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생숲길, 길을 떠난다
창세기부터 다시 세상을 읽으며
멀고도 긴 순례를 떠난다
30년 넘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내 삶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옹달샘
― 생숲길 1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다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았다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간다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숲으로 살아간다
제주의 사계(四季)
― 생숲길 2
제주의 봄은 사월에 피어난다
서천의 붉은 노을 꽃으로 피어난다
사월의 영혼들이 서천꽃밭 꽃감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제주의 여름은 숨비기꽃으로 피어난다
바다 어머니들의 숨비소리로 피어난다
포작(鮑作)이 진상하던 전복을 잠녀(潛女)가 시작한 후
숨비기꽃은 더욱 낮게 엎드려 향기로 깊어진다
제주의 가을은 감귤 향으로 익어간다
천 년을 고통나무로 버티어
한 때 대학나무가 되었던 감귤나무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던 1894년에
비로소 폐지된 진상제도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제주의 겨울은 한라산으로 온다
구상나무들이 하얗게 옷을 갈아입는다
곰과 사자와 호랑이가 흰 눈으로 나오는 길
설문대할망 자청비 영등신이 드나드는 입구도 보인다
가끔은 신(神)들을 따라 옥황상제가 그 길을 따라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神)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섬에
다시 사월이 오고 있다 사월의 겨울이 오고 있다
강정으로 들어오고 있다 겨울이 세상을 뒤덮어도
끝내 복수초는 두꺼운 얼음을 뚫고 나오리라
신(神)들이 벗어놓은 발자국마다 얼음새꽃이 따뜻하게 피어나리라
일주일
― 생숲길 3
하나님께서 가장 잘 하신 일은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신 일이다
일곱째 날에 반성을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못 하신 것은
여자를 흙으로 만들지 않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잘 하신 일은
일주일을 만들어 주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못 하신 일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일주일을 만드셨고
달님은 한 달을 만드셨고
햇님은 일 년을 만드셨다
해와 달의 사랑이 하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제
일주일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날마다 쉬지 못하고 밤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
2조1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3조2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4조3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5조3교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날마다 놀고먹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만든 남자와 여자는 모두 떠나고
스스로 이 세상에 공평하게 태어난 여자와 남자들이 산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날마다 나를 창조한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이어도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베이스캠프를 먼저 만든다
입춘 무렵
― 생숲길 4
동지섣달 지나고 입춘이 코앞이다
아픈 삶을 지나고 죽음이 코앞이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길이 보인다
머지않은 세월 지나면
아픈 장기는 새로운 장기로 교체될 수 있으리라
기계의 부품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듯이
사람들은 이제 앞으로
손이 아프면 새로운 손으로 바꾸고
심장이 아프면 새로운 심장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인간들은 이제 앞으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뇌까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을까
인공뇌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나와 새로운 나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배가 고픈 좀비들의 세상에서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옹달샘의 물소리로 흐른다
흐르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수선화와 복수초와 매화꽃들이
펑펑펑 울음을 토하며 피어난다
깊은 밤 산책
― 생숲길 5
깊은 밤 산책을 나간다
개 짖는 소리 멀어지고
지상의 불빛 모두 사라진다
계곡 물소리가 나를 감싼다
물소리를 짚고 가는 지팡이 소리에
하늘에는 젖은 별빛들이 피어나고
월라봉에서 노루가 노루를 부른다
유반석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박수기정에서
항아가 내려와 샘물 마시는 소리 들린다
‘김광종영세불망비’ 앞에 앉아서 나는
도깨비들의 춤을 보며 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휴대폰 메모장에 물소리와 별빛을 받아 적고
다시 하늘을 보니
그 많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다시 별빛을 찾아서 계곡으로 돌아가는데
별들은 보이지 않고 동백꽃들만 길가에 내려앉아
깊고도 푸른 물소리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탐라국 입춘 굿
― 생숲길 6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눈송이인지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할망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천지왕 허락 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이 없는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치고 꽹과리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대불처럼 몰려온다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신명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 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대나무와 사랑초
― 생숲길 7
2014년 4월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세월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심장 대동맥판막을 뜯어먹던 세균들을 겨우 몰아내고 돌아와서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에 대나무를 심고 해바라기 씨앗을 심었다
동백나무를 심고 감나무를 심고 매실나무를 심고 감귤나무를 심으면서 나온 돌들은
돌탑을 쌓고 돌담을 만들고 돌길을 만들면서 삐걱거리는 심장소리가 헐떡거렸다
서천꽃밭에 수많은 꽃들이 피었다 져도 가문장아기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병,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병
비후성심근증이 재발하여 심실벽이 두꺼워졌다
벽이 두꺼워진 만큼 방은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장난 문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내 삶의 밤이 가장 길었던
2017년 12월 22일 동짓날
나의 대동맥판막은 칼날 같은 금속판막으로 바뀌었다
째깍 째깍 째깍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나의 시계 소리가 되기 시작했다
나의 시간은 이제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나는 이제
전면에 배치했던 대나무를 뒤로 옮겨 심는다
죽창 들고 앞장서던 대숲이 뒤로 물러난다
대쪽 같은 절개의 마음으로 퉁소를 불고
때로는 만파식적을 불며
한라산처럼 떡 버티며
북풍을 막아주는 뻣뻣한 정신이 된다
빈 앞에는 이제 수선화와 사랑초들이 피어날 것이다
대나무와 소나무는 뒤에서 사철 푸르게 지키고
복수초와 사랑초와 수선화 향기가 전면에 나선다
가문장아기는 이제 마퉁이를 만나 꽃을 심는다
자청비는 이제 문도령을 다시 만나 씨앗을 뿌린다
백주또는 소로소천국을 만나 자식을 낳고 나무가 된다
설날 아침에
― 생숲길 8
설날 아침에 월대천 아래 징검다리 건너간다
밤새 떡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돌아온 아들이
가져온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여먹고 산책을 나간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내려온 물이 바다로 간다
월대천의 은어들이 징검다리 사이로 오르내린다
배부른 청둥오리들이 서로의 깃털을 다듬어주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기르던 오리들과 송아지의 눈빛이 보인다
내가 꼴을 베어 먹이던 어미소도 징검다리 아래로 걸어간다
삼기천을 건너 발을 씻으며 갱본으로 가서 햇빛을 하품한다
외도 앞바다에 누워계신 해수관음상을 보려고 간다
한라산에서 내려와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몽돌, 해변
내도 알작지의 파도소리에도 마음을 가다듬고 온다
알작지 해변에는 설날에도 군밤을 파는 낡은 트럭과
반짝반짝 빛나는 캠핑카들이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다
월대천 징검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던 황소 한 마리
낭쉐가 되어 관덕정 앞으로 바퀴를 달고 달려간다
바다에도 징검다리가 있다 섬들의 징검다리가 있다
나는 먼 바다를 건너간다 코로나19 마스크를 쓰고 간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때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일까
대동맥이 파열되어 통째로 인공대동맥으로 갈았던 사람
부산에서 대기업 임원을 하다가 쓰러졌다는 그 사람이,
조직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기계판막으로 바꾼 후부터
나의 심장 속에서는 피 묻은 나비 한 마리 날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만든 칼날 같은 날개로 젖은 하늘을 날고 있다
나는 자꾸만 그 날개의 칼날이 대동맥을 찢는 꿈을 꾼다
추자도와 거문도를 지나 여수로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하지만 나는 여수로 날아가지 못하고 하동포구를 지나
섬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한 마리가 된다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는 빈 고향집에 들렀다가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어머니 아버지께 절을 올린다
폭낭과 야자수
― 생숲길 9
제주도 팽나무와
워싱턴 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가지 많은 나무가 허리도 펴지 못하고 그늘을 가꾼다
벌레들에게도 젖을 물리며 숨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가지 하나 없는 나무가 하늘 높이 탑만 쌓아 올린다
우리들의 하늘을 함부로 들쑤시고 있다
붉은 해가 솟는다
워싱턴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붉은 해가 기운다
가슴이 넓은 나무가
홀쭉한 나무를 가만히 안아준다
심우도
― 생숲길 10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심재산방
― 생숲길 11
심재산방에서 보니
나와 식물이 하나로 보인다
마음을 굶겨보니
몸의 속까지 다 보인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있고
사람의 뿌리는 가슴 속에 있다
나무의 뿌리는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고
사람의 뿌리는 알뿌리처럼 둥그렇다
알뿌리 같은 심장이 땅에 묻혀도
나의 가슴에는 피가 잘 돌아
나의 생각은 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랄 것만 같다
너덜너덜한 대동맥판막, 망가진 심장도
땅 속에서는 뿌리를 잘 내릴 것만 같다
좌망정에 앉으니
계곡에 숨겨놓은 배도 보이고
늪에 감추어둔 그물도 보인다
월라봉에서 날아오는 학의 긴 다리도 보이고
바다로 날아가는 오리의 짧은 다리도 보인다
산방산에 눌러앉은 구름도 보이고
강정으로 실려 가는 마징가 같은 케이슨도 보인다
심재산방 좌망정에 앉아 눈을 감으니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천 년의 강물에 빈 배 하나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빈 배 가득 하늘이 실려 간다
등이 환하다
― 생숲길 12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칡과 등나무
― 생숲길 13
칡꽃이 환하게 피었다
등꽃은 지상을 밝히고
칡꽃은 하늘을 밝힌다
등나무는 시계방향으로 돌며 오르고
칡넝쿨은 반시계방향으로 돌며 오른다
시계를 보니 둥그렇게 돌고 있다
시계바늘은 어느 쪽으로 돌고 있는가
(시계바늘은 왜 같은 쪽으로만 도는 것일까)
0시에서 출발하면 오른쪽일까
3시에서 출발하면 아래쪽일까
6시에서 출발하면 왼쪽일까
9시에서 출발하면 위쪽일까
시계바늘은 그냥 둥그렇게 돌고
칡은 칡이 좋아하는 쪽으로 돌고
등나무는 등나무가 좋아하는 쪽으로 돈다
사람들은 칡과 등나무를 보고
갈등(葛藤)이란 말을 만들었다
갈등이란 말을 만든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고
갈등이란 말을 모르는 칡과 등나무는
지상과 하늘까지 환하게 밝히며 잘들 살아간다
시집
― 생숲길 14
시집을 읽다가
화장실 다녀오니
시집이 활짝 피었다
시집이 종이 날개를 폈다
한 장 한 장
나무로 살아났다
시집 속
꽃들이 활짝 피었다
시집 속
새들이 날아 올랐다
시집 속
별들이 피어 올랐다
시집 속
시들의 숨결이
세상을 꽃피우고
세상을 날게 하고
세상을 빛나게 하고
세상에 촛불을 켜고 있구나
시집은 읽다가
가끔은 멈추어야 한다
해찰을 해야만 한다
창밖을 보아야만 한다
시집을 홀로 펼쳐두면
책상이 피어나고
책상이 날아오르고
책상이 젖는다
방안 가득
시의 꽃이 피어나고
시의 새가 날고
시의 별이 빛나고
시의 향기로 번진다
나는 홀로 시집으로 펼쳐진다
심장의 춤
― 생숲길 15
심장과 함께 걸어 보니 잘 보인다
심장의 춤사위는 참으로 황홀하다
심장은 두근두근 뛰지 않는다
동방결절에서 전기 신호를 받는다
우리들의 심장은 최첨단 발전소다
두방두심 두방두심
심방심실 심방심실
들어옴나감 들어옴나감
드롬나감 드롬나감
나의 심장은 이렇게 춤춘다
심장은 마음이어서
마음으로 춤춘다
전기로도 춤추고
자율신경으로도 춤추고
호르몬으로도 춤춘다
심장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장은 가슴에도 있고
발에도 있고
손에도 있고
머리에도 있다
심장은 마음이어서
온 몸에 있다
온 몸이 심장이고
온 마음이 심장이다
나의 심장은 나에게만 있지 않다
나의 심장은 이제 너에게도 있다
너는 나의 심장이고
나는 너의 심장이다
나의 심장이 둥둥둥 북을 치며 오고있다
여수 가는 길
― 생숲길 16
거문도 섬 문을 들어서니 섬의 식구들이 정겹구나
다시 만난 식구들이 참으로 반갑구나
그리운 이들은 뒤꼭지만 보아도 반갑구나
일가친척들은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반갑구나
깨벅쟁이 친구들은 오늘도 진똘이와 나이먹기놀이에 정신이 없구나
계집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고 수평선으로도 고무줄놀이를 하는구나
구름들은 새끼줄로 기차놀이하며 섬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는구나
