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날,
열정(熱情)의 포플러는,
오려는 창공(蒼空)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地点)에서.
천막(天幕) 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南方)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蒼空)은, 한 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달과 기러기를 불러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理想)에 타고,
그의 동경(憧憬)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_ (1935.10.20. 평양에서, 윤동주 18세)
6. 창공(蒼空)(시) _ 1집, 중판, 삼판
* 이 시의 원제가 ‘蒼空.(未定稿)/창공.(미정고)’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윤동주 시인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임.
뻘배 한 마리 말뚝에 묶여서 산다
갱변에 묶여 있던 우리 집 소처럼
하루 종일 햇빛을 업어주고 있다
도붓장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그리움의 윤슬만 와온에서 빛난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일을 나누어서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골라서 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인간은 서로를 믿지 못하여
돈이라는 이상한 물건을 만들었다
하지만
돈에 눈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청맹과니 돈은 늘 더듬거린다
그리하여 돈은 늘 몰려다닌다
돈은 언제나 부자를 더 좋아하고
돈은 언제나 권력자를 더 좋아한다
왕이 되기를 꿈꾸었던 전직대통령
감옥으로 영치금이 몰려온다고 한다
대통령의 월급보다 더 많은 영치금
권력을 좋아하는 돈은 권력의 꼬리라도
잡아보려고 감옥으로도 가고 청와대나
용산으로도 달려가기 바쁘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노동자에게는
돈도 찾아오지 않고 운도 찾아오지 않는다
붕괴된 울산화력발전소 보일러타워 아래서
깔려 죽은 사람은 돈처럼 반짝이는 별,
금화처럼 반짝이는 별,
죽어서라도 별이 될 수 있을까?
저승으로
보낼 것들
모든 것들
물건들과
인연들과
사연들과
사진들과
편지들과
엽서들과
이야기들
너무 많아
그냥 태워
연기로만
가야 한다
그리고는
나무 하나
달랑 두고
떠나간다
돌아가며
내 소나무
바라본다
잘 있거라
나의 사랑
나의 분신
푸른 꿈아
잘 자라라
나는 간다
빈 몸으로
알맹이로
돌멩이로
별빛으로
이승하 시인
입력 2025.11.12 06:34
수정 2025.11.12 07:14
벌교 참꼬막 집에 갔어요
꼬막 정식을 시켰지요
꼬막회, 꼬막탕, 꼬막구이, 꼬막전
그리고 삶은 꼬막 한 접시가 올라왔어요
남도 시인, 손톱으로 잘도 까먹는데
저는 젓가락으로 공깃돌 놀이하듯 굴리고만 있었지요
제삿날 밤 괴**
꼬막 보듯 하는군! 퉁을 맞았지요
손톱이 없으면 밥 퍼먹는 숟가락 몽댕이를
참고막 똥구멍으로 밀어 넣어 확 비틀래요
그래서 저도― 확, 비틀었지요
온 얼굴에 뻘물이 튀더라고요
그쪽 말로 하면 그 맛 한번 숭악하더라고요***
비열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도 남도 시인― 이 맛을 두고 그늘이
있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그늘 있는 맛,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삶, 그늘이 있는 사람
그게 진짜 곰삭은 삶이래요
현대시란 책상물림으로 퍼즐 게임하는 거 아니래요
그건 고양이가 제삿날 밤 참꼬막을 깔 줄 모르니
앞발로 어르며 공깃돌놀이 하는 거래요
詩도 그늘이 있는 詩를 쓰라고 또 퉁을 맞았지요.
* 퉁(꾸지람):퉁사리, 퉁사니 멋퉁이 등.
** 괴:고양이.
*** 숭악한 맛:깊은 맛.
―『퉁』(서정시학, 2013)
퉁_ 송수권 시인 [이미지: 류우강 기자]
전라도의 구수한 사투리를, 특유의 풍습을, 수난의 역사를, 후한 인심을, 풍성한 먹거리를 멋진 가락으로 형상화한 시인이 송수권이다. 송수권 시인이 지인과 함께 벌교에 있는 참꼬막 집에 가서 꼬막 정식을 시켰을 때의 일이 시가 되었다. 전라도에는 ‘제삿날 밤 괴(고양이) 꼬막 보듯 한다’는 속담이 있는 모양이다. 화자가 잘 까서 먹지 못하고 서툰 솜씨로 꼬막을 굴리고만 있다가 남도의 지인 시인한테 퉁을 맞는다. ‘퉁바리맞다’의 준말이 ‘퉁맞다’인데 무엇을 말하다가 매몰스럽게 거절을 당한다는 뜻이다. 원래 ‘퉁’이란 품질이 낮은 놋쇠로, ‘퉁바리’란 이 퉁으로 만든 바리(놋쇠로 만든 여자의 밥그릇)이다.
