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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1. 2022

시의 씨앗 혹은 시작 메모

시를 쓰려고 메모를 한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을 본다


봄이 몸으로 보인다

봄이 몹으로 보인다

봄이 봅으로 보인다


해가 조금씩 일찍 온다

해가 조금씩 늦게 간다


해를 보려고 새싹이 돋아난다

해를 보려고 풀들이 자라난다


봄은 봄(春)이다

봄은 청춘이다


봄은 스프링(spring)이다

봄은 통통 튀어 오른다


봄은 봄(bomb)이다

봄은 펑펑 터진다


봄이 왔다

봄이 봄으로 보인다


나도 이제 봄이다

봄이 환하게 핀다






고양이 




꼬리 잘린 얼룩 고양이 한 마리

새끼 일곱 마리 데리고 놀고 있다

나도 함께 놀아보려고 다가간다 


새끼들은 쪼르륵 집으로 돌아가고

어미는 반대쪽으로 나를 유인한다 


꽃향기에 홀리듯 고양이 따라간다

꿈같은 고양이들의 천국이 있다 


대문 없는 아름다운 집으로 들어가니

고양이들이 몰려와 배불리 먹고 논다 


안쪽 거실에도 하얀색 고양이가 있다

밥그릇도 더 빛나고 놀이터도 더 좋다 


창문 안쪽의 고양이는 바깥쪽을 향하고

창문 밖 고양이들은 안쪽을 향하고 있다





한라산에서 지리산을 본다 




한라산 안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 안에 한라산이 있다 


한라산 밖에 백두산이 있고

백두산 밖에 한라산이 있다 


하늘에서 다시 보니 


한라산과 지리산과 백두산

백두산과 지리산과 한라산 


꿈처럼 생시처럼 한 몸이로구나

보면 볼수록 한 통속이로구나




히야신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벌써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삼 년만 근무하고 나가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벌써 삼십 년 넘게 갇혀있다 


나의 삶에도

나의 꿈에도

히야신스 꽃이 피어난다




초선 




꿈속에서 나는 초선이를 만났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영원한 전쟁도 없고

영원한 평화도 없다고 하였다 


초선이를 분명히 만나기는 만났는데

내가 동탁인지 여포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 중엔 여포요

말 중엔 적토마라 


유비와 관우와 장비와 조조의 세상에서

초선의 사랑과 여포의 사랑만 보였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왕윤은 연환계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살구꽃들과 복숭아꽃들은 벌써 피어나는데

도원결의를 할 사람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이 있다

하늘로 가는 길이 있다

수평선 너머

이어도 가는 길이 있다

너에게 가는 길이 있다 


구부러진 길이 있다

갈라 터진 길이 있다

바다 되는 길이 있다

하늘 되는 길이 있다

섬이 되는 길이 있다 


젖은 발로 걸어가는 길

노을 젖어 걸어가는 길

자기 몸을 밟고 가는 길

마음속을 밟고 가는 길

나무 되어 걸어가는 길 


스스로

나무 기둥 속으로

물이 되어 올라가

바다가 되는 사람

하늘이 되는 사람

구름이 되는 사람

이어도 되는 사람




지붕 




새들의 지붕을 생각한다

물고기 지붕을 생각한다

사람의 지붕을 생각한다

짐승의 지붕을 생각한다 


하늘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바다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산의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강의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수평선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지평선 지붕 아래 사는 식구들

수평선 지붕 위에 사는 식구들

지평선 지붕 위에 사는 식구들 


지붕 위에도 지붕 아래도

늘 해가 뜨는 세상

늘 달이 뜨는 세상

늘 별이 뜨는 세상 


오늘도 우리 다 함께 맛있는 세상,






고구마꽃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11월




홀로 걷던 1월이 나란히 손을 잡고 가는 11월

바다로 가는 은빛 억새꽃 물결에 홀려 왔던 길

오랜만에 거슬러서 신산공원으로 간다 동광리 헛묘 

억새밭에서 아직도 육지것들이란 말이 들린다

동광 육거리 지나 충혼묘지에서 

아직도 그날의 인육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평화로는 이제 마주 보던 얼굴이 너무 멀어져서

