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안녕일상회복기원
자정을 넘어 강남 서초구 투표함이 열리고 개표가 시작되면서
윤석열 후보의 표가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사의 강물은 또 부자들의 세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가장 큰 실책은
부동산 정책의 실패와 인사 실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심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망해서 문을 곧 닫을 것 같았던 야당이
5년 만에 다시 이렇게 여당이 될 수 있다니. . . . ,
민주당 또한 정신 바짝 차린다면 기회는 다시 올 수 있으리라
새별오름에서는 오늘도 들불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무사안녕일상회복기원"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작년은 "들불COVID-19OUT"을 염원 했는데
COVID-19가 너무 가까운 곳으로 침투하고 말았다
날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다가
서울살림 넋을 잃어 헐떡거리다가
또 새봄 찾아와 눈부시구나!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도 전에 어둠 내리고
우리가 사랑을 이루기도 전에 찬바람 불어
삶은 흐느적거려도
우리들 돌아가 저마다 따로 불을 밝히느니
저 혼자 가두어놓은 슬픔
저 혼자 문을 열어 마주하는 세계
저 혼자 저를 돌아보며 일깨우는
이 설레는 창조의 날!
고요함 속에서는 무엇이든 아주 잘 보여
비로소 잃어버린 우리 찾게 되느니
이성부, <어떤 봄날에>중에서 [창작과 비평 "시요일"엡에서 재인용]
김가방 4시간
결론은 한줄이다.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이 못해서 졌다"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은 패할 싸움에서 패한것 뿐이다. 당연히 질 싸움이었다. 다만 그것을 민주당 의원들만 인정하지 않았을뿐.
검찰과 언론이 촛불의 민심을 담아내지 못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모두를 괴롭힐때, 국민은 4.15총선에서 초압승을 민주당에 선물했다. 검찰과 언론과 국힘당은 까불지 말라며 준엄한 결정을 해줬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세상이 변 할 줄 아느냐' 하며 여건을 탓할때 그럼 일을 하게 여건을 만들어 주마하고 국민이 응답한것이었다.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확실히 일을 하라고 촛불의 염원을 담아 준것이다.
허나, 민주당은 지지부진 했고 국민들에게 매일 고구마를 먹이며 등신 같은 모습을 보였고, 바보 같이 무능력했다. 다시 오지 못할 국회의석을 주었는데 눈치를 보았고 주어진 힘을 쓰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사람과 세력들에게 인간적으로 초지일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들은 일을 했다고는 하나 누구하나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언론을 다룰줄을 아나?
검찰을 다룰줄을 아나?
그렇다고 국힘당의 생떼에 독하게 맞장을 뜨는 사람이 있었나?
어떤 사안에 대해 의석의 힘이 태산과 같은 거대한 흐름을 보여주기를 했나?
몸보신하기 바빴던 민주당 의원들이었다.(뭐 게중에는 열심히 한 사람도 있는데 나머지 의원들은 남의집 일 마냥 그냥 신경도 안쓰고 구경만 했다)
100석이나 180석이나 국힘당에게 끌려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지지자나 힘을 실어준 국민들은 지쳐갔고 실망했고 회의감을 지속적으로 맛보게 된다.
그러다가 국민들은 그 마음을 재보궐 선거에서 1차 싸인을 주었다. 여당의 완패라는 싸인. 또 서울시장, 부산시장 선거 등에서 2차 싸인을 분명하게 주었다.여당의 완패라는 싸인.
"너네 그러면 바꿔버린다고...."
그래도 민주당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지자들 떠나가게하고 질리게 만들었다. 설마 국민이 우리 버리겠어? 설마 국민의 힘 후보자를 찍겠어? 라고 생각한듯 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당도 거시적으로 보면 국민의 힘당하고 크게 다를바가 없다. 지들이 잘해서 180석을 받은줄 안다. 소가 웃을 일이지, 잘해서 준게 아니고 촛불시민의 뜻을 받들어 일하라고 준거다.
그때만이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대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정신 못차리고 여당이라는 기득권으로 태만하고 자기의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민심을 져버렸다. 그것을 국민이 대선에서 심판한 것이다. 민주당이 못해서 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 안보, 국방, 문화 등 국격은 높였으되 국내정치는 못했다고 봐야한다. 실패한게 맞다. 정권 재창출을 못했으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임명직 중 3명이나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김동연, 최재형, 윤석열) 인사 실패가 맞다고 봐야한다.
