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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Oct 27. 2021

무등이왓

- 이어도 공화국 15





무등이왓




제주도 예술가들은 앞서가는 사람들이다. 서울에 비하면 여건이 좋지 않지만 열정이 많아서 뛰어난 성과까지 거두고 있다. 제주도 예술가들은 이제 제주 4.3을 넘어 세계 평화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4.3의 진실 찾기와 해원과 상생에 열중하던 제주도 예술가들이 이제는 제주도를 넘어 여수 순전 광주를 넘어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제주 4.3의 와중에 잃어버린 마을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제주민예총 예술가들이 200평의 밭을 빌려 조 농사를 짓고 있다. 조가 잘 여물어 결실을 얻으면 그것으로 제주의 전통술인 고소리술을 빚을 계획이다. 빚어낸 술은 4.3 당시 피난처 중 한 곳인 큰넓궤에서 숙성시킬 예정이다. 술이 익으면 제주와 같은 역사를 지닌 곳과, 여전히 그런 아픔이 진행되는 세상의 모든 현장으로 보낼 계획이다. 바라건대, 술이 잘 익어서, 세상 모든 곳에서 숨져간 영혼들의 마른 목을 축이는 생명수가 되길 기도한다.


기저질환자인 나는 올해 코로나19 때문에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 홀로 다니곤 하였다. 예술가들이 200평의 밭을 빌려서 조 농사를 짓고 있는 무등이왓에도 홀로 조용히 다녀왔다. 그곳에서 나는 망 몇 개 씌워주고 요즘 쓰고 있는 창세기 한 편을 썼다. 내가 쓰는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창세기가 아니라 탐라국의 창세기이며 내가 만들고 있는 이어도공화국의 창세기가 될 것이다. 단순한 창세기기 아니라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의 일부가 될 것이다.


  무등이왓은 동광리의 한 마을이었다. 4.3 당시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 호), 삼밧구석(마전동 45호), 조수궤(10여 호), 간장리(10여 호), 사장밧(3호)등 약 200여호가 있었다. 무등이왓은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지금까지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다. 이곳은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주민들은 주로 목축과 조·메밀·콩 등을 재배하며 살았다. 교육열이 높아 일제시기인 1939년에 2년제인 동광간이학교가 건립됐는데, 감산리에 있었던 안덕공립보통학교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 유일의 교육기관이어서 창천·서광·덕수·상천 등지에서는 물론 중문면 색달리에서도 학생들이 취학했다.


4·3사건 당시 마을이 불타 버리자, 주민들은 도너리오름 앞쪽의 큰넓궤에 숨어드는 것을 시작으로 눈 덮인 벌판을 헤매다 유명을 달리했다. 4·3사건으로 무등이왓(130여 호)에서 희생자는 100여명에 이른다. 70여 년 전에 130호나 살고 있던 큰 마을이었으나 4·3사건 당시 마을이 불타버리자 이후 재건되지 못하여, 집터자리는 대나무 숲만 무성하다. 올렛길·돌담 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무등이왓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230번지 일대로, 잃어버린 마을터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마을 규모가 컸던 만큼 4·3사건 피해도 큰 마을이었고, 대나무 숲과 팽나무들이 마을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옛 마을의 구조를 살펴 볼 수 있고, 4·3사건의 아픔을 체험 할 수 있는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등이왓' 마을
동광리 5개 부락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서 가옥이 130호가 있었다. 국영목장인 7소장이 있어 말총을 쉽게 구할 수가 있고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주산지였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 학살터와 잠복 학살 터 등이 있는데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지금은 사라진 초가집 울담 따라 아직도 대나무가 많아 오순도순 살았던 당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정경이 그려진다. 

무등이왓마을 최초 학살 터
1948년 11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 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온 토벌대들이 동광리에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주민 10여 명을 호명하여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했는데 덜 맞은 사람은 도망을 쳤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모두 총살을 당한 현장이다.


무등이왓마을 옛 공고판
마을의 추곡수매나 대, 소사 혹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공고를 붙였던 자리이다. 일제 때는 가혹한 수탈의 공출을 알리는 공고가 있었고 4.3 바로 전해에는 식민지 치하에서나 겪었던 강탈이나 다름없는 보리 공출을 알리는 공고가 붙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곳이다. 

광신사숙
1930년에 설립된 동광리서당인 광신사숙이 있던 자리이다 . 학생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배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이후 동관 간이 학교로 개편되어 지역인재를 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으로는  김봉춘,이두옥씨가 있었다.







https://youtu.be/DcGrLVVtX8o


https://youtu.be/ouFRWnOxNIo


https://youtu.be/qOR0RmPDd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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