은빛 물결이 서로 손에 닿지 않는다

한라산 억새꽃들이 피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핏덩이로 태어나 백발이 되어가는 일생이 아니다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한 딸의 생리대도 아니다


신산마루에 살았었다는 신이 보이지 않는다

신신마루 난민촌도 보이지 않는다 신산공원

해원 방사탑 앞에 두 대의 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다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으로 가는 4.3 역사 순례 버스와

제2공항이 들어선다는 성산읍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과거로 가는 버스와 미래로 가는 버스가 나란히 있다

붉은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동쪽으로 간다 성산으로 일출처럼 간다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성산읍 신산리로 간다

강정 바다를 접수한 미군은 성산 하늘까지 넘보고 있다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성산공항이 들어서면 봉우리가 잘려나갈 대수산봉에 오른다

쑥부쟁이와 꽃향유가 때로 몰려와 무덤가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제주도는 사삼 유적지 아닌 곳이 없다

나는 아직도 4.3이라 말하지 않고

제주3.1절 발포사건이라 말한다

우리들의 봄, 3월이 총을 맞고 쓰러진 날이라 말한다

성산일출봉에도 섭지코지에도 다랑쉬오름에도

광치기해변에도 터진목에도 오늘 들어간 서궁굴에도

그때 총을 맞고 쓰러진 삼일정신이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들의 삼일운동은 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


독자봉을 찾다가 돌아오는 길, 송당 본향당에 들른다

11월엔 그냥 젖고 싶다는 시인은

환단고기와 구천 년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우주목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늘에 전하고

하늘은 우리들에게 비님을 보냈다 말았다를 반복한다

우산을 폈다가 접었다를 반복하는 사이

남해안의 섬들도 하늘의 대답이 궁금했을까

귀를 바짝 세우고 듣다 보니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구나

보길도와 청산도와 거문도와 여서도가 바다를 건너고 있구나

등 뒤에서 '붉은 입술족' 이야기가 나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나의 몸속에 긴 강이 있다

