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창세기부터 다시 세상을 읽으며
멀고도 긴 순례를 떠난다
30년 넘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내 삶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1
― 태초에는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2
― 제주의 사계(四季)
제주의 봄은 사월에 피어난다
서천의 붉은 노을 꽃으로 피어난다
사월의 영혼들이 서천꽃밭 꽃감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제주의 여름은 숨비기꽃으로 피어난다
바다 어머니들의 숨비소리로 피어난다
포작(鮑作)이 진상하던 전복을 잠녀(潛女)가 시작한 후
숨비기꽃은 더욱 낮게 엎드려 향기로 깊어진다
제주의 가을은 감귤 향으로 익어간다
천 년을 고통나무로 버티어 한 때 대학나무가 되었던 감귤나무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던 1894년에
비로소 폐지된 진상제도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제주의 겨울은 한라산으로 온다
구상나무들이 하얗게 옷을 갈아입는다
곰과 사자와 호랑이가 흰 눈으로 나오는 길
설문대할망 자청비 영등신이 드나드는 입구도 보인다
가끔은 신(神)들을 따라 옥황상제가 그 길 따라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神)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섬에
다시 사월이 오고 있다 사월의 겨울이 오고 있다
강정으로 들어오고 있다 겨울이 세상을 뒤덮어도
끝내 복수초는 두꺼운 얼음을 뚫고 나오리라
신(神)들이 벗어놓은 발자국마다 얼음새꽃이 따뜻하게 피어나리라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3
― 일주일
하나님께서 가장 잘 하신 것은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신 일이다
일곱째 날에 반성을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못 하신 것은
여자를 흙으로 만들지 않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잘 하신 것은
일주일을 만들어 주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못 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일주일을 만드셨고
달님은 한 달을 만드셨고
해님은 일 년을 만드셨고
해와 달의 사랑이 하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제
일주일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날마다 쉬지 못하고 밤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
2조1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3조2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4조3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5조3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날마다 놀고먹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만든 남자와 여자는 모두 떠나고
스스로 이 세상에 공평하게 태어난 여자와 남자들이 산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날마다 나를 창조한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이어도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베이스캠프를 먼저 만든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4
― 입춘 무렵
동지섣달 지나고 입춘이 코앞이다
아픈 삶을 지나고 죽음이 코앞이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길이 보인다
머지않은 세월 지나면
아픈 장기들은 새로운 장기들로 교체될 수 있으리라
기계들의 부품을 새로운 부품들로 교체하듯이
사람들은 이제 앞으로
손이 아프면 새로운 손으로 바꾸고
심장이 아프면 새로운 심장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인간들은 이제 앞으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드디어 뇌까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면
뇌까지 인공뇌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나와 새로운 나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배가 고픈 좀비들의 세상에서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옹달샘의 물소리로 흐른다
흐르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수선화와 복수초와 매화꽃들이
펑펑펑 울음을 토하며 피어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5
― 깊은 밤 산책
깊은 밤 산책을 나간다
개 짖는 소리 멀어지고
지상의 불빛 모두 사라진다
계곡 물소리가 나를 감싼다
물소리를 짚고 가는 지팡이 소리에
하늘에는 젖은 별빛들이 피어나고
월라봉에서는 노루가 노루를 부른다
유반석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박수기정에서
항아가 내려와 샘물 마시는 소리 들린다
‘김광종영세불망비’ 앞에 앉아서 나는
도깨비들의 춤을 보며 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휴대폰 메모장에 물소리와 별빛을 받아 적고
다시 하늘을 보니
그 많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다시 별빛을 찾아서 계곡으로 돌아가는데
별들은 보이지 않고 동백꽃들만 길가에 내려앉아
깊고도 푸른 물소리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6
― 탐라국 입춘 굿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눈송이인지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할망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천지왕 허락 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이 없는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치고 꽹과리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대불처럼 몰려온다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신명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 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7
