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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08. 2020

19. 걸리버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걸리버를 따라서 다시 한 번 간다

소인국과 거인국은 익숙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섬나라와

말들의 나라는 더욱 신선하다

말들의 나라를 언어의 나라로 읽어도 좋겠다  

  

너무 익숙한 것들은 오히려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걸리버 여행기도 그렇다. 소인국과 거인국 이야기는 잘 알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섬나라 이야기와 말들의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어쩌면 섬나라와 말나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소인국 이야기와 거인국 이야기를 먼저 하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섬나라와 말나라의 이야기가 더 재미 있고 더욱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풍자문학의 꽃 / 걸리버 여행기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해설자 김일영(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걸리버여행기』 중 소인국에 간 걸리버.


작품 배경


스위프트가 살았던 18세기는 보수적인 토리당과 진보적인 휘그당이 형성되어 서로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시기다. 두 정당은 각각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Anglican Church)를 옹호한다고 했지만 토리당은 가톨릭에, 휘그당은 청교도에 더 심정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즉, 성공회만을 공식적인 국가 종교로 인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구교와 신교를 각각 지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성공회 신부인 스위프트도 어떤 형태로든지 정치와의 연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작품이 황당한 소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동화적인 작품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8세기 영국은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해외에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 외국의 풍물과 관습을 소재로 한 기행문이 유행되고 있었다. 스위프트가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 포우프(A. Pope)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과 함께 소위 '스크리브레루스 클럽'을 형성하여, 가상의 문인 스크리브레루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당대 학문의 남용을 풍자하는 글을 기행문 형식으로 출판한 것도 이 시대의 전반적인 문학 풍조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행기를 빙자하여 당대의 사상과 철학, 문학 등을 풍자하거나 작가의 이상적인 국가상을 피력한 일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2세기경에 씌어진 루키아노스(Lucian)의 『진짜 이야기』에는 화자가 달나라를 여행하고, 거의 2년 동안을 고래 배속에서 사는 등 믿지 못할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모어(Thomas More)1)도 기행문의 형식을 빌려 쓴 『유토피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걸리버 여행기』에 영향을 준 작품은 1719년 발표된 디포우(D. Defoe)의 『로빈슨 크루소』다. 실제로 바다에서 조난당하여 무인도에서 살았던 인물을 소재로 삼아 쓴 이 기행문 형식의 소설은 다른 많은 기행문학을 유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걸리버 여행기』의 모델 혹은 반 모델로서 스위프트가 이 작품을 쓰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출판 상황과 작품 성격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는 1726년 처음 출판되었을 때부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의 첫 인쇄본은 1주일 만에 다 팔렸고 3주 만에 만권이 팔렸으며, 2년 만에 불어와 네덜란드어,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그 후에도 이 작품은 동화, 만화 혹은 다른 여러 형식의 글로 널리 알려지는 등 그 인기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이 작품이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 스위프트는 이 글의 작가로 걸리버라는 가공의 인물과 그의 사촌이라고 주장하는 심프슨(Sympson)이라는 또 하나의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출판업자와 거래했다. 그것도 출판업자의 집 앞에 몰래 던져 놓은 작품의 원고와 자신의 요구사항을 적은 쪽지를 통해서였다. 스위프트가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출판업자와 접촉한 것은 작품의 민감한 내용 때문이었다. 


이는 출판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처음 이 작품의 창의성에 매료되었지만, 원본 그대로 출판하는 데는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스위프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작품 내용의 일부를 삭제, 변경한 후에 출판하게 된다. 그 후 1735년 이 작품 원작의 진가를 인정하여 정치적 위험을 무릅쓴 죠지 포크너라는 출판업자가 더블린에서 이 책의 재판을 찍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작품의 원본 그대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출판업자와 스위프트 모두 심적 부담을 느꼈던 이 소설 속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리고 당시는 물론이요 오늘날에 와서도 이 작품을 고전적인 작품으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동화로 개작한 것이거나, 또는 원작의 거친 표현과 풍자 등을 삭제하여 책을 출판한 바우들러 박사(Thomas Bowdler)2)의 『걸리버 여행기』 만을 접한 독자는 이 점에 대해 상당한 궁금증을 품게 될 것이다.


