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산 Feb 07. 2020

18. 윤동주 문학관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연꽃과 산목련 / 강산


연꽃을 오래도록 바라보니
목련꽃이 보인다  


목련꽃을 오래도록 바라보니
산목련꽃이 보인다


산목련꽃을 오래도록 바라보니
그대가 보인다


그대를 오래도록 바라보니
하늘이 보인다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니
다시 연꽃이 피어난다


정음사(正音社)가 1948년 1월 30일 간행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142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1434

이 다세대 주택을 지날 땐 윤동주를 떠올려봐요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윤동주문학관 ①

19.05.02 16:52l최종 업데이트 19.05.22 15:06l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편집: 이주영(imjuice)


오늘날 서울은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뉜다. 조선시대 한양은 어땠을까? 한양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는데, 그 경계는 청계천이었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 동네는 북촌, 남쪽은 남촌이라 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가까운 북촌에는 집권층인 노론이 살았고, 남산 인근 남촌에는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이 살았다.


북촌, 남촌 외에 윗대와 아랫대라는 구분도 있었는데, 청계천 상류인 인왕산 아래 지역을 윗대(또는 웃대, 上垈)라 하고, 청계천 하류인 동대문, 왕십리 근처를 아랫대(下垈)라 했다. 윗대에는 경복궁에서 일하는 아전들이, 아랫대에는 하급군인들이 살았다.


조선 건국 무렵 경복궁 바로 옆 서촌엔 왕족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왕이 되기 전 이방원의 사저(私邸)가 서촌에 있었다. 서촌 주민들이 서촌을 '세종마을'이라 부르는 이유는 세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종과 세종의 잠저(潛邸)가 있었고 세도가문의 세거지였던 서촌은 문인과 예술인의 요람이었다. 안평대군,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이 머물렀고, 중인의 시문학 활동인 위항문학이 송석원을 중심으로 꽃 피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상, 윤동주, 현진건, 노천명, 김광규 같은 문인과 구본웅, 이상범, 이여성, 이쾌대, 이중섭 같은 화가가 이 일대에 자취를 남겼다. 


서촌 일대의 문인들


▲ 이상의 집 통인동 "이상의 집"은 이상이 실제 살았던 집은 아니다. 이상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상이 죽은 후 그의 아내였던 변동림은 유부남이던 화가와 사랑에 빠진다. 가족의 반대에도 그녀는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4년 재혼한다. 그녀가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사랑한 화가는 김환기다. 1974년 화가가 죽은 후 그녀는 서촌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 백창민


김해경.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이자 건축가인 이상의 본명이다. 1910년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은 세 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통인동에서 자랐다. 이상은 신명학교와 동광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일했다. 그는 스물여섯 인생 대부분을 서촌에서 살았다.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이 살던 집은 이제 '집터'만 남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상은 요양을 위해 배천온천에 갔다가 기생 금홍을 만나 종로 1가에 '제비다방'을 열기도 했다. 금홍과 헤어진 후 순옥이라는 여인을 만났으나 다시 헤어졌다. 1936년 6월 이상은 절친이자 화가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과 결혼, 다동 33-1번지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이상은 1936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7년 4월 17일 그는 서촌이 아닌 도쿄에서 26년 7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문인들이 자주 투숙하며 이용하던 곳이다. 1936년 스물두 살 서정주도 이곳에 머물렀다. 서정주는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며 '생명파' 활동을 이어갔다. 서촌은 생명파의 요람이기도 했다. 


서촌과 인접한 부암동에는 'B사감과 러브레터', '빈처', '술 권하는 사회'의 작가 현진건 집터가 있다. 현진건이 살던 부암동 325-5번지는 안평대군 이용의 집터와 가깝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진건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 현진건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37년 <동아일보>를 그만둔 후 작품 활동에 매진하다가 장결핵에 걸려 1943년 4월 마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주의 누상동 하숙집 시절 


▲ 윤동주 하숙집 터 누상동 9번지 윤동주가 하숙했던 한옥은 안타깝게도 1995년 철거됐다. 지금 있는 다세대 주택은 한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이다. 정병욱은 누상동 하숙집 시절에 대해 "아침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를 가보면 인왕산 수성동 계곡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다.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풍광 좋은 수성동 계곡을 두고 1.9km나 떨어진 창의문 근처, 지금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산책을 갔을까.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아침식사 전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종로구가 조성한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의 발길이 단 한번도 닿지 않은 언덕일 수 있다. ⓒ 백창민