― 대나무와 사랑초
2014년 4월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세월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심장 대동맥판막을 뜯어먹던 세균들을 겨우 몰아내고 돌아와서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에 대나무를 심고 해바라기 씨앗을 심었다
동백나무를 심고 감나무를 심고 매실나무를 심고 감귤나무를 심으면서 나온 돌들은
돌탑을 쌓고 돌담을 만들고 돌길을 만들면서 삐걱거리는 심장소리가 헐떡거렸다
서천꽃밭에 수많은 꽃들이 피었다 져도 가문장아기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병,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병
비후성심근증이 재발하여 심실벽이 두꺼워졌다
벽이 두꺼워진 만큼 방은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장난 문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내 삶의 밤이 가장 길었던
2017년 12월 22일 동짓날
나의 대동맥판막은 칼날 같은 금속판막으로 바뀌었다
째깍 째깍 째깍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나의 시계 소 리가 되기 시작했다
나의 시간은 이제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나는 이제
전면에 배치했던 대나무를 뒤로 옮겨 심는다
죽창 들고 앞장서던 대숲이 뒤로 물러난다
대쪽 같은 절개의 마음으로 퉁소를 불고
때로는 만파식적을 불며
한라산처럼 떡 버티며
북풍을 막아주는 뻣뻣한 정신이 된다
빈 앞에는 이제 수선화와 사랑초들이 피어날 것이다
대나무와 소나무는 뒤에서 사철 푸르게 지키고
복수초 사랑초 수선화 향기가 전면에 나선다
가문장아기는 이제 마퉁이를 만나 꽃을 심는다
자청비는 이제 문도령을 다시 만나 씨앗을 뿌린다
백주또는 소로소천국을 만나 자식을 낳고 나무가 된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8
― 설날 아침에
설날 아침에 월대천 아래 징검다리 건너간다
밤새 떡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온 아들이
가져온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여먹고 산책을 나간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내려온 물이 바다로 간다
월대천의 은어들이 징검다리 사이로 오르내린다
배부른 청둥오리들이 서로의 깃을 다듬어주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기르던 오리들과 소의 눈빛이 보인다
내가 꼴을 베어 먹이던 송아지도 징검다리 아래로 간다
삼기천을 건너 발을 씻으며 갱본으로 가서 햇빛을 하품한다
외도 앞바다에 누워계신 해수관음상을 둘러보고
한라산에서 내려와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몽돌, 해변
내도 알작지의 파도소리에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알작지 해변에는 설날에도 군밤을 파는 낡은 트럭과
반짝반짝 빛나는 캠핑카들이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다
월대천 징검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던 황소 한 마리
낭쉐가 되어 관덕정 앞으로 바퀴를 달고 달려간다
바다에도 징검다리가 있다 섬들의 징검다리가 있다
나는 먼바다를 건너간다 코로나19 마스크를 쓰고 간다
그런데 왜 자꾸만
대동맥이 파열되어 통째로 인공대동맥으로 갈았다는
부산에서 대기업 임원을 하였다는 사람이 생각이 날까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기계판막으로 바꾼 후부터
나의 심장 속에서는 피 묻은 나비 한 마리 날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만든 칼날 같은 날개로 젖은 하늘을 날고 있다
나는 자꾸만 그 날개의 칼날이 대동맥을 찢는 꿈을 꾼다
추자도 거문도를 지나 여수로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하지만 나는 여수로 날아가지 못하고 하동포구를 지나
섬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한 마리가 된다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는 빈 고향집에 들렀다가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어머니 아버지께 절을 올린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9
― 폭낭과 야자수
제주도 팽나무와
워싱턴 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가지 많은 나무가 허리도 펴지 못하고 그늘을 가꾼다
벌레들에게도 젖을 물리며 숨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가지 하나 없는 나무가 하늘 높이 탑만 쌓아 올린다
우리들의 하늘을 함부로 들쑤시고 있다
붉은 해가 솟는다
워싱턴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붉은 해가 기운다
가슴이 넓은 나무가
홀쭉한 나무를 가만히 안아준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10
―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11
― 심재산방
심재산방에서 보니
나와 식물이 하나로 보인다
마음을 굶겨보니
몸의 속까지 다 보인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있고
사람의 뿌리는 가슴 속에 있다
나무의 뿌리는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고
사람의 뿌리는 알뿌리처럼 둥그렇다
알뿌리 같은 심장이 땅에 묻혀도
나의 가슴에는 피가 잘 돌아
나의 생각은 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랄 것만 같다
너덜너덜한 대동맥판막, 망가진 심장도
땅 속에서는 뿌리를 잘 내릴 것만 같다
좌망정에 앉으니
계곡에 숨겨놓은 배도 보이고
늪에 감추어둔 그물도 보인다
월라봉에서 날아오는 학의 긴 다리도 보이고
바다로 날아가는 오리의 짧은 다리도 보인다
산방산에 눌러앉은 구름도 보이고
강정으로 실려 가는 마징가 같은 케이슨도 보인다
심재산방 좌망정에 앉아 눈을 감으니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천 년의 강물에 빈 배 하나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빈 배 가득 하늘이 실려 간다
* [제주신화] 가문장아기(삼공본풀이)
옛날 강이영성이어불이라는 남자거지가 윗마을에 살았고, 홍은소천궁에궁전궁납이라는 여자거지는 아랫마을에 살았는데, 흉년이 들어 살기가 어렵게 되었어요. 그런데 윗마을에서 아랫마을이, 아랫마을에서는 윗마을이 풍년이 들었다고 소문이 나서 두 거지는 이웃마을로 가다가 만나 부부가 되었어요.