제주도에서는 바다가 섬을 안아주는데
여수에서는 섬들이 바다를 품어주는구나
여수에서는 수평선도 마디가 있어서 더욱 정답구나
수평선 끝의 섬들도 부르면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구나
수평선이 글쎄 섬들을 이어주는 끈이 될 수도 있었구나
여수의 섬들은 가슴이 따뜻한 여수 사람들처럼
언제라도 나를 안아줄 듯 참으로 따뜻한 가슴이구나
수평선에도 징검다리가 있어
너에게 갈 수 있어 참 좋구나
네 가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참으로 따뜻하구나
제주도에서는 수평선이 섬을 감싸주는데
여수에서는 수평선에도 섬의 징검다리가 있어
너의 깊은 곳까지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구나
거문도의 커다란 섬 문을 들어서니
섬의 식구들이 오손도손 정겹기만 하구나
여수에서는 누구라도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어 혼자만의 섬이 아니구나
은하수 뿌리
― 생숲길 17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대곡마을에는
은하수 뿌리가 있다
대곡마을에는 복된 산이 있고
크고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의 옹달샘, 오두막에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다
바다의 뿌리에서 날아온
여수의 젖은 나비처럼, 소라면 앞바다의 뿔소라처럼
어느 누구라도 그 곳에 가서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별들이 그 곳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그 곳에서 켜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곳에 가면 누구라도 시인이 되어
꽃빛을 켜고 별빛을 켠다
대곡마을 은하수 뿌리에서 오늘도
꽃들이 하늘로 기어오른다
은하수 뿌리에서 오늘도 심장의
꽃들이 피어나 반짝거린다
그대에게 가는 모든 반짝이는 말들이
뿌리에서 출발하여 먼 은하수를
지금 막 건너가고 있다
은하수를 건너며 다시 보니
떠내려가는 고무신 한 짝이 보인다
은하수 뿌리에는 내가 징검다리에서
어린시절 잃어버린 고무신 한 짝이
있다 그 고무신 한 짝에 지금도
각시붕어가 살고 있다
동백과 동박새
― 생숲길 18
나는 작은 동박새입니다 여수는 나를 낳은 어머니이고 나를 살린 첫사랑입니다 젖을 빠느라 동백의 깊은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을 살았지만 목이 메어 울혈을 토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칠십년 전 사람들이 차마 건널 수 없었던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제주도 새들은 이미 득음을 한 곡비(哭婢)들이었습니다 수의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을 위하여 억새와 갈대는 해마다 수의를 장만하고 있었습니다 억새는 산에서 날려보내고 갈대는 물에서 날려보내고 있었습니다 봄부터 부지런히 짜기 시작한 베옷 한 벌씩 날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소리내어 울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새들은 단풍이 들도록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제주도 새들은 따로 독공을 하지 않아도 득음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반란의 뿌리에서 항쟁의 꽃이 피어나려면 백 년은 걸릴 것입니다 칠십년이 지난 지금도 총소리 가득합니다 서로를 향해 쏘아대는 손가락 총이 가장 무섭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손가락 끝은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한라산에서 시작한 통일의 첫걸음도, 지리산에 뿌려진 평화의 붉은 씨앗들도, 알고보면 모두가 삼일운동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함께 들고 일어났던 삼일정신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한 동백꽃들의 피맺힌 절규였습니다
남도의 붉은 동백꽃들이 목숨으로 살려낸 통일열차가 이제 막 출발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통일열차가 드디어 기적을 울리며 백두산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은 제 살을 찢으며 아픈 상처에서 피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새들은 오늘도 웃지 못하고 울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슬픔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의 산도 우리들의 물도 우리들의 하늘도 눈물이 많아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와 다시보니 여수의 억새밭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수의 갈대밭에서 하얀 베옷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여수의 동백숲에서 득음을 한 명창 곡비들이 곡을 하는데,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빈 젖꼭지를 빨고 있습니다 나는 붉게 우는 아주 작은 동박새입니다
한라산 어욱
― 생숲길 19
한라산 어욱은 새가 되지 못하여
봄부터 베를 짜기 시작한다
초가지붕에도 오르지 못하여
베옷 한 벌 장만하기 시작한다
천둥 번개 요란한 여름에도
베틀소리 멈추지 않는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만가(輓歌)도 없이 숨 죽여 가신 님들
해 좋은 날, 어욱꽃 마을까지 내려온다
수의 한 벌 챙겨들고
요령소리 앞세우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잊지 않고 찾아온다
무너진 돌담 하나 대답이 없어
빈 상여 소리에
빈 수의 한 벌 흩어져 날아가고
갈 곳 잃은 바람의 곡비
온몸이 휘청거린다
뼈만 남은 한라산 억새
흰 눈 내려 헛묘에 묻히고
한라산 자락에는 해마다
메김소리 가득한 오름 하나씩 늘어난다
* 어욱 : 억새의 제주도 말
* 새 : 제주에서는 볏짚 대신 새로 초가지붕을 만들었다
종석산 정읍사
― 생숲길 20
종석산에서 정읍사(井邑詞)
노래소리 들린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
범종소리 들린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모든 것이 선(禪) 아닌 것이 없다
내 가슴 속으로 들려오는
달빛 종소리, 요것은 도대체 뭣이다냐
옥정호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발자국소리다냐
참나무 숲으로 숨어드는 밤의 숨소리다냐
참나무 그늘을 덮고 잠든 산삼들의 잠꼬대다냐
홀로 달아오른 산삼 열매들의 후끈거림이다냐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떠돌았던 장돌뱅이였구나
아, 나는 너무 오래도록 보지 못한 청맹과니였구나
제주공항에서 여수공항은 바로 코 앞 이었구나
이륙하고 추자도가 보이더니 바로 착륙이구나
여수에 도착한 나비는 연어의 종착역을 지나
옥정호가 있는 숲으로 날아가는 구나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아, 참으로 먼 세월이 한 순간이구나
종석산에서는 정읍사(井邑詞) 후렴소리 들리고
종석산 정읍사(井邑寺)에서는 운판소리 들려오는데
나의 지친 가슴 속에서 환하게,
꿈꾸던 숲에서 드디어 산삼 꽃이 함께 영그는구나
《악학궤범(樂學軌範)》 정읍사
달문moon
― 생숲길 21
달은 문이다 문은 열리고 달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달은 달(達)이고 문은 문(文)이다
가슴을 열고 반월문을 바꾸니 달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가슴에 묻은 사람들 숨소리 들린다
달이 자꾸만 문을 기웃거린다 나는 아직 안토니오 가우디를 모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도 모른다 달빛으로 백 년의 꿈을 심는다
동쪽에는 평화공원이 있고 서쪽에는 평화학교가 있다 생명학교와 함께 있다 그 평생학교에서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가끔은 저 멀리 이어도와 서천꽃밭이 보인다
평생 베옷을 만드는 갈대와 억새가 있다 평생 곡비 노릇을 하는 새들이 있다 백 년을 날려 보내고 백 년을 울어야 비로소 하늘문에 닿을 수 있을까
수의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떠난 영혼들을 위하여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달은 밤새 메밀밭 백비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파도는 밤낮으로 절벽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그렇게 백 년을 써야만 주춧돌 하나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
폭낭과 워싱턴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야자수 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키 큰 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폭낭 쪽으로 해가 기울어진다 넓은 폭낭 그림자가 홀쭉한 야자수를 안아준다
백 년의 꿈이 낳은 폭낭 가지에 달문이 열린다 초승달 살이 환하게 오르고 있다
* 폭낭 : 팽나무를 제주도 사람들은 폭낭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무등이왓 사람들
― 생숲길 22
큰넓궤
평화로 가는 길에 붉은 상사화
무리지어 피어난다
추석날 오후 큰넓궤 찾아간다
큰넓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해 추석을 어떻게 지냈을까
아, 큰넓궤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의 눈동자
길에서 나를 쏟아버린 어머니의 자궁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싸늘한 정신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볼레오름까지 올라갔던 사람들
그들을 두 달 동안 지켜주었던
입구의 종나무
그 종나무와 어울려 살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홍단풍은 봄부터 붉고
청단풍은 가을에도 푸르다
아, 입구가 너무 좁다
거꾸로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거꾸로 들어간다
흙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눈동자 속으로, 자궁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멀리서 나팔소리 들려오고
어머니의 심장소리 들린다
어둠이 양수처럼 나를 감싼다 이 곳에서
붉은 상사화 지는 것도 잊은 채
두어 달 어머니와 함께 종나무로 살다가 나는,
발자국 밥그릇
눈이 온다 하늘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눈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하늘이 온다
눈이 쌓인다
하늘이 내려 쌓인다
큰일이다 큰일났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려거든
더 빨리 펑펑 쏟아 부어라
우리들이 벗어놓은
발자국 가득 쌓여 넘쳐버려라
거꾸로 벗어놓은 발자국이
차라리 하늘이 되어버려라
큰넓궤에서부터 따라오는 발자국이
자꾸만 우리들의 목숨을 따라오고 있다
왕오름을 지나고
이스렁오름을 지나고
어스렁오름을 지나고
산짐승도 내려가 텅 빈 볼레오름에 다 오도록
우리들의 발자국은 하늘이 되지 못하는구나
고봉밥이 되지 못하는구나
발자국 밥그릇에 하늘을 다 담지 못하는구나
아, 존자암의 염불소리도
부처님께 올리는 삼시 세 때 공양도
우리들의 발자국 그릇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의 눈꽃만 지상에 피어나
참나무들의 겨우살이 열매 눈빛이 더욱 붉어지더니
덜 채워진 하늘이 결국 붉게 엎어지고 마는구나
헛묘
정방폭포로 간다 정방폭포 앞바다로 간다 태평양으로 간다 혹시, 아는 사람이 뼈 한 조각이라도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간다 동광리로 간다 무등이왓으로 간다 삼밭구석으로 간다 혹시, 살 한 점이라도 붙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또 다시 낭떠러지 위로 간다 절벽의 바위를 뒤진다 폭포 아래 바위를 뒤지고 물속을 뒤지고 바다 속을 뒤지고 바다 속 물고기들을 뒤지고 물고기 뱃속을 뒤진다 혹시, 숨결 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허공 속을 뒤진다 더 높은 하늘을 뒤진다 구름 속을 뒤진다 빗방울 속을 뒤진다
뒤지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지상을 떠난 뒤에도, 집 앞으로 몰려든다 죽어서도 몸을 찾지 못한 영혼들이 작은 단서라도 얻어 들으려고 찾아든다 이렇게 찾아와 밤새 이야기하는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목백일홍 이라고 말한다 백일홍 나무라고 말한다 배롱나무라고 말한다 그 곁에 있는 충혼묘지에도 백일기도하는 붉은 꽃이 있다 죽어서도 영혼을 찾지 못한 몸들이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순례를 멈출 수 없다
언어와 연어
― 생숲길 23
종착역과 출발역
김도수 시인의 글을 읽으면
연어의 종착역이 보인다
언어의 종착역이 보인다
내가
연어의 종착역을 말하면
시인은
언어의 종착역을 말한다
언어와 연어가 만난다
나는 연어를 따라서
언어의 종착역으로 간다
나는 너무 멀리 돌아서
왔다 이제 다시
그 종착역에서 출발한다
대설주의보
어제 밤에 대설주의보처럼 꿈을 꾸었다
부처님과 예수님과 주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남은 생명이 5년이라고 말씀 하셨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씀 하셨다
5년의 시한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꿈속에서 고민을 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새해가 열리는 밤이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낮에 받아서 읽다가 잠든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다시 읽기 시작하니 섬진강이 보이고
진뫼마을이 보이고 반월산이 보이고
연어의 종착역이 보이고 징검다리가 보인다
어제 눈이 많이 와서 한라산을 넘지 못하고
이어도공화국에서 해를 넘기고 있는데
어둠 속으로 새해가 열리듯 방문이 열리더니
반월산에 누워 계신 부모님께서 들어 오신다
아직, 내가 등을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어야 할 흰 소는 보이지 않는다
연어의 종착역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는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언어의 종착역
언어의 종착역에는 어머니의 무덤 하나가 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잃어버린 젖무덤 하나가 있다
* 나는 몸으로 기억한다. 나의 몸이 어머니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나의 하느님이다. 그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 번 그 따뜻한 길을 여행한다. 그 행복과 평화의 길은 나의 길이고 내 아들의 길이고 내 어머니의 길이고 우리들 모두의 길이다. 그 숭고한 길의 힘으로 나는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나의 몸은 아직도 토성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토성(土星)을 진성(鎭星)이라 부른다. 토성은 목성에 이어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크며, 직경은 지구의 약 9.5배, 질량은 약 95배이다. 태양으로부터 14억k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약 9.7km/s의 속도로 공전하는데, 이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29.6년이나 걸린다.