민주당이 싫고 이재명이 싫었어도 윤석열과 국힘당은 아니 되겠기에 돌아선 사람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혼신의 힘을다했다. 하지만 0.8% 차이로 졌다. 방송 3사 출구조사가 0.6% 지는것으로 발표되었는데 그때까지도 민주당은 정신을 못차렸다. 지는 것을 발표했는데 박수치는 오만함을 보여주었다. 내가 보기엔 미친놈들 같았다.
자위하며 희망회로를 돌려보았지만 민주당은 끝났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만하고 무식한 망나니 윤석열이 나왔기 망정이지 홍준표가 나왔으면 완패했을 것이다.
모든 일을 마음대로 쳐돌릴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민주당에게 묻는다.
너네가 진심으로 국민을 섬기는지?
너네가 국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싸워는 보았는지?
너희는 촛불의 민심을 진심으로 담을 생각은 있었는지?
대선 패배한거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민주당이 승리했든 국힘당이 승리했든 절반 정도는 기쁘고 즐거울 것이고 절반 정도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 뿐이다.
여당일때도 국힘당한테 안되었는데, 의원들 임기가 남은 기간동안 무슨일을 할 수 있을까? 특별한 변화도 각성도 없을 것이다. 조금 시끄럽다가 6월 지방선거를 맞이하고 6월 지방선거도 재미보기는 힘들 것이다. 특별한 반성과 성찰과 변화없이는 안될 것이다.
민주당이 현재 172석인가?
결집하고 단결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일을 해라. 등신같은 병신짓 그만하고 검찰개혁, 언론개혁, 국회개혁 등을 단단하고 강하게 해라. 200석을 줘도 눈치볼놈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막가파 윤석열은 누가 막을수 있나? 누가 컨트롤하나? 한 명이 있긴하네, 영부인 되어도 내조만 한다던 여자! 그 여자는 법사와 스님들이 컨트롤하고 ....../
영혼의 성장에 관한 보고서
[ Walden ]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해설자 최광렬(출판·편집인)
1845년 3월 5일, 시인 채닝(William Ellery Channing)이 친구 소로(Henry David Thoreau)에게 호숫가 숲에 들어가 살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썼다. 3월 말의 어느 맑은 봄날, 소로는 친구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빌려 준 도끼를 들고 월든(Walden)1)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가 백송나무 한 그루를 찍어 넘겼다. 그가 살 통나무집 한 채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7월 4일, 소로는 가구 몇 점을 오두막으로 옮겼다. 세 평 남짓한 그 집은 비는 가릴 만했지만, 다가올 겨울에 하나뿐인 방을 덥힐 벽난로도 아직 없었다. "살면서 만들면 되지." 소로의 생각은 그랬을 터이다. 미국 독립 기념일이던 그날 밤, 콩코드 주민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축제의 여흥을 즐길 때, 소로는 호수로 쏟아져 내리듯 빛나는 별들을 보며 한 영혼의 홀로서기를 자축했다.
아침은 깨어나는 시간이다. 소로는 아침에 깨어나는 것이 어디 육신뿐이랴고 생각했다. 정신도, 아니 삼라만상이 모두 간밤의 어두움을 지나 다시 태어난다. 소로는 아침마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보았다. 월든 호수는 맑고 깨끗하다. "숲 속의 은자(隱者)처럼 긴 세월을 과묵하고 엄격하게 생활함으로써 그런 순수성을 얻었다"고 소로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새벽마다 호수에서 목욕을 한 것은 새로 태어난 존재에 정화수로 세례를 베푸는 제의와 같았다. 목욕 후에는 청소를 하고 명상에 들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명상이 때로는 한낮까지 이어졌다.
오전의 남는 시간에는 농사를 지었다. 밭을 갈아 강낭콩과 완두콩, 옥수수, 무, 감자의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김을 맸다. 비용을 줄일 요량으로, 가축을 부리지 않고 거름도 전혀 주지 않았다. 콩들은 그를 대지에 연결시켜 주었고, 그는 대지로부터 힘을 얻었다. 콩대가 한 뼘 자라면 영혼도 그만큼 자란 듯했다. 농사지어 거둔 작물은 일부는 먹고 일부는 팔아서 살림에 보탰다.
