성이에게 방아깨비 긴 뒷다리를 잡자 방아처럼 끄덕이며 인사를해대자 신기해하며 쳐다보고 있다. ⓒ 김도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마을 어르신들께 부모님 생일상을 차려 대접을 하거나, 팔순잔치에 초대해 대접할 일도 없어 아들 취직으로 인해 한턱 내는 기회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마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오늘 낮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면서 한 잔 하셨겠지. 자식 키운 보람 느꼈다며 아버지는 팔자걸음으로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였겠지.


술 한 잔씩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어르신들께서 돌아가신 부모님 맘을 내게 들려주고 계셨다.


"월국양반 월국떡은 참말로 좋겄네. 손지들이 둘씩이나 선생님이 돼아부러서. 월국양반이 늘 자식들에게 공무원, 공무원 노래 불렀쌌더니 손자들까지 꿈을 이뤄불었고만."


부모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 교육인데 5~6세 때부터 주말마다 고향집 데리고 다니면서 스스로 자연 공부 터득하며 놀던 아이들.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사하면서 고향집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노래불렀다.


마당 한켠엔 '가족나무'라 명명한 자목련을 심고, 뒤란에 아이들 이름을 각자 붙여 사과나무를 심어놨다. 결혼하면 자식들 데리고 부모님이랑 함께 심어 놓은 자목련은 지금쯤 피었을까, 사과는 몇 개나 열렸을까, 그 핑계 대고 남편 아내 손잡고 고향집에 한번이라도 더 오는 '이유'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 했거늘... 그러나 어쩌랴


▲ 눈 내린 고향집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 집. 한겨울, 아이들 데리고 주말에 달려가니 눈이 쌓여 고요하기만 하다. ⓒ 김도수


도시에 살거나, 많이 배웠거나, 높은 학력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두메산골 가난한 진뫼마을 사람들 눈높이로 자식 둘 모두 공무원으로 나가는 거는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형제들도 '이제 복 그만 가져가고 나한테 돌려 놔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도수가 집 사서 부모님께 잘 헝게 그 복 옴쏘롬허니(온전히) 다 받아 간 거여. 축하혀! 울 동상은 인생 잘 살았어. 진뫼 '사랑비'에다 막걸리 또랑물 내려가듯 부었고, 그렇게 뜨거운 여름날 까시덩풀 헤치고 엄마 산소 관리 하는데 복 안 주겄어. 조상님도 알고 복 주신거제. 오늘 뒷산에 잠드신 울 어매 아부지 벌떡 일어나 춤 덩싱덩실 추며 더듬더듬 고향집으로 니롸불지도 모르겄다."


그날 밤, 마을 어르신들께서 따라주신 술 받아 마시고 잠이든 아들 꼭 껴안아줬다. 부산에서 교대를 나온 아들이 임용시험을 부산으로 칠까, 경기도로 칠까, 고민하다 내 뜻 받들어 전북 지역으로 지원해 합격했기 때문이다. 자식자랑은 팔불출(八不出)이라 했거늘 나는 '기천팔불출' 쯤 되겠다. 그러나 어쩌랴.


▲ 부모님께 받치는 '사랑비' 살아생전 취직되면 막걸리 받아들고 오라던 어머니 말씀 가슴에 사무쳐 용돈을 모아 고추밭 가장자리에 빗돌 하나 세워드렸다. ⓒ 김도수
▲ 고향집 '보리베던 날'그림 옆에서 좌로부터 필자와 아내 아들 딸 가애가 보리베는 할머니와 목이 마르다며 어린 아빠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오매! 한 잔 하고 혀!" ⓒ 김도수


잠을 청하려 해도 쉬이 오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부모님 농사 도와주던 그 봄날이 머릿속에 환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쩍새가 구슬피 울어댈 때마다 쇠죽방에 누워 '나는 앞으로 뭣이 되어 사회에 나가 살 것인가,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로 올라갈 것인가, 아님 공무원 공부를 헐 것인가, 군대를 지원히서 일찍 갔다올 것인가,' 불멸의 밤으로 눈물 지새우던 그 봄날이 다시 내게로 오고 있었다. 


