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 시인의 꿈삶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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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을 뚫고 한라산을 넘어간다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들고 나온다
폭설을 뚫고 다시 한라산을 넘어온다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
역사를 바꾸었고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
도화낭자를 만났고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가다
다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다리 난간에 있는
거울 속 사내를 들여다 본다
거울 속 사내도 함께 읽고 있다
"김태광 사랑해 섹스 많이 하자"
나는 하늘에서 온 사람
나는 하늘로 돌아갈 사람
나는 이제 곧 강이 될 사람
나는 다시 바다가 될 사람
나는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사람
나는 또다시 구름으로 떠돌 사람
그래도 나는 영원히
그대 손길을 잊지 못하는 사람
꽃이 너무 많다
잔이 너무 많다
독이 너무 많다
독을 마시기에 딱 좋은 금잔옥대
벌써 비워져 있다
나는 이제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병원에 가야만 한다. 내 피의 농도를 확인하고 항응고제인 와파린 용량을 조절해야만 한다. 심장판막을 기계판막으로 바꾼 사람들은 평생 항응고제를 먹어야만 뇌졸중에 걸리지 않는다. 상처가 나서 피가 밖으로 나오면 응고 되듯이 피가 기계판막을 만나면 응고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몸 속의 피를 두 배 정도 묽게 만들어야 혈전이 덜 생긴다고 한다. 그래도 완전히 혈전을 없앨수는 없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는 뇌졸중에 걸릴 확률이 많을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기계판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히 치과 치료나 내시경을 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복용중인 항응고제인 와파린을 며칠 먹지 않고 치료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지혈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 기계판막의 최대 단점인 혈전 생성에 의한 뇌졸중 발생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치과에 갈 때나 내시검 검사를 받으러 가야할 때 등등 다른과 진료를 받기 위해서도 반드시 심장내과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가야만 한다. 나는 이제 수시로 적당한 피의 농도를 맞추기 위해서 피검사를 하고 그에 따라 와파린 용량을 조절해야만 한다. 2mg의 흰 보름달을 먹거나 1mg의 반달을 먹거나 보름달과 반달을 함께 먹어야만 한다. 5mg의 핑크색 보름달도 있지만 나는 아직 핑크색 보름달은 한 알도 먹어보지 않았다.
내가 받은 오늘의 핵심 십계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와파린을 끊으면 안 되며 치과 치료 한 시간 전에 반드시 항생제를 복용하고 치과 치료를 받으라는 엄명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심내막염에 걸려 또 다시 위험해질 수 있으니 필히 명심하고 실천하라는 계시였다. 세균들은 이제 나의 심장 판막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패혈증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미리 미리 항생제를 복용하여 예방하라는 지시였다.
나의 세한도에 묽은 피로 낙관을 찍기 전에 세한도 나무들을 다시 한 번 본다. "<세한도>는 조선의 문인화 가운데 최고로 평가받는다. 소박하지만 깊은 그림과 조선 최고의 글씨가 어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집과 나무는 은유적이다. 네 그루의 나무 가운데 오른쪽 늙고 앙상한 소나무는 김정희, 그 옆의 전나무는 이상적, 왼쪽 전나무 두 그루는 초의선사와 제자 허련을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가운데 청나라풍 집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연행(베이징 방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
세한도에 등장하는 나무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이 살면서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넷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친구도 넷이면 만족하고 가족도 넷이면 만족하고 심장에도 넷이면 만족하고 방도 넷이면 만족하고 문도 넷이면 만족하고 길도 넷이면 만족하고 글자도 넷이면 만족하고 글도 넷이면 만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김규원 기자 등록 : 2020-12-31 16:42 수정 : 2021-01-09 10:42
<세한도>는 김정희가 어려웠던 제주 유배 시절 변함없이 그를 도운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공자는 설추위 이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 설추위 이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설추위 이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공자는 설추위 이후를 특별히 칭찬했다. 지금 그대(제자 이상적)가 나에게 이전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이후라고 덜한 것도 없다. 그래서 이전의 그대를 칭찬할 것이 없지만, 또한 이후의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 (1844년 김정희가 쓴 <세한도> 후기)
유배 시절 제자 이상적 위해 그린 그림
