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창공(蒼空)
6.1 창공(蒼空)
와온 해변에서 순천만 갈대밭까지 걸어서 간다
와온 소공원에서 용산 전망대 입구까지 걸어서 간다
와온 해변과 순천만 국가정원 사이에 가야정원이 있다
와온 곁에 노월이 있다
해룡면 와온리 곁에 해룡면 노월리가 있다
노월 전망대 앞에는 노월 해녀들의 작업장이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새벽부터 바다일을 했다고 한다
머리에 불을 켜고 뻘배를 타고 나가 칠게를 잡고
짱뚱어를 잡고 장어 같이 생긴 물고기도 잡아서 씻고 있다
저 많은 것들을 어떻게 잡았을까?
맨손으로 저 많은 것들을 어떻게 잡았을까?
구멍에 들어간 후에 손을 집어넣어서 잡은 것일까?
저 많은 칠게와 짱뚱어와 내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저 물고기
내 눈에는 빈 바다보다 바다를 살아가는 해녀들의 삶이 더 잘 보인다
갯벌에서 뻘배를 타는 시간도 길지만 물통에서 씻는 시간도 참 길다
전동차를 타고 나와 바닷일을 하는 할머니 네 분들은
썰물이 시작되며 나와서 일을 시작하고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까지
뻘을 씻고 씻고 씻고 또 다시 씻고 있다
갯벌 중간에 있는 작업장에서 작업을 하다가
밀물이 시작되면 전망대 아래로 물러나서 씻고 또 씻는다
순천만가야정원을 지나 용산 전망대 입구까지 다녀오는동안
할머니들은 쉬지도 않고 계속 일을 하고 계신다
노월마을 사람들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끈질기다
또한
순천만가야정원 설립자 유병천 선생님은 참으로 대단하다
1956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는 선생님의 손을 본다
버려진 폐염전과 생활 쓰레기로 널브러진 땅은
그의 아름다운 손을 만나 가야정원이 만들어지고 있다
거칠고 메마른 땅에 꽃을 심고 나무를 심어
더 이상 버려진 땅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노월길 82-42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가야정원에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순천만의 창공(蒼空)에서 너를 보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다
컬럼 입력 2025.07.25 00:00 수정 2025.09.07 15:11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집을 애독하며 시적 감수성을 키웠고, 동시를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현실을 섬세히 그려냈다. 「조개껍질」, 「눈」, 「편지」 등은 이향의 쓸쓸함과 가족 해체, 경제적 빈곤을 어린이의 시선으로 표현했으며, 단순한 아동문학을 넘어선 현실 비판과 민족적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동시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탐독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윤동주 소장본 『정지용시집』이 증명하고 있다.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는 “도처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곳에 따라서는 적절한 촌평도 가해져 있는 등, 그가 얼마나 정독한 책인지를 알 수 있다.”고 썼다. 정지용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애독해 마지않은 것은 연희전문 친구들이 증언한 바도 있다.
윤동주의 자필 원고 「서시」 사진. 연희전문 졸업기념으로 발간하고자 했던 윤동주의 자선시집 맨 앞에 있는 시이다.
윤동주가 발표한 최초의 동시로 알려져 있는 「조개껍질」을 쓴 것이 1935년 12월이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10월에 『정지용시집』이 나왔다.
아롱아롱 조개껍대기
울언니 바다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대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대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잃은 조개껍대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대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소리
-「조개껍질」 전문
조개껍질은 2개가 있어야 짝을 이루는데 하나가 사라진 다른 하나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하나만 있는 조개껍질처럼 물소리, 특히 바닷물소리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왜 여기는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북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화자 아이의 고향마을이 바닷가에 있었나 보다. 그리고 조개의 고향인 남쪽은 3면이 바다인 조선이고 화자는 북간도에 있다. 즉,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동시를 시발점으로 하여 윤동주는 1936년부터 『가톨릭소년』이나 『아이생활』 『어린이』 등에 동시를 간간이 발표하는데, 정지용의 시집이 그랬듯이 시집 준비를 하면서 동시를 중간중간에 싣는다. 동시라는 구분이 없다. 윤동주는 시 끝에 쓴 일자를 써 놓는데, 아래 2편은 1936년 1월 2일에 쓴 것이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눈」 전문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 걸.
-「참새」 전문
1936년에 『카톨릭소년』에 발표한 두 편의 동시다.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심리상태를 잘 파악하여 이와 같이 재치 있는 동시를 쓰던 윤동주는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현실로 눈을 돌린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오줌싸개 지도」 전문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해바라기 얼굴」 전문
앞의 동시는 고아 신세가 된 형제 이야기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만주로 돈 벌러 가서 영 오질 않는다. 오줌싸게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형은 철이 들었지만 언제까지 고아처럼 살아가는 이 상태가 이어질까. 뒤의 동시는 누나를 불쌍히 여기는 동생이 화자다. 누나는 공장에 나가는 것일까 밭에 나가는 것일까. 무척 힘든 노동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방직공장과 군수공장에 가서 일하는 이 땅의 여성 인력이 적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이 동시는 현실 고발의 메시지까지 담보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어린이들의 굶주림에 대해 들려준 동시가 있었으니, 바로 윤동주의 동시다. 궁핍했던 당시 현실을 아래와 같이 다루고 있다.