나의 몸속에서 강물소리 들린다


나무의 몸속에 긴 강이 있다

나무 몸속에서 강물소리 들린다


한라산 몸속에 긴 강이 있다

한라산을 내려온 강물이 바다로 간다


어머니 탯줄에서 출발한 강물이

가슴속 돌멩이를 넘으며 여울이 된다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박차고 오르는

힘찬 강물이 옹이를 만나 나이테를 휘돈다


백록담에서 시작하여 사연 많은 오름들

한 번씩 안아주고 내려오느라

피와 땀과 눈물이 섞여있어 따뜻하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긴 강이 있다

하늘에도 긴 강이 있어 은하수가 흐른다


나는 긴 강을 흐르다가

한라산으로 머물고 싶다








뛴다

말이다

말이 뛴다

말들이 뛴다

말이 달린다

말들이 달린다

말 없는 말이 뛴다

말 없는 말들이 뛴다

말 많은 말이 달린다

말 많은 말들이 달린다

말들이 평화로를 달린다

말들이 자동차와 함께 달린다

말들이 비를 맞으며 평화로를 달린다

경마장에서 뛰쳐나온 말들이 평화로를 달린다

말들이 평화로를 달린다 이어도 공화국으로 간다

말들과 함께 말 많은 세상을 달려 이어도 공화국으로 간다 





꿈과 고양이



이어도공화국 고양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잘 산다

내가 밥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 산다

나와 고양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롭다

그런데 자꾸만 고양이들이

나의 꿈 속으로 들어온다*     





*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꿈속까지 따라서 들어온다. 낮에 보았던 고양이들이 이제는 내 꿈속까지 드나들기 시작한다. 검은 고양이와 호피무늬 고양이가 있다. 꼬리가 잘린 호피무늬 고양이가 두 마리 새끼들을 잘 기르고 있다. 작년에도 일곱 마리 새끼를 잘 낳아 잘 길렀던 고양이다. 올해도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는데 나에게 아지트를 들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세 마리의 새끼를 잃었다. 세 마리 새끼를 어디에서 잃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새끼들이 아주 어릴 때 나는 청소를 하다가 그들의 아지트를 무심결에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는 바람에 어미가 어린 새끼들을 물고 어디론가 이사를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새끼들이 좀 자란 다음에 내 곁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새끼들이 두 마리 뿐이었다. 밖에서 그 고양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과 달리 올해는 호피무늬 어미 고양이가 유난히 더 예민해져 있다. 평소에 잘 지내던 검은 고양이와도 자주 으르렁거린다. 새끼들과 함께 있다가 나를 보면 어미는 다른 쪽으로 뛴다. 나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 틈에 새끼들은 안전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어미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자꾸만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 호피무늬 고양이를 따라가니 아름다운 집이 나온다. 그 집 거실 창문 앞에는 길 고양이들 먹으라고 고양이 사료와 물그릇이 놓여 있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빛나는 털을 다듬고 있다. 호피무늬 고양이와 그 흰 고양이는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둘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피무늬 고양이는 집 안에 사는 흰 고양이의 안락함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집 안의 흰 고양이는 호피무늬 고양이의 자유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꿈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컨테이너 지붕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검은 고양이와 호피무늬 고양이가 또 다투고 있는 듯, 밤하늘을 물어뜯고 있다.     


고양이들의 다급한 발자국소리에 깨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꿈의 무대가 서울 남대문시장이다. 남대문시장 길거리에 침대가 나란히 있다. 병실처럼 침대 사이에 커튼이 쳐져 있다. 장도 보지 않고 함민복 시인이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장을 본 이진명 시인이 침대에 누워 시를 읽는다. 시장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안개가 자욱하다.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라며 백호를 노래한다. 배호야 배호야 노래 한 번 불러보렴. 나는 백호를 배호로 듣는다. 그런데 안개가 갑자기 백호가 되어 달린다. 백호를 부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며, 백호야 백호야 힘차게 달려오렴. 백호야 백호야 힘차게 나에게로 달려오렴. 안개 자욱한 남대문 시장의 아침이 백호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나는 느닷없이 김기택 시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안부를 물어보지 못하고, 나의 휴대폰에 충전을 시켜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백호 발자국소리 속에서 나희덕 시인과 정끝별 시인이 함께 나온다. 시장바구니를 든 나희덕 시인이 별을 든 정끝별 시인을 나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나의 침대 곁 의자에 앉아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갑자기 나의 몸에서 산목련 꽃이 피어난다.     


꿈에서 깨어나 나는 얼른 꿈속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린다. 고양이 꿈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시인들 꿈은 왜 꾸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를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엉뚱한 꿈이다. 더구나 나는 이진명 시인과 정끝별 시인을 직접 만나본 기억이 없다. 나희덕 시인과 김기택 시인은 아주 오래 전에 인사동 평화만들기에서 몇 번 만난 기억이 있지만 왜 갑자기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그 시인들은 왜 내 꿈속으로 들어왔을까? 그 원인을 나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나의 꿈 이야기를 그 시인들 허락도 없이 쓰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시인들이 내 꿈속에 나타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서 일단 사실대로 기록해두기로 한다. 대강 기록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감귤이 익어가고 있다. 새들이 먼저 맛을 보았는지 감귤을 부리로 쪼아 먹은 흔적이 남아있다. 나도 황금향 하나를 따서 먹어본다. 황금향은 참으로 달고 맛있다.          


