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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an 26. 2021

시장과 제주작가

- 강산 시인의 꿈삶글 5





시장과 제주작가

- 강산 시인의 꿈삶글 5





시장을 쓰기 시작한다. 시장은 시의 문장이고 시의 마당이며 시의 장터이다. 시장(詩章), 시와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시장(詩場), 시의 마당을 쓸기 시작한다. 시장(市場), 시의 시장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많은 시장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와 언어에 대하여 생각하고, 시의 언어에 대하여 생각하고, 시와 문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시의 문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시가 잠시 머무는 곳을 생각하고, 시의 마당을 생각하고, 시가 태어나는 자궁을 생각하고, 시의 장소를 생각하고, 시가 나고 죽는 길을 생각하고, 시인의 삶과 꿈을 생각하고, 시인들의 마당과 시인들의 장터를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에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시인으로 실지 못했다. 이제 나는 비로소 시인으로 살기 시작한다. 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시와 문장을 써야만 한다. 나만의 시와 나만의 문장을 써야만 한다. 나만의 색을 찾아서 나만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나는 우선 시의 마당을 쓸고 시와 장소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 시의 마당에는 고향이 있었다. 내 시의 출발은 고향이었다. 기차마을 곡성이었다. 연어의 종착역이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시를 쓰고 있다. 고향에서 쓰는 시와 타향에서 쓰는 시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고향과 타향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일까.     


나는 이제 시의 시장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시의 올바른 유통시장에 대하여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시인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곡성역, 서울역, 백마역, 여수역, 인천역을 지나 바다 건너에서 보니 이제는 조금 보인다.     


그리고 나는 더 많은 생각을 한다. 앞으로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높이 보아야만 한다. 시에 대하여 생각하고 문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시장에 대하여 생각한다. 시의 마당을 다시 쓸고 시의 시장을 다시 열면서 나는 이렇게 다시 한 번 간절히 시인으로 살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아마도 끝까지 시인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20년 넘게 유배생활을 하였다. 제주도보다 더 먼 이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유배자가 되었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바다만 바라보며 살았다. 20년 넘게 꿈만 꾸며 살았다. 하늘만 보며 살았다. 위리안치 속에서도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가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를 세상으로 옮겨놓고 싶었다. 이제 나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세상 속으로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먼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 이어도종합해양기지를 지나가고 있다. 마라도를 지나가고 있다. 가파도를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제 막 송악산에 도착했다. 산방산이 아름다워 보였다. 산방산 쪽으로 간다. 사계해안도로가 아름답다. 바다에 떠 있는 형제섬도 좋다. 수반 위에 올려진 수석을 닮았다. 산방산에 올라가 산방굴사에서 보니 저 멀리 이어도가 보인다. 산방산 정상에 올라 좌정하니 고향이 보인다. 월라봉쪽으로 떠오르는 달빛이 참으로 아름답다. 지리산과 설악산을 넘어, 백두산을 넘어 몽고를 넘어 인도로 가는 순례길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산방산과 월라봉 사이 화순에서 좀 쉬어가기로 한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를 옮겨놓기 시작한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어도를 현실로 옮겨놓으니 이어도공화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내가 옮기고 내가 만들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한다.


이어도공화국에서 보니 제주도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많이 보인다. 아름다운 시인들도 많고 아름다운 작가들도 참 많다. 아름다운 예술가들도 많고 아름다운 농부들도 많고 가슴이 따뜻하고 요망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꿈속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해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 같은 길을 동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아름다운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며 동행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아직은 나의 유배생활 또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조심조심 홀로 순례를 시작한다. 







제주작가 68(봄호)



깊은 밤 산책     



깊은 밤 산책을 나간다   


개 짖는 소리 멀어지고

지상의 불빛 모두 사라진다

계곡 물소리가 나를 감싼다

물소리를 짚고 가는 지팡이 소리에

하늘에는 젖은 별빛들이 피어나고

월라봉에서는 노루가 노루를 부른다         


유반석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박수기정에서 

항아가 내려와 샘물 마시는 소리 들린다            


‘김광종영세불망비’ 앞에 앉아서 나는

도깨비들의 춤을 보며 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휴대폰 메모장에 물소리와 별빛을 받아 적고