부부는 품팔이를 하며 그럭저럭 살았는데, 얼마 없어 부인에게서 태기가 있어 딸이 태어났어요. 가난한 부부는 딸에게 먹일 쌀도, 입힐 옷도 없어 울었어요.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이 은그릇에 밥을 해주어 딸을 키웠어요. 그래서 아기의 이름은 은장아기가 되었어요.
아이가 두 살이 넘자 다시 임신을 한 부인이 아기를 낳고 보니 또 딸이었어요. 동네 사람들은 다시 도와주었지만 성의가 없이 놋그릇에 밥을 해다 주어 놋장아기라고 불렀어요. 세 번째 딸이 태어나자 나무그릇에 밥을 담아다 주어 가믄장아기라 이름을 지었어요.
세 딸이 태어난 후, 하는 일마다 잘 되어 밭이 생기고, 말과 소가 우글거리고 마침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게 될 만큼 큰 부자가 되었어요.
세월이 흘러 딸들도 열다섯 살이 넘어갔어요.
가랑비가 내리는 날, 부부는 맏딸을 불러 물었어요.
“은장아기야,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입고 사느냐?”
“하늘님의 덕도 있고, 염라대왕도 덕이 있고, 아버님, 어머님 덕으로 삽니다.”
“착하다. 넌 방으로 가라.”
둘 때 딸도 첫째 딸과 같이 대답을 하자 부부는 다시 막내딸을 물었어요.
그런데 가믄장아기의 대답은 달랐어요.
“하늘님 덕도 있고, 아버지, 어머니 덕도 있지만 내 배꼽 아래 그뭇 덕으로 먹고 삽니다.”
그러자 부부는 화를 내며 “이런 불효막심한 년, 어서 빨리 집에서 나가거라.”하고 내쫓았어요.
가문장아기가 검은 소에 짐을 싣고 문밖으로 나가자 섭섭해서 큰 딸에게 말했어요.
“설룬 작은 아기에게 식은 밥에 물을 말아 놓은 것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해라.”
그러자 은장아기는 가믄장아기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재산을 나누는데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노둣돌 위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말했어요.
“가믄장아기야, 빨리 가라! 아버지, 어머니가 너를 때리려고 쫓아간다!”
가믄장아기는 언니의 속셈을 알고 속삭였어요.
“노둣돌 아래 내려서거든 파란 지네나 되세요.”
이렇게 중얼거리니 은장아기는 지내가 되어 버렸어요.
부모는 가믄장아기를 데리고 오는 줄 알고 한참 기다려도 은장아기도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놋장아기에게 가믄장아기를 데려오라고 말했어요. 놋장아기도 은장아기와 똑 같이 말을 하자 가믄장아기는 다시 중얼거렸어요.
“두엄 아래로 내려서거든 버섯이나 되세요.”
그래서 놋장아기도 버섯이 되고 말았어요.
부부는 한참 기다려도 데리러 간 놋장아기마저 소식이 없자 불길한 생각이 들어 문을 밀치며 밖으로 달려 나가다가 순간 눈이 멀어버렸어요.
세월이 흐르자 부부의 재산은 없어지고 부부는 다시 거지가 되어 구걸을 하러 다녔지요.
집을 나간 가문장아기는 정처 없이 산과 들을 지나 걷다보니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 있었어요. 그 집에는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가문장아기는 소를 매어 놓고 하룻밤만 자고 가게 해달라고 빌자 아들이 삼형제여서 누워 잘 방이 없다고 허락하지 않았지만 가믄장아기가 다시 사정을 하자 부엌에 가서 자라고 했어요.