함민복 시인과 함께 오규원 선생님 나무를 찾아가는 꿈을 꾸기도 하고 여수에서 찾아온 갈무리문학회 시인들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는 꿈을 꾸기도 하고 제주도 산방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김도수 시인의 고향 진뫼마을과 (많은 사람들은 김용택 시인의 고향으로 기억하지만 나는 김도수 시인의 고향으로 기억한다. 김도수 시인은 내가 아는 김인호 시인과 함께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김도수 시인의 고향 사랑은 꾸밈이 없고 깊어서 그의 곁에만 있어도 향기가 전해진다. 그에 비하여 김용택 시인을 생각하면 국화와 배상금 생각이 떠오른다. 어느 여름날 그가 심었다는 정자나무 아래서 수몰지 이야기를 하면서, 배상금을 많이 받으려면 국화를 심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김용택 시인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때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김용택 시인의 참 모습을 잘 보지 못한다) 순천 낙안읍성 문학기행을 하는 꿈들을 꾸더니 드디어 이런 꿈까지 꾸게 되었다. 이런 꿈들은 어쩌면 나에게 다시 시를 쓰라는 계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 1990년 1차 심장 수술을 마치고 회복기에 만난 붉은 여우 때문에 시를 쓰지 못한 이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시를 쓰라는 강력한 계시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산목련으로 변한 것은 어쩌면 그의 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나무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주로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와 정성껏 다시 살려내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더니 그는 나에게 한 가지 좋은 사업을 제안 했었다. “나무 고아원 원장이 되어보면 어떻겠느냐?” 라는 말을 하면서 각종 개발로 억울하게 죽어가는 나무들이 많다는 이야기와 구체적인 방법까지 말해주던 생각이 새삼 떠올랐다.


1차 수술 후의 상황과 지금 2차 수술 후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나날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가 강해서 그때처럼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생각하고 그때처럼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1차 수술에 비하여 2차 수술은 더욱 심각하고 위험한 수술이었다. 1차 수술은 판막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대동맥 판막 아래 있는 혹 하나만 떼어내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2차 수술은 타격이 크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바로 그 때 나는 병원에서 생중계를 보았다. 심장내막염 때문이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1차 수술 후에 병원에도 가지 않고 관리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리하여 심내막염에 걸리고 말았다. 패혈증의 일종인데 참으로 위험한 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잘 걸리지 않는 병인데 심장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잘 걸리는 병이라고 하였다. 심장에 칼을 한 번 댄 사람은 그 상처에 병균들이 잘 달라붙는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대동맥판막 부분에 병균들이 달라붙어서 염증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동맥판막이 망가졌다는 것이었다. 대동맥판막뿐만 아니라 승모판막까지도 상처를 입었으나 다행히 승모판막은 금속판막으로 교체하지 않고 성형수술만으로 가능해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기계판막으로 바꾸면 평생 항응고제를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극심한 스트레스로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나의 경우는 수술 받을 때 곁에 있던 환자가 대동맥이 찢어져서 인공대동맥으로 바꾼 환자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도 혹시 대동맥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참 많다. 만약에, 내 몸속에 들어있는 기계판막이 불량품이거나 다른 이유로 두 개의 날개 중에 하나라도 이탈된다면, 그 이탈된 날개는 칼이 되어 나의 대동맥을 찢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내 곁 침대에서 고생 많았던 그 대동맥환자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퇴원한 후에도 그 분은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많은 고생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여수 序