스위프트가 원래 의도하고 출판하고자 하였던 이 작품의 내용과 성격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작품을 환상적 여행기, 혹은 여행기를 빙자한 풍자문학, 도덕적 우화, 그리고 날아다니는 섬과 생각하는 기계가 등장하는 공상과학 소설로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이외에 이 작품을 보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뉘어 질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이 작품이 사실성을 추구하며 이에 바탕을 둔 소설적인 문학인가, 아니면 사실성을 강조하는 문학 장르를 의도적으로 패러디한 비소설인가하는 문제다.


이 작품의 소설적 요소는 자세한 상황묘사와 더불어 이 작품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다. 걸리버는 자신이 타는 배의 출발, 도착 날짜를 꼼꼼히 기록하며 바다에서의 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그가 실제 항해를 떠났던 인물인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게다가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가족관계, 그의 출생지, 거주지, 직업 등 걸리버에 관한 사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걸리버가 실존인물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걸리버가 방문한 소인들이 사는 릴리프트, 거인이 사는 브로딩낵, 날아다니는 섬인 라푸타, 마법사의 나라, 그리고 말이 이성적 존재로 등장하는 후이늠의 나라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것과 스위프트가 작품 시작부분에 제시한 걸리버 초상화 밑에 라틴어로 써 놓은 "놀라운 거짓말쟁이"란 문구는 이 작품이 실제 세계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란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스위프트는 사실성을 강조하는 소설적 양식을 작품에 도입하였지만, 이는 사실임을 강조하는 기존 소설이나 기행문학을 패러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스위프트는 기존 문학 장르에 대한 단순한 패러디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기행문의 형식을 빌어 기행문을 패러디하면서도 이를 통해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풍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행문은 화자로 하여금 수많은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비유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풍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걸리버를 포함한 이 작품의 작중인물들은 하나의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생각이나 관념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스위프트가 걸리버의 사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은 하나의 소설적 장식에 불과한 것이고 그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풍자인 것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스위프트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어떻게 풍자하였는지 살펴보겠다.


4가지 관점에서 본 인간의 모습


『걸리버 여행기』는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4가지 다른 각도에서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우선 1부에서 걸리버가 소개하는 릴리프트인들은 12분의 1 크기로 축소된 인간으로서, 이들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 


따라서 이들을 지켜 볼 때에 우리는 산의 정상에 올라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갖게 되지만, 우리 발아래 있는 사람들 겪인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지 깨닫지 못한다. 릴리프트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작은 나라가 우주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이웃 소인국인 블레퓨스큐 이외에 어떤 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릴리프트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들의 외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는 이곳 왕에 대한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걸리버는, 왕이 다른 릴리프트인보다 키가 커서, 만인으로부터 공포와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위엄을 가졌다고 하지만, 곧이어 왕의 키가 다른 릴리프트인 보다 자신의 엄지손톱 폭 정도로 더 크다고 말함으로써, 왕의 위엄이 얼마나 하찮고 과장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작은 인간들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인간들이 하는 악한 일을 행한다. 그들은 출세하기 위해서 왕에게 아첨을 하여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줄타기 솜씨를 왕에게 선보여야 한다. 스위프트는 줄타기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시세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의 행보를 암시하고 있는데, 줄타기가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되는 비유라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스위프트의 통찰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사소한 문제를 확대 해석하여 당파를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달걀 깨는 방법에 관한 것으로 스위프트는 이 문제의 발달과 이 문제가 야기한 사건을 다음과 묘사한다.