2020년 12월9일 문재인 대통령은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손창근 선생을 청와대로 초청해 감사 인사를 했다. 손 선생은 아버지 손세기 선생 때부터 소장해온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 등 300여 점의 문화재를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입구까지 나와 손창근 선생을 마중했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문 대통령은 손 선생에게 “신문에서 <세한도>를 두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고 표현했다. 제 안목으로도 <세한도>는 우리나라 국보 서화류 가운데 최고”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세한’이라는 말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국민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다. 국민께 큰 힘과 희망,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한도>는 1844년 제주 대정현에서 4년째 유배돼 있던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당파 싸움에 휘말려 제주에 유배된 자신을 변함없이 대하는 제자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발문(후기)을 썼다. 통역관인 이상적은 중국 연경(베이징)에까지 가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머나먼 제주의 김정희에게 보내주곤 했다. 김정희는 변치 않는 이상적의 우정을 ‘세한’이란 두 글자로 표현했다. 세한은 ‘설추위’인데, 설 전후 날씨가 가장 춥다고 해서 ‘한겨울, 맹추위’라는 뜻으로 쓰인다. 추사의 발문 가운데 “설추위 이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문장은 <논어> 자한편 27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려운 시절이 되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세한도>는 조선의 문인화 가운데 최고로 평가받는다. 소박하지만 깊은 그림과 조선 최고의 글씨가 어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집과 나무는 은유적이다. 네 그루의 나무 가운데 오른쪽 늙고 앙상한 소나무는 김정희, 그 옆의 전나무는 이상적, 왼쪽 전나무 두 그루는 초의선사와 제자 허련을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가운데 청나라풍 집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연행(베이징 방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정희는 조선 왕가 사위 집안의 종손으로 유복하게 자랐다.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이금)의 사위, 친아버지 김노경은 판서였다. 김정희 본인도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김정희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나, 7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돼 서울 월성위궁으로 왔다. 월성위궁은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면서 영조로부터 받은 집이다. 바로 북쪽으로 영조의 사저였던 창의궁이 있었다.
김정희가 삶의 대부분을 보낸 월성위궁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 일대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차도로 바뀌고 새 건물이 들어서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박승화 기자
당파싸움 휘말린 추사, 말년 9년간 유배
김정희 집안과 조선 왕가의 관계는 실록에 잘 나온다. 1774년 영조는 과거 합격자들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김정희의 양아버지인 김노영에게 “네가 사는 동네가 바로 나의 옛집과 같은 동네다. 내 경호부대(용호영)의 현악단(삼현)을 특별히 내려줄 테니 오늘 합격인사(유가)를 하라”고 말했다. 김노영은 영조의 사위 김한신의 손자였다. 이런 특별 대우는 순조(이공) 때까지 이어졌다. 1819년 과거의 논술(제술) 부문에서 김정희가 수석으로 합격하자, 순조도 김정희에게 음악을 내려주라고 지시했다. 순조는 “김한신의 제사를 모시는 자손이 합격했으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김한신의 부부묘에 비서(승지)를 보낼 테니 제사를 지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 왕가와의 특별한 관계도 김정희를 구원하지 못했다. 영·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당파싸움은 서인 중 노론 일당의 승리로 끝났고, 다시 일가 독재로 바뀌고 있었다. 불행히도 김정희 집안은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신안동) 김씨와 불화했다. 한 이유는 182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김정희가 비인 현감 김우명의 부정부패를 고발해 파직시킨 일이다. 이 일로 김우명이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었는데, 그가 신안동 김씨였다. 다른 이유는 김정희가 장동 김씨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풍양 조씨 조인영, 안동 권씨 권돈인 등과 가까운 친구였다는 점이다. 집안을 보호해주던 순조가 1834년 세상을 떠나자 장동 김씨의 눈 밖에 난 김정희는 유배됐다. 1840~1848년 제주 대정, 1851~1852년 함경도 북청 등 두 차례 9년 동안이었다. <세한도>도 이때 그렸다. 1844년 <세한도>를 선물받은 이상적은 그해 겨울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이 그림을 선보였고, 무려 16명의 중국 지식인이 이 그림에 시를 붙였다. 뒤에 오세창 등 3명이 글을 더해 원래 69.2㎝였던 이 그림의 가로 길이는 10m에 이르게 됐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손을 떠나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후지쓰카 지카시의 소유가 됐다. 그러나 서예가 손재형이 일본에까지 찾아가 몇 달 동안 팔 것을 간청했다. 그 정성에 감동한 후지쓰카는 돈을 받지 않고 조선에 돌려줬다. 손재형은 나중에 문화재 수집가인 손세기에게 <세한도>를 팔았고, 그의 아들 손창근 선생이 2020년 2월 정부에 기증했다.