이어도공화국에서 30년 만에 바람으로 부활

하여 순례를 시작했다 먼 바다를 건너

파랑도, 이어도종합해양과학기지를 둘러보고

마라도를 둘러보고 가파도를 둘러보고

송악산 들러

산방산으로 들어와 제주도 오름 365개

하루도 쉬지 않고 구석구석 순례 했다


오름 왕국 순례에 이어서 섬 왕국으로 간다

관탈섬을 둘러보고 추자도를 둘러보고

여수로 간다 거문도 등대로 간다 섬의 큰문

수월산 동백에는 아직도 붉은 피가 묻어있다

1948년 10월의 화약 냄새를 품고 있다

차마 제주 형제들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 없어

총구의 붉은 꽃으로 피어 떨어져버린 붉은 목숨들

거문도 동백에는 아직도 제주도 기억이 남아있다


거문도뱃노래길을 따라 녹산등대로 간다

해풍쑥 향기 찾아간다 빛나는 은갈치 따라간다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

오동도 동백꽃이 되어 바다에 뛰어들었던 첫사랑

향일암 붉은 해로 떠오르던 한결같은 나의 첫사랑

끝끝내 인어공주가 되어 거문도까지 마중을 나왔구나

신지끼 인어공주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만나니 비로소 백도가 보인다

매바위에서 매가 날아오르고 왕관바위가 왕관을 씌워준다




여수 1




거문도 섬문을 들어서니 섬의 식구들이 정겹구나

다시 만난 섬들이 참으로 반갑구나

그리운 이들은 뒤꼭지만 보아도 반갑구나

일가친척들은 발자국소리만 들어도 반갑구나

깨벅쟁이 친구들은 오늘도 진똘이와 나이먹기놀이에 정신이 없구나

계집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고 수펑선으로도 고무줄놀이를 하는구나

하늘의 구름들은 새끼줄 기차놀이하며 섬 징검다리 잘도 건너는구나


제주에서는 바다가 섬을 안아주는데

여수에서는 섬들이 바다를 품어주는구나


여수에서는 수평선도 마디가 있어서 더욱 정답구나

수평선 끝의 섬들도 부르면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구나

수평선이 글쎄 섬들을 이어주는 끈이 될 수도 있었구나


여수의 섬들은 가슴이 따뜻한 여수 사람들처럼

언제라도 나를 안아줄 듯 참으로 따뜻한 가슴이구나


수평선에도 징검다리가 있어 

너에게 갈 수 있어 참 좋구나

네 가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참으로 따뜻하구나


제주에는 수평선이 섬을 감싸주는데

여수에는 수평선에도 섬의 징검다리가 있어

너의 깊은 바다까지 건너갈 수 있겠구나


거문도 섬문을 들어서니

섬의 식구들이 오손도손 정겹기만 하구나


여수에서는 누구라도 섬으로 가는 길이 있어 혼자만의 섬이 아니구나





여수 2




거문도인가 백도인가 금오도 비렁길인가

뿌리 깊은 방풍처럼 절벽을 기어오른다

손톱을 바위틈 깊이 심으면서 기어오른다


붙잡은 바위들은 자꾸만 흔들리고

다시 잡은 바위도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래도 포기 안하고 끝에까지 가련다


금오도 방풍나물 나에게 길을 열어

자꾸만 기어간다 힘내어 올라간다

끝끝내 기어오르는 저 방풍 꽃 보아라




여수 3




꿈인가 생시인가 고향집 아궁이에

장작불 타고있다 밖에까지 번진다

아무리 소리쳐 봐도 목소리가 안나온다


우물에 가보아도 수도물 얼어있다

또랑에 가보아도 강물이 얼어있다

발바닥 뜨거워져도 번진불길 못 잡는다


아이고 아이고야 고향집 불에 탄다

아이고 아이고야 어머니 울고있다

아이고 화장허겠네 어머니가 안보인다




여수 4




하늘에서 보니 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 꽃가루 날린다

바다에서 더욱 향기로운 저 꽃가루 섬들

여수의 꽃밭에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

온 세상으로 깊은 꽃향기 퍼트리고 있다


저 나비는

어머니가 환생한 나비일까

아버지가 환생한 나비일까

아니면

나의 첫사랑이 환생한 나비일까

이순신 장군이 환생한 나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야포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제주도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팽목항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맹골수도에서 날아온 나비일까


아직도 젖어있는 나비 한 마리

먼 바다를 건너온 나비 한 마리

이제 막 꽃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다

젖은 날개 활짝 펴서 꿈을 말리고 있다




여수 5




바다를 알려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가 되어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쇄빙선을 타고 남극이나 북극에도 가보아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 참치라도 잡아보아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포경선을 타고 나가 고래의 꿈을 잡아보아야 한다