나의 기억이 왜 토성에서부터 출발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른다. 나는 다만, 어쩌면 나의 이름 때문에 기억이 재구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날, 그러니까 그믐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토성은 30년 만에 지구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접근하였고 번쩍, 하는 불빛과 함께 우주비가 내렸다. 나는 그 5억 개가 넘는 우주의 빗방울 속에 있었다. 나는 무작정 토성에서 지구를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지구에 도착하여 보니 어느 작은 시골이었다. 그믐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보름달을 이고 가는 도붓장수 여인이 있었다. 커다란 미원박스 안에 바늘, 실, 양말, 동정, 고무줄, 비누… 많은 생활용품들이 담겨있고 그 박스 아래는 생활용품과 물물교환 한 쌀, 보리, 조, 수수, 콩 등이 담긴 자루가 있고 또한, 그 박스 위에도 비교적 가벼운 물건들과 함께 이미 팔려나간 물건들 대신 수숫대 빗자루며 계란 등과 함께 손때 묻은 되가 있었다. 이 모든 물건들을 아주 큰 보자기에 싸서 이고 가는 여인이 있었다. 집을 나설 때에는 빈 헝겊 자루들이 똬리 역할을 했지만, 그 접혀 있었던 자루들이 불룩하게 다 채워지고 네모난 박스 위에도 묘지처럼 볼록해서 보름달이 되어야만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 이었다.
그 여인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천에 피어있는 참꽃들만이 바람결에 맞추어 몸을 눕히고 있었다. 나는 다행히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적셨고 무사히 그녀의 몸과 마음속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었고 축복이었다. 나는 그렇게 천만 다행으로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어찌하여 나는 그녀를 젖게 했을까? 왜 나는 하필 그런 여인의 몸속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던 것일까?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 그녀의 아들이 되었던 것일까?
세한도
― 생숲길 24
마포대교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
역사를 바꾸었고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
도화낭자를 만났고
누군가는 저 다리를 건너가다
다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다리 난간에 있는
거울 속 사내를 들여다 본다
눈사람
나는 하늘에서 온 사람
나는 하늘로 돌아갈 사람
나는 이제 곧 강이 될 사람
나는 다시 바다가 될 사람
나는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사람
나는 또다시 구름으로 떠돌 사람
그래도 나는 영원히
그대 손길을 잊지 못하는 사람
수선화
꽃이 너무 많다
잔이 너무 많다
독이 너무 많다
독을 마시기에 딱 좋은 금잔옥대
벌써 비워져 있다
달과 소나무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먹쿠실낭*
― 생숲길 25
입춘날 아침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다
제주4ㆍ3평화재단에서 발행한 『4ㆍ3과 평화』를 펼쳐 보았다
열두 살에 사삼이 지나갔다는 강순아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영아 오빠는 한림국민학교에서 총살당해 여드랑밭에 묻히고
영보 오빠는 여드랑밭에서 일하다 끌려가 섯알오름에서 죽고
두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멍은 밭에서 웃통을 벗고 훌떡훌떡 뛰고
나보다 가슴이 더 깊이 아픈 사람들을 생각하며 돌아오는데
멀구슬나무가 자꾸만 나를 붙잡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머니 가슴처럼 쭈글쭈글한 열매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
봄이 관덕정 쪽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고 하였다
붉은 동백꽃들이 뚝뚝 떨어졌다고 하였다
감저공출 절대반대 보리공출 절대반대를 외치며
3ㆍ1절 만세를 부를 때에는 아직 미처 알지 못했다
푸른 잎들과 보라색 꽃들이 하늘을 뒤덮을 때였다
새들의 둥지를 품고 밤낮으로 젖을 물리던 때였다
어느 맑은 날 나는 차마, 끝내, 보고야 말았다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젊은 청년을 여드랑밭에 묻는 것을 보았다
큰 바람에 밭담이 무너져 무덤이 없어지는 것도 보았다
섯알오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혔다는 소문도 들었다
검질을 매다가 웃통을 벗고 훌떡훌떡 뛰는
양쪽 가슴에 두 아들을 묻고 겨우 살아가는 어머니도 보았다
마을들까지 불태워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동쪽 어느 마을에 빈 가슴으로 살아간다는 불칸낭처럼
가슴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나는 그때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 내가 업어서 키운 열두 살 소녀가 돌아왔다
재봉틀소리도 총소리로 들렸다는 그 소녀가 다시 돌아왔다
내 몸으로 염주를 만들어 나를 어루만지며 기도를 하고 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따뜻한 피가 돌며 또 다른 내가 돋아난다
* 먹쿠실낭 : 멀구슬나무
천년폭낭
― 생숲길 26
1
퐁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폭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팽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산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신당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서낭당나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정자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2
얼굴책에서 우연히 나무 한 그루 사진을 보았다
살아있는 낭쉐 한 마리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뿔로 하늘을 들어올리고 있다
쿵쿵쿵 지축을 흔들며 낭쉐 한 마리 걸어가고 있다
텅, 텅, 텅, 걸어가면서도 똥을 잘 싼다
똥덩이를 보니 ‘상가리 천년퐁낭’이라 쓰여있다
지식의 바다로 헤엄을 쳐서 들어간다
살아있는 낭쉐는 코끼리가 되고 하마가 되고
거대한 전갈이 되고 거대한 하늘소가 된다
코뿔소가 되고 사슴이 되고 노루가 되고 토끼가 되고
백록이 되고 꽃 모자를 쓴 설문대할망이 된다
나는 쇠기둥을 받치지 않은 낭쉐가 더 마음에 들지만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나는 이제
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그 폭낭을 찾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올려야만 하겠다
속을 다 비우고 껍데기로 버티고 있을 나무 한 그루
뼈만 남아서 온 몸이 뼈가 된 나무 한 그루
나이테도 다 버리고 기억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나무 한 그루
넘어지고 얻어터지고 허리가 꺾여서도
끝끝내 포기할 수 없었을 생에 대한 믿음 한 그루
나는 그 꿈과 삶에 대한 예의를 찾아서 가리라
그 간절한 마음은 꿈속으로도 이어져
연꽃이 있는 꿈속으로 먼저 찾아간다
천년폭낭이 낳아 기른 상가리
이 폭낭 아래서 차씨, 주씨, 현씨 세 사람이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상가리로 발전하였다는 전설을 따라가니
올레에 조등이 걸려있는 상가에서 도감으로 앉아서
천 년 넘게 돔베고기를 썰고 계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3
나무라고 해서 모두가 나무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나무로 태어났지만 짐승처럼 살아가는 나무가 있다
거대한 곤충처럼 기어가는 나무가 있다
울퉁불퉁한 몸뚱이를 이끌고 천천히 하늘로 기어가는 거미가 있다
살아있는 낭쉐 한 마리 하늘로 올라가 하늘소가 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바라보니 진흙소 한 마리 숲으로 간다
바람소리 한 수레 싣고 허공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다
상가리 천년폭낭을 보니 드디어 나무가 보인다
나와 무(無)가 함께 보인다
나보다 무(無)가 더 잘 보인다
4
길을 찾아보려고
홀로
밤새 길을 걸었다
아침에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보니
카톡이 하나 와 있다
아, 오늘이
나의 생일이었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구나
5
며칠 전에 겨우 배웠다
천년폭낭 보고 배웠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 처한 그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라
바람 불면 바람을 안고
비가 오면 빗물에 젖고
눈이 오면 눈물을 닦고
봄이 오면 하늘을 보고
여름 오면 그늘을 주고
가을 오면 뿌리로 가고
겨울 오면 하늘로 가라
나도 이제 그렇게 산다
6
강산 시인의 꿈삶글을 쓴다
강산 시인의 꿈과 삶과 글을 쓴다
강산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나는 참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참 세상을 모른다
나는 참 사람을 모른다
나는 참 나를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처음부터 다시 세상을 읽는다
나는 세상을 잘 읽어서
아름다운 세상 하나 만들고 싶다
나는 나를 더 잘 읽어서
나의 세상 하나 꼭 만들고 싶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
세상을 베끼고 세상을 배운다
사람을 베끼고 사람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집 정리를 하고 메모를 한다
아, 오늘은 식목일이자 한식날 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나무 심기를 좋아하고
찬 음식을 먹는 가난한 시인이었구나
7
제주도 어느 마을이나
폭낭이 많다
내가 사는 화순에도
폭낭들이 참 많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폭낭 아래 모여서 지낸다
자세히 보면
상처가 많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암덩이처럼 울퉁불퉁 하고
오래 전에 잘린 가지들은
속이 텅텅 비어 있다
그렇게 상처 많은 나무들이
새들을 품어 키우고
사람들도 그늘로 덮어주며
모두 모두 함께 잘 자란다
이어도공화국에도 그런 폭낭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8
며칠 전에 보고 온
천년폭낭이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천년폭낭 등에서 자라는
돌나물들이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천년폭낭 등에서 자라는
어린 생명들이
자꾸만 나에게 눈을 껌벅거린다
처음에 보고는
다른 나무가 곁에서 자라나서
함께 합쳐진 연리목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큰 바람에 쓰러질 때
엉겁결에 땅을 짚었던
왼손이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야 할 가지가
땅을 향하여
뿌리처럼 박혀 있는
그 나뭇가지가 자꾸만
내 눈에 밟힌다
쓰러진 몸으로도 잘 사는 폭낭 한 그루
큰 바람에 꺾이어 상체를 다 잃고도
다시 싹을 틔워 살아나
자꾸만 자꾸만 나를 부른다
사람들이 받쳐 준 쇠기둥 다 버리고
온전한 자신의 뼈로 지팡이 삼아
다시 새롭게 부활을 꿈꾸는 폭낭 한 그루
자꾸만 자꾸만 내 몸으로 들어온다
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폭낭 한 그루