아녀자의 밥그릇으로 얻어맞는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무엇을 말하다가 매몰스럽게 거절당하는 뜻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우리말임에 틀림없다. 화자는 퉁을 맞고 나서 시란 그늘이 있어야 한다는 충고를 또 듣는다. 남도 시인은 목포 출신 시인 김지하인 듯하다.
‘퉁’이란 이 시에서는 거절을 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꾸지람이나 충고를 듣는다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남도 일원의 말은 이렇듯 사전적인 의미와 조금 다르기도 하다. ‘거시기’가 수많은 표현의 대유법으로 쓰이듯이 말이다.
송수권 시인은 퉁, 괴, 숭악한 맛 같은, 사전적인 의미에 머물 수 없는 우리말의 묘미를 이 시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늘 있는 맛,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삶, 그늘이 있는 사람”이 “진짜 곰삭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남도 사람’에게 들은 말이라고 하면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늘’의 뜻은 김지하의 저작을 펼쳐보아야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송수권 시인에게는 생의 비극적 측면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송 시인은 이 시에서 현대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현대시란 책상물림으로 퍼즐 게임하는 거 아니래요”라는 말에는 현대시의 지나친 난해성에 대한 비난의 뜻이 담겨 있다. 많은 시인들이 책상머리에서 시를 쓰면서 퍼즐 게임을 유도하고 있는데 시인이 독자에게 퍼즐 게임을 시키면 곤란하다는 뜻이리라. 괴(고양이)가 제삿날 밤에 참꼬막을 앞발로 어르며 공깃돌놀이를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럼 안 된다는 것이다. 참꼬막을 잘 까야지 시인이 된다는 뜻이리라. 나는 이 구절을, 시인이란 말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하고, 그 말놀음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또한 부채를 부치며 쉴 수 있게 그늘이 좀 있어야 하는데 독자가 진땀을 뻘뻘 흘리게 하면 안 된다는 말로 이해했다. 난해한 현대시들이 우리의 곰삭은 삶을 제대로 표현해내더냐고 이 시를 통해 은근히 충고해준 송수권 시인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그립다.
[송수권 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했으며, 순천사범을 거쳐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래 『산문에 기대어』『꿈꾸는섬』『아도』『새야 새야 파랑새야』『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파천무』 등의 시집을 냈다. 문공부예술상, 서라벌예술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삿갓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순천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2016년에 별세하였다.
[김지수 시인의 좋은 시 365]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 여행
김지수 칼럼니스트
승인 2025.11.11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김지수
귀찮다는
엄마를 모시고 길을 나선다
언제 또 떠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영국사 하늘 구름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는
얼굴이 흘러간다
하늘과 가까운 은행나무
바람을 모아 리본으로 묶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매달아 놓는다
은행 알알이 엮어 둔
천년 나비의 울음소리
희망의 노래가 되어
우리를 춤추게 한다
추억이 쌓인 노란 주단에
다시 온다는 약속을 새긴다
*
11월의 문턱에서 길을 나섭니다.
그 길의 이름이 여행이든 산책이든, 혹은 잠시의 머묾이든 간에
결국 마음이 닿는 곳은 그리움과 추억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은행잎이 흩날리는 길목에서 바람은 지난날들의 온기를 불러오고,
햇살은 오래된 기억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습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루는 충분히 따뜻해집니다.
길 위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의 흐름에 마음이 느려지고,
그 느림 속에서 오래된 마음들이 조용히 깨어납니다.
11월의 은행나무길은 그렇게 우리를 부릅니다 - 지금 이 계절의 빛을 바라보라고.
김지수 칼럼니스트
시인, 교수, 연기지도. 2023년 ‘월간 시’ 34회 추천 신인상으로 등단, ‘열린시 서울’ 시낭송가협회 회원. 저서로는 시집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 된다』, 동인시집 『지구의 솜털을 숏커트로 잘랐다』 『나 때와 라떼』 『축봄합니다』 가 있으며,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에 다양한 언어로 번역 소개 됨. 백제예대 연예매니지먼트과 강사, 상명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김지수 연기 아카데미 학원장을 역임했으며, 배우 권상우, 송혜교, 김선아, 남궁민 등 연기 지도. 저서 『대한민국에서 연예인 되는 법』이 있음. 현재 단국대 공연예술학부 연극과 초빙교수, 안양대 글로벌대학원 K-콘텐츠비즈니학과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