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만(汝自灣) 08

― 윤동주 시인과 함께 바다를 건넌다

by 강산





여자만(汝自灣) 08

― 윤동주 시인과 함께 바다를 건넌다




아직, 제주도 순례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윤동주 시인과 함께 바다를 건넌다

오름의 왕국 제주도에서 섬의 왕국 여수로 간다

여수에서 한 계절 돌아보고 다시 오리라

다시 돌아와서 또 다시 처음부터 순례를 하리라

그렇게 나의 순례길의 여정은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남은 삶은 순례의 연속이 될 것이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 (1941.11.20, 윤동주 25세)

115. 서시(序詩)(시) _ 육필자선시집, 초판, 중판, 삼판

* 처음에는 제목이 없었으나 후대 사람들이 제목을 붙임



윤동주 시인과 함께 1

― 서시(序詩)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깊이 살았다


이어도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부처님도 만났고 예수님도 만났다 공자님도 만났고 소크라테스도 만났다 어머니도 만났고 아버지도 만났다 제주도 사람들도 만났고 여수 사람들도 만났다 고향사람들도 만났다 북간도 사람들도 만났고 북한 사람들도 만났다 제주도 사람들이 먼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방폭포 위에 위령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일전에 서복 선생님과 함께 다녀왔던 서복 전시관에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바람처럼 돌았다 정방폭포에서 온 사람들이 먼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도 따라 나선다 연어의 종착역에도 가고 백두산에도 가고 북간도에도 가고……, 긴 순례를 떠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2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사람들, 이어도에서 하늘로 간다 죽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본다 서천꽃밭으로 간다 버드나무 아래 우물에서, 동자들이 물을 길어와 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숨결도 함께 주고 있다 서천꽃밭에서 꽃과 꽃씨를 챙겨 삼색 물을 건넌다


서천꽃밭을 나와 하늘에서 본다


소도였던 자리에 솟대가 세워져 있고, 마고할미가 살던 곳에 노고단이 있고, 단군이 내려왔던 곳에 참성단이 있고, 방사탑과 거욱대 위에 새와 돌이 있다


백두산도 보이고 지리산도 보이고 무등산도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도 보이고 영실도 보인다 마라도와 가파도와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한반도 남쪽에는 수직으로 솟아오른 높은 건물들과 붉은 십자가들이 보인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미사일처럼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인이 방학 때마다 타고 갔던, 고향 가는 철로가 기적소리처럼 펼쳐져 있다 강처중의 고향도 보이고 문익환의 고향도 보인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간쯤

바다 위에 공이 하나 떠 있다

손을 뻗친 손바닥 자국들이

비치볼에 가득 찍혀 있다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과 소련이 질러대던

럭비공 하나 떠 있다

축구공 하나 떠 있다

군홧발로 함부로 차던

족구 공이 하나 떠 있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이 상대선수를 바꾼다

미국과 중국이 야구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한다

빠따로 수없이 얻어맞은

상처투성이 야구공 하나 있다

찌그러진 탁구공 하나 떠 있다


하늘에서 다시 깊이 본다

알이 하나 있다

알이 움직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3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나의 심장에도 촛불을 켠다


평화공원에 누워있는

저 차가운 백비에

처음처럼

촛불의 이름을 새긴다


긴 잠에서 깨어나 목숨으로 만든 길 찾아간다

낮에는 꽃들이 심장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심장을 켠다


통일의 첫걸음을 찾아서

평화의 씨앗을 찾아서

봄의 어린 순교자를 찾아서

길에서 다시 피어난 애기동백과 함께 찾아간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란다면

백비로 누워있는 저 메밀밭에서도

달빛처럼 부드럽게 붉은 피를 핥아야만 한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4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굴속으로 숨어야만 했다


굴이 발각되어 한라산 오르는 길

밤새 내린 눈도 덮어주지 못했다


전분공장이나 단추공장으로 가서

정방폭포의 아우성으로 떨어졌다


지금도 정방폭포에는 빈 관이 많다

주상절리에 빈 관들이 세워져 있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불로초를 찾아왔던 서복이 머문 곳

지금도 대궐 같은 집에서 불로초를 가꾸고 있는 곳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이어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평화공원과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5

― 나는 괴로워했다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 한 명이 들려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 볼 뿐



윤동주 시인과 함께 6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속에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 모습이 보인다

정방폭포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다슬기처럼

한참을 멈추었다가 다시 올라간다

나를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 로프도 보인다

나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수염이 아니라

기름이 잔뜩 발라진 검은 쇠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계단을 오른다

쇠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오른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스스로 올라간다

아파트 옥상에는 하늘타리꽃이 피어난다

별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하늘타리 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고 있다

반야심경(半夜心經)을 염불하고 있다

깊은 밤의 마음을 뚫고 만다라가 핀다

붉게 핀 칸나의 꽃들은 합장을 하고

도라지꽃들은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

푸른 고추들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고

토란잎에 매달린 취우들의 눈빛이 맑다

흙의 가슴에서는 고구마 순의 상처에서

이제 막 뿌리를 만들며 어둠을 뚫는다

땅속에서 반야심경(半夜心經) 소리

하늘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소리

마음속으로 반야반야(半夜般若) 소리

저 멀리 보이는 드림타워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밤을 알아야 낮을 알고

달을 알아야 해를 알고

어둠의 그림자를 알아야 빛이 보인다

나는 이제 반야에서 천천히 줄을 타고 내려온다

260자의 윤슬이 마음의 경전으로 빛난다

경전 속에서 바다는

파도를 불러 오도송(悟道頌) 하나 읊고 있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7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정방폭포 암벽에 글자를 새겼다 세월이 지워버린 화두가 있었다