붉은 사과 한 개를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넷이서
껍질째로 송치까지
다― 나눠먹었소.
-「사과」 전문
바닷가 사람
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무얼 먹구 사나」 전문
모처럼 사과 한 개가 생긴 집의 식구는 넷.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지라 그 사과 속 고갱이까지 다 먹는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사과를 하나 먹게 되었을 때 제일 가운데 것까지 다 먹었을까. 동시는 짧지만 식민지 시대의 궁핍한 현실을 은근히 반영하고 또 이를 비판하고 있다. 뒤의 동시는 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별나라는 저승이고 별나라 사람은 죽은 자이다. 산 자는 먹을 것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한다. 사자는 무얼 먹고 사는지 알 수 없지만 물고기와 감자조차도 없는 현실에서는 도대체 무얼 먹고 살아가야 하는가? 동시임이 분명한데,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교묘하게 암시하고 있는 아래의 작품을 보자.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편지」 전문
눈이 오지 않는 나라는 식민지 조선도 아니고 만주도 아니고 연해주도 아니다. 저승이 아니면 남쪽의 나라이다. 저승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동시로 쓴 작품에서 이런 고도의 상상력과 지적 능력을 동원해서 생각하라고 아이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누나는 눈이 오지 않는 나라에 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연구자는 일제에 의한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의 개정(1937.9.29.)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대량의 일본군이 중국에 투입되자 일본군은 군의 시설로 위안소 설치를 중요한 일로 삼았다. 일본군은 일본 내무성ㆍ외무성 등 중앙정부와 조선총독부ㆍ대만총독부 등 식민지 권력기관을 통해 위안부 동원을 요구하였고 이후 관련 기관의 협조로 군 위안부 동원 시스템이 작동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1938년부터 강제모집이 시작되므로 윤동주가 이 동시를 쓴 1936년과는 시차가 있다. 하지만 꼭 일본군 위안부를 염두에 두고 쓴 동시가 아니라 하더라도 1937년에 나온 『재상해일본총영사관경찰서연혁지』라는 책을 보면 1936년에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여성의 수는 900명, 남성의 수는 897명인데 여성 중 290명이 사창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자료를 백 프로 못 믿는다고 하더라도 조선에서 타국으로 먹고살 길을 찾아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상해는 매년 눈이 오지 않는데, 올 때도 좀 내리다 만다고 한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이 42세 때인 1886년에 아내 진씨와 4남 1녀의 어린 자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자동에 자리를 잡았다. 1990년쯤에 북간도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이 모여 ‘촌’을 이루고 있었다. 북간도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북경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로 이주해 갔을 것이다. 마카오나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지로 내려간 ‘누나’가 있다면 편지를 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이 아주 교묘하게 그려져 있는 시가 바로 「편지」다.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에 나오는 어린이는 해맑고 천진하기보다는 쓸쓸해 하고 아파한다. 세상 풍파에 갖은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 시적 자아는 차라리 어른 쪽에 가깝다. 그런 윤동주 동시의 가장 큰 두 가지 주제는 이향(離鄕)의 쓸쓸함과 경제적 빈곤이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사진과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초판본 표지
이와 같이 윤동주의 동시는 비록 동시이기는 하지만 1930~40년대에 나온 어떤 시작품에 못지않은 현실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다. 「아우의 인상화」나 「트루게네프의 언덕」 「기왓장 내외」 「애기의 새벽」 「햇빛ㆍ바람」도 그렇고, 아이들의 밝은 꿈을 그리기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암담했기에 이런 슬픈 동시를 계속해서 썼던 것이리라. 평범한 일상에서 가져온 소재를 아이다운 엉뚱한 생각에 담은 전형적 동시도 있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동시만 보더라도 윤동주는 현실을 몰각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든 동시대인들의 아픔을 보듬고 증언하려는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의 편린이 내보이는 동시를 썼다. 게다가 어린이도 읽고 어른도 읽을 동시를 통해서 실현했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
교토의 도시샤대학 교정에는 두 시인의 시비가 앞뒤로 서 있다. 윤동주 시비가 앞에 있고 뒤에 정지용의 시비가 있다. 윤동주의 시비에는 시 「서시(序詩」가, 정지용의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압천은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교정 근처에 있는 가모가와 강의 한자 표기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대학 교정에도 유학생 2명의 시비를 나란히 세워놓은 예는 없다. 1942년 3월에 일본에 가서 4월 2일에 도쿄의 릿쿄[立敎]대학에 입학, 잘 다니던 윤동주였다. 1924년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한 정지용을 흠모하여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그해 10월 1일부터 도시샤대학에 다닌 윤동주는 전학을 갔기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나이 차는 15년이고 정지용이 18년 선배다. 지금도 교정에는 두 사람의 시비가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해바라기 얼굴」 전문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