자꾸만 나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준다
9
천년폭낭도 처음부터 천 년을 산 것은 아니다
두부가 된다는 것은
― 생숲길 27
콩이 두부가 된다는 것은
콩이 고기가 되는 것이다
콩이 두부가 된다는 것은
원이 네모가 되는 것이다
콩이 두부가 된다는 것은
딱딱함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어릴 적 내 고향에는 밤마다 두부를 만들어 파는 집이 있었다 따뜻한 두부를 먹기 위해서는 저녁밥을 일찍 먹고 서둘러서 가야만 했다 커다란 솥에 미리 갈아놓은 콩물을 은근히 끓이며 저어주어야만 했다 어둠이 눌러 붙지 않게 하려면 끊임없이 저어주어야만 했다 보통 하루에 두 판 정도의 두부를 만들었고 명절에는 더 많이 만들어 팔곤 하였다 인기가 좋아서 늦게 가는 사람들은 두부는 사지 못하고 비지만 얻어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얻어먹은 순두부와 두부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두부뿐만 아니라 비지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두부를 만든다
이제는 맷돌로 갈지 않고 모터로 콩을 간다
물을 부어가며 콩을 갈아 콩물을 만든다
이왕에 콩물이 있으니 콩국수도 만들어 먹으며 두부를 만든다
두부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은근과 끈기다
은근한 불에 끈기 있게 저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이 눌러 붙지 않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저어주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콩물을 저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금방 지쳐서 방에 들어가 드러눕는다
어떤 사람은 곁에서 노래를 불러준다
어떤 사람은 국수를 끓이고 김치를 만든다
어떤 사람은 상을 차리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콩이 콩물이 되고 콩물이 다시 엉겨 붙어 두부가 된다
딱딱한 것들은 부드러워지고
둥근 것들은 제 영혼을 갈아서 다시 네모로 부활한다
순두부로 만족하는 두부도 있지만
다시 물을 쪽 빼고 두부가 되고 싶은 콩들이 많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렇게 모두가 둥그렇게 태어나서 네모로 간다
둥그런 하늘 아래서 둥그런 무덤을 만들고 떠난다
둥그런 무덤 속에는 언제나 두부처럼 네모난 관이 들어있다
(혹은 네모난 상자 안에 둥그런 항아리 속에서 잠든다)
뱀
― 생숲길 28
뱀은 손과 발이 없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뱀은 귓구멍이 없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없다
뱀은 눈꺼풀이 없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뱀은 수 백 개의 갈비뼈로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땅의 영혼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삼보일배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오체투지 같은 절실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동안거에 들어가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큰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소신공양까지 불사하는 뱀들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기도하고 수행하는 뱀들의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할 만큼만 먹고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는 평화주의자의 마음으로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기어 다니다가
길쭉한 소주 됫병 속에서 비로소
몸 속 사리 같은, 마음 속 모든 독을 토해내고
비로소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서 보는
뱀술 같은 뱀의 운명이여, 또 다른 나의 운명이여
아, 내가 새롭게 만든 에덴동산, 서천꽃밭에
구렁이 한 마리, 나의 발가락 앞으로 지나간다
무화과나무
― 생숲길 29
나는 가인의 후예일까 아벨의 후예일까
나는 셋의 후예일까 아담의 후예일까
나는 이브의 후예일까 뱀의 후예일까
세상의 시작은 하나에서 시작하였으니
나는 그 하나님의 자식이 분명하다
태초의 처음은 없음에서 출발하였으니
나는 그 없음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만물은 모두가 형제자매가 분명하다 너도 나도 모두가 형제자매가 분명하다 뱀도 그렇고 곰과 호랑이도 그렇고 여우와 늑대도 그렇다 고양이와 돼지도 그렇고 토끼와 사슴과 새들도 모두가 다 한 식구가 분명하다 원숭이와 코끼리와 낙타와 사자도 한 식구가 분명하다 나무늘보와 개미핥기도 우리들의 한 식구가 분명하다 소와 말과 개도 그렇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을 너무 몰랐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모자란 것이 없다
하나님은 깡패나라의 두목이 아니다
하나님은 푼돈이나 뜯어먹는 양아치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식들을 사랑할 뿐
그 어떤 재물이나 예배도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떠한 뇌물도 바라지 않는데
인간들은 자꾸만 십일조 뇌물을 바치려고 한다
인간들은 자꾸만 보험용 뇌물을 상납하려고 한다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서로 나누기를 바라는데
인간들은 자꾸만 아부하려고, 하늘에 뇌물을 상납하려고
형제자매들의 재물을 더 많이 빼앗으려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하늘에는
지상의 재물을 쌓아 둘 창고가 없다
내가 사는 에덴동산에는 이제
하느님도 살고 단군할아버지도 살고 설문대할망도 함께 살아간다
부처님도 살고 공자님도 살고 예수님도 함께 모여서 정답게 살아간다
성경책도 읽고 팔만대장경도 읽고 사서삼경도 읽으며 살아간다
날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반야심경을 외우며 살아간다
가끔은 페이스북 속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며 살아간다
무화과나무 아래로 모세의 지팡이 같은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도 아니고 모세의 지팡이도 없어서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무화과나무 잎이 넓은 그림자를 벗으며 잠시 흔들린다
무화과나무 열매 안쪽에서 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
오메기
― 생숲길 30
하늘에서 연자방아를 돌리고 있다
잘 갈아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무등이왓 조 밭이 햇살에 익고 있다
무등이왓 오메기* 밭이 햇살에 익고 있다
잠복학살터 곁에 있는 조 밭에서 술렁거리는 소리 들린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이란 글자에 녹이 슬어있다
그날, 정방폭포 위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한결같은 오메기 이삭들이 고개를 깊숙이 떨구고 있다
큰넓궤와 도엣궤로 숨었다가, 영실 볼레오름까지 쫓겨갔다가
정방폭포에서 총을 맞고 떨어져 바다가 되어버린 사람들
파도소리 들리는 헛묘의 목백일홍 영혼처럼
조 이삭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오메기 이삭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새들이 먹지 말라고 씌워놓은 푸른 양배추 망들
그 속에 갇혀 있는 조의 모가지들이, 오메기 모가지들이
함께 학살당한 가족들 같아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말 목장의 말들도 보이지 않고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만들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의 구름들이 굿판을 벌이고 있다
시인들이 시를 낭송하고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춤꾼들이 춤을 추고 가수들이 노래를 부른다
심방이 굿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
조 밭에서 오메기떡 냄새가 난다
조 밭에서 오메기술 향기가 난다
조 밭에서 오소리술 향기가 난다
큰넓궤와 도엣궤에서 잘 숙성된 술은
헛묘에 올려질 것이고 정방폭포에 뿌려질 것이고
영실 볼레오름에 뿌려질 것이고 큰넓궤에 뿌려질 것이고
여수로 갈 것이고 광주로 갈 것이고 지리산으로 갈 것이고
오키나와로 갈 것이고 베트남으로 갈 것이고 미얀마로 갈 것이다
그런데 아,
잃어버린 마을, 조릿대들만 무성한 마을에 들어선
저 거대한 건축물은 도대체 무엇이더냐
저 거대한 십자가는 또한 도대체 무엇이더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되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저 하나님의 궁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꿈의 사다리이더냐
나는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담 자손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담은 셋을 낳았고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았고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았고
야렛은 에녹을 낳았고
에녹은 므드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는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노아를 낳았고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나는 아직 나의 계보를 알지 못한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내 피 속에는 하나님의 피가 섞여있다 하느님의 피가 섞여있고 단군할아버지의 피가 섞여있고 설문대할망의 피가 섞여있고 부처님의 피가 섞여있고 공자님의 피가 섞여있고 예수님의 피도 섞여있다 나의 몸속에는 아담의 피도 섞여있고 이브의 피도 섞여있고 루시퍼*의 피도 섞여있다
하늘에서는 연자방아가 돌아
잘 갈아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데
무등이왓에서 돌던 연자방아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이 가득 담겨 찰랑거리고 있다
* 오메기 : 차조의 제주도 말. 제주 4・3의 와중에 잃어버린 마을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제주민예총 예술가들이 200평의 밭을 빌려 조 농사를 짓고 있다. 조가 잘 여물어 결실을 얻으면 그것으로 제주의 전통술인 고소리술을 빚을 계획이다. 빚어낸 술은 4・3 당시 피난처 중 한 곳인 큰넓궤에서 숙성시킬 예정이다. 술이 익으면 제주와 같은 역사를 지닌 곳과, 여전히 그런 아픔이 진행되는 세상의 모든 현장으로 보낼 계획이다. 바라건대, 술이 잘 익어서, 세상 모든 곳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들의, 마른 목을 축이는 의미 있는 생명수가 되길 기도한다.
* 루시퍼 : 루시퍼는 ‘빛을 내는 자’, ‘새벽의 샛별’이라는 뜻으로, 천계에 있을 때는 신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던 존재였다. 신의 은총을 한 몸에 받으며 모든 천사를 지휘하던 루시퍼에게 점차 ‘오만’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이 신의 분노를 사서 그는 하늘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신을 배반하여 쫓겨난 루시퍼가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이브를 유혹하여 악마가 되었다고 한다.