달걀을 먹기 전에 원시적인 방법은 달걀의 큰 모서리 쪽을 깨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왕의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달걀을 먹기 위해 기존 방법에 따라 달걀을 깨려다 손가락을 다치자, 그의 아버지는 모든 국민들이 달걀을 깰 때 작은 모서리 쪽으로 깨라고 칙령을 내렸다. 역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이 법에 몹시 분개하여 여섯번의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으로 한 명의 왕이 목숨을 잃었으며, 한명의 왕은 왕관을 잃었다


결국 이 여파로 이 나라 사람들은 달걀을 깰 때 모서리가 큰 쪽으로 깨느냐 작은 쪽으로 깨느냐에 따라서 각각 '큰 모서리(Big-Endian)' 파와 '작은 모서리(Small-Endian)' 파로 나누어지게 만들고, 이들은 서로간에 반목과 질시를 하며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걸리버는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당시 영국에서 가톨릭과 신교, 토리당과 휘그당이 각각 대립하고 있던 상황을 상징한 것이지만, 사소한 문제에 모든 것을 걸고 파벌을 형성하며 서로간의 이득을 위해 싸우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즉, 우리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로 다투고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걸리버의 다음 기착지인 브로딩낵에 이르면 인간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제시된다. 따라서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인간의 추함과 결점이 돋보기를 통해 보는 것처럼 노출되는 것이다. 이 거인국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인간도 걸리버의 눈에는 거칠고 조야하며 혐오스런 모습으로 보인다. 


그는 모두가 아름답다는 찬사를 보내는 궁정 여인들의 얼굴에서 여러 색깔의 피부와 커다란 주근깨를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외모에서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서 나는 냄새, 이들이 먹는 어마어마한 양의 식사는 걸리버에게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걸리버를 경악케 한 것은 그가 시장터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가슴에 난 거대한 크기의 종양에는 수많은 구멍이 나 있었고, 그 구멍 중 두 세개는 내가 기어들어가 내 몸을 다 덮을 정도로 컸다. 또한 가방 다섯 개보다 커다란 혹이 목에 나있는 남자와 20피트 높이의 나무로 만든 다리로 걷고 있었던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혐오스런 광경은 그들의 옷에 기어 다니는 이었다. 난 맨눈으로 이의 수족과 돼지처럼 파헤치는 이의 주둥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거인국 사람들을 통해 스위프트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결점을 보여 주었지만, 소인국에서의 자신의 모습도 흉측하였을 것이란 걸리버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 과연 인간의 사소한 결점을 따지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삶이란 때로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함으로써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인국 사람들의 피부가 영국의 어느 귀부인의 피부보다도 고왔다고 한 걸리버의 진술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릴리프트인들이 걸리버의 키의 12분의 1이고, 브롭딩낵 주민들이 걸리버보다 정확히 12배 크다는 사실은, 스위프트가 인간의 왜소함을 거인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또한 인간의 결점을 12배의 확대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모든 가치는 궁극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걸리버가 소인국에서는 거인이요, 거인국에서는 소인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이러한 가치의 상대성 문제는 "비교라는 개념 없이는 어떤 것도 크거나 작다고 할 수 없다"고 한 걸리버의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부재하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소인국과 거인국의 설정을 통해서 스위프트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위프트는 절대적인 기준이나 이데올로기를 배격한 사상가이다.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삶 속에서 여유와 관용을 가질 수 있고 경직된 사고를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스위프트의 이러한 메시지는 각종 이념과 정파가 대립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꼭 새겨들어야 할 대목인 것이다.


3부는 날아다니는 섬인 라푸타 사람들의 기이한 눈을 통해 인간의 허황되고 비상식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곳 사람들의 눈은 하나는 안쪽으로,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해 고착되어 있어서 자신의 주변세계나 실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추상과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공기주머니로 얼굴을 쳐서 주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임무를 맡은 시종을 대동하지 않고는 외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사색에 잠겨있어서 절벽아래로 떨어지거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혹은 거리에서 남을 밀치거나 혹은 남에게 밀쳐져서 하수구에 빠질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변환경에 대해 무관심하고 비현실적인 이론가와 철학자들을 연상시키는 라푸타 사람들의 모습은 라가도의 학술원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과학 실험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의 배설물을 음식으로 환원하고, 털 없는 양을 양육하며,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하고 대리석을 부드럽게 만들어 베개로 만들려는 이들의 실험은 그야말로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것들이다.


오늘날 과학의 획기적인 발달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과학은 자연 법칙을 거스를 수 없으며, 만일 자연 법칙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르면 재앙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스위프트가 3부에서 묘사한 과학 실험들은 그 발상부터가 터무니없을 뿐더러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자칫 과학만능주의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인 것이다.


