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식명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산 Jan 04. 2021

주식 명상 31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를 읽으며






주식 명상 31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를 읽으며




처음에 내가 김도수 시인의 산문들을 인터넷에서 읽었을 때에는, 내가 이미 그 10여 년 전에 발표한 <우리들의 고향> 연작시들을 산문으로 풀어 놓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나의 시들보다 훨씬 더 좋은 산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 한 편의 산문들이 모두가 훌륭한 시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며 완벽한 희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김도수 시인이 풀어놓은 입말들이 참 구성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김도수 시인의 삶은 그의 글들보다 더욱 진솔하고 정이 많아서 좋다. 김도수 시인이 여는 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는 늘 말과 글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다.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되도록 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말과 글과 행동이 따로따로 논다면 독자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거짓 없이 진솔하게 쓰려 했고, 또 내가 쓴 글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쓰고 있는 <꿈삶글> 연작의 정신이며 계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한 때 김도수 시인을 비롯하여 김인호 시인과 박남준 시인과 이원규 시인이 함께 사는 지리산 가까운 곳으로 가서 살려고 하였다. 내 고향 곡성으로 돌아가 살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고향에 있는 반월산을 사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가까운 여수에도 좋은 시인들이 많이 있어서 꼭 가까이 가서 함께 살고 싶었다. 고향집이 너무 좁아서 곁에 있는 집터도 더 사려고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폐가로 남아있던 고향집도 다시 청소를 하고 수리를 하려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너무나 좀스럽고 편협하고 비뚫어진 마음이 그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다시 찬찬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 때는 너무나 속이 많이 상해서 나의 계확을 스스로 접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는 그 당시 두 명의 친구가 결혼도 않고 총각으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참 많이 미안해서 내가 점심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연락을 하고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의 친구들이 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왔다. 친구들과 같이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선배들와 후배들이라고 말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예상을 못해서 잠시 당황은 했지만 그래도 오히려 더 좋았다. 앞으로 얼굴 보고 지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점식 식사를 함께 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고향집으로 돌아와 집을 대강 치우고 공향집에서 잠을 자려고 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고향집에서 일찍 자려고 하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와서 생각도 많아지고 불편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다. 점심 때 함께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나만 빼고 다 함께 술을 먹고 있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집이여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간단한 부탁을 하였는데 거절을 당했다. 뭐, 그동안 연락도 하지 않다가 불쑥 찾아가서 부탁을 하니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니, 끊으려고 하였다. 친구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친구는 아마도 전화기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술상에 전화기를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친구의 전화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 술집 풍경을 생중계 하기 시작했다. 점심 때, 나를 일부러 바가지를 씌워 골탕 먹이려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던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나의 아버지 이야기들까지 1시간이 넘도록 나와 나의 가족들은 그들의 술안주가 되고 있었다. 나는 차마 중간에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귀향의 꿈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나의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옹졸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였고 너무나 큰 절망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들 곁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면, 술을 먹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충분히 좋은 술안주가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그날이 그랬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그날 가장 적당한 술안주였을 것이기에 지금은 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김도수 시인이 태어났다는 작은 방, 월곡산방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그리고 김도수 시인이랑 김인호 시인과 함께 요강바위에 직접 들어가보고 그 주위에서 목욕을 함께 한 추억이 있다. 또한 징검다리 건너 밭에서 먹감을 함께 딴 추억이 있다. 또한 제주도에서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남도 기행을 갔을 때 김도수 시인께서 직접 운전을 해주시고 진뫼마을 고향집에서 따뜻한 밥을 얻어 먹은 추억이 있다. 김도수 시인과 박은자 형수님께서 제주도에 오셨을 때 함께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또 여수에서 열렸던 전국문학인대회에서 다시 만났던 기억도 있다. 김도수 시인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좋아지는 시인이다.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에서 나는 <어머니의 비자금 만들기> 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용수네 어매, 존말로 헐 때 나와> 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중에 내게 고백한 이야기지만 그날 저녁 어머니는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려 했단다. '아이고, 당신도 어린 자식들 데리고 영금 한번 보며 남은 인생 살아 보시오' 하는 심정이었단다."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너무나 많이 닮으셨다. 그리고 김도수 시인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또한 너무나 많이 닮으셨다. 그런데 나는 김도수 시인이 너무나 부러웠다. 김도수 시인은 그래도 논이 열 마지기나 되는 부자였고 이장일을 오래도록 할 만큼 건강한 아버지가 계셨다. 투망질을 잘 하시는 것은 나의 아버지도 같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늘 구들장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환자이셨기 때문이다. 김도수 시인 집에는 머슴도 있는 부자였지만 우리집은 시골에 살면서도 땅 한 평 없는 지지리도 기난했던,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집이였기 때문에 나는 늘 논이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 우리집은 언제나 김도수 시인의 글에 나오는 외딴집 현철이 이거나, 남의집 아래채에 살다가 3학년인가 4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그 여자친구 집에 가까웠었다. <하필 보리쌀 갈 때 너그 선생님이 와서 ...>에 나오는 정수형님네 뒷집에 살았다는 그 여자친구가 자꾸만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김도수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입력 2015.07.19 19:37