시인 윤동주는 서촌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윤동주가 하숙했던 곳이 바로 서촌 누상동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1941년 5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후배 정병욱과 함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3층짜리 다세대 주택으로 바뀐 누상동 9번지가 윤동주가 하숙했던 곳이다. 윤동주가 서촌에서 하숙한 기간은 4개월이 채 되지 않는데, 여름방학 때 한 달 동안 고향인 북간도 용정(龍井)에 다녀왔다고 하니, 2개월 남짓 이곳에 살았던 셈이다. 


서촌에서 4개월 머문 윤동주는 1941년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긴다. 누상동 하숙집 주인 김송이 일제 고등경찰의 요시찰 인물이다 보니 하숙생 윤동주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해 연말까지 윤동주는 북아현동에 머무는데 '서시'와 '별 헤는 밤', '또다른 고향', '간(肝)'을 비롯한 그의 대표 시가 이때 쓰인다. 


윤동주 시집에 실린 시 중 '십자가', '바람이 불어', '눈 감고 간다' 같은 몇 편만이 누상동 시절에 쓰였다. 누상동에서 2개월 밖에 살지 않은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서촌 근처에 문을 연 건 살짝 낯 간지러운 게 아닐까. 윤동주문학관 뒤편에 만든 '시인의 언덕'도 윤동주가 살던 하숙집과 꽤 멀어서 그가 후배 정병욱과 함께 오르내렸다는 인왕산 중턱일 리가 없다. 

윤동주는 1938년 4월 9일 연희전문 문과 입학과 함께 경성에 와서 1학년 때는 송몽규, 강처중과 기숙사 생활을 하고 2학년 때인 1939년엔 북아현동과 서소문 일대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3학년 때인 1940년 다시 연희전문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졸업반인 1941년엔 신촌 하숙과 기숙사, 누상동, 북아현동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기간만 놓고 보면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대부분을 학교 기숙사 포함해 북아현동과 신촌, 즉 지금의 서대문구 일대에서 지냈다. 


어쨌거나 종로구는 발 빠르게 청운공원 끝자락에 윤동주문학관을 건립했다. 재미있는 건 정작 윤동주 대표작의 또 다른 산실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에서는 시인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기 어렵다는 것. 윤동주의 모교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세운 윤동주 시비와 윤동주 기념실이 관내에 있다고 안심한 걸까? 서대문구가 어물어물하는 사이 종로구는 윤동주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2017년 9월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윤동주문학제도 열었다. 


시인 동주의 사랑 이야기


▲ 윤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머문 기숙사, 핀슨홀 1922년 지어진 핀슨홀은 2층으로 보이지만 다락방 공간이 있어서 3층이다. 윤동주가 연전 1학년 때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사용한 방은 3층 다락방 공간이다. 핀슨홀 앞에는 1968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세운 ‘윤동주 시비’가 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는 핀슨홀을 ‘윤동주기념관’으로 새롭게 조성하는 중이다. ⓒ 백창민


정병욱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윤동주는 4학년 때인 북아현동 하숙 시절 이화여전 문과 졸업반 여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북아현동에서 하숙하는 동안 윤동주는 그 여학생과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며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서 서로 건너다보는"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윤동주의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정병욱이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동주가 쓴 '사랑스런 추억'은 기차역에서 이 여학생을 기다리던 추억을 시로 남긴 건 아닐까.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강하늘 분)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나오는 옥천 출신 이여진(신윤주 분)은 이화여전 여학생을 염두에 두고 영화 속에 그려낸 인물이다. 


윤동주의 사랑은 실제로 이어졌을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친구 강처중의 '발문'을 보면 윤동주가 사랑한 여성은 그의 연모를 몰랐고 그가 여성에게 고백조차 하지 않았다 하니, 동주의 사랑은 가슴 아픈 짝사랑으로 끝이 났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쓴 그의 시처럼 말이다. 