일본인 소유 거쳐 2020년 2월 국가로
김정희가 살던 집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먼저 그가 태어나 자란 집(1786~1793)이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잘 보존돼 있다. 그가 유배 생활을 한 집(1840~1848)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복원돼 있다. 그가 두 번째 유배 뒤 자리잡은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1852~1856)도 복원돼 있다. 다만 삶의 대부분을 보낸 서울 종로구 적선동 월성위궁(1793~1840)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월성위궁 터는 현재 경복궁 서십자각 터 네거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2018년 서화 304점 기증할 땐 “손 아무개로 해 달라”
돈 벌 때도, 쓸 때도 가치 좇았던 ‘개성상인 핏줄’이 바탕
▎손창근 선생의 차남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세한도]를 관람하고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1844년 작, 국보 제180호)는 가로 70㎝, 세로 33.5㎝ 크기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직접 그린 서화의 크기가 대개 그렇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 전시된 [세한도]의 길이는 15m에 이른다. 특별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다. 176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청나라와 조선의 문사들이 쓴 감상평이 줄줄이 그림에 덧붙여져서 그렇다.
개성 출신 실업가 고(故) 손세기(1903~1983) 선생은 1970년대 [세한도]를 사들였다. 이후 그의 장남 손창근(91)이 2020년 1월 박물관에 기증하기까지 약 50년을 손세기-손창근 부자가 소유했다. 176년 세월의 3분의 1을 함께한 셈이다. 그런데도 손씨 부자는 감상평을 남길 종이를 덧대지 않았다. 손창근 선생은 [세한도] 기증에 앞서 2018년 서화 304점을 먼저 중앙박물관에 내놓을 때는 “손아무개 기증으로 해달라”면서 자신의 이름을 숨겼다.
이들 부자는 개성상인의 피를 잇는 기업인이다. 투자와 보상에 관한 관념이 누구보다도 확실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 이들이 한사코 무명(無名)을 고집했던 이유는 뭘까. 답을 찾기 위해 손창근 선생의 차남인 손성규(61)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간 언론에 나서길 꺼려왔던 손 선생이 아들에게 자신을 대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 [세한도]를 봤을 때가 언제였나?
“2019년 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정작 아버지가 소장하실 땐 집 금고에 보관하셔서 보기 어려웠다. 한번 꺼내서 보여주셨을 때 본 것이 전부다. 사실 내일(인터뷰 다음 날인 12월 15일) 지인들과 특별전을 관람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다.”
박물관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 기증을 기념해 특별전(‘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을 기획했다. 2020년 11월 24일부터 새해 1월 31일까지 약 두 달간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 계획이었다. 그러나 특별전을 연 지 2주일 만에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박물관 전체가 12월 8일부로 기약 없는 휴관에 들어갔다.
‘마지막 한 점’ 두고 고민한 1년 2개월
▎2020년 1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손창근(가운데) 선생과 함께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이면 아직 아버님께서 소장하실 때 아닌가?
“2005년 5월, 2010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70점, 135점을 박물관에 기탁하셨다. 이때 이미 [세한도]를 포함해 모든 컬렉션을 맡기셨기 때문에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었다. 2010년 아버지께서 경기도 용인의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기시면서 보관이 어려워진 사정도 있다.”
이때 기탁한 문화재 305점은 손세기·손창근 컬렉션으로 불린다. 손세기 선생과 장남 손창근이 대를 이어 수집한 작품들이어서다. [세한도] 외에도 추사의 걸작 [불이선란도], 최초 한글서적인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 등이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손창근 선생은 2018년 11월 21일, 구순을 맞아 [세한도]를 제외한 기탁품 304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 측은 이를 기념해 상설전시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하고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손 선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서 작품을 내놓는 소회를 밝혔다.
“한 점 한 점 정(情)도 있고, 한 점 한 점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 앞으로 내 물건에 대해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손 선생은 기념식에서 소회를 말하지 않을 생각도 했었다고 손 교수는 전한다. 손 교수는 “아버지께서 처음엔 말씀조차 안하신다고 했다”며 “‘당신께서 안하면 누가 하시겠냐’고 설득해서 나서신 것”이라고 돌이켰다. 손 선생은 이후 언론 인터뷰만큼은 한사코 사양했다.
손 선생은 많은 작품에 대한 애착을 내려놨지만, [세한도]에 대해선 내려놓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린 듯하다. 추사의 작품 중에서도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불리는 작품이었다. 손 선생은 2018년 기증 이후 1년 2개월여가 지난 2020년 1월 29일, 비로소 [세한도] 기증서에 서명했다.
父子이자 동지였던 손세기-손창근
▎고(故) 석포 손세기 선생이 1973년 서강대에 고서화 200점을 기증하면서 써 보냈던 기증서. / 사진:손성규
손 선생께서 [세한도]만큼은 고민을 더 하셨던 것 같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이건(세한도는) 가치가 조 단위’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아끼셨던 작품이다.”