 수정 2015.07.20 07:24

▲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표지.

-전라도닷컴, 잃어버린 고향에 관한 이야기 펴내

-고향 진뫼마을의 과거와 현재 기록해


   몸은 가끔 일터와 삶터에 놓여있을지라도, 마음은 늘 고향마을에 닿아 있는 사람. 주말마다 고향마을로 달려가 고향의 강과 돌맹이와 나무와 집과 사람들을 보듬는 사람. 전북 임실 덕치면 진뫼마을이 고향인 김도수 씨의 수식어 쯤 되겠다. 지난 2004년에 출간된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에 이어 김도수 씨가 최근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전라도닷컴)를 펴냈다. 섬진강이 흐르는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마을, 진뫼마을에 대한 사랑과 그곳에서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책속에 담겼다.

 진뫼마을엔 다른 곳에선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가 부모님을 위해 세운 ‘사랑비’다. 사랑비엔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져/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라고 적혔다.

 “취직이 되면 주말마다 술병 들고 진뫼마을로 달려오라”며 막내 아들인 도수 씨에게 당부하셨던 어머니, 그러나 취직이 되고 보니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셨다. 그는 어머니 말씀이 사무쳐 첫 봉급 타던 날 통장 하나를 따로 만들어 속옷 값을 넣었고, 그 뒤로도 이건 술이라고, 이건 겨울 외투라고, 이건 용돈이라고…통장에 돈을 넣었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그는 부모님이 땀 흘리던 마을 앞 고추밭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빗돌 하나를 세웠다. 그의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증거하는 ‘사랑비’는 그렇게 세워졌다.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라는 제목의 배경이다.

 그가 풀어놓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일화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잃어버린 각자의 고향이 호출된다.

 “허리 고부라지게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았던 ‘지게세대’의 아버지들,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려고 논두렁길에서 허리 고부라지게 뜨거운 삶을 이고 나르던 ‘똬리세대’의 어머니들”이 거기 있다.

 <기한 내에 내지 못한 육성회비 가지러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며 선생님께 혼날 생각에 엉엉 울며 가던 길. 회비를 못 만든 내 어머니가 몰무덩까지 따라와 내 등을 두드리며 “이번 달까지만 잘 참고 전디거라(견디거라). 어떡허든지 간에 내가 만들어 볼팅게 울지 말고. 니가 뭔 죄가 있겄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죄뿐이제…”라고 말 잇지 못하던 길. 육성회비가 없어 학교에서 쫓겨온 아들을 빈손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가 눈물 펑펑 쏟던 길. ‘오매가 뭔 죄가 있다요. 내 등짝에 지게 하나 맞춰줘 불면 오매도 핀헐 턴디…’라고, 어린 맘에도 가난한 오매가 짠해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서럽게 울고 가던 길.>

 고향 마을의 바위 하나, 나무 하나도 그에겐 소중한 존재였다. ‘허락 바위’가 관공서 치장석으로 끌려갔다 ‘自律(자율)’이란 한자를 몸에 새긴 채 고향 강변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이 컸다. 죽어가던 정자나무를 살리고, 떠내려간 강가 징검다리를 어느해 추석, 동네 사람들과 울력으로 놓았다. 마을 공동체를 일구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헌사도 가득하다.