오전 일이 끝나면 샘물 근처의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책을 읽었다. 옥수숫가루에 호밀가루를 섞고 소금으로 간을 해 구운 빵으로 허기를 채웠다. 콩밭에서 캐낸 쇠비름에 물을 부어 끓인 후에 소금을 친 것도 입에 맞았다. 호수에서 낚은 물고기나 마을에서 산 돼지고기로 가끔 육식을 하기도 했지만, 차츰 멀리하게 되었다. 차, 커피, 담배 같은 기호 식품들도 피했다.
영혼의 허기는 동양과 서양의 고전들로 달랬다. 호머의 『일리아드』 같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작가들의 작품도 틈틈이 보았지만, 애독서는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2)를 비롯한 동양 고전들이었다. 고대 인도 철학의 정수가 담긴 『기타』를 읽노라면 "경이로운 우주 생성적 철학에 지성을 목욕"시키는 듯한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거의 날마다 산책을 했다. 월든 주위의 숲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숲의 소리'를 듣고 나무를 보면서 숲과 호수의 주민들인 여러 동물들을 관찰했다. 반시간이나 한 시간쯤을 걸어 주위의 농장들을 방문하거나 콩코드 마을의 친구들을 찾을 때도 있었다.
밤이 내리면 숲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콩코드의 숲이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제 손금 보듯 익숙한 터라, 빽빽한 수풀이 별빛을 가려도 길눈이 어두워지지 않았다. 돌아와서는 등잔에 불을 밝히고 일기를 썼다. 그날 듣고 보고 생각한 것들을 간추려 기록으로 남기면서, 소로는 생생한 삶과 맞닿아 있는 그 글들이 자신을 여물게 한다고 느꼈다.
소로가 2년 넘게 숲 속 생활을 한 것은 "되도록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가운데 개인적인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개인적인 사업'이란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함으로써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이었다.
당시에 미국은 독립한 지 70년 남짓 된 신생국으로서 자본주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북동부를 중심으로 공장들이 생겨나고 그 주변에 마을과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며, 도시들을 연결하는 철로와 전신선이 뉴잉글랜드3)의 울창한 야생림을 뚫고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갔다.
1843년에는 보스턴을 출발해 월든 호수 옆을 지나 피츠버그로 가는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고, 머잖아 콩코드의 농부들도 자연의 순환에 몸을 맞추던 '목가적 시간'에서 벗어나 열차 시각에 시계를 맞추는 '근대의 시간'에 익숙해질 터였다. 1848년 1월 24일, 샌프란시스코 동쪽의 한 계곡에서 기술자 제임스 마셜이 금을 발견했다. 이 소문이 바람처럼 전국으로 퍼졌고, 사람들은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들었다. 운이 좋으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에 만연하였고, 남들보다 먼저 그 운을 잡으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더 많이! 더 빨리!"가 당대의 표어가 된 것이다.
소로는 그러한 추세가 영 마뜩찮았다. 소를 앞세워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그는 묻는다. 누가 주인인가? 농부는 제가 소를 부린다고 여기겠지만, 소로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소가 농부를 끌고 가는 형국이었다. 더 많은 부(富),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하던 그 시대의 미국인들이 날이 갈수록 물질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 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찾았고, 그 비용을 대느라 이전보다 더 많이, 더 힘들게 일해야 했다. 남부에서는 농장주의 끝없는 탐욕 탓에 흑인 노예들이 원치 않는 고역에 시달렸고, 북부에서는 자유민들이 끝없는 욕구 때문에 임금 노동의 노역을 달게 받아들였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소로의 눈에, 물질주의에 찌든 그들의 삶은 인생의 본질을 외면한 '삶이 아닌 삶', "개미처럼 비천하게 사는 삶"으로 비쳤다.