노아
― 생숲길 31
우리들의 세상에는 그럴듯하게 잘 짜여진 플랫폼들이 많다
카카오와 네이버 플랫폼들이 한국을 통째로 삼키려고 한다
구글과 애플, 아마존과 페이스북이 세계를 콱 삼키려고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불교가 사람들을 길들이고 있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듯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였다
탈레반이 다시 한 번 아프가니스탄을 통째로 삼키고 있다
아비규환의 땅에서 아기라도 살려보려고 철조망 위로 던진다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노아의 시대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최초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었고
새로운 하나님들께서
이 세상을 개조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한 생명은
새로운 하나님이 된다
그러니 결코 자식을
소유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하늘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권세를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 터무니없이 믿었다
부모님은 자식을 너무 터무니없이 믿었다
처음부터 생명나무 하나만 주었어야 옳았다
모든 초목과 모든 짐승들을 먹게 해서 망했다
모든 초목들과 모든 짐승들에게 죄를 지었다
인간들이 살기 위해 희생시킨 모든 초목들과
모든 짐승들에게 엎드려 절을 하며 빌어야 하였건만
인간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잘못 길들였던
하나님께 희생양을 올리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들은 함께 망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오만방자함이 이 지구를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
새로 태어나는 우리들의 하나님들께서 망가진 지구를 수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머물고 있는 임시거처 베란다에
손수건 같은 하얀 빨래가 햇살 속에 펄럭이고 있다
노아의 방주
― 생숲길 32
내가 사는 안덕면에 노아의 방주가 있다
이타미 준 선생님이 설계한 방주교회가 있다
유동룡 선생님의 숨결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수풍석 박물관도 있고 두손 박물관도 있고
포도 호텔도 있다 한결같이
내가 사는 산방산 쪽을 향하여 기도를 한다
나는 비가 오는 날에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비를 맞으며 이어도공화국에서 돌길을 만든다
돌탑을 쌓을 때와
돌담을 만들 때와
돌길을 만들 때는
돌 모양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다
하늘을 받들 것인가
바람을 받들 것인가
사람을 받들 것인가
우리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게 될 때
자신의 시신을 치워 줄 수 있는
그런 손길을 은근히 사랑할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너를 생각하며
돌탑이 되어 보기도 하고
돌담이 되어 보기도 하고
돌길이 되어 보기도 한다
더욱 깊어지는 푸른 하늘이
푸른 바다 속으로 깊이 걸어서 들어가고
늙어서도 더욱 푸르러지는 청춘 하나
스스로 가을 깊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
겨울을 덮고 긴 꿈속으로 누워서 잠이 든다
탐라국 창세기
― 생숲길 33
땅 위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까마귀는 왕래하고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온다
제주공항에 시조새와 익룡들이 날아오른다
저 무서운 새들은 우리들의 까마귀일까 비둘기일까
설문대할망의 방주는 오늘도 물 위에 떠 있다
사람들의 홍수에 떠내려간 것들이 있다
아스팔트 홍수에 떠내려 가버린 것들이 있다
제주공항 아스팔트 아래 너무 많은 것들이 묻혀 있다
물 가운데 섬 하나 만들고 섬 가운데 산 하나 만들고
너무 지쳐서 한라산으로 누워계신 설문대할망
아, 언제 다시 일어나 하늘로 가는 다리를 놓으실까
아직도 탐라국 창세기를 쓰고 있는 탐라국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쫓겨난 인디언들을 생각한다
이방인들과 끝까지 싸워 몰아낸 참파왕국 사람들을 생각한다
정재수와 김달삼과 이덕구는 가고 없지만
화순과 위미에서 몰아냈던 해군기지는 강정에 들어서고 말았지만
공군기지만은 끝까지 막아내겠다는 가열 찬 탐라국의 후예들을 본다
탐라국 사람들은 오늘도 설문대할망과 일만 팔천 신들과 함께
아름다운 탐라국을 함께 만들고 있다 하늘로 가는 다리를 놓으려고
아흔아홉 통의 명주실로 설문대할망의 치마를 다시 만들며
마지막 한 통을 더 준비하려고 열심히 누에까지 기르고 있다
이방인, 육지 것인 나는 언제쯤 탐라국 사람으로 편입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한라산이 되지 못하고 제주바다의 물고기로 살아가고 있구나
제주바다에는 아직도 거대한 설문대할망의 방주가 흔들리고 있구나
폭낭과 야유나무
― 생숲길 34
당산나무가 나를 업어 키웠다
제주도 폭낭들은 오늘도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람을 업어 키우고 있다
북촌리 폭낭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1949년 1월 17일
그날 보았던 일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산나무에 임산부를 매달고
대검으로 찌르는 것을 보았다
총탄에 쓰러진 시체 더미 속에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
피의 가슴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피가 솟아나는 순간
천둥소리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미친(美親) 바람은 바다까지 건너갔다
야유나무를 한 번 휘감고
퐁니를 거처 퐁넛으로 달아났다
제주도 폭낭처럼 베트남의
그 퐁니 마을 야유나무도 똑똑히 보았다
총소리를 보았고 천둥소리의 뼈를 보았다
1968년 2월 12일 아침
야유나무는 야유나무 학살을 모두 다 보았다
탐라국 폭낭들이 보았고
참파왕국 야유나무가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당산나무들이 오늘도 똑똑히 보고 있다
당산나무는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다만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이제 다시 어미가 되고 싶다
웃는 아이들을 업어서
웃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 어미가 되고 싶다
바람의 왕국
― 생숲길 35
파도 발자국으로 건너온 바람
제주의 돌담들은 모두가
바람의 길이고 바람의 강이다
피바람이 불던 시절이 있었다
꽃들까지 울던 시절이 있었다
바람을 업어 키우느라 등이 휘어버린
팽나무에서
영등 할망의 자장가 소리 들린다
수월봉에서는 차귀도 바다를 보라
붉은 노을을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빛나는 은하수를 풀어 놓는다
바람의 왕국에서
바람으로 별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바람으로 꽃밭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아, 이제는 울던 바람이 웃는다
꽃밭에 꽃바람이 불고 있다
돌
― 생숲길 36
섬은 돌로 만든 심장이다
돌 속에 묻어 놓은 솥이 깨지고 숟가락이 부러지는 시절이 있었다 방사탑을 무너뜨려 성벽을 쌓던 시절이 있었다
한라산은 신에게 올리는 제사상이었다 오름들은 모두가 술잔과 밥그릇이었다
옥황상제께 올리던 백록담 술잔과 사라오름 퇴주잔에 술이 마르면서 사람들은 돌집을 짓고 돌담으로 바람의 길을 만들었다
음복에 취한 바람이 퇴주잔까지 깨뜨리고 제사상을 뒤엎으면서 가슴에 돌덩이를 품었다 돌의 큰 가슴 속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빌레못동굴과 다랑쉬굴에서 솥이 깨지고 숟가락이 부러졌다 너븐숭이 애기돌무덤에서 아직도 울음소리 들린다
돌담에 바람의 길이 있고 잣담에 발자국소리의 길이 있다 죽어서도 숨을 멈출 수 없는 산담에 영혼의 길이 있다 돌 속에 숨구멍이 있고 곶자왈에도 숨골이 있다
바람과 파도가 바위를 갈아 몽돌을 만들고 있다 우리들의 가슴으로 다시 데워진 돌에서 새싹이 돋아날 것 같다 숨비기꽃이 피어난다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백록담 술잔에 달빛이 차오른다
구름 뒤에서 붉은 화산을 품은 시지포스의 돌이 구른다 굴러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나는 땅에서 발자국소리와 숨소리를 듣는다 방사탑 안에 묻어둔 솥에 함께 먹을 쌀을 앉힌다 검은 돌 위에 쌀밥 같은 눈이 내려 덮는다
섯알오름
― 생숲길 37
섯알오름 연못에 연꽃이 없다
소나무들이 온 몸으로 젖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까치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작교가 보이지 않는다
두개골과 척추 뼈 하나씩만 묻히고
나머지 뼈와 살과 영혼들이
오름 어딘가에 흩어져
칠석날에도 만나지 못한 채
자꾸만 달과 별들을 부르고 있다
곁에 있는 백조일손묘역(百祖一孫墓域)에도
안장되지 못한 영혼들
섯알오름을 둘러싸고 있다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저
소나무들의 뿌리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다
길을 가던 달이 별들을 데리고 조문을 온다
소나무가 그들을 맞이한다
소나무들이 자꾸만 발목을 내려다본다
새벽이 조문을 오고 아침이 조문을 오고
동알오름쪽에서도
조문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두 개의 연못이 해처럼 환해진다
섯알오름 연못에 오작교 같은 연꽃이 돋아나고 있다
백비
― 생숲길 38
오후 네 시의 평화공원
온몸이 부서져 내린 보름달 부스러기들이
가을 억새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다시 보름달을 함께 만들기 위하여
가을바람에 온몸을 내던지며
스스로를 반죽하는 저 빛나는 영혼들
아, 어머니가 밀어 만들어주시던
칼국수 반죽처럼
크고 둥글고 납작하게 늘어나는 흰 영혼의 숨소리들
평화공원에 아직은 달이 뜨지 않는다
무지개도 검은 무지개만 떠 있다
거친오름 기슭에 너무 많은 관이 묻혀있다
관들이 병풍으로 쌓여있는 위패봉안실 뒤로
행방불명자 비석들이
궤 속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건만
아직은 밤이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국수 함께 먹으려면
우리들의 밤은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동굴 속 하얀 혼백의 관으로 누워 있는 저 백비에
저 많은 죽음이 통일의 첫걸음 이었다고
저 많은 통곡이 평화의 씨앗 이었다고
아직은 새길 수 없어
코스모스는 길 밖에서만 피어나고
어머니가 만드는 칼국수 반죽은 보름달이 되지 못한 채
검은 동굴 속에서 흰 관으로 묻혀 숙성되고 있다
불탄낭
― 생숲길 39
그때 불에 타버린 나무가 어찌
선흘리 후박나무 뿐이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한 나무가
어찌, 북촌리 팽나무 뿐이랴
불이야아~ 불이야아~ 불이야아~
아무리 소리쳐보아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아무리 빌어보아도 아무도 살려 주지 않는다
아무리 호소해보아도 누구 하나 살려주지 않는다
붉은 태양이 무섭다 푸른 하늘도 무섭다
밤하늘의 별들도 너무 뜨겁다
달은 지금도 그때 입은 상처가 선명하다
온 세상을 쉬지 않고 돌고 있는 달을 보아라
불이야, 를 뜨겁게 외치는 둥근 저 영혼을 보아라
잊을 수 없다 온 동네가 불타오르던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뜨거운 몸이 먼저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병든 사람이 문지방을 기어 나오다 불타오르고, 갓 낳은 아이를 끌어안고 쓰러진 젊은 엄마가 불타오르고, 대나무밭에 숨어 숨죽이며 지켜보던 눈빛이 불타오르고, 우리 안의 돼지가 불타오르고, 외양간의 소가 불타오르고, 닭들이 불타오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쏘아 죽이며 온 동네에 불을 질러대던 사람들, 배고픈 개와 돼지들이 올레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을 뜯어 먹고, 그런 개와 돼지들을 또 다시 잡아먹는 사람들까지 모두 보아버렸으니, 어찌 멀쩡한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아, 온 동네가 불타오르는 밤하늘의 별들
이제 겨우 눈빛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밤새 불이야, 를 외치며 쉬지 않는 달빛의 목소리에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하는 어둠의 빛나는 눈빛들
밤이 깊을수록 더 깊은 어둠일수록, 더 밝은 별빛을 낳는다
어느 순례자의 수첩 제1권
― 생숲길 40
촛불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나의 심장에도 촛불을 켠다
평화공원에 누워있는
저 차가운 백비에
처음처럼
촛불의 이름을 새긴다
긴 잠에서 깨어나 목숨으로 만든 길 찾아간다
낮에는 꽃들이 심장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심장을 켠다
통일의 첫걸음을 찾아서
평화의 씨앗을 찾아서
봄의 어린 순교자를 찾아서
길에서 다시 피어난 애기동백과 함께 순례를 시작한다
알
하늘에서 본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 중간쯤
바다 위에 공 하나 떠 있다
손을 뻗친 손바닥 자국들이
비치볼에 가득 찍혀 있다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과 소련이 질러대던
럭비공 하나 떠 있다
축구공 하나 떠 있다
군화발로 함부로 차던
족구공 하나 떠 있다
더 높은 하늘에서 본다
미국이 상대선수를 바꾼다
미국과 중국이 야구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탁구를 한다
빠따로 수없이 얻어맞은
상처투성이 야구공 하나 있다
찌그러진 탁구공 하나 떠 있다
하늘에서 다시 본다
알이 하나 있다
알이 움직이고 있다
알에서 깨어나고 있다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순례단
송악산 진지동굴 안에서 붉은박쥐 강의를 듣는다 알뜨르비행장 풀숲에서 붉은가슴염낭거미 수업을 듣는다 제로센비행기 격납고 앞에서 고추잠자리 말씀을 듣는다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소나무재선충 증언을 듣는다 동광리 헛묘 앞에서 선홍빛 꽃그늘로 쌓이는 정방폭포 소리에 젖는다