 꽹과리 치며 굿판 맨 앞에 서서 상쇠 노릇을 하던 아버지. 그 뒤로 장구를 치던 판초형님과 징을 치던 최샌 양반, 그리고 소고를 하던 문수, 백식, 이환이 양반. 지게를 잘도 맞춰냈던 장기동 양반과 길홍이 당숙 이야기. “저마다의 재주와 솜씨로 서로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존재로 한데 얼려 살았던 그 아리땁던 마을”에 대한 헌사다.

 남에게 팔려버렸던 고향집. 그 고향집을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사서 안방 벽에 허름한 옷가지들 주렁 주렁 내걸었던 날, 그는 꿈을 실현한 자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환한 웃음을 그 에 함께 걸었다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고향집에 안착할 것이다. 고향 진뫼마을이 다시 일공동체, 밥공동체로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며….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일곱 자식들,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 진뫼마을 고향편지

김도수 2010. 11. 15. 11:52

http://blog.daum.net/jm117/13666341


일곱 자식들,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부모님께 바치는 ‘사랑비’ 세우던 날


ⓒ 전라도닷컴

“취직 되면 주말마다 술병 들고 진뫼마을로 달려오라”고 막내아들 보고 싶은 마음을 살아생전 그리 표현하던 내 어머니.


취직이 되고 보니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안계셨다. 어머니 그 말씀 가슴에 사무쳐 첫 봉급 타던 날 통장 하나 따로 만들어 속옷값을 넣었고 그 뒤로 줄곧 이건 술이라고, 이건 겨울외투라고, 이건 용돈이라고, 차곡차곡 돈을 넣었다. 그 돈으로 부모님 땀 흘리던 마을 앞 고추밭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빗돌 하나를 세웠다.


부모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았기에 ‘사랑비’라 이름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21년, 아버지 돌아가신 지 18년 되던, 2006년 5월8일이었다.


‘사랑비’ 세우던 그 날, 부모님께 쓴 편지를 비석 앞에서 읽었다. 


ⓒ전라도닷컴


아버지 어머니!


첫 봉급 타서 사 드리고 싶었던 술과 옷을 2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바칩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과 하늘만 보이는 땅 진뫼. 두메산골 강변마을에서 일곱 자식 낳아 기르느라 땀과 한숨과 눈물로 살았을 두 분 덕분에 저희 일곱 자식들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고생 많으셨다고, 애달프고 고마운 마음 올리려 여기 이 비를 세웁니다.


가난한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고생만 하다 가신 분이 어찌 아버지 어머니뿐이겠습니까? 하지만 새벽녘이면 쌀 독아지 득득 긁는 소리 그칠 날 없었던 궁핍한 살림살이에도 자식들에게 지게만큼은 물려주지 않겠다며 마을에서 처음으로 큰아들에게 검정 운동화에 교복을 입혀 순창읍내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해 줄줄이 자식들을 배움의 문턱에 들어서게 한 부모님의 교육열과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오늘 저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일요일이면 집에 다녀가는 자식들 손에 쥐어줄 차비가 없어서 맨발로 이 집 저 집 뛰어다니며 돈 꾸러 다니던 어머니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모내기 하고 돌아와 마루에서 밤새 누에똥 가리다 밀려오는 졸음 참지 못하고 그만 뜰방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이마에 툭 튀어나온 어머니의 상처, 한시도 잊고 산 적 없습니다. 자식들 가르치려고 술 한잔 돼지고기 한근 못 사 드시고 평생 해진 옷만 입고 사신 거 저희 일곱 자식들은 잘 압니다.