가믄장아기가 한참 쉬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요란했어요. 아들들이 마를 파고 돌아오는 소리였지요.
얼마 후에 돌아온 큰 마퉁이가 부엌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애쓰게 마를 파다가 배불리 먹게 했더니 지나가는 아이를 데려다가 놀고 있네.”
조금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온 둘째도 가믄장아기를 보며 욕을 했어요.
그런데 셋째 아들은 가믄장아기를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어요.
“우리 집에 검은 암소와 사람이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려는 모양입니다.”
가믄장아기가 삼형제가 하는 행동을 보았더니 파온 마를 삶아 저녁을 먹는 것이었지요. 맛없는 위쪽은 부모에게 주고, 자기는 살이 많은 가운데를 먹고, 가믄장아기에게는 꼬리를 주었어요. 둘째 마퉁이도 형이 하는 양을 그대로 따라했어요.
작은 마퉁이는 마를 삶더니 부모님께 드리며 말했어요.
“어머니 아버지, 우리를 낳아서 기르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셋째 아들은 부모님에게는 살이 많은 가운데 부분을 드리는 것이었어요.
가믄장아기는‘쓸 만한 사람은 작은 마퉁이 밖에 없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가믄장아기는 솥을 빌려 쌀밥을 지어 한 상 차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들고 갔는데, 조상대대로 먹지 않았던 밥이라며 화를 냈어요. 큰 아들도, 둘 째 아들도 역시 먹지 않았어요. 셋째 아들에게 들고 가니 작은 아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두 형이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맛이 있어 보여 조금 달라고 하자
“드시라고 할 땐 안 먹겠다고 하더니 왜 먹겠다고 하세요?”
셋째는 뜨거운 가운데 밥을 떠서 형들의 손바닥에 놓아주었어요.
저녁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가믄장아기는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워서 “할아버지, 같이 잘 아들을 하나 보내 주세요.”하고 말했는데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거절해서 작은 마퉁이는 기뻐하면서 갔어요. 둘은 부부가 되었어요.
가믄장아기는 작은 아들과 같이 마를 파던 곳을 구경하자고 가보니 큰 아들이 파던 곳에는 똥만 가득했어요. 둘째가 파던 곳에 가니 지네, 뱀 같은 동물만 우굴 거렸어요. 마지막으로 작은 마퉁이가 파던 곳을 가보니 번쩍번쩍하는 금덩이가 있었어요. 가믄장아기는 검은 암소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아주 큰 부자가 되었어요.
가믄장아기는 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거지가 되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백일 동안 걸인 잔치를 열었어요. 한 달 두 달이 되어도 부모님은 나타나지 않았지요. 백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날이 저물 무렵에 눈에 익은 거지가 보였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거지가 막대기 하나를 같이 짚고 더듬더듬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가믄장아기는 놀랐지만 보통 때처럼 일군들을 불러 말했어요.
“저 거지는 위쪽에 앉아 먹으라고 하고 아래쪽에서 갖다 주다가 떨어졌다고 하면서 주지 말고, 아래쪽에 앉아 먹으려고 하거든 위쪽에서 나눠주다가 떨어졌다고 하면서 주지 말고, 가운데 앉으면 양쪽에서 갖다 주다가 떨어졌다고 해서 주지 마세요.”
부부거지는 복이 있어야 얻어먹는다고 한탄하면서 그냥 나가려고 하자 계집종을 시켜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 차려내고, 귀한 술을 따라주니 거지는 배가 고프다며 마구 먹었어요.
잠시 후, 가믄장아기가 와서 말을 걸었어요.
“옛날 말이나 좀 해보세요.”
그러자 거지 부부는 할 말이 없다고 하다가 은장아기, 놋장아기, 가믄장아기를 낳고 부자가 되었다가 가믄장아기를 내쫓고 나서 거지가 되었다면서 신세타령을 했어요.
눈물을 흘리며 듣던 가믄장아기는 약주를 잔이 넘치게 부어 들고 말했어요.
“이 술 한 잔 드세요. 천년주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가믄장아기입니다.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아니, 네가 가믄장아기냐?”
부부는 깜짝 놀라며 받아든 술잔을 떨어뜨리고 눈을 크게 떴어요.
가믄장아기는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면서 잘 살았어요.