구억초등학교 옛터에 들러 김달삼과 김익렬 목소리도 들어보고 모슬포와 수월봉과 월령리 쪽으로 돌며 현장학습을 시작한다 한라산 백록담까지 구석구석 바람과 함께 찾아간다 그늘과 어둠을 샅샅이 뒤져본다 아직도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있는 상형문자를 읽는다 사려니 숲길 따라 이덕구 산전에도 찾아가 빈 밥상에 차려진 햇빛도 받아보고 관덕정 앞 광장 바닥에서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도 만난다 선흘리 불칸낭 그늘에서 둥근 김밥을 나눠 먹고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간다
애기동백을 따라오는 꽃빛 순례단이 반짝이고
배고픈 달을 따라오는 별빛 순례단이 피어난다
가슴마다 불씨를 옮겨주는 반딧불이 순례단이 환하다
다랑쉬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 한 명이 들려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 볼 뿐
서서 흐르는 강
강 끝에, 서서 흐르는 강이 있다
당산나무가 아이들을 업어 키웠다
하늘로 가는 강이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강물을 따라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길
바다 건너 강 끝에도
하늘로 흐르는 강이 있었다
빛살처럼 눈부신 모습으로
강을 기어오르던 아이들이 떨어지고
퐁니 마을 야유나무 강물 속으로
피 묻은 총알 하나가 뛰어들었다
하늘로 오르던 강물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강물 속으로
왈칵, 폭포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어머니 체취가 함께 밀려들었다
강정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린다 강정천에서 헐레벌떡 몸만 겨우 빠져나온 은어들이 소개령에 대하여, 금족령에 대하여,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강정천 끝에도, 서서 흐르는 강이 있다 이제는 아이들을 업어 키우지 못하고, 바람만 업어 키우고 있다 허리가 너무 휘어서 하늘로 흐르지 못하는 강
오키나와로 가라고, 등을 후려치는 바람의 채찍에
구럼비 남쪽으로 활처럼 기울어지고 있는 여울목에서
나는 어머니처럼 붉은 알을 낳고 푸른 강물이 된다
관덕정
죽어서도 오백 년 천 년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
살아서도 투표용지 같은
잎들만 떨구는 나무가 있다
관덕정 앞 광장에
분홍달맞이꽃이 피어난다
꽃들의 가슴 속에
불씨가 숨어 있다
보도블럭을 들썩이는
뿌리들이 있다
화살 같은 햇살을 받으며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지금도 관덕정에서는
이재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덕구의 피냄새도 풍긴다
이승만 꼭두각시도 보인다
별들이 켜놓은 꽃불이 피어난다
꽃들이 켜놓은 혼불이 반짝인다
심장 같은 나뭇잎이 돋아난다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
죽어서도 집이 되어주는 나무가 있다
살아서도 심장에 촛불이 꺼진 사람들
살아서도 허수아비 그림자들이 많다
시인
어느 시인이 ‘한 걸음씩 걸어서’ 가고 있다
나도 따라서 ‘한 걸음씩 걸어서’ 가고 있다
시인은 포아스 화산을 보며 시를 낭송한다
나는 포아스 화산을 보며 신의 시를 읽는다
코스타리카는 1948년에 군대를 폐지했다는데
우리나라는 언제쯤 군대를 폐지할 수 있을까
인디언의 땅을 정복한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너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제주도를 짓밟고
노근리를 학살하고
베트남을 공격하더니
이제 또 다시 한반도를 유린하려고 하는데
어느 시인은 평화를
‘총구에 꽂힌 한 송이 꽃’ 이라 말하고
나는
‘한 그릇의 따뜻한 말씀’ 이라 말한다
어느 아름다운 시인은 오늘도
백 년 넘은 괘종시계에 따뜻한 밥을 주고
나는 오늘도 벽시계가 되어
밤새도록 어두운 벽을 둥그렇게 뚫고 있다
산
지리산을 오르고 한라산을 오르니 비로소 보인다 오늘도 지리산은 한라산을 보고 한라산은 지리산을 보고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생각하니 한라산 가슴 속으로 흐르는 긴 강도 보인다
제주도는 한 때 전라도 였다
한라산은 한 때 지리산 이었다
한라산 억새와 지리산 억새는 오늘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쓰러지고 있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한라산 동백과 지리산 동백은 오늘도 붉게 피어나고 먼나무는 먼 기억처럼 피를 뿜어올리고 있다
제주에서도 여수에서도 광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산으로 일어났던 강물이 모두 삼일운동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들은 아직도 여수 마래터널 앞에서 더 오래 기다려야만하고 제주도 백비에도 마음을 새기지 못하고 있다 반란의 뿌리에서 항쟁의 꽃이 피려면 백 년은 걸리고 완전한 독립이 되려면 또 백 년을 더 기다려야만 하는가
제주도가 탐라국으로 독립하려면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만 하는 것일까
탑
사람들은 이제 탑을 돌지 않고 탑 안에서 산다 철탑이나 철근콘크리트탑 안에서 산다 나도 탑 안에서 탑을 쌓으며 살고 있었구나 일 년 동안 급하게 쌓은 탑이 무너지니 비로소 오십 년 동안 쌓아온 탑이 보이는구나
창밖으로 눈발이 뛰어내린다
탑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끝장이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면 그 탑은 무너지고 만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나의 탑을 다시 쌓으며 보니 나무도 나이테로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무는 아직도 탑 속에 살지 않고 탑을 돌고 있다 탑을 둥그렇게 돌며 둥그렇게 길을 만들고 있다 나이테를 둥그렇게 돌며 둥그렇게 쌓고 있다
절
나의 봄은 동지부터 시작한다 겨울나무는 모래시계처럼 몸을 크게 한 번 뒤집는다 하늘의 영혼을 빨아들여 땅 속에서 봄을 낳는다 겨울에는 지하생활이 활발하다 밤에는 동굴에서 살고 낮에도 동굴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나무들도 삼일운동을 준비한다 바깥 동정을 살피며 힘차게 나아갈 길을 열어 나이테를 만든다
나이테에는 세월이 통째로 들어있다 오래된 나무들은 그 해 겨울을 잊을 수 없다 가지에 매달려 대검에 찔리던 임산부를 잊을 수 없다 마을이 통째로 불타며 죽어가던 아우성을 잊을 수 없다 마을과 함께 온몸이 불타버린 나무들의 비명소리도 잊을 수 없다 동굴 속을 전전하다 하얀 눈밭에 붉게 피어나던 붉은 동백꽃들도 잊을 수 없다 북촌리 팽나무도 선흘리 후박나무도 동백동산의 동백나무도 그해 겨울의 나이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탐라국 입춘굿이 열리고 삼일절이 오고 사삼절이 오고 사일구절이 오고 오일팔절이 온다 우리들의 봄은 모두가 삼일운동이다 양과자반대운동도 그렇고 민관총파업도 그렇다 아무리 삼일절발포사건이 터지고 초토화작전으로 불바다를 만들어도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사삼투쟁을 낳고 사일구혁명을 낳고 오일팔민주화운동을 낳고 유월항쟁을 낳고 촛불혁명을 낳는다
나는 삼일운동이다 너는 발포다 나는 삼일절이다 너는 삼일절발포사건이다 나는 총파업이다 너는 오리발이고 검거선풍이다 나는 여수민중항쟁이다 너는 초토화 작전이다 나는 꺼지지 않는 촛불이다 너는 베트남참전 학살이다
콧구멍 없는 소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자신의 모든 전생을 보시고 크게 깨달음을 얻으셨다 나도 이제 나의 전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아, 나는 콧구멍이 없다
어느 순례자의 수첩 제2권
― 생숲길 41
여수 序
이어도공화국에서 30년 만에 바람으로 부활
하여 순례를 시작했다 먼 바다를 건너
파랑도,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를 둘러보고
마라도를 둘러보고 가파도를 둘러보고
송악산 들러
산방산으로 들어와 제주도 오름 365개를
하루도 쉬지 않고 구석구석 순례를 하였다
오름 왕국 순례에 이어서 섬 왕국으로 간다
관탈섬을 둘러보고 추자도를 둘러보고
여수로 간다 거문도 등대로 간다 섬의 큰 문
수월산 동백에는 아직도 붉은 피가 묻어있다
1948년 10월의 화약 냄새를 품고 있다
차마 제주 형제들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 없어
총구의 붉은 꽃으로 피어 떨어져버린 붉은 목숨들
거문도 동백에는 아직도 제주도 기억이 남아있다
거문도뱃노래길을 따라 녹산등대로 간다
해풍쑥 향기 찾아간다 빛나는 은갈치 따라간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
오동도 동백꽃이 되어 바다에 뛰어들었던 첫사랑
향일암 붉은 해로 떠오르던 한결같은 나의 첫사랑
끝끝내 인어공주가 되어 거문도까지 마중을 나왔구나
신지끼 인어공주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만나니 비로소 백도가 보인다
매바위에서 매가 날아오르고 왕관바위가 왕관을 씌워준다
여수 1
거문도인가 백도인가 금오도 비렁길인가
뿌리 깊은 방풍처럼 절벽을 기어오른다
손톱을 바위틈 깊이 심으면서 기어오른다
붙잡은 바위들은 자꾸만 흔들리고
다시 잡은 바위도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래도 포기 안하고 끝에까지 가련다
금오도 방풍나물 나에게 길을 열어
자꾸만 기어간다 힘내어 올라간다
끝끝내 기어오르는 저 방풍 꽃 보아라
여수 2
꿈인가 생시인가 고향집 아궁이에
장작불 타고있다 밖에까지 번진다
아무리 소리쳐 봐도 목소리가 안나온다
우물에 가보아도 수도물 얼어있다
또랑에 가보아도 강물이 얼어있다
발바닥 뜨거워져도 번진불길 못 잡는다
아이고 아이고야 고향집 불에 탄다
아이고 아이고야 어머니 울고있다
아이고 화장허겠네 어머니가 안보인다
여수 3
하늘에서 보니 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 꽃가루 날린다
바다에서 더욱 향기로운 저 꽃가루 섬들
여수의 꽃밭에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
온 세상으로 깊은 꽃향기 퍼트리고 있다
저 나비는
어머니가 환생한 나비일까
아버지가 환생한 나비일까
아니면
나의 첫사랑이 환생한 나비일까
이순신 장군이 환생한 나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야포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제주도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팽목항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맹골수도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아직도 젖어있는 나비 한 마리
먼 바다를 건너온 나비 한 마리
이제 막 꽃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다
젖은 날개 활짝 펴서 꿈을 말리고 있다
여수 4
바다를 알려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가 되어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쇄빙선을 타고 남극이나 북극에도 가보아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 참치라도 잡아보아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포경선을 타고 나가 고래의 꿈을 잡아보아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하다못해 해적선이라도 타고 나가 보아야만 한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바다를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가 마음속에 오대양 육대주를 다 품고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가 마음속에 저마다의 우주가 들어있고
우주보다 더 넓고 더욱 깊은 하늘이 살고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어찌 바다를 다 알 수 있으며 마음을 다 볼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나는 잠시 거문도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뜯으며 오동도의 동백을 생각한다
여수 5
멀리 금오도 쪽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간다
날아가다 보니 제주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팽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기러기 섬에 어찌하여 제주도 숲이 있는 것이냐
기러기 섬에 어찌하여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느냐
제주도 동백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맑은 하늘에서 어찌하여 미군 전투기 소리 들리느냐
마른하늘에 기총소사라니,
햇빛이 어찌하여 느닷없이 총알처럼 빗발치는 것이더냐
날아가던 기러기 한 마리 어찌하여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더냐
기러기 섬은 아직도 1950년 8월 3일을 잊을 수 없다
이야포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해변의 몽돌들이 두룩여의 조기잡이배 이야기도 한다
한반도를 품은 호수마을에서는 아직도
태극기를 단 목선에 폭격이 가해지고
갓난아이는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다 피를 빨고 있다
* 1950년 8월 미군 전투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학살과 남면 두룩여 조기잡이 어민 집단학살이 있었다
여수 6
나는 여수의 땅 한 평 갖고 싶네
그곳에 나무와 꽃들을 심고 싶네
나는 여수 바다 한 평 갖고 싶네
나는 갯벌에서 꼬막과 살고 싶네
나는 여수 하늘 한 평 갖고 싶네
나는 여수 하늘 노을이 되고 싶네
나는 여수에 방 하나 갖고 싶네
방 없는 나그네 쉬어가게 하고싶네
나는 여수의 가슴 하나 갖고 싶네
그 가슴에서 나의 심장 뛰고 싶네
나는 여수에서 긴 여행 마치고싶네
내가 심은 나무와 꽃으로 쉬고싶네
여수의 나비가 되어버린 첫사랑 따라
나는 늘 죽어서라도 여수가 되고싶네
나는 여수의 땅 한 평 되고 싶네
그곳의 나무와 꽃으로 피고 싶네
방 없는 나그네는 여수가 방이라네
여수 7
커다란 트렁크 하나 들고 겨울 새벽 여수역에 내린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이제 다시 겨울 저녁 여수항으로 가고 있다
여수 8
외로운 한 남자를 만난다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다
