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창세기부터 다시 세상을 읽으며
멀고도 긴 순례를 떠난다
30년 넘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내 삶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1
― 태초에는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2
― 제주의 사계(四季)
제주의 봄은 사월에 피어난다
서천의 붉은 노을 꽃으로 피어난다
사월의 영혼들이 서천꽃밭 꽃감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제주의 여름은 숨비기꽃으로 피어난다
인어들의 숨비소리로 피어난다
포작(鮑作)이 진상하던 전복을 잠녀(潛女)가 시작한 후
숨비기꽃은 더욱 낮게 엎드려 향기로 깊어진다
제주의 가을은 감귤 향으로 익어간다
천 년을 고통나무로 버티어 한 때 대학나무가 되었던 감귤나무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던 1894년에
비로소 폐지된 진상제도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제주의 겨울은 한라산으로 온다
구상나무들이 하얗게 옷을 갈아입는다
곰과 사자와 호랑이가 흰 눈으로 나오는 길
설문대할망 자청비 영등신이 드나드는 입구도 보인다
가끔은 신(神)들을 따라 옥황상제가 그 길 따라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神)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섬에
다시 사월이 오고 있다 사월의 겨울이 오고 있다
강정으로 들어오고 있다 겨울이 세상을 뒤덮어도
끝내 복수초는 두꺼운 얼음을 뚫고 나오리라
신(神)들이 벗어놓은 발자국마다 얼음새꽃이 따뜻하게 피어나리라
https://youtu.be/RsoCQ5iSnZ8
https://youtu.be/WxUUWuoVn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