가족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셨나?
“아버지의 기증 결심을 1월 중순에 알게 됐다. 2018년 때도 결심을 굳히고 나서 가족들에게 알렸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대기업 2, 3세들도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숱하게 싸우지 않나. 자식들하고 의논하기 어려우시지 않았을까. 원체 과묵한 분이시다. 혼자 고민하느라 힘드셨을 거다.”
손 선생이 홀로 판단했던 데는 가족에 대한 믿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그가 경기도 용인시 소재 산림 약 6600㎡(200만 평, 시가 약 1000억원)를 산림청에 기부할 때는 자녀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손 교수는 “2012년 때 그렇게 의견을 모아주니 ‘내가 하자고 하면 존중해주나보다’라고 믿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손 선생은 산림청에 ‘아들딸 등 가족도 손씨 뜻에 적극 동의했다’는 점을 함께 알려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번 결정에는 선생의 부인이자 손 교수 어머니께서도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2018년 기증 때 어머니께서 ‘왜 한 점(세한도)만 뺐느냐, 이럴 거면 나한테 달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손 선생은 지난 12월 8일 문화훈장 중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4년 문화재청이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을 시작한 이래 금관문화훈장 수훈은 처음이다. 하지만 이날 훈장은 손 선생의 자녀들이 대신 가서 받았다. 다음날인 9일엔 청와대 초청도 받았지만, 이것 역시 처음엔 사양할 마음이었다고 한다. ‘손 아무개 씨’의 진심으로 읽혔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멀어서 안 간다’고 하셨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자손들이라도 와달라고 하더라. 저도 ‘(참석은) 대통령직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설득 끝에 아버지께서 마음을 돌리셨다.”
청와대 방문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세한도] 복제본이 청와대에 있더라. 원래 만들면 안 되는 건데, 행사 담당자가 저한테 양해를 구하더라. 별달리 이야기는 안했지만, ‘이제 우리 아버지 것도 아닌데, 우리한테 미안할 필요가 없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 선생의 고서화 수집·기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손 선생의 부친 손세기 선생은 “간송미술관 특별전이 열리면 전시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서화 감상에 열중했다”(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고 할 정도로 고서화에 관심이 많았다. 손창근 선생도 아버지를 따라 1960년대부터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손세기 선생께서 개성 인삼 업계에서 ‘떠오르는 실업가’로 불렸다고 들었다. 인삼 재배·무역으로 축적한 자본이 밑천이 됐을까?
“6·25전쟁이 나면서 다 두고 부산으로 피란 가셨다. 이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광물사업으로 일어서셨다고 들었다. 아버지께서도 스위스계 상사에 수 년간 계시다가 나와서 할아버지와 사업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성함 ‘세’ 자에다 아버지 성함 ‘창’ 자를 써서 ‘세창물산’이라는 회사를 경영하셨다. 지금은 정리하셨다.”
상인의 감각과 수집가의 안목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에서 사진 촬영하는 손성규 교수 뒤로 추사 김정희의 말기 대표작 [진서완석루]가 전시돼 있다.
조부께선 어떤 계기로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나?
“간송 선생처럼 거창한 가치로 시작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미술품이 한 국가에 갖는 의미는 고민하셨던 것 같다. 1973년 조부께서 서강대에 작품 200점을 기증하셨을 당시 쓴 글에 그런 마음이 드러난다. 조부께서 쓰셨지만, 아버지 조언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번 고치셨다고 하더라. 아버지의 마음도 담겨있는 셈이다.”
손세기 선생이 당시 서강대에 써 보낸 기증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품들을 영구보존 하여주시고, 귀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1973년 1월 30일 석포 손세기’(사진2)
작품들은 그동안 어떻게 수집하셨나?
“두 분이서 같이 수집하셨다. 수집을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말씀하신 적 없다. 다만 개성 출신 분들이 고서화 수집에 관심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故) 최순우(1916~1984) 선생님과 교분이 깊었다. 이외에도 개성 출신인 고(故) 서성환(1924~2003)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고(故) 이회림(1917~2007) 동양제철화학그룹(현 OCI) 창업주 등도 고서화에 투자를 많이 하셨다. 호림미술관을 세운 고(故) 윤장섭(1922~2016) 성보화학·유화증권 회장은 아버지의 고종사촌이시기도 하다.”
좋은 작품 찾으러 두 분께서 발품을 많이 파셨을 것 같다.