고독하고 짧게 살고 길게 기억되는 남자
짧게 살아도 길게 기억되는 것이 좋을까
길게 살아도 바로 잊혀지는 것이 좋을까
고갱이 떠나자 고흐는 왜 하필 귀를 잘랐을까
자꾸만 환청이라도 들렸던 것일까
자신의 귀에 고갱의 입이라도 달라붙었던 것일까
입을 자를 수 없어 귀라도 잘랐던 것일까
귀를 자르면 고갱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
나에게도 테오가 있을까
나에게도 요한나 봉허가 있을까
나에게도 고갱이 있을까
고흐에게는 그래도 자신을 쏟아낼 그림이 있었다
나도 고흐처럼 나를 쏟아놓으면 시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도 자화상이 시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시에도 아몬드 꽃이 피고 별이 빛날 수 있을까
여수 9
여수에는 음식까지 잘하는 팔방미인 친구가 있다
여수는 장어도 서대도 방풍도 갓도 맛있는 팔방미인이다
여수에는 레인보우처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 피를 주겠다고 전남대병원까지 달려와 준 사람들
배은망덕한 나는 어찌하여 그들을 잃어버린 것일까
여수에는 아직도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수를 떠나면서 싸늘하게 식었을까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오동도엔 아직도 동백꽃 피는데
나의 가슴에는 어찌하여 새우의 멍텅구리 배만 묶여 있을까
내가 가장 사랑했던 향일암엔 아직도 석양까지 꽃이 피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신풍애양원 골목의 두룩저어지일까
여수는 내가 모르는 사이 가장 깨끗한 미항이 되었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남몰래 쏟아버리는 굴뚝으로 사는가
여수항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항이 되었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회색 바바리코트의 날파람동이인가
여수는 날이 갈수록 따뜻하고 아름답고 새로워지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왼쪽가슴 움켜쥐고 쓰러지는 것일까
경찰서와 우체국에서 시화전을 하던 어린 시인들은 자라나
진남관 기둥이 되어 여수를 지키는 이순신장군이 되었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영취산 참꽃으로 가슴만 붉어지는가
소호동에서 내가 잡던 실뱅장어는 이제 여수를 먹여살리는데
나는 이제 겨우 다시 바다의 댓잎으로 떠가는 실뱀장어인가
여수 10
여수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살고 있다
여수는 시장님도 시인이고 국화의원도 시인이다 의사도 시인이고 요리사도 시인이다 중대장님도 시인이고 복지사님도 시인이다
여수에서는 바람이 시를 쓰고 시인들은 시를 산다
진짜 시인들은 시를 쓰지 않아도 시를 살 줄 안다
여수 11
여수에는 여수시가 있다
여수에는 여수의 시가 있다
여수에는 麗水詩가 있다
여수는 모두가 麗水詩
시와 시인은 모두 여수로 간다
시와 시인은 이제 여수에 산다
여수에는 시 아닌 것이 없다
여수 12
30년 전에 나는 여수에서 첫 시집을 냈었지
한 번도 뵙지 못했던 김훈 선생님은 나를
한국일보 지면으로 여수바다와 함께 불러주셨지
그때 나는 시만 쓰면 시인이 되는 줄 알았었지
시인만 되면 가고 싶은 숲길 가는 줄 알았었지
시인의 길이 꽃신 신고 가는 꽃길이 아니라
맨발로 가는 가시밭길 이라는 것을 알았지
맨발로 가는 유리조각길 이라는 것을 알았지
세상이 병들면 작두라도 타야한다는 것을 일았지
나는 그것을 30년 만에 이제 겨우 알았지
그리하여 비로소 진짜 시인이 되고 있는 것이지
모르는 최동호 교수님과 권영민 교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지
정끝별 시인과 함께 불러주셨지 좀 허전한 봄이었지
그해 가을 함민복 시인이 나와 반대 길로 가서 시인이 되었지
그리고 다시 봄이 되어 신경림 선생님과 김우창 교수님께서
나를 다시 불러 주셨지 죽음의 숲을 건너던 봄이었지
김기택시인 나희덕시인 김우태시인 노용희시인 조기원시인을 만났지
그리고 나는 죽음의 숲을 겨우 빠져나와
붉은 여우를 만났지
그 붉은 여우의 꼬리에 목이 감겨
월미도 앞바다에 버려졌지
그때 나는 이규보의 구시마문(驅詩魔文)을 몰랐지
30년 이면 누군가의 일생으로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어쩌면 나에게도 앞으로 거짓말처럼 한 30년 남아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새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여수 13
여수에는 나의 평생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나의 평화와 생명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나의 평화와 생명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의 평생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의 평화와 생명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의 평화와 생명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이 평생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이 평생 살아야 할 것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이 평생 가꿔야 할 것이 있다
여수 14
평생학교 돼지들이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돼지감자가 너무 많은 새끼들을 품고 있다
칡넝쿨이 쉬지 않고 돼지우리로 뻗어 온다
칡넝쿨에서는 이방원의 하여가 소리 들린다
칡뿌리에서는 정몽주의 단심가 소리 들린다
평생학교 돼지들이 돼지우리 밖으로 간다
칡넝쿨이 멈칫 하는 사이 잎 뜯어 먹는다
칡뿌리가 헛눈 파는 사이 땅 파고 먹는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칡은 아무래도 뿌리를 믿고
돼지는 아무래도 주둥이를 믿는다
봄이 오면 또 다시 칡과 돼지가 함께 살리라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 「단심가」
여수 15
첫눈 왔다는 소문이 펄펄 흩날리고 있다
누군가는 롱패딩 장만하려고 줄을 서고
누군가는 겨울에서 여름으로 여행 하고
누군가는 겨울에서 더 깊은 겨울로 간다
단풍의 순례는 숲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단풍의 순례는 바다에서도 떠가고 있다
단풍의 순례는 섬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단풍의 순례는 길에서도 굴러가고 있다
들국화도 아직은 살아있고 해국도 분꽃도
아직은 멀쩡하게 살아있다
수선화가 한창 땅을 들고 일어나 기지개 켜고
바다 속에서는 남방돌고래가 사랑을 찾는다
첫눈이 나와 당신의 가슴 속으로 쌓인다
여수 16
내가 지금까지 아는 시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여수 시인들이다
나도 이제 여수 시인이 되어야겠다
내가 지금까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여수 사람들이다
나도 이제 여수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가 지금까지 아는 고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고을은 으뜸 여수이다
나도 이제 여수 같은 고향이 되어야겠다
여수 17
평생학교에 돼지들이 많다
평화와 생명학교에 돼지감자가 많다
돼지들이 주둥이로 땅을 판다
돼지감자들이 발로 땅을 판다
돼지와 돼지감자가 흙을 일군다
돼지와 돼지감자가 흙 농사를 짓는다
나와 어머니가 뚱딴지 농사를 짓는다
나는 겨울에도 돼지의 불알을 까고
돼지감자를 넓은 우리로 옮겨준다
꿀꿀꿀 꿀꿀꿀 꿀꿀꿀 꿀꿀꿀
나는 이제 뚱딴지 농사의 대가가 되었다
곁에서 어머니는 방풍으로 웃고 계신다
여수 18
평생학교 정문 양쪽에 후박나무 두 그루 있다
몇 년 전에 심었다
선흘리 불칸낭 어린 새끼를 데려다가
안아주고 업어주고 정성껏 키웠다
처음에는 다친 뿌리로 고생도 많았지만
이제는 제법 잘 자라서 학생 티가 좀 난다
여수 19
여수 호명마을에는 진세의례가 있다
단옷날 하는 곳들도 많지만
호명마을에서는 칠월칠석에 한다
아침부터 동네는 떠들썩하고
사람들은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날이 갈수록 어려지는 진세들은
마을 어른들과 정자나무에 절을 하고
마을 어른들과 정자나무는 덕담을 한다
호명마을에는 아직도 진세놀이를 한다
갈수록 아이들이 없어지는 시대에도
살기 좋은 마을에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여수 20
11월도 벌써 끝물이다
평생학교 억새꽃은 벚나무 단풍들과 놀고
무당거미도 붉은 단풍잎 하나와 놀고 있다
임산한 검은 고양이는
돼지감자 캐는 내 곁으로 다가와 파고든다
하늘을 밝혔던 칡꽃은 열매를 매달았고
멀구슬나무 잎은 날개를 달고 열매는 익어간
호박잎은 아직도 싱싱하게 뻗어 피어나고
방풍 잎은 나의 입 안에서 더욱 진한 향을 내뿜는다
사철나무 씨는 붉게 익어가고 동백꽃망울은 부풀어간다
세상에는 꿀벌들이 자꾸만 없어진다는데
평생학교 행복꽃밭에는 꿀벌들의 왕국이다
지금도 한창 꿀벌들은
들국화와 백일홍과 로즈마리 꿀을 따느라 바쁘다
감귤나무는 이제 감귤을 내려놓고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또한 평생학교의 11월이 겨울 속으로 가고 있다
땅속으로 기어들어간 굼벵이들이 날개의 꿈을 꿈꾸기 시작한다
봄
― 생숲길 42
봄이 오고 있다
봄을 본다
봄이 몸으로 보인다
봄이 몹으로 보인다
봄이 봅으로 보인다
해가 조금씩 일찍 온다
해가 조금씩 늦게 간다
해를 보려고 새싹이 돋아난다
해를 보려고 풀들이 자라난다
봄은 봄(春)이다
봄은 청춘이다
봄은 스프링(spring)이다
봄은 통통 튀어 오른다
봄은 봄(bomb)이다
봄은 펑펑 터진다
봄이 왔다
봄이 봄으로 보인다
나도 이제 봄이다
봄이 환하게 핀다
고양이
― 생숲길 43
꼬리 잘린 얼룩 고양이 한 마리
새끼 일곱 마리 데리고 놀고 있다
나도 함께 놀아보려고 다가간다
새끼들은 쪼르륵 집으로 돌아가고
어미는 반대쪽으로 나를 유인한다
꽃향기에 홀리듯 고양이 따라간다
꿈같은 고양이들의 천국이 있다
대문 없는 아름다운 집으로 들어가니
고양이들이 몰려와 배불리 먹고 논다
안쪽 거실에도 하얀색 고양이가 있다
밥그릇도 더 빛나고 놀이터도 더 좋다
창문 안쪽의 고양이는 바깥쪽을 향하고
창문 밖 고양이들은 안쪽을 향하고 있다
한라산에서 지리산을 본다
― 생숲길 44
한라산 안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 안에 한라산이 있다
한라산 밖에 백두산이 있고
백두산 밖에 한라산이 있다
하늘에서 다시 보니
한라산과 지리산과 백두산
백두산과 지리산과 한라산
꿈처럼 생시처럼 한 몸이로구나
보면 볼수록 한 통속이로구나
히야신스
― 생숲길 45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벌써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삼 년만 근무하고 나가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벌써 삼십 년 넘게 갇혀있다
나의 삶에도
나의 꿈에도
히야신스 꽃이 피어난다
초선
― 생숲길 46
꿈속에서 나는 초선이를 만났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영원한 전쟁도 없고
영원한 평화도 없다고 하였다
초선이를 분명히 만나기는 만났는데
내가 동탁인지 여포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 중엔 여포요
말 중엔 적토마라
유비와 관우와 장비와 조조의 세상에서
초선의 사랑과 여포의 사랑만 보였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왕윤은 연환계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살구꽃들과 복숭아꽃들은 벌써 피어나는데
도원결의를 할 사람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길
― 생숲길 47
바다로 가는 길이 있다
하늘로 가는 길이 있다
수평선 너머
이어도 가는 길이 있다
너에게 가는 길이 있다
구부러진 길이 있다
갈라 터진 길이 있다
바다 되는 길이 있다
하늘 되는 길이 있다
섬이 되는 길이 있다
젖은 발로 걸어가는 길
노을 젖어 걸어가는 길
자기 몸을 밟고 가는 길
마음속을 밟고 가는 길
나무 되어 걸어가는 길
스스로
나무 기둥 속으로
물이 되어 올라가
바다가 되는 사람
하늘이 되는 사람
구름이 되는 사람
이어도 되는 사람
지붕
― 생숲길 48
새들의 지붕을 생각한다
물고기 지붕을 생각한다
사람의 지붕을 생각한다
짐승의 지붕을 생각한다
하늘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바다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산의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강의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수평선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지평선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수평선 지붕 위에 사는 식구들
지평선 지붕 위에 사는 식구들
지붕 위에도 지붕 아래도
늘 해가 뜨는 세상
늘 달이 뜨는 세상
늘 별이 뜨는 세상
오늘도 우리 다 함께 맛있는 세상,
고구마꽃
― 생숲길 49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11월
― 생숲길 50
홀로 걷던 1월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가는 11월
바다로 가는 은빛 억새꽃 물결에 홀려 왔던 길
오랜만에 거슬러서 신산공원으로 간다 동광리 헛묘
억새밭에서 아직도 육지것들이란 말이 들린다
동광 육거리 지나 충혼묘지에서
아직도 그날의 인육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평화로는 이제 마주 보던 얼굴이 너무 멀어져서
은빛 물결이 서로 손에 닿지 않는다
한라산 억새꽃들이 피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핏덩이로 태어나 백발이 되어가는 일생이 아니다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한 딸의 생리대도 아니다
신산마루에 살았었다는 신이 보이지 않는다
신신마루 난민촌도 보이지 않는다 신산공원
해원 방사탑 앞에 두 대의 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다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으로 가는 4.3 역사 순례 버스와
제2공항이 들어선다는 성산읍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과거로 가는 버스와 미래로 가는 버스가 나란히 있다
붉은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동쪽으로 간다 성산으로 일출처럼 간다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성산읍 신산리로 간다