소쩍새


대학 문 못 밟고

쇠죽방에 누워 자는데

소쩍소쩍

문틈 뚫고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벽지 대신 발라놓은 누우런 신문지 

인재를 찾습니다

취업 광고판 읽으며

세상 나가는 길 찾고 있다


소쩍소쩍

나도 소쩍새 따라

훌쩍훌쩍


날 밝기 전

세상 속으로 숨어들었다


― 시집 <진뫼로 간다>중에서,  졸시<소쩍새> 전문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곤히 잠든 아들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종일 농사일에 지쳐 곤히 잠든 나를 새벽녘 아버지께서 우두커니 바라보듯. 그러다 팔베개를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내는 "카드빚" 타령이지만, 내 맘대로 썼습니다

아들이 알바해서 준 용돈으로 고향 사람들에 점심 대접하던 날

13.01.10 20:58l최종 업데이트 13.01.10 20:58l 김도수(khjm117)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고향집 댓돌 고향집 댓돌에 놓인 고무신에도 눈은 쌓여만 가고. ⓒ 김도수


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올 겨울방학 동안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봉사를 이수해야 해서 집에 오지 못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연말 새해 새 아침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며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는 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뜬금없이 돈 봉투를 내민다.


"나 지금 아르바이트 해요. 초등학교 4학년 가르치는데 일주일에 세 번씩 가기로 하고 40만원 받았어요. 학교 인근이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돼서 할 만해요."


"사람이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는 게 좋지. 네 삶이 풍요로워져서 좋기는 허다만은


공부 열심히 히서 장학금을 타오는 게 나는 더 좋다."


"아빠! 괜찮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임용고시 붙을 자신 있으니까 넘 염려하지 마세요."


아들은 돈을 꺼내 아빠, 엄마, 누나에게 각 10만 원씩 나누어준다. 그리고 자기도 용돈으로 쓴다며 10만 원을 지갑에 넣는다.


▲ 비료포대 썰매 이웃 새몰마을에 전주에 사는 아이들이 할머니 댁에 놀러와 비료포대를 이용 썰매를 타고 있다. ⓒ 김도수


"마냥 어린애 같기만 하던 아들이 다 커서 돈을 벌어다 내 손에 쥐어주니 고맙기만 하구나. 잘 쓸게."

아들이 아르바이트로 벌어온 '첫 돈'을 쥐고 어디에 쓸까 고민했다. 잃어버린 목도리를 살까? 아님 추운데 내의를 한 벌 사 입을까? 돈을 만지작거리다 첫 봉급 타서 어머니께 옷 한 벌 사드려니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한없이 울던 생각이 났다.


아, 그래. 이 돈은 나를 키워주고 길러주신 우리 부모님과 고향 사람들을 위해 써야지. 나와 내 자식들 세끼 밥 편히 먹고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바라지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을 위해 쓰는 게 맞아.


부모님께 '효도'하려 해도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 주말에 집에 오면 어머니 수중에 돈 한 푼 없어 맨발로 이 집 저 집 돈 꾸러 다닐 때 선뜻 빌려주신 마을 사람들이 계시지 아니한가.


▲ 조기와 동태 마을 사람들에게 드릴 찬거리를 아내와 함께 사가지고 갔다. ⓒ 김도수


"가애 엄마! 항상 애기로만 보이던 아들이 고생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을 이렇게 쥐고봉게 기분이 참 묘허고만. 의미 있게 써야 헌디 어디다 쓸까 고민허다 결정힜네. 자네는 그 돈 어따 쓸랑가?"


"어따 쓰기는 뭐설 어따 써! 봉급 타먼 일주일도 못가 맨날 마이너슨디. 돈 이리 내놔! 아들이 애쓰게 벌어온 돈을 진짜로 쓸라고 힜소? 등록금 낼 때 보태 써야지 쓰기는 어따 쓸라고 혀! 지금 카드빚이 얼마나 된지 알기나 허요?"


"음마! 아들 뒷바라지 히서 처음으로 벌어온 돈잉게 나도 내 맘대로 한번 써봐야제 시방 뭔 소리여!"


"도대체 어디다 쓸라고 그러요?"


"고향 사람들에게 찬거리나 좀 사다 드릴라고 허고만. 눈이 몽땅 니리서 어디 장에나 한번 갔겄는가."


▲ 진뫼마을 '윗골'에 있는 소 막사에 쇠죽 주러가는 동환이 어르신. ⓒ 김도수


"아이고 지금까지 그만큼 사다드렸으먼 됐어. 넘 오바허지 말고 돈 이리 내놔! 마이너스 카드 내역서 볼 때마다 한숨 나와 죽겄는디 어따 쓸라고 난리여. 하여간 그 돈 쓰기만 허먼 알아서 혀. 좋지 못헐 텅게."