자식들은 비단길 걷게 하겠노라고 힘든 가시밭길 걸어오신 부모님의 깊은 뜻,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만, 여기 살아실 제 드리지 못한 사랑, 조그마한 비에 새겨 기리려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가난했지만 일곱 자식들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2006년 5월8일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


책소개

부모님과 고향을 향한 지극한 애정에서 발원한 글들이 한데 묶여 김도수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로 출간 되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산골마을에서 자식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한생애를 바쳤던 어머니의 헌신과 아버지의 개성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리 고부라지게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았던 ‘지게 세대’의 아버지들,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려고 논두렁길에서 허리 고부라지게 뜨거운 삶을 이고 나르던 ‘똬리 세대’의 어머니들을 대표하는 전형이다.[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김도수저자 : 김도수
저자 김도수는 1959년 전북 임실 덕치면 진뫼마을에서 출생. 2006년 《사람의 깊이》로 작품활동 시작. 산문집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2004), 시집 《진뫼로 간다》(푸른사상·2015)를 냈다.


목차

1장 사랑비 세운 뜻은
-월곡양반 월곡댁에게 사랑비를 바칩니다
-성 생일은 보리밥 묵는 여름철, 내 생일은 쌀밥 묵는 겨울철
-내 옷을 자근자근 깨물며 이를 잡아주던 아버지
-해필 보릴쌀 갈 때 너그 선생님이 와서…
-어머니 쌀자루 이고 가던 ‘진뫼 오리길’
-너그는 나 죽으먼 당장에 깡통 찬다
-울 아들 뭘 믹이서 군대 보낸다냐
-작두질 허는 것 봉게로 한심허다 한심혀
-어머니의 비자금 만들기
-울 아부지가 장에서 사 온 초록색 롱부츠
-니가 내 앞에 뗏짱을 두르다니…
-누에 굶이 죽을라고 환장을 히 부렀고만
-떠내려간 고무신, 아직도 망덕포구에 있을까
-넉 아부지 보고는 하루도 못 살아
-아버지의 구두 두 켤레
-용수네 어매, 존말로 헐 때 나와
-나 죽거든 햇빛 한번 쐬게 히 주라

2장 궁극의 맛, 추억의 맛
-껌 대신 씹던 삘기, 새콤달콤햇던 때왈
-여기서 뽕, 저기서 뽕, 보리밥 먹고 뽕뽕뽕
-입안에 침 고이는 오두개의 계절
-여름에는 대수리국에 보리밥 한덩이
-소풍 날 먹던 계란찜과 사이다
-차비를 아껴 생라면을 먹으며 걸어갔제
-아버지, 그 곶감 제가 빼 먹었습니다
-굴풋헐 때 한 그럭씩 더 묵어라
-겨울 밥상의 제왕은 싱건지였다
-아랫목 ‘스뎅밥그릇’과 난로 위 노란 ‘변또’

3장 마을 구석구석 추억은 방울방울
-수수만번도 더 걸었을 진뫼 오리길
-봇도랑 속으로 빠진 교과서
-가을 달빛 아래 볏짚 냄새
-비풍초똥팔삼을 내라
-‘지소 목욕탕’에선 고무신을 신으시오!
-너그 동네 지난 설에 닭 안 죽었냐?
-십 원어치 망원경 보여주던 ‘벗거지 양반네 가게’
-피(皮) 떨라면 돼아지 안 팔라네
-그때 그 논두렁깡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는 재산 절반이 소 아니었가디
-다 큰 녀석이 못줄 하나도 못잡네
-찬수네 콩밭에 물똥 두 개
-아, 아! 다름이 아니오라…

4장 정다운 산천 위대한 유산
-진뫼 자치공화국의...(하략)


서평 김도수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 고향을 잊고 사는 우리들에게 이제 막 당도한 잃어버린 낙원, 혹은 되찾아야 할 마을공동체에 관한 이야기
= 징글징글한 고향 사랑으로 고향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
= 이땅 어디에도 없을 ‘부모님 사랑비’에 깃든 마음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져/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