다시 하늘을 보니

그 많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다시 별빛을 찾아서 계곡으로 돌아가는데

별들은 보이지 않고 동백꽃들만 길가에 내려앉아

깊고도 푸른 물소리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탐라국 입춘 굿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눈송이인지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할망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천지왕 허락 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이 없는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치고 꽹과리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대불처럼 몰려온다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신명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 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제주작가 69(여름호)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심재산방     


심재산방에서 보니

나와 식물이 하나로 보인다

마음을 굶겨보니

몸의 속까지 다 보인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있고

사람의 뿌리는 가슴 속에 있다

나무의 뿌리는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고

사람의 뿌리는 알뿌리처럼 둥그렇다

알뿌리 같은 심장이 땅에 묻혀도

나의 가슴에는 피가 잘 돌아

나의 생각은 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랄 것만 같다

너덜너덜한 대동맥판막, 망가진 심장도

땅 속에서는 뿌리를 잘 내릴 것만 같다      


좌망정에 앉으니

계곡에 숨겨놓은 배도 보이고

늪에 감추어둔 그물도 보인다

월라봉에서 날아오는 학의 긴 다리도 보이고

바다로 날아가는 오리의 짧은 다리도 보인다

산방산에 눌러앉은 구름도 보이고

강정으로 실려 가는 마징가 같은 케이슨도 보인다

심재산방 좌망정에 앉아 눈을 감으니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천 년의 강물에 빈 배 하나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빈 배 가득 하늘이 실려 간다          



제주작가 70(가을호)



한라산 어욱  

   


한라산 어욱은 새가 되지 못하여

봄부터 베를 짜기 시작한다

초가지붕에도 오르지 못하여

베옷 한 벌 장만하기 시작한다     


천둥 번개 요란한 여름에도

베틀소리 멈추지 않는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만가(輓歌)도 없이 숨 죽여 가신 님들          


해 좋은 날, 어욱꽃 마을까지 내려온다

수의 한 벌 챙겨들고

요령소리 앞세우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잊지 않고 찾아온다          


무너진 돌담 하나 대답이 없어

빈 상여 소리에

빈 수의 한 벌 흩어져 날아가고

갈 곳 잃은 바람의 곡비

온몸이 휘청거린다          


뼈만 남은 한라산 억새

흰 눈 내려 헛묘에 묻히고

한라산 자락에는 해마다

메김소리 가득한 오름 하나씩 늘어난다               



* 어욱 : 억새의 제주도 말

* 새 : 제주에서는 볏짚 대신 새로 초가지붕을 만들었다



종석산 정읍사     



종석산에서 정읍사(井邑詞) 

노래소리 들린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

범종소리 들린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모든 것이 선(禪) 아닌 것이 없다

내 가슴 속으로 들려오는

달빛 종소리, 요것은 도대체 뭣이다냐     


옥정호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발자국소리다냐

참나무 숲으로 숨어드는 밤의 숨소리다냐

참나무 그늘을 덮고 잠든 산삼들의 잠꼬대다냐

홀로 달아오른 산삼 열매들의 후끈거림이다냐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떠돌았던 장돌뱅이였구나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보지 못한 청맹과니였구나     


제주공항에서 여수공항은 바로 코 앞 이었구나

이륙하고 추자도가 보이더니 바로 착륙이구나

여수에 도착한 나비는 연어의 종착역을 지나

옥정호가 있는 숲으로 날아가는 구나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 참으로 먼 세월이 한 순간이구나

종석산에서는 정읍사(井邑詞) 후렴소리 들리고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는 운판소리 들려오는데

나의 지친 가슴 속에서 환하게,

꿈꾸던 숲에서 드디어 산삼 꽃이 함께 영그는구나               



제주작가 71(겨울호)


달문moon  


   

달은 문이다 문은 열리고 달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달은 달(達)이고 문은 문(文)이다     


가슴을 열고 반월문을 바꾸니 달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가슴에 묻은 사람들 숨소리 들린다     


달이 자꾸만 문을 기웃거린다 나는 아직 안토니오 가우디를 모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도 모른다 달빛으로 백 년의 꿈을 심는다     


동쪽에는 평화공원이 있고 서쪽에는 평화학교가 있다 생명학교와 함께 있다 그 평생학교에서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가끔은 저 멀리 이어도와 서천꽃밭이 보인다     