3부에서는 비실제적인 과학과 그 이론을 풍자하고 있지만, 걸리버가 마법사의 나라 그럽덥드립에서 마법을 통해 만난 역사적 인물과의 대면은 역사의 진위 여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걸리버는 이들과의 면담을 통해 알렉산더 대왕이 독살된 것이 아니며, 알프스 산을 넘은 카니발이 바위를 식초와 불로 없앤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로마의 황제들이 사실상 비천한 출신이며, 탐욕스런 일을 많이 저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역사라는 것이 권력자의 뜻에 따라 기술되는 데에도 기인한다.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정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피지배자의 입장이나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의 관점에서 기술된 기록도 참고하고 있는데, 이는 정사가 과연 진실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에서이며, 더 나아가 보다 균형 잡힌 역사적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역사 기록의 이러한 속성을 스위프트는 벌써 280여 년 전에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4부에서 스위프트는 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의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즉, 흔히 '이성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과연 이성적으로 살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이성적 삶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4부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이성적 존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동물적인 본성만을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말들이 지배하는 후이늠의 나라에서 인간은 야후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벌거벗은 채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며 아무데서나 배설물을 갈기고 성격이 포악하여 잘 다투고, 특히 노란 금 덩어리를 몹시 좋아해서 이를 갖기 위해 동료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야후는 많이 먹고 욕심을 부려 이 나라에서 병에 걸리는 유일한 피조물이기도 한데, 이러한 야후의 특성을 걸리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본 바로 야후는 모든 짐승 중 가장 교육할 수 없는 동물이며, 그들은 짐을 끌거나 나르는 것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난 이들의 결점이 이들의 고집 센 기질에서 주로 연유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활하고 사악하고, 배신을 잘하고 복수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하고 튼튼하지만 겁쟁이다. 그 결과 그들은 거만하고 비굴하고 잔인한다.


걸리버의 야후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야후에 대한 경멸감으로 이어지지만, 후에 야후가 옷만 입지 않았다 뿐이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 경멸감은 공포심도 유발한다. 걸리버는 인간인 야후에게서 이처럼 혐오감을 느끼지만, 이 나라에서 후이늠이라고 지칭되는 말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개인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동체의 삶을 중시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는 말에 대해서 흠모와 존경심을 갖게 된다. 


그 결과 걸리버는 모든 면에서 말을 모방하려다 보니 말처럼 걷고 말처럼 발음하게 되며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심지어 걸리버는 야후들이 사는 고국 영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후이늠의 나라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야후인 걸리버는 이 나라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후이늠의 부족회의에서 결정이 났을 때 걸리버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후이늠의 나라를 떠나게 된 걸리버는 야후가 사는 유럽으로 가는 대신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포르투갈 배의 선장에게 발견된 걸리버는 어쩔 수 없이 무인도를 떠나 영국으로 오게 되는데, 이때 걸리버는 자신의 가족조차도 야후로 간주하여 어떤 접촉도 피하려 한다. 결국 걸리버는 집에 돌아와서도 인간 야후를 멀리하며 새로 구입한 말들과 마구간에서 매일매일 대화를 나누며 상당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스위프트의 인간에 대한 풍자가 가장 극심한 4부 때문에 이 책은 한때 출판 금지를 당한다. 말을 이성적인 존재로 설정하고, 인간을 가장 혐오스런 동물로 비하하여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는 불편한 심기마저 느끼며, 스위프트의 인간에 대한 풍자가 그 도를 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부에서 인간이 가진 탐욕과 동물적인 속성이 과장되게 표현된 게 사실이지만, 스위프트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탐욕과 이기심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다만 이를 억제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나 문명, 법 등의 외부적 장치다. 현대 문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이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스위프트는 이성의 중요성을 동물적인 야후를 통해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화로서의 풍자문학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이다. 스위프트는 인간을 4가지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기 위해 우화적인 수법을 사용하였다. 즉, 1부의 릴리프트인들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인간의 모습이고, 2부의 브로딩낵 사람들은 세밀하게 들여다 본 인간의 모습이며, 3부의 라푸타 섬의 주민들은 이성주의를 맹신하는 인간의 모습, 4부의 야후는 동물적인 면이 강조된 인간의 원초적 모습인 것이다.


