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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Oct 26. 2021

창세기 5장

- 이어도 공화국 14





창세기 5장




하늘에서 연자방아를 돌리고 있다

잘 갈아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무등이왓 조 밭이 햇살에 익고 있다

무등이왓 오메기* 밭이 햇살에 익고 있다

잠복학살터 곁에 있는 조 밭에서 술렁거리는 소리 들린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이란 글자에 녹이 슬어있다

그날, 정방폭포 위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한결같은 오메기 이삭들이 고개를 깊숙이 떨구고 있다


큰넓궤와 도엣궤로 숨었다가, 영실 볼레오름까지 쫓겨갔다가

정방폭포에서 총을 맞고 떨어져 바다가 되어버린 사람들

파도소리 들리는 헛묘의 목백일홍 영혼처럼

조 이삭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오메기 이삭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새들이 먹지 말라고 씌워놓은 푸른 양배추 망들

그 속에 갇혀 있는 조의 모가지들이, 오메기 모가지들이

함께 학살당한 가족들 같아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말 목장의 말들도 보이지 않고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만들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의 구름들이 굿판을 벌이고 있다

시인들이 시를 낭송하고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춤꾼들이 춤을 추고 가수들이 노래를 부른다

심방이 굿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


조 밭에서 오메기떡 냄새가 난다

조 밭에서 오메기술 향기가 난다

조 밭에서 오소리술 향기가 난다

큰넓궤와 도엣궤에서 잘 숙성된 술은

헛묘에 올려질 것이고 정방폭포에 뿌려질 것이고

영실 볼레오름에 뿌려질 것이고 큰넓궤에 뿌려질 것이고

여수로 갈 것이고 광주로 갈 것이고 지리산으로 갈 것이고

오키나와로 갈 것이고 베트남으로 갈 것이고 미얀마로 갈 것이다


그런데 아,

잃어버린 마을, 조릿대들만 무성한 마을에 들어선

저 거대한 건축물은 도대체 무엇이더냐

저 거대한 십자가는 또한 도대체 무엇이더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되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저 하나님의 궁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꿈의 사다리이더냐


나는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담 자손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담은 셋을 낳았고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았고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았고

야렛은 에녹을 낳았고

에녹은 므드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는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노아를 낳았고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나는 아직 나의 계보를 알지 못한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내 피 속에는 하나님의 피가 섞여있다 하느님의 피가 섞여있고 단군할아버지의 피가 섞여있고 설문대할망의 피가 섞여있고 부처님의 피가 섞여있고 공자님의 피가 섞여있고 예수님의 피도 섞여있다 나의 몸속에는 아담의 피도 섞여있고 이브의 피도 섞여있고 루시퍼*의 피도 섞여있다


하늘에서는 연자방아가 돌아

잘 갈아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데

무등이왓에서 돌던 연자방아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이 가득 담겨 찰랑거리고 있다





* 오메기 : 차조의 제주도 말. 제주 4.3의 와중에 잃어버린 마을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제주민예총 예술가들이 200평의 밭을 빌려 조 농사를 짓고 있다. 조가 잘 여물어 결실을 얻으면 그것으로 제주의 전통술인 고소리술을 빚을 계획이다. 빚어낸 술은 4.3 당시 피난처 중 한 곳인 큰넓궤에서 숙성시킬 예정이다. 술이 익으면 제주와 같은 역사를 지닌 곳과, 여전히 그런 아픔이 진행되는 세상의 모든 현장으로 보낼 계획이다. 바라건대, 술이 잘 익어서, 세상 모든 곳에서 숨져간 영혼들의 마른 목을 축이는 생명수가 되길 기도한다.


* 루시퍼 : 루시퍼는 ‘빛을 내는 자’, ‘새벽의 샛별’이라는 뜻으로, 천계에 있을 때는 신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던 존재였다.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으며 모든 천사를 지휘하던 루시퍼에게 점차 ‘오만’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이 신의 분노를 사서 그는 하늘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신을 배반하여 쫓겨난 루시퍼가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이브를 유혹하여 악마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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