반듯한 미남이어서인지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학교 시절에도 여학생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얼굴이 잘 생겨서 거리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유심히 그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여자로부터 말을 건네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수줍음 많은 윤동주는 "한 번도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동주를 만든 건 독서가 팔할


▲ 윤동주가 소장했던 장서 윤동주는 고향 집에 8백 권 정도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 고향 집 한쪽 벽면을 모두 채웠다는 그의 장서를 보면 잡지와 책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윤동주가 얼마나 대단한 독서가이자 장서가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에 전시된 윤동주 소장 도서. ⓒ 백창민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정식 출간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원래 시집 제목을 '지금 세상이 온통 아픈 환자 투성이'라는 의미로 '병원'이라 붙이려 했다. 졸업을 기념해 77부 한정판으로 시집 출판을 희망했지만 일제의 검열과 출간 비용 부족 때문에 시집 출간을 포기한다. 윤동주는 정식 출간 대신 자신의 육필로 수기(手記) 시집을 3권 만들어 지도교수인 이양하, 후배 정병욱과 한 부씩 나눠 가졌다.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로 창씨개명하고 4월 2일 도쿄 릿쿄(立敎)대학에 입학한다. 릿쿄대는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메이지대, 호세이대와 함께 '도쿄 6대학'으로 꼽히는 명문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1941년 12월 7일, 미군의 도쿄 첫 폭격이 1942년 4월 18일이니까 윤동주는 긴박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도쿄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를 타려면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는데 이 서류 발급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적이었다. 


창씨개명 5일 전 윤동주가 쓴 시가 '참회록'이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기 전 윤동주는 자신의 책과 시 원고, 쓰던 책상을 친구 강처중에게 맡긴다. 강처중은 연희전문 1학년 때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기숙사 핀슨홀 3층 한 방에서 지낸 친구다. 우리가 윤동주문학관에서 윤동주 소장도서를 만날 수 있는 건 친구 강처중이 소중히 간직했다가 윤동주 가족에게 전한 덕분이다.


이 대목에서 시인 윤동주의 독서에 대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절친이자 윤동주와 명동학교, 숭실중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문익환 목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방학 때마다 사 가지고 돌아와서 벽장 속에 쌓아둔 그의 장서를 나는 못내 부러워했었다. 그의 장서 중에는 문학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많은 철학서적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한번 나는 그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해가 신학생인 나보다 훨씬 깊은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도 그의 독서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만큼 그의 독서 범위가 넓었다. 문학·역사·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했다. 꼭 다문 입술이 팽팽히 조인 채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 했었다.

그러고는 눈을 꼭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메모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그는 결벽성이 심했다고 하겠다." 


정병욱과 서촌에서 하숙하던 무렵 윤동주는 학교를 마치고 혼마치(本町: 지금의 충무로) 일대와 적선동 '책방 순례'도 자주 했던 모양이다. 정병욱은 '하교 후 충무로 지성당(至誠堂), 일한서방(日韓書房), 마루젠(丸善), 군서당(群書堂) 같은 신간 서점과 고서점, 적선동 유길서점(有吉書店) 을 자주 순방하다가 하숙집으로 가곤 했다'고 회고했다.


윤동주는 어떤 책을 소장했을까


▲ 연세대학교 교정에 서있는 언더우드 1세 동상 언더우드 1세(Horace Grant Underwood)의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다. 1885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를 창설하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고, 1916년 사망했다. 그의 장남이 언더우드 2세인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이고, 손자가 언더우드 3세(Horace Grant Underwood Jr.)인 원일한이다. 1927년 세운 언더우드 동상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1955년 다시 세웠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도 이 동상 앞에서 이양하 교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남긴 바 있다. ⓒ 백창민