“가회동 집에 살 때 두 분께서 인사동을 자주 다니셨다. 그동안 수집한 작품 대부분을 인사동에서 구하셨다. 당시 집에서 두 분이 ‘어느 작품이 좋더라, 뭘 살까’ 논의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나머지 형제분이나 저희 자녀들은 지식이 없어 말을 나누기 어려웠다. 나중에 특별전에서 조부님 안방에 걸려 있던 작품들을 보고 가치를 알았다.”
조부에 대한 다른 기억은 있나?
“제가 스물네 살일 때 돌아가셔서 희미하다.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경기도 광주에 묘소를 만들어두셨다. 예전 어르신들은 가실 곳 미리 만들어두시고 흐뭇해하지 않나. 할아버지께서도 묘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앉아계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개성사람에게 돈은 어떤 의미였을까?
“개성사람만큼 부에 대한 관념이 투철한 사람들이 없다. 이름 뒤에 상인이란 단어가 붙는 지역은 개성이 유일하다. 그런데 개성사람은 돈 버는 감각도 뛰어나지만, 돈 쓰는 방식도 범상치 않다. 과시하듯 쓰지 않는다. 굉장히 검소하신 분이 많다. 돈을 쓸 땐 가치 있는 데 쓰길 원한다. 그런 맥락에서 조부와 부친은 고서화에 투자하셨다고 생각한다.”
부친도 검소하신 편이었나?
“아버지는 지금도 이면지 쓰신다. 택시 탈 때도 목적지와 반대방향 도로에서 타는 것 용납 안하신다. 저도 부지불식 간 아버지를 따라할 때가 많다. 집안 내력이다. 자식한테 검소하게 살라고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삶을 보고, 묵묵히 배운다.”
“세한도, 이제 국민의 것”
▎[세한도]에는 조선의 문사 4명과 청나라 문사 16명의 감상평이 추사의 서화와 함께 수록돼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그렇게 살뜰히 모은 부를 모두 내려놓으셨다.
“할아버지께서 칠순에 서강대에 기부하셨고 팔순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팔순 때 용인 땅을 내놓으시고 2018년 구순 때 고서화 304점을 기부하셨다. 할아버지의 족적을 지켜보며 계획해 오셨던 것 같다.”
연세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손 교수와 함께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측은 손세기-손창근 기증자의 후손인 손 교수를 위해 [세한도] 특별전시실과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두 곳을 공개해주었다.
손 교수와 함게 1시간여 동안 전시실들을 둘러봤다. 세한도 특별전 전시실은 손 교수도 첫 방문이었다. 작품들을 하나씩 곱씹던 손 교수는 이따금 “옛날 할아버지 안방에서 본 것”이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손창근 선생 소유의 미술품은 없다. 아들로서 아쉬운 마음은 없을까. 작품 관람을 끝낸 손 교수에게 물었다.
“1844년에 세한도가 세상에 나왔다. 조부께서 1970년대에 사셨고, 부친께서 2020년에 내놨다. 176년 역사 중 약 50년이다. 이 작품이 앞으로 100년, 아니 1000년 갈지 모르는데, 50년이면 짧은 시간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가족이 잠깐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국민의 것이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한자 뜻과 음] 길 장, 말 무, 서로 상, 잊을 망. [풀이] 길이 서로 잊지 말자. 중국 섬서성 순화에서 출토된 瓦當(와당)에 새겨진 말.
장무상망은 長(길 장) 毋(말 무.없다) 相(서로 상) 忘(잊을 망)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말자.' 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이 청나라의 귀한 서적을 구해서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린 세한도에 인장으로 찍힌 글이다.
'생자필멸'이라는 말처럼 살아있는 것은 모두 쓰러지고 결국에는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나 추사는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주면서 요즘 말로 가볍게 '영원불멸'이라 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안으로 다스려 '장무상망' 이라 표현했다. 그래서 추사의 그 애절함이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더 흔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외로울 때 힘이 되어줄 사람, '장무상망'의 그러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몇 명이나 있는지요?
세상을 살면서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두어 명은 있어야 "내 인생은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한도(歲寒圖)와 장무상망(長毋相忘)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쓸쓸한 초가집 한 채와 고목(古木)이 된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가 한 겨울 추위에 떨고 있는 그림이 있다. 바로 다름아닌 세한도(歲寒圖)다. 더욱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 인장은 그림의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감동시킨다. 조선조 문인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를 할 때 제자 蕅船 이상적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창문 하나가 있는 소박한 시골 초가집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우정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좌우 대칭을 이루는 그림은 얼듯 보기에는 단순하다. 금방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한도의 그림이 주는 의미가 심오하다는데 있다. 이 정도는 금방 따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한도’가 시대를 뛰어넘어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단순히 ‘눈에 보여 지는 풍경’ 보다 이 작품의 배경에 담긴 ‘심오한 의미’와 ‘고귀한 정신’ 때문이다.