그날 밤 결혼해서 수십 번도 더 들었을 두메산골 어린 시절 가난했던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또 이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육성회비를 기한 내 못 낸다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어머니는 집집마다 돈 빌리려 다녔는데 당장 비료 사와 농사지을 돈까지 기꺼이 빌려주던 고향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계신다고. 나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모를 심던 사람들, 이제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만 남아 겨우내 마을 회관방에 모여 밥상 두 개면 충분한 지금 사가지 않으면 난 두고두고 후회 한다고.


1월 6일 일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오일장이 열리는 광양시장으로 발길 옮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가고 오늘, 고향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마을 회관 겨우내 함께 모여 사는 마을 회관 ⓒ 김도수


"가애 아빠! 조기 한 상자만 사야 돼! 더 이상 뭐 사자고 힜다 허먼 나 도로 집으로 들어가불 텅게 그리 알아."


"알았어. 걱정허지 마!"


지금 시골에는 눈이 많이 내려 분명 찬거리가 부족할 게 뻔하다. 마을 사람들 하루 종일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과 저녁까지 해 드시고 헤어지니 지난해 겨울처럼 김치 하나에 드시고 계신지 모를 일이다. 그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비교적 양이 많고 저렴한 콩나물 가게부터 들어섰다.


"콩나물 같은 싼 거 좀 사가세. 이왕이먼 두부도 한 판 사가고."


내 예상은 적중해 아내는 콩나물과 두부 한 판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부와 콩나물을 나눠 들고 다니면 혹시 아내가 힘들어 신경질 낼까봐 가게에다 맡겨두고 조기를 사러 돌아다녔다. 조기를 골라 놓고는 "이왕이면 저기 저 동태도 좀 사가세. 조기를 많이 사니까 싸게 줄턴디…" 하고 말을 건네자 "아예 장을 봐서 가지 그러요!" 면박을 준다.


▲ 꽃밭등 마을 앞 꽃밭등과 섬진강 ⓒ 김도수


눈을 흘기면서도 아내는 "저기 저 동태는 얼매요? 좀 싸게 줏쇼. 우리 묵을라고 사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마을 어르신들 갖다 줄라고 헝게 젊은 아저씨도 봉사헌다 생각허고 좀 싸게 줏쇼" 하며 동태도 산다. 시장을 나오려 하니 맨 끝에 과일 좌판들이 죽 늘어서 있다. 나는 침을 꼴딱 생키며 말했다.


"가애 엄마! 이왕이먼 귤도 좀 사가세. 오랫동안 눈 속에 갇혀 있응게 얼매나 과일이 묵고잡겄는가. 귤 한 박스만 사가세!"


"환장허겄네. 조기만 사간다고 허더니 이것저것 다 사네."


"나도 아들이 준 돈 일부 헐어서 썼응게 그리 알아!"


"잘 힜어. 장바구니 들먼 돈 뭐 쓸 것 있가디. 남에게 복을 주는 사람은 복도 대물림으로 도로 받는 법이여! 남에게 베풀먼 다 자식들한테 돌아가."


"글먼 술은 안 사갈라요?"


"당신 모르게 젠작 트렁크 속에 사다 넣어 놨제. 내가 누구여!"


▲ 섬진강 저리소산 아래 섬진강이 산에 막혀 휘돌아 나가고 있다. ⓒ 김도수


마을에 도착하니 회관 지붕은 아직 리모델링 공사가 안 끝났고, 내부 시설은 다 끝났는지 현관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허허! 뭔 놈의 것을 요로케도 많이 사왔데아, 응. 제삿장 봐온 것맹키로 몽땅도 사와부렀네. 반찬 다 떨어져서 그라니도 내일 순창 나가서 찬꺼리 좀 사올라고 힜는디 자네가 장베기(장보기) 다 봐와불었네."


"저 학교 댕길 때 돈도 빌려 주고, 우리 부모님 농사지을 때 동네 사람들이 도움 많이 줬는디 내가 그 고마운 마음 잊고 살먼 되겄어라우. 그냥 뭐 이것저것 쬐끔 사왔고만이라우."