소로가 생각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데에 있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성장에 무한한 단계가 있으며, 언제나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 애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자기 성찰을 통해 내면에 깃들인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그것이 계속 성장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물질과 육신의 안락에 대한 집착을 단호히 끊을 필요가 있었다. 과소비와 그로 인한 중노동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영혼을 돌볼 시간을 확보하게 해줄 생활 원리, 소로는 '자발적인 빈곤'과 '간소화'에서 그 길을 찾았다. "'자발적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는 될 수 없다."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으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러한 비율로 줄이라." 그렇게 의식주를 간소화한 결과, 그는 "1년 중 약 6주일만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성찰을 하기에는 자연만한 곳이 없었다. 소로에게 자연은 인간과 세계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해 주는 눈과 같았다. 특히, 인간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월든 호수와 야생 숲은 자연 본래의 모습이 잘 보존된, 더 깊고 초월적인 실재를 간직한 곳이었다. 그는 1851년 7월과 9월 어느 날의 『일기』에서, "우리가 건강해지는 유일한 비결은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이 숨어 계신 장소를 알아내며 자연의 모든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귀기울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했음을 밝히고 있다.
소로를 잘 모르던 콩코드 주민은 물론이고 친구들 중에도 그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은 무엇 하러 숲으로 가느냐고 물었고, 숲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했다. 소로는 자기 체험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낼 필요성을 느꼈다. 원칙과 실제가 조화를 이룬 대안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의문에 답하려 한 것이다. 숲 속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소로는 『월든』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2년째 되던 해인 1847년 초에 콩코드 문화회관에서 '월든'을 주제로 삼아 두 차례 한 강연이 호평을 얻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다. 비록 "몇몇 이웃 사람의 잠을 깨우는 결과밖에 얻지 못하더라도" "횃대 위에 올라앉은 아침의 수탉처럼 한번 호기 있게 울어" 볼 만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소로가 생각한 아침은 쉬 오지 않았다. 숲에서 나왔을 때 그는 『월든』을 곧 출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숲에서 같이 쓴 첫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 위에서 보낸 일주일』의 초고를 매만져 2년 만에 제 돈을 들여 어렵사리 출간했으나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이것이 다음 책의 발간에도 영향을 주어, 『월든』은 소로가 숲에서 나온 지 거의 7년이 다 된 1854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소로는 1839년 4월부터 1854년 4월까지 쓴 일기들까지 반영해 초고를 적어도 여섯 번이나 고쳐 썼다. 그 결과로 숲 속 생활의 체험들이 짜임새 있게 재현되어 완성도 높은 작품이 탄생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역시 냉담했다. 1858년 12월 15일, 출판사에서는 『월든』이 전혀 팔리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1851년 12월 30일, 소로는 월든 숲의 소나무가 잘려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날의 일기에 따르면, 그것은 "예전의 울창했던 소나무 숲이 벌목당할 때 요행히 살아남았던 열두어 그루 소나무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나무였다." 소로는 "소나무가 이고 있던 하늘의 공간은 앞으로 200년 동안 비어 있으리라. 소나무는 이제 재목에 불과했다. 나무꾼들은 하늘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다"라며 탄식했지만, "마을에서는 조종(弔鐘)이 울리지 않"았고, 다음해에도 소나무들은 계속 잘려나갔다.
이른바 '골드 러시'로 가속도가 붙은 서부 개척도 맹렬하게 진행되었다. 대륙 횡단 철도가 계속 서부로 뻗어 갔고 '기회의 땅'을 찾는 마차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유럽에서 이민자들도 몰려들었다. 그 뒤를 따라 군대가 백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밀려왔고, 독립전쟁 때 원래 살던 북동부의 땅을 잃고 중서부로 내몰렸던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은 다시 한 번 땅에서 쫓겨나 백인 군대와 원치 않은 전쟁을 벌이다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이 터졌다. 상공업에 기반을 둔 북부와 흑인 노예제로 지탱되던 남부 사이에 벌어진, 미국의 앞길이 걸린 한판 승부였다. 4년 동안의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미국의 진로는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남짓 만에 미국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자본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했고, 곧바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꾀하게 되었다.
물질적 이해를 둘러싼 전쟁보다는 인간 내면의 선악 투쟁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던 소로는 그러한 변화에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월든』 발간을 준비할 무렵인 1850년 11월 어느 날의 『일기』에서는, "나는 무언가 되기 위해 여물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느끼고만 있을 뿐, 정체를 알 수는 없다. 단지 땅이 기름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이 나에게는 파종기다. 이제 싹을 틔워도 좋을 만큼 충분히 오래 땅 속에 묻혀 있었다"고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땅은 날로 척박해지고 싹틀 날은 멀어져만 갔다.