바로 다름 아닌 신의, 의리와 절개다. 오랜 제주도 유배 기간이 길러지면서 가깝게 지내던 귀우(貴友)도 떠나고 사랑하는 아내도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갈수록 서울 소식도 멀어지고 오로지 책을 벗 삼아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역관으로 중국을 다니면서도 귀한 금석문이나 책을 구해 스승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가끔 제주를 오가며 유배 신세에 처해 있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제자 이상적(李迪)뿐이었다. 그런 제자에게 보답의 의미로 그려 준 것이 바로 세한도다. 아무리 제자라고해도 수 천리를 오가며 책 심부름을 하고 편지를 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추사는 두 사람 관계를 변하지 소나무와 잣나무로 비유했고, 세한 울타리 집으로 화답한 것이다.
'세한삼우(歲寒三友)'는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매화(梅), 소나무(松, 대나무(竹)를 지칭한 것이다. 엄동설한 한 겨울에도 본연의 자태인 푸르름을 잃지 않아 선비들의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되었다.‘세한’은 공자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온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조(知松柏之凋)’ 즉 ‘추운 계절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는 뜻이다. 조선 3대 천재로 꼽히고, 승승장구하던 추사는 55세 늦은 나이에 절해고도에 유배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끊었지만 제자 이상적만은 달랐다.
노송(老松)은 추사 자신이요, 제자 이상적은 끝까지 푸르름을 간직한 잣나무였다. 당시 59세의 환갑을 넘긴 추사가 처한 물리적, 신체적, 정신적 고달픔과 정서의 메마름을 보여주듯 건조한 먹과 거친 필선(갈필)으로 표현했다. 그림에 담긴 주제(상황)와 표현(그림)법이 어우러져 고도의 예술적 에너지를 함축한 작품이라고 볼수 있다. 특히 그림의 오른 쪽 아래에 추사는 붉은 낙관(인장)을 찍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간절한 소망을 뜻한 것이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學藝)일치의 완벽한 경지를 지향했다. 깊은 의미와 정신이 녹아내리는 완벽성을 나타낸 것이다.
더욱이 그림을 많이 남기지 않은 추사 김정희는 귀양지인 제주도에서 특별한 의미로 자신의 심경을 나타내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린 것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곧 바로 사라져가고 힘(權力)이 없어지고 나이가 들면 주위사람들이 쉽게 떠나가는 현대판 인간관계를 다시금 재조명케 하는 걸작이다. 걸작은 단순히 쌈박하게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영원히 남는 뭉클함이 있어야 한다.
후한서에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라는 구절이 있다.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칠 때라야 강한 풀을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한민국 국보 제180호 완당 세한도 (阮堂歲寒圖)
지정일 : 1974.12.31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 ‘세한도(歲寒圖)’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서예(書藝)의 대가(大家)로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할 때 그린 그림이다.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노경(金魯慶)의 아들로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필체(筆體)를 만들었으며 고증학(考證學)·금석학(金石學)에 밝았고 시문(詩文)·묵화(墨畵)에도 아주 능하였으며 추사(秋史) 외에 완당(阮堂)·예당(禮堂) 등 200여 가지의 호(號)를 사용해 낙관(落款)하였다.
이 ‘세한도(歲寒圖)’는 갈필(渴筆)의 까실까실한 붓끝으로 고담(枯淡)한 필선(筆線)을 구사하면서 간결한 구성으로 송백(松栢)과 정우(亭宇)를 표현하였고 한림(寒林)이나 고목(枯木)이 풍겨주는 스산한 운치가 세한(歲寒)의 분위기와 함께 조용히 청절(淸節)을 풍겨주는 듯한데 사실상 이 그림의 조형미(造形美)는 그런 시정적(詩情的)인 맛이 아니라 필선(筆線)과 먹빛의 변화에서 나오는 문기(文氣)에 있는 것인데 이 그림은 김정희(金正喜)가 귀양살이하던 59세 때(1844) 당시 청나라에 가 있던 역관(譯官)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4-1865)에게 그가 남의 눈을 개의치 않고 사제간(師弟間)의 의리를 지킨 것에 감탄하여 그려 준 것인데 당시의 심정을 그린 장문(長文)의 자제(自題)가 붙어 있다.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 완당(藕船是賞, 阮堂)'이라는 관기(款記)의 글씨 크기와 방향, 그리고 '정희(正喜)'와 '완당(阮堂)'이라는 도인(圖印)이 세심한 조형(造形)을 이루어 배치(配置)되었다.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세로 23센티미터, 가로 108센티미터의 족자 형식을 빌려 그린 문인화이다. 긴 화면에 단지 쓰러져 가는 오막집과 그 좌우에 소나무·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을 뿐, 여백의 텅 빈 화면을 보노라면 한 겨울 추위가 매섭게 전해져 뼛속까지 시리다. 화면 오른쪽에는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란 관지(款識)에 정희(正喜)·완당(阮堂)이라고 새긴 낙관이 찍혀 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용비늘이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가 담백하고도 고담(古淡)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한도는 지극히 절제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고졸(高拙)한 정신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병제(竝題)에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듯이 황량한 세상에 지조 높은 선비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귀양살이하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 간의 끈끈한 사제(師弟)의 정이 흠뻑 배어 있는데, 문인화의 인위적인 기교를 훌훌 털어 버려 선비의 맑은 문기(文氣)가 넘쳐흐른다.