"공짜로 돈 빌려주고, 공짜로 일 힜가디 그런가. 사와도 너무 많이 사와부렀고만. 자네도 자식들 둘 다 대학 댕긴 게 힘들 턴디 앞으로 요로케 많이 사오지마! 술이나 한두 병 사오먼 모를까."


▲ 벼락바위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이불을 가지고 나와 별을 벗삼아 잤던 벼락바위에도 눈이 소복이 내렸다. ⓒ 김도수


작년까지만 해도 회관 방은 단열이 잘 안 되어 곰팡이가 피고 찬바람 솔솔 파고 들어와 썰렁하기만 했는데 정부에서 리모델링을 해주니 방에 훈기가 돌며 따스했다. 화장실도 내부에 하나 새로 설치되어 겨우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마을 사람들 얼굴마다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 잘 되았는디 저그 씽크대허고 들어오는 문짝이 영 엉성혀. 문짝은 잘 안 맞아 손 좀 봐야 헐랑가비어. 글고 제섭이네 집 창고에 넣어둔 텔레비만 가져다 놓으먼 참 좋겄는디 제섭이네 어메가 열쇠를 가꼬 서울 자식들 집으로 가부러서 오늘이나 내일 쯤 니론당게 지달려봐야제."


집에 가니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화장실 좌변기 저장물통에 담긴 물도, 보일러실에 얼지 말라고 부동액을 넣어둔 물통도, 땅 속에 묻어둔 싱건지도, 지붕에서 눈 녹아 흐르는 홈통도, 하수구 내려가는 파이프 관도 모두 꽁꽁 얼어붙어 그야말로 얼음집이 되어버렸다.


▲ 연통과 먹감 연통에서는 연기가 퐁퐁 솟고, 먹감은 홍시가 되어 꽁꽁 얼고. ⓒ 김도수


이 얼음이 녹으려면 아마 따스한 봄이 와야 가능할 것 같다. 지난해 겨울에는 보일러가 얼지 않도록 전기코드를 뽑지 않고 '외출'로 해 놓아 영하로 내려가면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방과 보일러실을 지켜줬다.


그런데 주말마다 가던 나도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발걸음 멈추니 맥없이 보일러만 펑펑 돌아가는 게 기름 값 아까워 아예 전기코드를 뽑고 보일러실 호스와 밸브를 이중 보온재로 감싸고 헌 이불로 겹겹이 쌓아 덮어놓았다. 그런데 올 겨울은 유난히 강추위가 계속되어 각 방으로 들어가는 보일러 호스나 보일러실 밸브 관이 터져버릴까 걱정이다.


콩나물 무치고, 멸치 넣어 두부 지지고, 무 썰어 넣고 자박자박 지진 조기찌개와 시원한 동태 국에 먹는 점심. 거기에 곁들여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어찌나 밥맛이 좋더니 고봉밥 한 그릇 눈 깜짝할 사이에 뚝딱 해치우고 나자 '더 묵어라'고 밥그릇 달라 하시는 어머니들 손길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도수! 밥 더 묵소. 여럿이 묵는 밥이라 참 마싯제. 그나저나 오늘 낮에 도수 덕분에 마싯게 잘 묵네. 월국떡이나 월국양반 살았으먼 얼매나 좋아라고 힜겄어."


사는 게 뭐 특별한 거 있겠는가. 행복한 삶, 어디 멀리 가 있겠는가. 나와 부모님 도와주시던 마을사람들 잊지 않고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밥상 마주하며 막걸리 한 사발 따라드리며 함께 웃고 기쁨 만끽하며 누리며 사는 게 행복 아니겠는가.


▲ 징검다리 마을 앞에 놓인 징검다리에도 얼음이 잡히고. ⓒ 김도수


덧붙이는 글 | 김도수 기자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마을로 돌아가 밭농사를 짓고 있고 전라도닷컴(http://www.jeonlado.com/v2/)에서 고향 이야기를 모은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책] 징글징글한 고향 사랑의 기록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 독자 호응 속 2쇄 찍어