소로는 '더 많은 영혼', '더 높은 이상'을 원했지만 시대는 '더 많은 물질', '더 발전한 자본주의'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였다. 그의 관심은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한 콩코드 자연사(自然史)를 저술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1861년 12월 3일, 소로는 숲에서 나무의 나이테를 세다가 심한 감기에 걸렸는데 그것이 곧 기관지염으로 발전했고, 차도가 없던 중에 다음해 4월에는 병명이 폐결핵임이 판명되었다. 요양을 했지만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연말에는 일기도 쓰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해졌다.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이듬해 5월 6일 아침 9시, 소로는 마흔다섯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큰사슴(moose)'과 '인디언'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소로는 '정치적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개혁이란 철저히 개인의 내면에 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율, 지적 성장, 영적 발전이야말로 그 수단이라고 보았다. 친구들이 시도한 이상주의 공동체 실험에 소로가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어떠한 개혁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았고, 개혁가를 자처하는 이들을 오히려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일 누군가가 내게 선(善)을 베풀 요량으로 내 집에 오려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나는 온 힘을 다해 달아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소로가 죽은 지 100년이 넘도록 『월든』의 진가가 재조명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그 100년은 제국주의와 전쟁과 혁명의 한 세기였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김수영, 「절망(絶望)」 중에서 - 근대가 자기 성찰 없이 질주했던, 한마디로 이념의 시대이자 정치의 시대였다. 1960~1970년대에 서구를 휩쓴 거대한 이념운동, 정치운동의 물결이 가라앉고 나서야 사람들은 『월든』을 다시 집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쟁이 빛의 속도로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월든』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너무 많은 자본주의'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근대의 자성(自省)이 진행되면서, 여러 대안들 가운데 하나로서 『월든』의 삶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월든』은 정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저마다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고 그에 따라 살아가라고 촉구할 따름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의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고 격려할 따름이다. 1851년 7월 어느 날의 『일기』에서도 소로는, "여행자!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 우리의 인생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여행' 아니겠는가. 개인의 역사란 결국 '어디'에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 아니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러니, 한번쯤 펼쳐들 일이다, 『월든』을.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 지친 어느 날, 모두가 다녀 이미 다져진 길 말고 새 길이 문득 찾고 싶어지는 어느 날에.
1. 소로가 말한 '깨달음'은 공유될 수 있는가?
소로는 '깨달음'에 무한한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가 개인의 영적 성장과 관련하여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했다는 것을 뜻한다. 수양한 정도가 다르면 깨친 바가 다르고, 저마다 깨우친 바도 궁극적인 '우주적 원리'에 견주면 좁쌀만할 것이다.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하기보다 끊임없이 깨달음의 수준을 높여 가려고 노력하는 삶, 소로가 개혁가라기보다 종교적 구도자에 가까웠다는 평을 듣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2. 모든 구성원이 '더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더 선한 사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가?
『월든』이나 『일기』의 내용으로 보건대, 소로는 개인의 성장 가능성을 낙관하면서도 그것과 사회 개혁의 연관성에 대해서 깊이 사고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개인의 생활 원리와 사회의 운용 원리가 서로 다르므로, 개인이 선해진다고 사회가 자연스럽게 더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한 사람'이 없는 '선한 사회'는 공허하고 '선한 사회'가 없는 '선한 사람'은 무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의 영향 관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3. 개혁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는가? 즉, '개인'의 자기 혁신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있는가?
둘 사이에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개혁의 성격과 내용·방법에 대한 관점에 따라 여러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강승영 역, 도서출판 이레, 2004.
1)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Concord) 마을 근처에 있는 호수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 숲에서 스물여덟 살부터 서른 살까지 2년 2개월을 살았다.
2) '거룩한 자, 존엄한 자의 노래'를 뜻한다. 『우파니샤드』, 『브라흐마 수트라』와 더불어 힌두교의 3대 경전으로 꼽힌다. 모든 집착과 그로 인한 내면의 갈등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깨달음(해탈)에 이르는 길을 노래하고 있다.
3) 미국 북동부 대서양 연안의 여섯 주를 가리키는 말. 현재의 메인·매사추세츠·뉴햄프셔·버몬트·코네티컷·로드아일랜드 주가 이에 해당한다. 미국 초기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다.