바다를 알려면 하다못해 해적선이라도 타고 나가 보아야만 한다

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바다를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가 마음속에 오대양 육대주를 다 품고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가 마음속에 저마다의 우주가 들어있고 

우주보다 더 넓고 더욱 깊은 하늘이 살고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어찌 바다를 다 알 수 있으며 마음을 다 볼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나는 잠시 거문도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뜯으며 오동도의 동백을 생각한다




여수 6




멀리 금오도 쪽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간다

날아가다 보니 제주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팽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기러기 섬에 어찌하여 제주도 숲이 있는 것이냐

기러기 섬에 어찌하여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느냐

제주도 동백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맑은 하늘에서 어찌하여 미군 전투기 소리 들리느냐

마른하늘에 기총소사라니,

햇빛이 어찌하여 느닷없이 총알처럼 빗발치는 것이더냐

날아가던 기러기 한 마리 어찌하여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더냐


기러기 섬은 아직도 1950년 8월 3일을 잊을 수 없다

이야포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해변의 몽돌들이 두룩여의 조기잡이배 이야기도 한다

한반도를 품은 호수마을에서는 아직도

태극기를 단 목선에 폭격이 가해지고

갓난아이는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다 피를 빨고 있다




* 1950년 8월 미군 전투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학살과 남면 두룩여 조기잡이 어민 집단학살이 있었다




여수 7




나는 여수의 땅 한 평 갖고 싶네

그곳에 나무와 꽃들을 심고 싶네


나는 여수 바다 한 평 갖고 싶네

나는 갯벌에서 꼬막과 살고 싶네


나는 여수 하늘 한 평 갖고 싶네

나는 여수 하늘 노을이 되고 싶네


나는 여수에 방 하나 갖고 싶네

방 없는 나그네 쉬어가게 하고싶네


나는 여수의 가슴 하나 갖고 싶네

그 가슴에서 나의 심장 뛰고 싶네


나는 여수에서 긴 여행 마치고싶네

내가 심은 나무와 꽃으로 쉬고싶네


여수의 나비가 되어버린 첫사랑 따라

나는 늘 죽어서라도 여수가 되고싶네


나는 여수의 땅 한 평 되고 싶네

그곳의 나무와 꽃으로 피고 싶네


방 없는 나그네는 여수가 방이라네




여수 8




커다란 트렁크 하나 들고 겨울 새벽 여수역에 내린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이제 다시 겨울 저녁 여수항으로 가고 있다




여수 9




외로운 한 남자를 만난다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다

고독하고 짧게 살고 길게 기억되는 남자

짧게 살아도 길게 기억되는 것이 좋을까

길게 살아도 바로 잊혀지는 것이 좋을까


고갱이 떠나자 고흐는 왜 하필 귀를 잘랐을까

자꾸만 환청이라도 들렸던 것일까

자신의 귀에 고갱의 입이라도 달라붙었던 것일까

입을 자를 수 없어 귀라도 잘랐던 것일까

귀를 자르면 고갱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


나에게도 테오가 있을까

나에게도 요한나 봉허가 있을까

나에게도 고갱이 있을까


고흐에게는 그래도 자신을 쏟아낼 그림이 있었다

나도 고흐처럼 나를 쏟아놓으면 시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에도 자화상이 시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시에도 아몬드 꽃이 피고 별이 빛날 수 있을까




여수 10




여수에는 음식까지 잘하는 팔방미인 친구가 있다

여수는 장어도 서대도 방풍도 갓도 맛있는 팔방미인이다

여수에는 레인보우처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 피를 주겠다고 전남대병원까지 달려와 준 사람들

배은망덕한 나는 어찌하여 그들을 잃어버린 것일까

여수에는 아직도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수를 떠나면서 싸늘하게 식었을까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오동도엔 아직도 동백꽃 피는데