이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희귀한 기념비가 그의 고향마을 앞 고추밭 한 귀퉁이엔 세워져 있다. 바로 부모님께 바치는 ‘사랑비’다.
“취직 되면 주말마다 술병 들고 진뫼마을로 달려오라”고, 막내아들 보고 싶은 마음을 살아생전 그리 표현하던 어머니. 취직이 되고 보니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셨다. 어머니 그 말씀이 가슴에 사무쳐 첫 봉급 타던 날 통장 하나 따로 만들어 속옷 값을 넣었고 그 뒤로 줄곧 이건 술이라고, 이건 겨울외투라고, 이건 용돈이라고, 차곡차곡 돈을 모아 그 돈으로 부모님 땀 흘리던 마을 앞 고추밭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빗돌 하나를 세운 것.
그 비에 새긴 ‘손발톱 속에 낀 흙’은 두메산골에서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를 닳아치는 것으로 자식들을 건사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한생애와 헌신을 증거한다.

고향마을 앞 고추밭에 세운 ‘부모님 사랑비’
부모님과 고향을 향한 지극한 애정에서 발원한 글들이 한데 묶였다. 임실 덕치면 진뫼마을이 고향인 김도수(57)씨가 산문집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전라도닷컴)를 펴냈다. 2004년 펴낸 《섬진강 푸른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에서 보여준 고향사랑이 더 깊어졌다.
김도수라는 사람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고향을 징글징글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남에게 팔려버린 고향집을 12년 만에 되찾고 나서야 밤마다 진뫼마을 곳곳을 헤매던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람. 목요일 저녁이면 주말에 고향집으로 가지고 갈 보따리들을 현관에 가지런히 챙겨놓아야 비로소 안심되는 사람. 딸아들이 현관 초인종을 누르면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어보곤 ‘진뫼’라고 대답해야 문을 열어주는 사람. 오래 전에 사라진 고향 강변의 징검다리를 마을 울력으로 다시 놓은 사람. 관공서 표지석으로 끌려간 고향 강변의 ‘허락바위’를 되찾기 위해 간절한 민원편지를 쓴 끝에 결국 제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한 사람. 시름시름 앓던 마을 정자나무를 갖은 애를 써서 살려냈으며 그 정자나무에게 마침내 ‘풀꽃상’을 안긴 사람. 취직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용돈 드리는 통장을 만든 것이고 그 돈으로 생전에 부모님 땀 흘리던 밭두렁에 ‘사랑비’를 세워 주말마다 막걸리를 올리는 사람.