<월든>의 작가
[ Henry David Thoreau ]
출생 - 사망
1817.07.12. ~ 1862.05.06.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남쪽으로 1마일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월든(Walden)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물이 들어온 내력과 나가는 길을 파악하기 힘든 신비한 호수이다. 1845년 3월 말, 27세의 젊은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호숫가 숲속에서 도끼질을 하기 시작했다. 호수 북쪽 비탈진 언덕에 자신이 기거할 오두막을 짓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 서툰 손놀림으로는 도대체 개집 하나 만들어낼 성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로의 손놀림은 부드러워지고 신속해졌다. 5월 초순이 되자 소로는 친지들과 함께 상량(上樑)을 했다. 벽을 붙이고 지붕 올리는 일이 완료되자 소로는 마침내 새로운 집에 입주했다.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었다. 19세기의 진정한 자유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2년 2개월 2일 동안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그의 작은 오두막을 어떤 거대한 건축물보다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
모험은 집을 지을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소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짓고자 했다. 집이라곤 한번도 지어본 경험이 없는 이가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도끼질하고 톱질하는 것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지출한 건축비는 28달러가 조금 넘은 금액이었다. 당시 하버드대학 기숙사의 1년 방세가 30달러였다니, 1년 방세도안되는 돈으로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이다. 당시 1달러가 현재의 1달러보다 약 30배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때, 오늘날의 돈으로 1천 달러가 되지 않은 돈으로 집을 지은 셈이다.
소로는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집의 노예였고 재산의 노예였고 일의 노예였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여유있게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노예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리고 최대한 여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소로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길이었다. 그는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삶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 기록이 바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비견되는 명작 <월든>이다. 물론 소로의 상황은 자발적 고립이라는 점에서 외딴섬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두 작품이 모두 원시적인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소로는 <월든>에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잠시라도 한눈 팔게 되면 뒤처지는 현대인에게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월든>이 소로가 살았던 때보다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후반, 특히 21세기에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토마스 페인, 마하트마 간디와 더불어 뼛속까지 혁명적인 인물이다. 페인이 근대 혁명의 출발인 미국의 독립운동과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인 토대를 지원했다면, 간디는 현대 문명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고, 소로는 일과 명예와 돈과 통념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한 현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주체할 수 없는 끓는 피를 소유하고 있었다. 페인이 정치적 혁명가였다면, 간디는 다분히 종교적인 혁명가였고, 소로는 문학적인 혁명가였다. 소로의 혁명이 은근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문학적이고 개인적인 혁명은 자칫 혁명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소로가 숲속에 혼자서 둥지를 튼 것부터가 혁명과는 도통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통념의 뿌리를 흔드는 혁명이었다. 사회 속에서 부지런히 일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로의 부모는 성격이 서로 정반대였지만 매우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아버지는 조용하고 겸손하고 친절했으며, 어머니는 재치있고 총명하고 쾌활했다. 그들은 허세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문학과 학식을 중히 여겼다. 노예제 폐지가 메사추세츠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자 소로의 부모는 자신의 집을 노예폐지론자들의 모임 장소로 빌려주었다. 소로의 부모는 또 산책하면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취미가 자식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헨리의 위로는 누나 헬렌과 형 존이 있었고, 여동생 소피아가 있었다. 헨리는 형과 함께 인디언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형제들과 사이가 좋으면서도 헨리는 혼자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열두 살 무렵부터 홀로 엽총이나 낚싯대를 메고 인적 없는 후미진 숲과 강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어린 시절에 월든 호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호수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1833년 열여섯 살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뒤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소로의 말에 따르면 그의 대학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그는 “나의 육신은 하버드 대학의 일원이었지만, 내 마음과 혼은 소년 시절의 정경으로 멀리 떠나 있었다. 공부하는 데 헌신해야 할 시간들이 내 고향 마을의 숲을 찾아 헤매고 호수와 시내를 탐험하는 데 소비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로는 대학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가 1843년의 어느 편지에서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주로 나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이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학 시절이 그에게 문필가이자 강사로서의 능력을 부여한 기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1837년 랠프 왈도 에머슨과의 만남은 소로에게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소로의 여동생 소피아가 에머슨의 처형 루시 브라운과 함께 에머슨의 강연을 들었는데, 강연 내용이 오빠가 쓴 글과 같았던 것이다. 이에 소피아가 브라운 부인에게 그 글을 보여주었고, 그 글이 에머슨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4월 9일 집으로 찾아온 소로를 보는 순간 에머슨은 소로가 예사로운 젊은이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소로는 본래 매사에 냉담한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 뛰어난 지성인 앞에서는 특별히 생기발랄해졌다. 에머슨은 소로의 입에서 사회와 종교에 대한 탁월한 견해,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쏟아져나올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되었고, 약간의 굴곡이 있긴 했지만 소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중시한 소로(1854년)
대학을 졸업한 소로는 생계를 위해 교사 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콩코드의 마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체벌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2주 만에 그만두었다. 형과 함께 사설 학교를 몇 년 운영하지만 형이 몸이 아프게 되자 그것마저 벗어던지고 만다. 소로는 이제 시인이자 박물학자로서 식물표본상자와 쌍안경을 들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이 무렵 소로는 에머슨이 주도하고 있는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운동에 매료되었다.