나의 가슴에는 어찌하여 새우의 멍텅구리 배만 묶여 있을까

내가 가장 사랑했던 향일암엔 아직도 석양까지 꽃이 피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신풍애양원 골목의 두룩저어지일까

여수는 내가 모르는 사이 가장 깨끗한 미항이 되었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남몰래 쏟아버리는 굴뚝으로 사는가

여수항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항이 되었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회색 바바리코트의 날파람동이인가

여수는 날이 갈수록 따뜻하고 아름답고 새로워지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왼쪽가슴 움켜쥐고 쓰러지는 것일까

경찰서와 우체국에서 시화전을 하던 어린 시인들은 자라나

진남관 기둥이 되어 여수를 지키는 이순신장군이 되었는데

나는 어찌하여 지금도 영취산 참꽃으로 가슴만 붉어지는가

소호동에서 내가 잡던 실뱅장어는 이제 여수를 먹여살리는데

나는 이제 겨우 다시 바다의 댓잎으로 떠가는 실뱀장어인가




여수 11




여수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살고 있다


여수는 시장님도 시인이고 국화의원도 시인이다 의사도 시인이고 요리사도 시인이다 중대장님도 시인이고 복지사님도 시인이다


여수에서는 바람이 시를 쓰고 시인들은 시를 산다

진짜 시인들은 시를 쓰지 않아도 시를 살 줄 안다




여수 12




여수에는 여수시가 있다

여수에는 여수의 시가 있다

여수에는 麗水詩가 있다


여수는 모두가 麗水詩

시와 시인은 모두 여수로 간다

시와 시인은 이제 여수에 산다


여수에는 시 아닌 것이 없다




여수 13




30년 전에 나는 여수에서 첫 시집을 냈었지

한 번도 뵙지 못했던 김훈 선생님은 나를

한국일보 지면으로 여수바다와 함께 불러주셨지

그때 나는 시만 쓰면 시인이 되는 줄 알았었지

시인만 되면 가고 싶은 숲길 가는 줄 알았었지


시인의 길이 꽃신 신고 가는 꽃길이 아니라

맨발로 가는 가시밭길 이라는 것을 알았지

맨발로 가는 유리조각길 이라는 것을 알았지

세상이 병들면 작두라도 타야한다는 것을 일았지

나는 그것을 30년 만에 이제 겨우 알았지

그리하여 비로소 진짜 시인이 되고 있는 것이지


모르는 최동호 교수님과 권영민 교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지

정끝별 시인과 함께 불러주셨지 좀 허전한 봄이었지

그해 가을 함민복 시인이 나와 반대 길로 가서 시인이 되었지

그리고 다시 봄이 되어 신경림 선생님과 김우창 교수님께서

나를 다시 불러 주셨지 죽음의 숲을 건너던 봄이었지

김기택시인 나희덕시인 김우태시인 노용희시인 조기원시인을 만났지


그리고 나는 죽음의 숲을 겨우 빠져나와

붉은 여우를 만났지

그 붉은 여우의 꼬리에 목이 감겨

월미도 앞바다에 버려졌지

그때 나는 이규보의 구시마문(驅詩魔文)을 몰랐지


30년 이면 누군가의 일생으로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어쩌면 나에게도 앞으로 거짓말처럼 한 30년 남아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새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여수 14




여수에는 나의 평생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나의 평화와 생명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나의 평화와 생명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의 평생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의 평화와 생명학교가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의 평화와 생명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이 평생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이 평생 살아야 할 것이 있다

여수에는 우리들이 평생 가꿔야 할 것이 있다




여수 15




평생학교 돼지들이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돼지감자가 너무 많은 새끼들을 품고 있다

칡넝쿨이 쉬지 않고 돼지우리로 뻗어 온다


칡넝쿨에서는 이방원의 하여가 소리 들린다

칡뿌리에서는 정몽주의 단심가 소리 들린다


평생학교 돼지들이 돼지우리 밖으로 간다

칡넝쿨이 멈칫 하는 사이 잎 뜯어 먹는다

칡뿌리가 헛눈 파는 사이 땅 파고 먹는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칡은 아무래도 뿌리를 믿고