‘지게 세대’ 아버지와 ‘똬리 세대’ 어머니 이야기
이 책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산골마을에서 자식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한생애를 바쳤던 어머니의 헌신과 아버지의 개성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리 고부라지게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았던 ‘지게 세대’의 아버지들,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려고 논두렁길에서 허리 고부라지게 뜨거운 삶을 이고 나르던 ‘똬리 세대’의 어머니들을 대표하는 전형이다.
가냘픈 몸에 자식새끼들 건사하는 엄중한 짐을 짊어지고 살았던 어머니의 헌신은 늘 눈물굽이를 이룬다.
<기한 내에 내지 못한 육성회비 가지러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며 선생님께 혼날 생각에 엉엉 울며 가던 길. 회비를 못 만든 내 어머니가 몰무동까지 따라와 내 등 두드리며 “이번 달까지만 잘 참고 전디거라(견디거라). 어떡허든지 간에 내가 만들어 볼텅게 울지 말고. 니가 뭔 죄가 있겄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죄뿐이제…”라고 말 잇지 못하던 길. 육성회비가 없어 학교에서 쫓겨온 아들을 빈손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가 눈물 펑펑 쏟던 길. ‘오매가 뭔 죄가 있다요. 내 등짝에 지게 하나 맞춰줘 불먼 오매도 핀헐 턴디…’라고, 어린 맘에도 가난한 오매가 짠해서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서럽게 울고 가던 길.>
‘진뫼 오리길’에 얽힌 추억에도 ‘가난한 오매’의 초상은 새겨져 있다. 억척스러움과 한량 기질과 타고난 해학이 한데 버무려진 아버지의 일화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향’이란 꿈보따리를 내내 간직해온 삶
고향의 지도, 고향의 추억들은 그의 몸에 새겨진 것처럼 선명하다.
그에게로 이르면 강변의 바위들도 모두 제 삶의 이력과 이름을 얻는다.‘허락바위’가 관공서 치장석으로 끌려갔다‘自律(자율)’이란 한자를 몸에 새긴 채 고향 강변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시름시름 죽어가던 정자나무를 살리고, 떠내려간 징검다리를 어느 해 추석에 동네사람들과 울력으로 다시 놓고….
그는 추억이나 회억에 머물지 않고 현실 속에서 고향을 세워가려 애쓰는 자다.
마을공동체를 귀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도 각별하다.
생활의 달인들이자 저마다의 재주와 솜씨로 서로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존재로 한데 얼려 살았던 마을 사람들에 바치는 헌사가 지극하다.
마을 사람들이 모정에 한데 모여 후루룩 후루룩 국숫발 빨아올리며 합창을 하던 어느 날의 정경에도 “부모님들 한 분 두 분 평밭 가는 걸음 멈춰서고, 무심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살겠지. 오늘의 이 소리도 언젠가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리겠지”라고 사라져가는 일공동체, 밥공동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실어내는 그다. 남에게 팔려버렸던 고향집을 길고도 조마조마한 기다림 끝에 다시 사서 드디어 안방 벽에 허름한 옷가지들 주렁주렁 내걸던 날, 그는 꿈을 실현한 자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환한 웃음을 그 벽에 함께 걸었노라고 말한다.
“구멍 뚫린 양말, 해진 속옷, 낡은 운동화에 빛바랜 겉옷 걸쳐 입고 삽 들고 텃밭에 나가 씨앗 뿌리던 그 해 봄이 내겐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했던지.”
고향집 사서 돌아갈 꿈을 간직했던 헌옷 보따리.
“언젠가 저 보따리, 고향집 안방에 꼭 풀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던 나의 보따리처럼 누구든 꿈보따리 하나씩은 보듬고 살아가길.”
‘고향’이란 꿈보따리를 결코 내버리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건네는 축원이다.
















징검다리 / 배진성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 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 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 2013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957번지
제가 중학생 시절까지 살았던 집이 있는 곳입니다
바로 집 앞에 삼기천(섬진강으로 이어짐)이 있고
징검다리가 있고
호남고속도로가 있고
제가 태어난 월경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오랫동안 이 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갈 수 없었습니다
2013년 6월 3일
이제서야 겨우 용기를 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 입니다
이 글은 어머니의 마지막 글입니다
아마도 병원을 몰래 빠져 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그 농약이 온 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입니다
신음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 합니다
자식인 저는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사망 진단서 대신
시체 검안서를 읽으며 온 몸으로 울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2006년 2월 26일 20시 54분



2007년 04월분 전기요금 고지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께서 떠난 이후에도 전기는 한동안 들어왔나 봅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내려왔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은 막내딸 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딸막 이라고 하셨습니다



맨 앞에 보이는 슬라브 건물은 오랫동안 구멍가게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집도 없어서
빨래비누, 세수비누, 바늘, 동정, 검은고무줄, 애기고무즐, 이태리타울, 비누곽 등등
커다란 미원박스에 생활용품들을 담아 이고 다니시며 팔아야만 했던
도붓장수 였습니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마을 회관에 함께 지었던 구판장을 하다가
구판장을 못하게 되자
화장실 자리에 슬라브 집을 짓고 구멍가게를 하시다가
바로 그 가게 방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워 방치해 두었더니
대문은 멀쩡한데
집 안의 물건들은 누군가 다 털어가버렸습니다