친동생 윤일주 교수는 북간도 고향집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윤동주의 장서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그가 방학 때마다 이불 짐 속에 한 아름씩 넣어 오는 책은 8백 권 정도 모이었고, 그것은 우리 동생들에게 참으로 좋은 자양이 되었다. 그가 전문학교 시절 읽던 잡지로는 <문장>, <인문평론>이 있었고, 일본 잡지로는 <세르빵>, <시지>(詩誌), <사계>, <시와 시론>, 수필과 판화 전문지 <흑과 백> 등이었다. 그밖에 더 있었겠지만 생각나는 것은 그 정도이다.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서가에서 생각나는 책을 차례로 들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사 간행의 <현대조선문학전집>(전8권), 삼중당 발행의 <조선고전문학전집> 모두, <호암(湖岩) 전집>(전3권), <진단학보> 기간본 전부,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잡지로서 <문장>, <인문평론> 전부, 우리말 시집들과, 일본 책으로는 앙드레 지드 전집, 발레리 시 전집, 도스또옙스끼의 연구 서적, 릴케 시집, 프랑스의 시집들인데, 역시 그가 애독하는 것들이었다. 그밖에 일본 연구사의 영문학 관계의 책들, 영어 원서 등이었다. (중략)

그리고 그의 책 속에서는 흔히 마른 꽃잎이나 단풍잎이 끼여 있었다. 그가 즐기는 산책길이나 여행에서 가져온 것인데, 단풍잎에는 으레 장소와 날짜가 씌어 있었다. 그의 시 전작품에 작품 날짜가 거의 기입되어 있듯, 그의 장서에도 대부분 책을 산 날짜가 이름과 함께 기입되어 있다."


윤동주가 시인 백석의 <사슴>을 사본으로 입수한 사연도 눈에 띈다. 1936년 1백 부 한정으로 나온 <사슴>을 구할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1937년 8월 5일 광명중학교 도서실에서 하루 종일 베껴서 사본으로 소장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얽힌 윤동주의 흔치 않은 일화다. 


추운 겨울 학생복을 수선하라고 부모가 준 돈으로 책을 사 볼 정도로 동주는 책을 좋아했다. 유학 생활 동안 동생들에게 책 선물을 자주 보내고 방학 기간 고향 집에 머물 때도 "손에는 책이 쥐어 있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한다.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인도 사랑하는 명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동주의 탁월한 시는 그가 뛰어난 독서가이자 장서가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명시를 남긴 윤동주는 시를 어떻게 썼을까. 원고지에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무수한 수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정병욱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혀지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강처중도 비슷한 회고를 남겼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준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玉)이다."


동주는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지만 그가 시를 쓱쓱 쉽게 써댄 시인은 아니었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윤동주와 그의 문학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 끝까지 증명해낸 일본인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윤동주문학관 ②

19.05.02 16:51l최종 업데이트 19.05.22 15:06l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편집: 이주영(imjuice)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일제 강점기 3대 사립 전문학교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는 시인 윤동주가 4년을 보낸 모교다. 1915년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 원두우(언더우드 1세)가 기증한 230여 권의 책으로 출발한 연희전문 도서관은 1940년 당시 도서관과 문과, 상과, 이과 연구실을 합쳐 6만여 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1935년을 기준으로 연희전문(4만9천 권)은 보성전문(3만 권)이나 이화여전(1만6천 권)보다 많은 장서를 가진 곳으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고는 장서가 가장 많은 학교였다. 


장서량은 많았으나 당시 연희전문은 보성전문처럼 독립된 도서관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1925년 6월 완공된 언더우드홀 3층을 도서관으로 썼다. 지금도 남아있는 언더우드관이 바로 연세대학교 도서관의 모태인 셈이다. 연희전문 도서관은 열람실, 서고, 사무실로 이뤄져 있었고 듀이십진분류법으로 책을 분류했다. 1940년 당시 도서관장은 이묘묵이었고 도서관원 1명과 도서역 2명이 직원으로 있었다. 장서량이 많아 그런지 직원 수도 당시 전문학교 중에 가장 많은 편에 속했다. 


윤동주 재학 시절 연희전문 도서관


▲ 연희전문 도서관이 있던 언더우드관 연희전문 시절 도서관은 언더우드관 3층에 있었다. 연희전문은 도서관 뿐 아니라 문과, 이과, 상과 연구실에 자료를 분산 비치해서 학생들이 책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부분은 보성전문이나 이화여전과 다른, 연희전문 도서관만의 특징이다. 윤동주 재학 당시 연희전문 도서관은 일제 강점기 전문학교 중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대학본부로 쓰인다. ⓒ 백창민


이묘묵은 1926년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근대사 최초의 '도서관학 석사'가 아닐까 싶은데, 연희전문 교수직과 도서관장을 함께 맡은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1936년 1월 1일 <동아일보>가 '문화조선의 다각적 건축'이라는 학술 특집면을 냈을 때 이묘묵은 '종합도서관 문화계수기(文化計數機)'라는 글을 썼다.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도서관 전문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영어 실력 때문에 이묘묵은 해방 후 특별비서관이라는 직함으로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한다. 이 과정에서 이묘묵은 실권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친일 활동으로 이묘묵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다.