돼지는 아무래도 주둥이를 믿는다


봄이 오면 또 다시 칡과 돼지가 함께 살리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 「단심가」 




여수 16




첫눈 왔다는 소문이 펄펄 흩날리고 있다

누군가는 롱패딩 장만하려고 줄을 서고

누군가는 겨울에서 여름으로 여행 하고

누군가는 겨울에서 더 깊은 겨울로 간다


단풍의 순례는 숲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단풍의 순례는 바다에서도 떠가고 있다

단풍의 순례는 섬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단풍의 순례는 길에서도 굴러가고 있다


들국화도 아직은 살아있고 해국도 분꽃도

아직은 멀쩡하게 살아있다

수선화가 한창 땅을 들고 일어나 기지개 켜고

바다 속에서는 남방돌고래가 사랑을 찾는다


첫눈이 나와 당신의 가슴 속으로 쌓인다




여수 17




내가 지금까지 아는 시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여수 시인들이다

나도 이제 여수 시인이 되어야겠다


내가 지금까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여수 사람들이다

나도 이제 여수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가 지금까지 아는 고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고을은 으뜸 여수이다

나도 이제 여수 같은 고향이 되어야겠다




여수 18




평생학교에 돼지들이 많다

평화와 생명학교에 돼지감자가 많다

돼지들이 주둥이로 땅을 판다

돼지감자들이 발로 땅을 판다

돼지와 돼지감자가 흙을 일군다

돼지와 돼지감자가 흙 농사를 짓는다

나와 어머니가 뚱딴지 농사를 짓는다


나는 겨울에도 돼지의 불알을 까고

돼지감자를 넓은 우리로 옮겨준다


꿀꿀꿀 꿀꿀꿀 꿀꿀꿀 꿀꿀꿀


나는 이제 뚱딴지 농사의 대가가 되었다


곁에서 어머니는 방풍으로 웃고 계신다




여수 19




평생학교 정문 양쪽에 후박나무 두 그루 있다

몇 년 전에 심었다

선흘리 불칸낭 어린 새끼를 데려다가

안아주고 업어주고 정성껏 키웠다

처음에는 다친 뿌리로 고생도 많았지만

이제는 제법 잘 자라서 학생 티가 좀 난다




여수 20




여수 호명마을에는 진세의례가 있다

단옷날 하는 곳들도 많지만

호명마을에서는 칠월칠석에 한다

아침부터 동네는 떠들썩하고

사람들은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날이 갈수록 어려지는 진세들은

마을 어른들과 정자나무에 절을 하고

마을 어른들과 정자나무는 덕담을 한다

호명마을에는 아직도 진세놀이를 한다


갈수록 아이들이 없어지는 시대에도

살기 좋은 마을에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여수 21




11월도 벌써 끝물이다

평생학교 억새꽃은 벚나무 단풍들과 놀고

무당거미도 붉은 단풍잎 하나와 놀고 있다

임산한 검은 고양이는

돼지감자 캐는 내 곁으로 다가와 파고든다 

하늘을 밝혔던 칡꽃은 열매를 매달았고

멀구슬나무 잎은 날개를 달고 열매는 익어간

호박잎은 아직도 싱싱하게 뻗어 피어나고

방풍 잎은 나의 입 안에서 더욱 진한 향을 내뿜는다

사철나무 씨는 붉게 익어가고 동백꽃망울은 부풀어간다

세상에는 꿀벌들이 자꾸만 없어진다는데

평생학교 행복꽃밭에는 꿀벌들의 왕국이다

지금도 한창 꿀벌들은

들국화와 백일홍과 로즈마리 꿀을 따느라 바쁘다

감귤나무는 이제 감귤을 내려놓고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또한 평생학교의 11월이 겨울 속으로 가고 있다

땅속으로 기어들어간 굼벵이들이 날개의 꿈을 꿈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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