빈 집에도 이렇게 새 이름표가 붙어 있습니다



고향집에서는 언제나 섬진강 물소리가 들립니다


옆집도 다 헐리고
쭈욱 늘어선 정자나무 무성한 놀이터였던 자리에
정자나무는 늙고 새로운 정자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슬라브집 지붕에서 본 정자 지붕입니다
구멍가게 지붕과 정자 지붕이 닿을 듯 가깝습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정자에는 텔레비젼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가게 건물 옆
아래채 벽이 위험해 보입니다
아래채 옆
창고 벽은 이미 무너져 있습니다
빨리 정리를 해야 할 듯 합니다



슬라브집 지붕에서 본 본채 지붕입니다
집터가 워낙 좁아서
마당이 너무 좁고
텃밭 없는 것이 흠입니다

아마도 저번 태풍에 창고 담장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가게 건물 내부 모습 입니다
앞에 보이는 작은 탁자는
가게방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는 술상입니다
주 안주는 김치와 기름소금이었습니다
주로 아버님께서 술을 마시던 술상입니다
저물녁이면 늘
아버님의 얼굴로 붉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술상은 돈이 되지 않았는지
고물장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가게 바닥에 전기요금 고지서가 있었습니다
형제들도 저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1년 넘게 전기 들어오다가 지쳐서 끊겼나봅니다



광주에 살고 계신 누나와 함께 집을 둘러보고 알아본 결과
아직도 집은 어머니 앞으로 있었습니다
누나와 형님들과 동생에게 연락하니 나에게 관리를 하라고 합니다
그냥 아무 조건 없이 내 앞으로 상속을 하고 내 마음대로 쓰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큰형님 앞으로 가야할 것 같아 큰형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냥 저에게 쓰라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 모임 총무인 막내와 의논한 결과
부모님을 위한 형제들 모임 통장으로 5백만원 입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형님들과 누나는 돈 받는 것을 극구 사양하시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저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3백만원 받고 누나가 팔겠다고 한 것을 내가 반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곡성군청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곡성군청에 갔습니다
곡성군 기차마을에서 장미축제가 있었습니다
22세기 약속의 땅 곡성군
기차마을이 있는 곡성군
심청이 마을과 섬진강이 있는 곡성군
여기에서 저는 다시 문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너무 멀리 돌아서 온 것 같습니다



등기소까지 들러 왔습니다
서류정리는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합니다



집터는 좁아도 최대한 활용한 집이기 때문에
안쪽 내부는 상당히 넓습니다
방이 4개 이상 나올 것입니다
천천히 수리할 생각 입니다
가게방은 심야전기 난방설비가 잘 되어 있어
전기공급만 재개되면 바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을 먼저 정리하고 도배해서 사용하면서
나머지도 고치면서 글을 쓸 생각 입니다



예전에는 저렇게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징검다리가 없어졌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창작 작업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빌려줄 생각 입니다
또 누가 압니까
이 작은 창작 작업실에서 세계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을지......,
주위 여건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인연을 꿈꾸어 봅니다

(전국에 있는 폐가들을 이용하여 무료 창작실이나 무료 쉼터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정자도 잘만 활용하면 좋을 듯 합니다
저 뒤에 보이는 분들은 누나와 매형 입니다
정자 바로 앞으로 삼기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흐르는 물도 많아서 징검다리가 있었습니다
징검다리 건너
뚝 너머에 우리집이 있었습니다
뚝을 넘으면 월경리 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어릴때부터 오리를 많이 길렀습니다
제 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징검다리의 주요 배경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뚝이 넘쳐 회관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불가피하게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다음에 혹시 사용하시고 싶은 분들은 저에게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곡성 창작실 상머슴 연락처  : 010-2693-5597



연어의 종착역


곡성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나도 이제는
연어알 같은 붉은 새끼를 낳아야겠다



※ 2018년 나는 이제 다시 이런 생각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