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산 Jul 18. 2022

샘과 우물

― 이어도공화국 6






이어도공화국 6

― 샘과 우물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해마다

우물 푸는 날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도르래를 달고 우물을 퍼냈다

어른들이 우물물을 퍼내면

나는 그 우물 바닥까지 내려가서

이물질들을 모아 두레박에 담았다

그러면서 나는 

내 발가락을 들어 올리며 올라오는

더 굵어지는 물줄기를 직접 보았다


옹달샘에서 나는 엎드려 물을 마신 후 늘

옹달샘 바닥 청소를 하는 버릇이 생겼다


샘물은 퍼내지 않으면 물길이 막혀서 망한다

샘물이 아깝다고 밖으로 퍼서 버리지 않으면

그 샘은 시나브로 물길이 막혀서 죽고 만다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

너무 아까워서 퍼내지 않으면 망하고 말리라


나는 이제 내 시의 옹달샘을 퍼내기 시작한다


소로가 책을 쓰기 위해서 월든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듯이 나도 이제 새롭게 책을 쓰기 위해서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에 오두막을 짓고 산다

월든 호숫가 숲 속의 오두막에서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을 썼듯이 

나도 우선 나의 마중물 같은 책을 먼저 쓰려고 한다


소로의 『월든』은 그 첫 번째 책이 없었다면 써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들 역시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샘에서 끊임없이 샘물을 퍼내지 않으면

샘물이 오히려 말라버리듯이

우리들의 마음 또한 그럴 것이다

지난날의 생각들을 깨끗하게 퍼내지 않으면

우리들의 사랑하는 마음 또한 막히고 말리라

시심 또한 물줄기가 막혀 시맥을 잃게 되리라


자, 이제 어린 시절 고향에서 우물을 푸는 날처럼

옹달샘에 엎드려 물을 마시고 

옹달샘 바닥을 청소하는 날처럼

잔칫날처럼 기쁜 마음으로 내 시의 우물을 퍼보자

시원한 샘물이 콸콸 솟아나는 그날까지 꼭 파보자










물은 스스로 고집하는 모양이 없다. 물은 자신을 담아주는 그릇 모양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은 자신을 품어주는 집의 모양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물은 또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면서 살아간다. 옹달샘에서 솟아난 물은 골짜기에 길을 만들고 내려와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닷물이 된다. 사람도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간다. 어머니 자궁에서 나온 아이는 기어서 문지방을 넘고 마루를 내려와 마당을 거닐다가 대문을 열고 나온다. 골목길을 지나 신작로를 나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고 일구며 성장한다.


시 한 편에는 그 시인이 걸어온 길과 그 시인의 마음의 빛깔과 그 시인의 꿈이 담겨있다. 그래서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음미해보면 그 시인의 눈빛과 꿈빛과 숨결을 느낄 수가 있다. 내가 쓰는 나의 시에는 어떤 빛깔의 어떤 숨결이 숨어있을까. 누구를 향하여 건너가는 메아리가 숨어 있을까. 나는 이제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꾸밈없이 진실한 가슴으로 길을 내어야만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스스로 오래도록 들여다본 결과 나의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이 이어도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어도를 이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이 지상으로 꺼내야만 할 것이다. 내가 만드는 이어도공화국은 바로 그렇게 내 마음속의 아름다운 나라를 조금씩 이 지상으로 꺼내어 구축하고 있는 공화국인데 사람들은 아직 그 꿈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마음과 내가 꿈꾸는 나라를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나는 믿는다.