아 아, 세상에 날 찾는 이 없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며 서화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추사(秋史)이다. 증조부되는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영조의 첫째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해 열 셋에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부마(駙馬)가 된 월성위는 예산 오석산 근처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의 '추사고택(秋史古宅)'이 바로 그 집이다.
김정희는 증조 할머니가 옹주였으니 집안의 범절이나 내력이야 더 할 나위 없는 명문가의 자손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청나라를 왕래하며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등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금석문(金石文)의 감식법과 서법(書法)을 익혔다.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阮堂)'은 당시 옹방강에게서 '해동 제일의 문장'이란 칭찬과 함께 지어 받은 것이다. 또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도 힘써 신라 진흥왕이 세운 북한산 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는 쾌거도 올렸다.
1819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예조 참의, 병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면서 순탄한 벼슬길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부친이 비인 현감(현재 충남 서천 소재)을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靜浦)에 또다시 유배, 안치되었다. 아버지인 김노경은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김정희는 영의정이며 친구였던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은 모면했으나 제주도 서쪽 백 리 거리의 외딴 집에서 8년간이나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 세월 동안 김정희는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해서 마침내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어냈다.
이처럼 절대 고독과 맞대면해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정희에게 마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일까? 거센 바람과 무서운 파도가 돛단배를 집어삼킬 듯한 험난한 뱃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주도를 찾아와 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와 역관(譯官) 이상적이었다.
세한도를 낳게 한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으로 만학(晩學)과 대운(大雲)이란 책을 중국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 주었다. 그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 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내 준다는 것은 여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내 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랭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켜내었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 주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송백(松栢)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마음을 담은 발문(跋文)을 특유의 추사체(秋史體)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지난 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책을 보내주더니, 금년에 또 우경(藕耕)과 문편(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 책은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닌데 천만 리 먼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사서 나에게 얻어 보게 했으니 한때의 일이 아니다.
세상 인심은 도도(滔滔)하여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마음과 힘을 허비하면서 권세와 이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내 바다를 건너 초췌하고 여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세상에서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을 일컬어 태사공[司馬遷]은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을 함께 갖은 사람이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제가 소원해진다'하였다.
그대도 역시 도도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인데, 스스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 밖으로 빠져나와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으니,(그렇다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송백이 사계절이 없이 시들지 않고 날씨가 차가워지기 전에도 송백이요,
차가워 진 후에도 송백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특히 날씨가 차가워진 후를 칭송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있을 적에 그대를 위해 잘해 준 것도 없고, 뒤(유배시)에도 덜 생각해 준 것도 없다. 그런 연유로 전(권세가 있을 때)에 그대를 칭찬한 적이 없는데, 그대는 훗날 성인의 칭찬을 받으려 한 것인가.
성인이 특히 칭송하기를 시들지 않는 정조와 굳은 절개뿐만 아니라 날씨가 추워진 때가 되어야 송백의 정조와 절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호라, 한나라 서경[洛陽]에 순박하고 후덕한 인심이 있었을 적엔 급암(汲 )과 정당시(鄭當時)같은 어진 사람도 그 빈객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으며, 하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문(榜文)을 붙인 일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한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2년만에 풀려났다. 그 후로는 안동 김씨의 계속된 세도 때문에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김정희는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더욱 몰두하더니 71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 고택 왼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묘 앞쪽에는 밑동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비스듬히 구부러진 반송이 서 있는데, 혼탁한 세태에 김정희의 예술 정신을 청아하게 일깨우는 듯 하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그 후 북경으로 가 그곳의 학자들에게 두루 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장악진(章岳鎭)·조진조(趙振祚)등 16명의 명사들은 앞을 다투어 그림을 칭찬하는 찬시(贊詩)를 지어 그림 끝에 붙였고, 그 후 김정희의 문하생이던 김석준(金奭準)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그림에 대한 감상문) 등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두루마리 형태로 완성되었다.