※ 이 신화는 큰 굿의 한 순서인 삼공 본풀이, 삼공맞이에서 불립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는 신라 선화공주님과 결혼한 마퉁이, 백제 무왕의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 주술을 부리는 여신, 백주또
천자님을 형상화한 무신도(제주도 중요민속문화재 제240호)
제주도 ‘세화본향당’에서 모시는 신은 백주또라는 여신이다. 본래 서울 남산 서대문 밖 ‘가는대밭’에서 솟아났는데, 웬일인지 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 눈에 거슬리고 어머니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용왕천자국에 사는 일곱 삼촌의 수청이나 들도록 하라.” 부모는 가차 없이 딸을 쫓아내 버렸다.
일곱 삼촌은 백주또에게 일곱 가지 부술(符術·도구를 사용하여 부리는 주술)을 가르쳐 주었다. 청가루, 백가루, 적가루, 흑가루, 황가루, 녹가루가 든 여섯 개의 주머니와 주황당사(朱黃唐絲·누른빛의 명주실) 매듭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청명(淸明) 삼월 초여드렛날, 용왕문을 열어 조카를 내보냈다. “용서하여 주소서.” 백주또는 곧장 부모를 찾아뵙고 사죄를 청했다. “네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매정한 부모.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다시 딸을 내쫓았다. 열다섯 살 백주또, 어쩔 것인가. 눈물로 세수하면서 제주도 한라산에 산다는 외조부 천자님을 찾아 길을 떠났다.
이 거리 저 거리를 썩 넘어 전라도 장성 갈재를 넘어가니, 쿵더쿵 쿵더쿵, 마침 일천 선비가 재인광대를 데리고 놀음놀이 중이었다. “거문고를 빌려 오거라.” 몸종인 느진덕정하님이 일천 선비에게 가서 청하였다. “여인은 꿈에만 보여도 사물(邪物)인데 무슨 말이냐?” 이 말을 전해 들은 백주또, 청가루를 내어 일천 선비를 향하여 ‘푸우’ 불었다. 가슴이 아프다, 설사가 난다, 죽겠다며 일시에 야단이 났다. “청하는 것을 다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상황을 파악한 선비 하나가 급히 와서 사죄하였다. “괘씸하다.” 허나 백주또는 부술을 거두어 일천 선비를 살려냈다.
이후 눈물 세수의 내력을 거문고 장단에 풀어내고 제주도에 도착한 백주또, 제일 먼저 앞선도 당신께 인사를 청하니 길 안내를 주선해 주었다. 샛다리 냇가에 이르러 어떤 아기씨와 마주쳤다. 허 선장의 따님아기였다. “오늘 저녁은 너의 집에서 머물고 가겠다.” “그리하시지요. 무슨 음식을 잡수십니까?” “손으로 벤 음식은 손 냄새 나서 못 먹고, 칼로 벤 음식은 쇠 냄새 나서 못 먹는다.” 허 선장의 따님아기는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여 백주또를 대접하였다. “급한 지경에 당하거든 이 주머니를 내놓고 나를 생각하고 있으면 세 번까지는 살려주마. 허 씨 댁을 상단골로 맺고 가니, 없는 명을 이어주고 없는 복도 이어 주마.”
백주또는 허 선장의 따님아기에게 보답한 뒤 한라산 백록담으로 향했다. “저는 천자님의 거행집사입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말 도둑놈같이 생긴 포수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백주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더러운 놈, 잡혔던 손목 두었다가 무엇하리.” 백주또는 자신의 팔목을 싹둑 잘라 던져두고 천자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출신 음식 재주 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나와 같이 좌정할 만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에게서 날피 냄새가 나느냐?” 백주또는 도중에 겪은, 서러운 사정을 얘기했다. 분기탱천한 천자님, 그 즉시 단골을 소집하여 공포(公布)하였다. “내 자손이 오는데 겁탈하려 하다니 괘씸하다. 땅 가르고 물 갈라라. 물도 같은 물 먹지 마라. 길도 같은 길 걷지 마라. 사돈도 맺지 마라. 세화리 땅 자손은 간마리 땅에 다니지 말고, 간마리 땅 자손은 세화리 땅에 오지 마라.” 그 후로 천자님이 말한 법이 그대로 실행되었다. 천자님의 말 한마디, 그것이 ‘법’이다. 신화는 성문법 이전의 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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