정방폭포 소리에 울음이 있었다 바람이 지워버린 눈물이 있었다

정방폭포 가슴에 무지개 피었다 득음의 독공소리 끊이지 않았다


서복 일행이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추사 선생은 탁본을 하고 있었다

백조 한 마리 날아와 목을 풀었다 흑조 한 마리 날아와 몸을 풀었다

울혈을 토하고 절창을 하는 백조와 살풀이춤으로 길을 터주는 흑조


한라산을 기어서 내려오는 용 한 마리, 바다를 향해 용트림을 한다


정방폭포 위에서 베틀소리 들린다 비단과 무명과 삼베가 흩날린다

무명천 할머니 베틀 노래 부르며, 베를 짜서 수의를 만들어 날린다

정방폭포 아래서 웡이자랑 들린다 비설상 적시는 폭포수 흩날린다


정방폭포 주상절리에서 피아노 소리 들린다 둥둥 북소리도 들린다

삐그덕 탁탁 베틀소리에 깨어나 수의를 입는다 바다가 날개를 편다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윤슬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 가득 빛난다


온몸에 바느질자국 선명한 선인장 마을 무명천 할머니의 선창 소리와

북촌리 옴팡밭 순이삼촌, 거친오름 비설상 변병생 어머니 후렴소리에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함께 밤새 부르는 아, 울음의 절창(絶唱)


한라산에서 내려온 용 한 마리, 밤에도 쉬지 않고 베옷 입혀 흩날린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명령소리는 그치지 않고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비명소리가 나를 울린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8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정방폭포 위에 감옥이 하나 있다

철창살로 만든 감옥이 하나 있다

깊은 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스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정방폭포 감옥에서 책을 읽는다

달빛에 어리는 동백꽃을 읽는다

동백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낳는다


유채꽃을 노래하던 사람들에게

동백꽃 이름표를 달아주는 4월

동백꽃이 지면 지상에 피었다가

동백의 푸른 열매들로 익어간다


나도 이제 동백꽃 이름표를 달고

마음이 몸이 될 때까지 스며든다

달빛이 정방폭포에 스며들고

별빛이 제주바다에 스며든다


깊은 밤 함께 깊어져서 밤이 되면

여울물소리와 함께 깊이 스며들면

감옥도 물과 함께 흘러가고 말리라

태평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 되리라


나도 감옥도 정방폭포로 쏟아진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9

― 걸어가야겠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더 이상 가야 할 길이 없을 때, 한 걸음만 더 가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더 낮아질 수 없을 때, 더 이상 더 내려갈 수 없을 때, 한 걸음만 더 내려가라고 말한다 더 이상 더 기다릴 수 없을 때, 더 이상 더 깊어질 수 없을 때,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새로운 길은 열리고, 몸과 마음이 부서진 다음에야 겨우 날개는 돋아난다고 말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며 물을 칭찬하지만 물의 옷까지 벗어야만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구름이 되어 산타의 고향, 라플란드까지 가 보아야 순록의 심장소리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눈 속에 숨어있는 쥐의 심장소리까지 보고 들을 수 있는 큰회색올빼미의 눈과 귀, 청어 떼를 만난 범고래와 혹등고래의 숨소리, 한라산으로 내려오는 백록의 발자국소리, 봄의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지던 3월과, 봉화처럼 피어올라 한꺼번에 떨어지던 4월의 동백꽃, 조금만 더 가면 백두산의 평화에도 갈 수 있고 북간도의 고향에도 갈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우리들이 갈 수 있는 길 끝에서, 함께 손을 잡고, 한 걸음만 더 갈 수 있으면, 총에서도 꽃이 피는 아름다운 세상 만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그렇게 정방폭포의 말하는 빛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10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무등산이 무등이왓으로 간다

무등을 타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정방폭포에 들러

수박령들 모시고 무등이왓으로 간다

동광 육거리 헛묘에도 둘러보고 간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하늘로 떨어지는 폭포

정방폭포는 바다로 솟아나는 주상절리

하늘도 바다도 무등을 타고 춤을 추며 간다


우리는 누구라도 존재 자체로 귀한 사람들

누구라도 살아있는 자체가 눈부신 아름다움


정방폭포 수박령들 무등이왓 지박령들 만난다


무등이왓 입구 조릿대에 리본들이 펄럭인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분홍의 마음들

집터에는 작물들만 해마다 기억을 되새긴다

자리 잡은 더덕 꽃이 열매를 낳는다

잘 익은 콩들이 똘망똘망 눈을 뜬다

공고판이 있던 자리에 메밀밭이 백비처럼 누워있다

밤마다 달은 달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우고

날마다 해는 햇빛으로 비문을 새겼다가 다시 지운다

통일의 첫걸음 이었다, 썼다가 지우는 메밀밭

잊지 말자고 그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볕뉘라도 건져 올려 밥을 짓는 복조리의 마음


하늘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영혼들

지상에서 더욱 아름답게 살고픈 사람들


무등이왓이 무등산으로 간다

큰넓궤에서 잘 숙성된 고소리술을 들고 간다*

헛묘에 들렀다가 정방폭포에도 들러 무등산으로 간다

무등이왓이 무등을 타고 무등산으로 춤을 추며 가고 있다



* 제주도의 예술가들이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함께 조 농사를 지어, 그 조로 고소리술을 빚어, 큰넓궤에서 숙성시킨 후, 제주4·3민중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10·19여순민중항쟁 등의 기념식에 쓸 제주로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