<우리말본>을 쓴 외솔 최현배도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연희전문 도서관 촉탁으로 몸 담은 바 있다. 윤동주는 연전에서 외솔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동주는 외솔이 쓴 <우리말본>을 그의 고향집 서가 가장 좋은 자리에 꽂아 두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원두우(언더우드 1세)의 손자 원일한(Horace Grant Underwood Jr.)은 연희전문 도서관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기 전해엔가는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대학 도서관을 수색, 불온문서란 이름으로 귀중도서 수백 권을 압수해갔다고 들었다. 압수 당한 도서 가운데는 한일합병에 관한 영문 사료도 포함돼 있었다."


원일한이 증언한 연희전문 도서관 수색과 압수가 있던 해는 1938년이다. 연희전문 38학번 윤동주도 도서관 탄압 소식을 알았을 것이다. 동주는 도서관 책조차 마음 놓고 읽기 어려운 환경에서 연전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연희전문 도서관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기록은 없지만 대단한 독서가였던만큼 도서관도 즐겨 이용하지 않았을까. 


송몽규와 윤동주의 독립운동을 밝힌 두 나라 사서


▲ 영화 <동주> 포스터 문익환 목사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자기보다 매사 한발 앞서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고 한다. 윤동주가 자신의 말처럼 대기만성형이라면 송몽규는 천재형이 아니었을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아름다운 두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는 2016년 2월 17일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 <동주>라는 이름으로 제작, 개봉된다. 영화 <동주>는 117만 명이 관람했다. ⓒ ㈜루스 이 소니도스


일본 유학 첫 해 쓴 작품이면서 동주가 남긴 마지막 시가 '쉽게 씌어진 시'다. 영화 <동주>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 만나는 여학생 쿠미(최희서 분)가 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밝힌 것처럼 쿠미는 가상 인물이다. 도쿄 유학 시절 윤동주는 결혼 상대로 친구 여동생 박춘혜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이어지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윤동주는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긴다. 1875년 설립된 도시샤는 일본 사립대학 중 여덟 번째로 문을 연 곳으로 윤동주가 다니던 릿쿄대학보다 오래된 학교다. 도시샤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이기도 하다. 윤영춘의 회고에 따르면 교토 시절 윤동주는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새벽 2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향하려 했던 윤동주는 7월 14일 일본 특수경찰인 특고(特高) 형사에게 체포된다. 절친이자 교토에서 함께 유학하던 송몽규와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윤동주의 체포와 투옥에 대해 그의 가족은 '독립운동' 혐의였음을 주장했으나 국내 문학계는 일제의 과잉 단속에 희생양이 된 걸로 받아들여 왔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실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됐음을 일본 정부 서류를 발굴해서 입증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도시샤대학 출신이자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인 우지고 츠요시(宇治鄕毅)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부관장을 지내고 <근대 한국 도서관사의 연구>(近代韓国図書館史の研究, 1988)를 쓰기도 한 우지고 츠요시는 일본 정부의 극비문서 중 특별고등경찰의 <특고월보>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 책동 개요' 문서를 찾아냈고, 또 다른 극비문서인 <사상월보>에서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을 찾아 공개했다(<사상월보>에서 윤동주 판결문을 찾아 공개한 사람은 또다른 일본인 이부키 고다).  


우지고 츠요시가 일본 정부 비밀문서를 발굴해서 공개한 사연에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정병욱의 남동생이자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였던 정병완은 1970년 10월 15일부터 1주일 동안 윤동주 서거 25주년, 국립중앙도서관 개관 25주년 기념으로 '시인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던 우지고가 이 전시회를 자세히 살펴보고 정병완을 통해 윤동주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없다는 사연을 들었다고 한다(관련기사 : "영화 <동주>가 빼먹은 특별한 '엔딩 크레디트'").