소로는 1837년부터 3년간 에머슨의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 콩코드의 초월주의 그룹이 만드는 잡지 <다이얼>에 시와 산문을 실으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소로는 대중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인간보다는 자연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상적 성격은 초월주의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면모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소로의 기질이기도 했다.
소로는 원래가 모험가적 성향이 강했다. 형 존과 함께 카누를 타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을 탐험한 것도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안정된 교사의 길을 접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생활한 것은 모험의 정점이었다.
그의 위대한 모험이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뉴욕에서의 작가생활 시도도 실패했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카누 여행 경험을 담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일주일>은 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듬뿍 담아 집필했건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다만 소로에게 안락한 생활이란 일반적인 것과는 판이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불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모험을 통해 인생을 충분히 즐긴 사람이었다.
소로는 잘못된 것을 그냥 두지 못했다. 젊은 시절 에머슨과 함께 길을 걷다가 길 옆에 울타리가 쳐진 것을 보고 소로는 분개했다. 그는 하느님의 땅은 만인의 소유이므로 울타리 바깥의 쪼가리 땅만을 밟을 수는 없다며 울타리를 넘어가려 했다. 에머슨은 이를 만류하며 사유재산제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로는 월든 숲에서 살던 1846년 7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 납부를 거절한 죄로 투옥당한 적이 있으며,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존 브라운을 위해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로의 근본적인 저항은 <월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로의 저항이 잘못된 제도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서일까, 안정된 삶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소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문필활동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로는 측량사 일을 겸해야 했다. 물론 글을 쓰는 일은 버릇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1854년 <월든>을 출간한 이후로 소로는 어떤 책도 출간하지 않고 오직 집필에만 몰두했다. 그는 초월주의에서 벗어나 실천적인 노예제 폐지 운동을 펼쳤다. 1854년에 행한 강연 <매사추세츠의 노예제>는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신랄한 고발이었다. 이렇게 부지런하게 활동하는 사이에 몸이 약해졌던 것일까? 1859년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이 하퍼스페리 마을 습격을 주동했다가 처형당할 때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아직 젊은 사람의 몸에 결핵이 찾아온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소로와 에머슨의 삶을 함께 정리한 하몬 스미스는 소로의 마지막 장면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렸다. 스미스는 소로가 밀려오는 피로 속에서 생의 최후를 보냈지만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1862년 5월 6일, 소로는 여동생 소피아에게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슈아 어귀를 지나쳤고, 곧 새먼 부룩도 지나칠 즈음, 우리의 배를 가로막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5월 9일 소로의 지인들이 모인 장례식에서 에머슨은 조사를 통해 25년 동안 우정을 나눴던 친구를 회고했다. 에머슨의 이 조사는 소로와 소로의 문학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에머슨은 소로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작가로서의 업적은 적극적으로 칭찬하지 않았다. 에머슨은 자신이 좋아한 소로의 시 <연민(Sympathy)>과 <연기(Smoke)>를 언급했지만, 시인으로서 소로는 자연스러운 서정과 기교가 모자라다고 평했다. 소로의 월든 호숫가 생활을 얘기했지만 작품 <월든>은 지나가는 말로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큰 울림이 있었다. “가장 숭고한 사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짧은 생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그곳, 덕이 있는 그곳, 아름다움이 있는 그곳이 바로 그의 영혼의 집입니다.”