평생 베옷을 만드는 갈대와 억새가 있다 평생 곡비 노릇을 하는 새들이 있다 백 년을 날려 보내고 백 년을 울어야 비로소 하늘문에 닿을 수 있을까     


수의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떠난 영혼들을 위하여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달은 밤새 메밀밭 백비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파도는 밤낮으로 절벽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그렇게 백 년을 써야만 주춧돌 하나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     


폭낭과 워싱턴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야자수 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키 큰 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폭낭 쪽으로 해가 기울어진다 넓은 폭낭 그림자가 홀쭉한 야자수를 안아준다     


백 년의 꿈이 낳은 폭낭 가지에 달문이 열린다 초승달 살이 환하게 오르고 있다          


* 폭낭 : 팽나무를 제주도 사람들은 폭낭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무등이왓 사람들     



큰넓궤     


평화로 가는 길에 붉은 상사화

무리지어 피어난다

추석날 오후 큰넓궤 찾아간다

큰넓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해 추석을 어떻게 지냈을까

아, 큰넓궤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의 눈동자

길에서 나를 쏟아버린 어머니의 자궁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싸늘한 정신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볼레오름까지 올라갔던 사람들

그들을 두 달 동안 지켜주었던

입구의 종나무

그 종나무와 어울려 살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홍단풍은 봄부터 붉고

청단풍은 가을에도 푸르다

아, 입구가 너무 좁다

거꾸로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거꾸로 들어간다

흙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눈동자 속으로, 자궁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멀리서 나팔소리 들려오고

어머니의 심장소리 들린다

어둠이 양수처럼 나를 감싼다 이 곳에서

붉은 상사화 지는 것도 잊은 채

두어 달 어머니와 함께 종나무로 살다가 나는,     


발자국 밥그릇     


눈이 온다 하늘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눈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하늘이 온다

눈이 쌓인다

하늘이 내려 쌓인다

큰일이다 큰일났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려거든

더 빨리 펑펑 쏟아 부어라

우리들이 벗어놓은

발자국 가득 쌓여 넘쳐버려라

거꾸로 벗어놓은 발자국이

차라리 하늘이 되어버려라

큰넓궤에서부터 따라오는 발자국이

자꾸만 우리들의 목숨을 따라오고 있다

왕오름을 지나고

이스렁오름을 지나고

어스렁오름을 지나고

산짐승도 내려가 텅 빈 볼레오름에 다 오도록

우리들의 발자국은 하늘이 되지 못하는구나

고봉밥이 되지 못하는구나

발자국 밥그릇에 하늘을 다 담지 못하는구나

아, 존자암의 염불소리도 

부처님께 올리는 삼시 세 때 공양도

우리들의 발자국 그릇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의 눈꽃만 지상에 피어나

참나무들의 겨우살이 열매 눈빛이 더욱 붉어지더니

덜 채워진 하늘이 결국 붉게 엎어지고 마는구나     


헛묘     


정방폭포로 간다 정방폭포 앞바다로 간다 태평양으로 간다 혹시, 아는 사람이 뼈 한 조각이라도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간다 동광리로 간다 무등이왓으로 간다 삼밭구석으로 간다 혹시, 살 한 점이라도 붙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또 다시 낭떠러지 위로 간다 절벽의 바위를 뒤진다 폭포 아래 바위를 뒤지고 물속을 뒤지고 바다 속을 뒤지고 바다 속 물고기들을 뒤지고 물고기 뱃속을 뒤진다 혹시, 숨결 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허공 속을 뒤진다 더 높은 하늘을 뒤진다 구름 속을 뒤진다 빗방을 속을 뒤진다     


뒤지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지상을 떠난 뒤에도, 집 앞으로 몰려든다 죽어서도 몸을 찾지 못한 영혼들이 작은 단서라도 얻어 들으려고 찾아든다 이렇게 찾아와 밤새 이야기하는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목백일홍 이라고 말한다 백일홍 나무라고 말한다 배롱나무라고 말한다 그 곁에 있는 충혼묘지에도 백일기도하는 붉은 꽃이 있다 죽어서도 영혼을 찾지 못한 몸들이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순례를 멈출 수 없다               



배진성 1988년 『문학사상』『동아일보』등단. 시집 『땅의 뿌리 그 깊은 속』,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길 끝에 서 있는 길』, 『꿈섬』.전자우편 : yeardo@naver.com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5. 물이 불을 만든다