일본으로 돌아간 우지고는 기밀문서 해제 시점에 해당 문서를 발굴해서 한국에 전했고, 그의 노력으로 1977년 <문학사상> 12월호에 일본 특고경찰의 비밀기록이 공개됐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독립운동 기록의 발굴·공개는 한일 두 나라 도서관 사서의 기묘한 인연과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 신분으로 자국의 어두운 과거사를 공개하는 데 앞장 선 우지고 츠요시의 행동은 지성인인 사서로서의 귀감이 아닐까. 일본인으로서 그가 겪었을 고심에도 불구하고 학자와 사서로서 그가 양심에 따라 한 행동 덕분에 우리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마지막, 그리고 최후의 진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지고는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해서 <시인 윤동주로의 여행>(詩人尹東柱への旅)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44년 3월 31일 윤동주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규슈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지 19개월, 8.15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1945년 3월 7일에는 절친이자 후쿠오카 감옥에 함께 투옥된 송몽규도 옥사한다.


윤동주 유해는 아버지에 의해 후쿠오카에서 화장돼 1945년 3월 6일 북간도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동주의 장례식 때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됐다. 장례 후 그의 유골은 용정 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집을 내지 못했지만 시인으로 살다 간 그의 무덤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기적처럼 전해진 윤동주의 육필원고


▲ 중정으로 꾸민 윤동주문학관 제2전시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은 청운수도가압장의 기계실을,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은 2개의 콘크리트 물탱크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제2전시실은 물탱크 천장을 제거해서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중정으로 꾸몄다. 제2전시실 벽체에 남아있는 네모난 구조물과 철심은 콘크리트 물탱크로 들어가는 입구와 철제 사다리 흔적을 남겨둔 것이다. ⓒ 백창민


일본 유학 중 옥사한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가 가진 시집은 전해지지 않았고, 후배 정병욱이 챙긴 육필원고만이 무사히 전해져 1948년 정음사 판으로 출판됐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윤동주 육필원고 보관을 신신당부했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서 술도가를 한 정병욱 어머니가 마루 아래 항아리에 소중히 보관하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기적처럼 전해졌다.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통해 자세히 밝힌 것처럼 후배 정병욱뿐 아니라 친구 강처중의 공도 컸다. 강처중은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유품을 전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시를 소개했다.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가 정지용의 찬사와 함께 실린 건 강처중이 애쓴 덕분이다.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나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31편의 시가 실렸는데, 19편은 정병욱이 보관했던 수기 시집에, 12편은 강처중이 보관했던 유품에 있던 시다.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강처중의 발문이 실려있다. 정병욱과 강처중,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를 전한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돼 학자의 길을 걸었다. 정병욱의 소개로 그의 여동생 정덕희는 윤동주 시인의 남동생 윤일주와 결혼, 두 집안은 인척이 된다. 강처중은 경향신문 조사반에서 일하다가 좌익 활동 혐의로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강처중은 1950년 9월 4일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 강처중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문학관


▲ 김현옥 시장 시절 지은 청운아파트 11개동이 있던 청운아파트는 모두 철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서울시는 이 자리에 청운공원을 조성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문학도서관이 자리하면서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윤동주문학관이 건립된 청운공원은 원래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1966년 4월 1일 40세 나이로 최연소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은 강력한 추진력 때문에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김현옥 시장은 '돌격'이라고 적힌 헬멧을 쓰고 다니며 군사 작전을 하듯 서울을 개발했다. 서울 전역이 공사판이던 시대다. 


그런 김현옥 시장이 1969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헐고 시민아파트 10만 호를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수송장교 출신답게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다. 시민아파트는 금화아파트, 낙산아파트, 회현아파트를 비롯 32개 지구에 434개 동 1만7402호가 지어졌다. 1970년 4월 8일 지은 지 3개월밖에 안 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나 34명이 죽고 40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도 이 때다. 