아아, 최근 부드러운 소년을 알았다
너무나 덕스러운 용모를 지닌 그 소년은
원래 한갓 아름다운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나
마침내 스스로 미의 요새를 지키는 왕좌에 앉았도다
고백건대, 나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신하로서의 예를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그러나 지금 알게 되었느니, 그 동안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다면, 이제라도 더욱더 사랑하리
하지만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존경의 엄숙함이 우리 사이를 더욱더 멀리 갈라놓으니
우리 서로 손이 닿지 않네
첫 만남의 순간보다 더 낯설기만 하네
영원은 우연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로되
분명 나 홀로 외로이 길을 가야 하네
우리 한때 만난 슬픈 기억 속에서
축복이 영영 떠났음을 알고-소로의 시 <연민> 전문(윤규상 역)
겉으로 보면 소로의 삶은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에머슨의 조사가 말해주듯, 그의 시세계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가장 평판이 좋았던 <월든>마저도 각광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시민의 불복종>도 19세기 말에야 널리 읽혔고 간디 같은 위대한 인물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소로가 그만큼 뼛속까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인 정신은 이해받기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에도 제대로 이해받았다고 볼 수 없다.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가 지적하듯이 소로는 여전히 자연예찬론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선구자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인생을 단지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의 소중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는 때로 고립을 자초했고 사회와 싸웠고 글을 썼다. 필자는 소로를 앞에서 말했던 대로 ‘문학적인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혁명가나 종교적 혁명가가 주로 한 방향으로의 전환을 꿈꾼다면, 문학적(예술적) 혁명가는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혹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생각할 때 그의 대부분의 책이 국내에서 출판되었어야 옳다. 유독 <월든>만이 여러 판본이 나와 있는 실정이다. 방대한 분량의 일기를 다 출판하진 못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저서들을 망라해서 펴내는 출판사에게는 그에 따른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소로 생전에 출판업자들이 <월든>의 가치를 몰랐지만, 100년이 지난 후에 <월든>이 엄청난 각광을 받았듯이……. 소로의 불후의 명작 <월든>은 그 명성에 답하듯 국내에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다.
위 글에서는 강승영이 옮긴 <월든>(이레, 2004)의 문장들을 인용했다. 사이버 경제논객 세일러는 자신의 책 <흐름을 꿰뚫어보는 경제독해>(위즈덤하우스, 2009)에서 <월든>을 경제위기 상황에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을 만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월든>에는 오늘의 세계를 읽는 해법이 들어 있다. 우리들은 모두 경제논리의 노예이며, 더 세부적으로는 집의 노예이며 직장의 노예이며 돈의 노예이며 길의 노예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샬롯의 거미줄>을 쓴 미국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가 대학 졸업생에게 졸업장 대신 <월든> 한 권씩을 주자고 제안한 이유를 상기해볼 일이다.
시민의 불복종헨리 데이비드 소로 저강승영 역이레1999.08.10.상세보기
소로의 책 중에서 인류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은 단연 <시민의 불복종> 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수많은 혁명가와 인권운동가와 사상가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의 다음과 같은 말을 꼭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박홍규 저필맥2008.03.10.상세보기
박홍규의 <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는 소로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다. 저자는 소로가 모든 면에서 세속적 잣대를 철저히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단순소박하게 ‘멋대로’ 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멋대로’ 사는 삶은 따돌림당하기 십상인 법인데, 소로야말로 원칙을 지키면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켰다. <월든>을 읽기 힘든 독자들은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월든>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하몬 스미스 저서보명 역이레2005.12.26.상세보기
하몬 스미스의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는 소로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친구였던 에머슨과 소로의 삶을 함께 다룬 흥미로운 전기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쓴 내밀한 일기를 종합하여 드라마틱하게 재조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솔트의 전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윤규상 옮김, 양문, 2001)도 권하고 싶은 전기이다. 헨리 솔트는 소로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본 선구자였다. 심지어 그는 이 책의 개정판에서 소로가 결국 에머슨보다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의 실현을 확인하고 있다. 한 인간의 순수한 정신세계에 깊은 애정을 갖게 하는 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 <월든>의 작가 (인물세계사, 차창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