2018.02.20. 05:29


살다 보면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다. 꽃 피는 날도 있고 꽃 지는 날도 있다. 수선화가 만발하고 매화가 피어난다. 나는 오늘도 마라도와 가파도를 본다. 벌써 20년도 넘게 보고 있다. 화순항이 많이 바뀌었다. 집요하게 화순 주민들을 설득하던 해군은 강정으로 갔다. 해녀들의 잠수병을 치료해주던 군함도 떠났다. 화순항에 해군기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여론을 조성하고 특히 해녀들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공을 들였었다. 군함에는 고압산소를 이용한 잠수병 치료장비인 챔버라는 기계가 있었다. 나도 한 번 초청받아 직접 챔버를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생김새가 꼭 잠수함처럼 생겼는데 그 속에 들어가 치료 받은 해녀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그런 끈질긴  회유에도 화순 주민들은 끝끝내 반대를 했고 결국  해군은 어쩔 수 없이 화순에서 철수했다. 그렇게 해군기지 건설을 온 몸으로은 막았지만 요즘에는 해경부두를 만들고 있다. 내가 좋아했던 갈대숲은 사라지고 화순항은 오늘도 공사중이다. 화순금모래해수욕장은 쪼그라들고 테트라포드 공장이 되었다.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출근을 하면 먼저 옥상에 올라가 마라도와 가파도와 형제섬에게 안부인사를 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요즘에는 사랑하는 현성이가 마라도에서 군 복무 중이라서 더욱 각별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그리고 마라도 너머에 있을 이어도를 생각한다. 나는 3년만 다니고 그만 두려던 직장에서 30년도 넘게 근무하고 있다. 세월이 참 빠르다. 어쩌면 나는 저 푸른 바다에게 붙들려 지금껐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함민복 시인은 발전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증을 얻어 아름다운 시인이 되었다. 내가 인천화력에 있을 때 강화도 시인의 집에 간 기억이 선명하다. 아궁이에 시집을 태우던 모습이 선명하다. 오래도록 가난한 시인의 대명사로 살더니 뒤늦게 결혼하여 인삼장사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등사 숲에 계시는 오규원 선생님 소나무도 뵙고 함민복 시인의 인삼 가게에도 가보고 싶다. 다시 한 번 생각하면 너무 잘 적응하는 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우연히 <공조>라는 영화를 보았다. 남한과 북한의 형사가 공조수사를 한다는 내용 이었다. 북한 범인이 남한 형사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몸에 폭파장치를 설치하여 협박한 장소가 바로 인천화력 발전소였다. 그렇게 오래된 발전소가 지금도 유물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상당히 긴 시간을 서로 총질하고 때리고 도망가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동안에도 나는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고, 내가 옛날에 조작하고 기록하고 수리하고 감독하던 시절로 돌아가 너무나 젊은 나를 뜷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의 발전소는 대부분 자동이다. 인천화력1호기 같은 수동 발전소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발전소가 왜 바닷가에 있는지 혹시 아시는가? 물론 많은 물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다. 뜨거운 물을 식히기 위해서 많은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팀을 물로 되돌리기 위해서 그 많은 바닷물이 필요한 것이다. 발전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가 잘 되지 않겠지만, 화력발전소의 전기는 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로 만든다. 물이 전기 불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화력발전소에는 불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기를 만드는 직접적인 요인은 불이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많은 발전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원리는 간단하다. 태양광발전소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발전소는 전기를 만드는 발전기가 있다. 발전기는 대부분 자석을 이용하는데 자석을 회전 시켜주면 전기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 회전시켜주는 방법에 따라서 수차발전기, 풍차발전기, 터빈발전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용량 발전소는 터빈 축과 발전기 회전자가 한 몸으로 함께 돌아가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는 같은 터빈발전기라 할 수 있다.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터빈이 돌아야 한다. 그런데 터빈을 돌려주는 것이 바로 고온 고압의 과열증기다. 이 증기를 생산하는 방법에 따라서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복잡해지니까 그냥 우리는 물이 불을 만든다고만 기억하고 퇴근 할 일이다. 저 하늘을 보아도 물이 불을 만든다. 구름이 불타고 있다. 불이 꺼진 후에도 검은 재 속에서 별의 불씨들이 반짝일 것이다. 사람들 또한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사랑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사랑의 물은 밤새 뜨거운 불덩이를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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