강정 바다를 접수한 미군은 성산 하늘까지 넘보고 있다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성산공항이 들어서면 봉우리가 잘려나갈 대수산봉에 오른다
쑥부쟁이와 꽃향유가 때로 몰려와 무덤가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제주도는 사삼 유적지 아닌 곳이 없다
나는 아직도 4.3이라 말하지 않고
제주3.1절 발포사건이라 말한다
우리들의 봄, 3월이 총을 맞고 쓰러진 날이라 말한다
성산일출봉에도 섭지코지에도 다랑쉬오름에도
광치기해변에도 터진목에도 오늘 들어간 서궁굴에도
그때 총을 맞고 쓰러진 삼일정신이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
독자봉을 찾다가 돌아오는 길, 송당 본향당에 들른다
11월엔 그냥 젖고 싶다는 시인은
환단고기와 구천 년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우주목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늘에 전하고
하늘은 우리들에게 비님을 보냈다 말았다를 반복한다
우산을 폈다가 접었다를 반복하는 사이
남해안의 섬들도 하늘의 대답이 궁금했을까
귀를 바짝 세우고 듣다 보니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구나
보길도와 청산도와 거문도와 여서도가 바다를 건너고 있구나
등 뒤에서 '붉은 입술족' 이야기가 나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강
― 생숲길 51
나의 몸속에 긴 강이 있다
나의 몸속에서 강물소리 들린다
나무의 몸속에 긴 강이 있다
나무 몸속에서 강물소리 들린다
한라산 몸속에 긴 강이 있다
한라산을 내려온 강물이 바다로 간다
어머니 탯줄에서 출발한 강물이
가슴속 돌멩이를 넘으며 여울이 된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박차고 오르는
힘찬 강물이 옹이를 만나 나이테를 휘돈다
백록담에서 시작하여 사연 많은 오름들
한 번씩 안아주고 내려오느라
피와 땀과 눈물이 섞여있어 따뜻하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긴 강이 있다
하늘에도 긴 강이 있어 은하수가 흐른다
나는 긴 강을 흐르다가
한라산으로 머물고 싶다
말
― 생숲길 52
말
뛴다
말이다
말이 뛴다
말들이 뛴다
말이 달린다
말들이 달린다
말 없는 말이 뛴다
말 없는 말들이 뛴다
말 많은 말이 달린다
말 많은 말들이 달린다
말들이 평화로를 달린다
말들이 자동차와 함께 달린다
말들이 비를 맞으며 평화로를 달린다
경마장에서 뛰쳐나온 말들이 평화로를 달린다
말들이 평화로를 달린다 이어도 공화국으로 간다
말들과 함께 말 많은 세상을 달려 이어도 공화국으로 간다
꿈과 고양이
― 생숲길 53
이어도공화국 고양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 산다
내가 밥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 산다
나와 고양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롭다
그런데 자꾸만 고양이들이
나의 꿈 속으로 들어온다*
*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꿈속까지 따라서 들어온다. 낮에 보았던 고양이들이 이제는 내 꿈속까지 드나들기 시작한다. 검은 고양이와 호피무늬 고양이가 있다. 꼬리가 잘린 호피무늬 고양이가 두 마리 새끼들을 잘 기르고 있다. 작년에도 일곱 마리 새끼를 잘 낳아 잘 길렀던 고양이다. 올해도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는데 나에게 아지트를 들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세 마리의 새끼를 잃었다. 세 마리 새끼를 어디에서 잃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새끼들이 아주 어릴 때 나는 청소를 하다가 그들의 아지트를 무심결에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는 바람에 어미가 어린 새끼들을 물고 어디론가 이사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새끼들이 좀 자란 다음에 내 곁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새끼들이 두 마리 뿐이었다. 밖에서 그 고양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과 달리 올해는 호피무늬 어미 고양이가 유난히 더 예민해져 있다. 평소에 잘 지내던 검은 고양이와도 자주 으르렁거린다. 새끼들과 함께 있다가 나를 보면 어미는 다른 쪽으로 뛴다. 나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 틈에 새끼들은 안전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어미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자꾸만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 호피무늬 고양이를 따라가니 아름다운 집이 나온다. 그 집 거실 창문 앞에는 길 고양이들 먹으라고 고양이 사료와 물그릇이 놓여 있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빛나는 털을 다듬고 있다. 호피무늬 고양이와 그 흰 고양이는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둘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피무늬 고양이는 집 안에 사는 흰 고양이의 안락함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집 안의 흰 고양이는 호피무늬 고양이의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꿈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컨테이너 지붕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검은 고양이와 호피무늬 고양이가 또 다투고 있는 듯, 밤하늘을 물어뜯고 있다.
고양이들의 다급한 발자국소리에 깨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꿈의 무대가 서울 남대문시장이다. 남대문시장 길거리에 침대가 나란히 있다. 병실처럼 침대 사이에 커튼이 쳐져 있다. 장도 보지 않고 함민복 시인이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장을 본 이진명 시인이 침대에 누워 시를 읽는다. 시장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안개가 자욱하다.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라며 백호를 노래한다. 배호야 배호야 노래 한 번 불러보렴. 나는 백호를 배호로 듣는다. 그런데 안개가 갑자기 백호가 되어 달린다. 백호를 부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백호야 백호야 힘차게 달려오렴. 백호야 백호야 힘차게 나에게로 달려오렴. 안개 자욱한 남대문 시장의 아침이 백호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나는 느닷없이 김기택 시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안부를 물어보지 못하고, 나의 휴대폰에 충전을 시켜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백호 발자국소리 속에서 나희덕 시인과 정끝별 시인이 함께 나온다. 시장바구니를 든 나희덕 시인이 별을 든 정끝별 시인을 나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나의 침대 곁 의자에 앉아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몸에서 산목련 꽃이 피어난다.
꿈에서 깨어나 나는 얼른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린다. 고양이 꿈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시인들 꿈은 왜 꾸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를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엉뚱한 꿈이다. 더구나 나는 이진명 시인과 정끝별 시인을 직접 만나본 기억이 없다.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아주 오래 전에 인사동 평화만들기에서 몇 번 만난 기억이 있지만 왜 갑자기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그 시인들은 왜 내 꿈속으로 들어왔을까? 그 원인을 나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나의 꿈 이야기를 그 시인들 허락도 없이 쓰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인들이 내 꿈속에 나타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서 일단 사실대로 기록해두기로 한다. 대강 기록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감귤이 익어가고 있다. 새들이 먼저 맛을 보았는지 감귤을 부리로 쪼아 먹은 흔적이 남아있다. 나도 황금향 하나를 따서 먹어본다. 황금향은 참으로 달고 맛있다.
함민복 시인과 함께 오규원 선생님 나무를 찾아가는 꿈을 꾸기도 하고 여수에서 찾아온 갈무리문학회 시인들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는 꿈을 꾸기도 하고 제주도 산방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김도수 시인의 고향 진뫼마을과 (많은 사람들은 김용택 시인의 고향으로 기억하지만 나는 김도수 시인의 고향으로 기억한다. 김도수 시인은 내가 아는 김인호 시인과 함께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김도수 시인의 고향 사랑은 꾸밈이 없고 깊어서 그의 곁에만 있어도 향기가 전해진다. 그에 비하여 김용택 시인을 생각하면 국화와 배상금 생각이 떠오른다. 어느 여름날 그가 심었다는 정자나무 아래서 수몰지 이야기를 하면서, 배상금을 많이 받으려면 국화를 심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김용택 시인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때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김용택 시인의 참 모습을 잘 보지 못한다) 순천 낙안읍성 문학기행을 하는 꿈들을 꾸더니 드디어 이런 꿈까지 꾸게 되었다. 이런 꿈들은 어쩌면 나에게 다시 시를 쓰라는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 1990년 1차 심장 수술을 마치고 회복기에 만난 붉은 여우 때문에 시를 쓰지 못한 이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시를 쓰라는 강력한 계시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산목련으로 변한 것은 어쩌면 그의 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나무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주로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와 정성껏 다시 살려내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더니 그는 나에게 한 가지 좋은 사업을 제안 했었다. “나무 고아원 원장이 되어보면 어떻겠느냐?” 라는 말을 하면서 각종 개발로 억울하게 죽어가는 나무들이 많다는 이야기와 구체적인 방법까지 말해주던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1차 수술 후의 상황과 지금 2차 수술 후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나날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가 강해서 그때처럼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생각하고 그때처럼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1차 수술에 비하여 2차 수술은 더욱 심각하고 위험한 수술이었다. 1차 수술은 판막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대동맥 판막 아래 있는 혹 하나만 떼어내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2차 수술은 타격이 크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바로 그 때 나는 병원에서 생중계를 보았다. 심장내막염 때문이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1차 수술 후에 병원에도 가지 않고 관리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리하여 심내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패혈증의 일종인데 참으로 위험한 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잘 걸리지 않는 병인데 심장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잘 걸리는 병이라고 하였다. 심장에 칼을 한 번 댄 사람은 그 상처에 병균들이 잘 달라붙는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대동맥판막 부분에 병균들이 달라붙어서 염증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동맥판막이 망가졌다는 것이었다. 대동맥판막뿐만 아니라 승모판막까지도 상처를 입었으나 다행히 승모판막은 금속판막으로 교체하지 않고 성형수술만으로 가능해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기계판막으로 바꾸면 평생 항응고제를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로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나의 경우는 수술 받을 때 곁에 있던 환자가 대동맥이 찢어져서 인공대동맥으로 바꾼 환자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도 혹시 대동맥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참 많다. 만약에, 내 몸속에 들어있는 기계판막이 불량품이거나 다른 이유로 두 개의 날개 중에 하나라도 이탈된다면, 그 이탈된 날개는 칼이 되어 나의 대동맥을 찢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내 곁 침대에서 고생 많았던 그 대동맥환자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퇴원한 후에도 그 분은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많은 고생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