국보를 찾아왔노라
이상적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가 어떻게 그 후 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의 손에 세한도가 들어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후지즈카는 북경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살았다. 그리고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 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淸朝文化東傳의 硏究(청조문화동전의 연구)」(원제: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 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끊질 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그 사람이다. 세한도가 후지즈카의 수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손재형은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그림을 양보해 달라고 매달렸다.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 수장가요, 대 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골동사에 굵은 필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에 소재한 멋들어진 한옥 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해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하였다.
일제 때, 고려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만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겸재(謙齋)의 화첩까지 양가 댁의 불쏘시개로 쓰이기 예사였고,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가의 그림도 벽지로 둔갑한 채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어 버렸다.
어두웠던 시절, 조상의 예술 혼과 기상이 신광을 찌르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우리의 자긍심을 부추 키는데는 그 시대, 몇 안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손재형의 집념은 민족문화재수호의 귀감이기도 하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찾아 동경으로 달려갔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어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死地)였다.
손재형은 물어 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내고는,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이만 저만이 아님을 잘 아는 손재형인지라 장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 문안을 했다.
말이 병 문안이지 사실은 세한도를 문안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목적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매일 눈만 뜨면 찾아가 인사를 하기를 일주일, 수상히 여긴 후지즈카가 드디어 목적을 물었다.
"어쩐 일로 매일 찾아오는 거요?"
기회를 엿보던 손재형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무겁게 털어놓았다. 얼굴에는 비장한 의지가 감돌았다.
"세한도를 양보해 주십시오."
"뭐요? 그 그림은 내가 정당하게 입수한 물건이요.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오. 당장 나가시오."
노기가 가득 찬 얼굴로 후지즈카가 일어나 앉았다. 눈빛에는 추호의 양도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재형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손재형은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 집을 나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스럽게 들리고 거리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손재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지독한 상황까지도 각오한 그였다.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찾아가 세한도를 양도해 달라고 했다. 그러기를 백 여일 가까이,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손재형의 열성에 후지즈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소. 하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을 하겠소."
긴장한 손재형을 후지즈카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거든 그림을 당신에게 보내 주라고 하리라.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 주시오."
드디어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동경의 전세는 날이 다르게 험악해져 갔다. 그 와중에 세한도가 온전히 살아 남을 지 의심스러웠다. 한번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몰려왔다.
"후지즈카 상, 기왕에 넘겨주시기로 결심했다면 당장 넘겨주시지요."
그러자 후지즈카는 단호하고도 매정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림없는 말,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물러가시오."
손재형은 다시 후지즈카의 집을 물러 나왔다. 그는 마지막 조율을 가다듬은 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후지즈카에게 문전 축객을 당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생각하고, 10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갔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굳게 닫혔던 후지즈카의 집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당신의 열성에 내가 졌소. 가져가시오."
김정희의 혼이 배인 명품이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손재형이 얼마의 돈을 주고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를 입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만약에 그때 세한도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랑스런 국보 한 점을 영원히 잃을 뻔하였다.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그 즉시 오세창에게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오세창은 즉석에서 배관기를 써 주었다.
"전화(戰禍)를 무릅쓰고 사지(死地)에 들어 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 왔노라."
바람처럼 옮아간 세한도
그러나, 세상 물건에는 모두가 때에 따라 주인이 있는 법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 끝에 되 찾아온 세한도도 그후 너무나 어이 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을 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더니, 1947년에는 진도 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 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일약 정치가로 활약했다.
1958년 민의원 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 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화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만큼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 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개성 사람, 이근태(李根泰). 그는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 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세한도를 비롯한 고서화가 한 뭉치나 들려 있었다.
이근태는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고 또 들고 온 고서화 모두가 국보급 미술품이라 남의 돈을 빌려다 주면서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저당 잡힌 고서화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 등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들이다.
그런데 손재형은 첫 달부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집착했던 그에게 권력은 그토록 달콤했던가? 이근태는 몇 달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꾸었다. 하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이었다. 몇 번이고 손재형을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으나 워낙 바쁜 의원님이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다 남의 이자 돈을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살던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의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하지만 그 그림들 역시 남의 이자 돈을 막는 볼모로 모두 팔려 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재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는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수장하고 있다.
이상적에 이어 후지즈카를 거쳐 손재형, 손세기로 바람처럼 옮아다닌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일,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국보 제 180호로 지정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