남신희 

기사 게재일 : 2006-12-27 06:00:00


 그의 고향마을 앞엔 세상에 둘도 없을 비가 서 있다.
 비에 새겨진 내용은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져/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 뒷면엔 <어머니 아버지 가난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라고 씌어져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려 두 분이 생전에 땀흘려 일하던 고추밭에 자그만 `사랑비’를 세웠다. 지극정성 그 마음은 고향마을에까지 두루 닿아 있다.
 고향집이 팔린 뒤 타향의 삶을 사는 동안 밤마다 진뫼마을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는 사람. 이미 남의 것이 돼 버린 옛집에 비가 새는 것을 보다 못해 담장을 타고 올라가 비닐을 덮어주다 집주인에게 핀잔을 받은 사람. 잃어버린 징검다리를 고향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기 위해 어느 해 추석 `징검다리 놓기’ 울력을 벌인 사람…. 김도수(48)씨다.
 그는 강가의 바위 하나, 마을 들머리의 오래된 이발소, 마을을 지키는 정자나무 한 그루를 두고도 섬진강 오백리보다 더 길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섬진강물 마를지라도, 그의 고향 이야기는 마르지 않을 것 같다. 그 엄청나고 유장한 `수다’의 근원은 무엇보다 `사랑’이다. 그의 고향은 섬진강 흐르는 강변마을, 임실군 덕치면 진뫼마을.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는 그 고향을 향한 징글징글한 사랑의 기록이다. 지난 2004년 첫 출간에 이어 최근 2쇄를 찍었다. 그 사랑에 `감염’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 읽어본 이들이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권하는 책이다.

 섬진강 오백리보다 더 긴 고향 이야기
 그가 글 속에 펼쳐놓은 것은 너무나 정밀한 마을지도이자 추억의 지도이다. 또 어머니 아버지 누이 형 깨복쟁이친구들 마을 어르신들의 생생한 초상이기도 하다. 그 속에 눈물나고 정겨운 사람살이가 다 담겨 있다.
 지난 98년, 고향집을 12년만에 되찾은 그는 주중에는 직장생활하느라 순천에서 살고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진뫼에 돌아와 고향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별명이 `진뫼마을 주말 명예이장’인 이유다. 고향 일에 관해서라면 그는 정말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 모 청사의 표지석으로 끌려갔던 마을 강변의 `허락바위’를 되찾기 위해 민원편지를 쓴 것도 그였다. 허락바위는 비가 내려 강물이 불었을 때 이 돌이 어느 정도 물에 잠겼는지를 봐서 강을 건널지 안 건널지 마음속에서 허락을 받아내던 바위. 지금 그 허락바위는 `自律’이란 글자가 새겨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있다.
 눈물 참느라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지는 이야기는 대부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들. 모내기하랴 누에똥 가리랴 늘 잠이 부족했던 탓에 어느날 저녁 마루에서 꾸벅꾸벅 졸며 일하다 시멘트 바닥 위로 떨어진 어머니의 이마에 볼록하니 상처가 났던 이야기도 있다. 돌아가신 날까지도 여전했던 어머니의 그 상처는 아들의 가슴에 아프게 남아 있다.

 눈물나고 정겨운 사람살이 다 담겨
 당숙네 집에 가서 새마을담배 한갑 건네주고 하던 까까머리 이발, 어머니 몰래 귀한 달걀 주고 사먹었던 아이스깨끼 등 `그 땐 그랬지’라고 고개 주억거리게 되는 이야기들도 많다. 마음속에 `고향’을 품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드는 글들이다.
 발문을 쓴 시인 박남준씨는 김도수씨의 고향 사랑을 두고 <강가의 작은 마을을 지키는 징글징글한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 있네. 여기 불이 꺼진 마을에 다시 들어와 따뜻한 불을 밝힌 사람이 있네>라고 말한다.
 진뫼마을에서 2년 전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진뫼마을 할머니들은 “도수는 참말로 금뺏지 단 것보다도 더 좋은 일을 해부렀어”라며 눈물을 훔쳤다. 책 속의 사진들만 봐도 진뫼마을이 생생하고 애틋했기 때문.
 그는 “돌이켜 보니 내가 고향 이야기를 쓴 게 아니라 쉼없이 흘러가는 저 섬진강이, 제 몸 아끼지 않고 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착하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생애가 이 글을 쓰게 한 힘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향도 많이 달라졌다. “적막하고 쓸쓸해졌다. 많은 분들이 죽고 떠나고, 이제 몇 분 남은 어르신들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향에 돌아오는 꿈을 오랫동안 꿔왔던 그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불 꺼진 집들에 다시 불이 켜지는 꿈. 자신의 아들딸 가애와 민성이에게도 먼 훗날의 아이들에게도 진뫼마을이 계속 `고향’이 되는 꿈.
 주문 및 문의 650-2042
  남신희 기자 miru@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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