김현옥 시장의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 일환으로 인왕산 기슭에 들어선 아파트가 청운시민아파트다. 1969년 11월 청운아파트는 11개 동 513세대 규모로 지어졌다. 1969년 10월 20일 입주 공모를 했는데 4일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500세대가 넘게 거주한 청운아파트는 청와대가 가까워 경호실 직원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2003년 정밀 안전진단에서 청운아파트가 재난위험지역에 해당하는 D등급을 받자 주민 퇴거가 시작되고, 지은 지 36년 만인 2005년 9월 철거됐다. 서울시는 청운아파트를 철거한 후 나무 1천여 그루를 심고 녹지를 가꿔 2007년 1월 청운공원을 조성했다. 2009년 7월 11일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고 '서시' 시비가 세워졌다. 


윤동주문학관을 세우려 했던 종로구는 예산과 부지가 마련되지 않아 고심하다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 근처에 방치돼 있던 청운수도가압장에 주목한다. 가압장은 느려진 물살에 압력을 가해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시설로 지대가 높은 청운동 일대에 안정적인 상수도 공급을 위해 1974년 지었다. 종로구는 2010년 12월 4일 청운수도가압장 기계실에 윤동주문학관을 임시로 개관했다.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한 윤동주문학관 


▲ 윤동주문학관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서일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문학관과 기념관, 도서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2012년 종로구가 개관한 윤동주문학관에 이어, 연세대학교는 2019년 현재 핀슨홀을 윤동주기념관으로 조성중이고, 은평구는 2018년 <새로운 길>의 시구를 딴 "내를 건너 숲으로 도서관"을 개관했다. ⓒ 백창민


종로구가 보안여관, 이상집터, 윤동주 하숙집터, 정철 생가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이르는 '문학둘레길'을 만들면서 윤동주문학관 리모델링 사업이 본격화된다. 임시로 운영 중이던 윤동주문학관 리모델링은 건축가 이소진이 맡았다. 설계에 착수한 지 418일이 지난 2012년 7월 25일, 윤동주문학관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제1전시실인 시인채에는 윤동주 시인의 인생이 연대기 순으로 정리돼 있고 그가 아끼던 소장도서, 유품, 육필원고를 만날 수 있다. 제1전시실 한복판에는 윤동주의 고향에서 가져온 우물 목곽이 자리하고 있다. 제2전시실인 열린 우물은 가압장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해서 중정(中庭)으로 만든 공간이다.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그대로 보존한 공간으로 박범찬 PD가 만든 시인에 대한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카페 공간인 별뜨락에서는 차와 음료를 즐길 수 있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함께 거닐어볼 수 있다. 


콘크리트 물탱크를 활용해서 독특한 느낌을 주는 제2, 제3전시실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을 뻔했다. 리모델링 설계를 마치고 착공을 앞둔 2011년 7월에 폭우가 쏟아졌다. 전국 각지에서 산사태와 인명 피해가 나면서 청운수도가압장도 구조안전진단을 다시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 이소진은 뜻밖의 발견을 한다. 가압장 사무실 건물 뒤편에 있던 콘크리트 물탱크 2개를 발견한 것이다. 이소진은 물탱크를 전시실로 활용하는 새로운 설계에 착수한다. 5.9미터 깊이 콘크리트 물탱크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심했던 건축가 이소진과 스토리텔링팀은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을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로 각각 표현한 것은,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을 문학관의 핵심 콘셉트로 잡은 덕분이다.


독특한 풍경을 지닌 윤동주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한국의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건축가 이소진에게 2012년 '젊은 건축가상'을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윤동주문학관은 도서관이 아니다. 여느 도서관처럼 만인의 책을 만날 수 없고 작품을 대출할 수도 없다. 전시품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가 아닌 정밀하게 영인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전시품보다 공간과 '영혼의 가압장'이라는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하는 독특한 문학관이다. 


하지만 어떤가. 동주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아니던가. 오직 한 사람, 시인 윤동주를 깊이 만나고 싶다면 이곳, 윤동주문학관을 찾으시라. '닭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부는' 우물 속, 홀로 있는 사나이를 만나고 싶다면 이곳을 찾으시라. 


[윤동주문학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19 (청운동)

- 이용시간 : 10:00 - 18: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시 소재 학생 또는 직장인, 무료

- 홈페이지 : https://www.jfac.or.kr/site/main/content/yoondj01

- 전화 : 02-2148-4175 

- 운영기관 : 종로문화재단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윤동주와 그의 문학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17. 고양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