스위프트가 이처럼 우화적 수법을 사용한 근저에는 인간의 이러한 모습이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화는 시공을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는 서술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인 릴리프트인이나 거인 브로딩낵에게서 당대 영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달라 보이는 야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후이늠에게서 야후의 특성에 관해 전해 듣고 야후를 직접 관찰한 걸리버는, 야후의 특성을 유럽인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독자는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 야후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의 인간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제시한 것은 환상의 나라에서 걸리버가 겪은 모험이 아니라, 당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인 것이며,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오늘날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은 스위프트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통찰력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걸리버 여행기』를 시대를 넘어 선 영원한 고전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작가와 작품을 서술하는 화자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에서 화자인 걸리버와 작가인 스위프트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지 생각해보자. 우선 4부에 걸쳐 드러나는 걸리버의 특징은 그의 비일관적인 성격이다. 릴리프트에서 걸리버는 하찮은 일을 가지고 당파를 조성해 싸우는 소인국 사람들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이지만, 브로딩낵에서 걸리버는 왕에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화약제조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이를 거부하는 왕을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잔인한 인물이다. 


이 점에서 걸리버는 스위프트의 목소리를 대변함으로써 풍자의 척도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스위프트가 비난하는 면모도 갖추고 있는, 다시 말하면 스위프트의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즉, 걸리버를 스위프트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비일관적인 화자로 스위프트가 설정한 이유는 스위프트가 하고 싶은 말을 걸리버를 통해 긍정적으로 혹은 역설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2. 이 작품에서 이성적 존재로 등장하는 후이늠이란 말이, 과연 스위프트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의 모델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걸리버가 지적이고 이성적이고 애타주의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후이늠은 어찌보면 스위프트가 옹호하는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사상을 구현하는 이상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이늠은 동정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가족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전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결혼을 사랑이 아니라 철두철미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결정한다. 또한 자식에 대해서도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 않아 남이 자식을 모두 잃으면 자신의 자식을 기꺼이 주기까지 한다. 따라서 가족간의 애정을 느끼지 못하며 개인적인 감정조차 전혀 없는 이들은 어찌 보면 정서적으로 메마른 불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 여행을 통해 겪는 모험담을 주요 골자로 하는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머의 『오딧세우스』와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두 작품 사이에는 구조상 여러 가지 유사점이 있다. 『오딧세우스』의 주인공 오딧세이 왕과 걸리버는 둘 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항해를 하다 배가 난파당하여 환상적인 나라에 도착한다는 공통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오딧세이는 마녀나 외눈박이 괴물, 선원을 홀려 배를 난파시키는 사이렌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대결을 벌이지만, 걸리버는 브로딩낵에서 쥐, 개구리와 일전을 벌이고, 심지어 말벌과 새에 습격을 받아 고난들 겪는 등 서사시의 영웅이 겪는 모험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찮은 일에 시달린다. 


이외에 두 작품의 근본전인 차이는 오딧세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지만, 걸리버는 야후가 사는 고국을 혐오하여 무인도에서 은둔하고자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 전자는 영웅의 모험을 그린 서사시고, 후자는 풍자 문학이라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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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여행기』, 조너선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역, 출판사: 미래사 출판연도: 2003년.


각주1) 영국의 인문주의자·대법관(1529~1532)으로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여 참수형에 처해졌으나 1935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반열에 올랐다. 그가 쓴 『유토피아』는 기행문의 형식을 빈 일종의 이상국가론이다. 
2) 바우들러(1754~1825)는 영국의 의사였지만 은퇴후 10권으로 된 가정용 셰익스피어 전집을 출판한다. 이때 바우들러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되는 부분을 삭제하여 어린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출판하였는데, 그 후 바우들러는 셰익스피어 작품이외의 다른 작품에도 이와 같은 원칙을 적용하여 삭제하여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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