글은 쓰는 장소와 쓰는 시간에 따라서 그 결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지금 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쓰지 못하고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에 쓰고 있다. 그래서 아마 통일성이 부족하고 다소 산만한 글이 써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산책을 하면서 휴대폰 메모장에 메모를 하는 편이다. 그리고 인터넷이 가능한 곳에서는 브런치에 직접 글을 써서 올리는 편이고, 인터넷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에는 노트북으로 한글파일에 글을 써서 저장하는 편이다. 나는 아직도 타지 실력이 좋지 않아서 독수리타법으로 조금씩 조금씩 쓰고 모아서 다시 읽으면서 수정을 하는 편이다. 나의 손은 아직도 호미와 낫 등의 농기구에 길들여져 있고 또한 익숙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고작 2년 동안의 숲 생활의 경험으로 『월든』을 썼고 단 하루의 감옥 경험으로 『시민 불복종』썼다. 그러나 단 두 권의 이 책으로 전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다. 나 자신을 가장 나다운 상태로 유지하는 것, 가장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들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월든』과『시민 불복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일기들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일기와 그의 첫 번째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월든』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소로처럼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기부터 쓰려고 한다.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모든 사람들이 축포와 성조기로 '미국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찬양하던 그날, 소로는 신이나 돈 혹은 국가가 아니라 완전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기 위해 숲으로 간다. 스물여덟의 독립 선언! 그리고 '가장 단순한 삶'에 대한 위대한 실험이 시작된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 소중하다. 그리고 가능한 한 체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삶의 정수를 모두 빨아들이고, 굵직한 낫질로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을 짧게 베어버리고 삶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최소한의 조건만 갖춘 강인한 스파르타식 삶을 살고 싶었다."





     




강산 2021년 7월 18일           

        

이렇게 못생긴 치아가 나를 먹여 살렸구나

고맙다

참으로 고맙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밉다고 학대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나를 사랑해준 나의 차아여

치하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




강산 2020년 7월 18일           

                 


정읍사의 고향 정읍을 생각하니

나는 어쩌면

정읍사 여인의 지아비가 아날까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나는 너무 오래 시장에서 살았구나

너무나 오랫동안 장사에만 몰두했구나

이제는 지어미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겠구나

달아 높이곰 돗아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밝혀다오

어긔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를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졈그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강산 2018년 7월 18일                                         


광주공항은 참 소박하고 정겹구나

7월의 밤 7시 20분 활주로를 

천천히 걸어가는(굴러가는?) 큰 철새 한 마리

멈칫 멈추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군사훈련 관계로 잠시 대기한다는 방송과 함께

작고 뾰족한 철새들이 하늘을 들쑤신다

굉음을 내며 솟아올라 저녁을 물어뜯으니

7월 여름 밤하늘의 깃털이 뽑혀 흩날린다

광주공항은 오늘도 여전히 군사 공항이구나

우리들의 하늘은 여전히 군사작전 중이구나

민간항공기는 전투기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드는구나

전투기들이 사라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광주의 땅은 아직도 납작 엎드려 있구나

찰싹 달라붙어 낮은 포복하는 광주가

우리들의 땅이고 우리들의 어머니로구나

아, 그래도 구름 위에서는 여전히 찬란하구나

기내식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도

승무원들은 변함없이 친절하고 아름답구나

목소리 좋은 기장 또한 운전을 참 잘하는구나

붉어지는 구름을 벗어나니

남해안과 섬들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니라

하늘과 바다의 시간이로구나

푸른 하늘바다에서 고깃배들이 꽃불을 켜는구나

꽃불들은 또다시 바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이 되는구나

너무  짧아 음료수 한 잔 마실 수 없어도 작은

바구니의 사탕은 참으로 달고 부드럽구나

아, 벌써 한라산인가?

곧 제주에 도착하겠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름인지 꿈인지

그 푸르름 속어서 영산처럼 신비로운 섬이 보인다

아, 여기가 어디인가?

여기가 진정 인간들의 땅이란 말인가

아니다

여기는 분명 신들의 땅이 분명하리라

그런데 한라산이라 생각했던 섬은 이미 지나와버렸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 신비로웠던 섬은

어쩌면 추자도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밖이 어두워지면서

나의 그림자가 창밖으로 나가더니

나도 모르게 내가 꿈꾸던 이어도에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아, 어쩌면 안내방송이 너무 일찍 나와서

나의 마음이 허상처럼 한라산을 옮겨왔으리라

정신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보니 비양도가 보이고

이호 태우 해수욕장 쌍원담이 나를 보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 또다시 신비로운 여행을 하는구나



강산 2017년 7월 18일


                              

소똥 먹은 해바라기

하늘의 해를 잡으려고

오르고 오르고 오른다




강산 2017년 7월 18일


순례 25(3) ―한라산 어욱새


한라산 어욱은 새가 되지 못하여

봄부터 베를 짜기 시작한다

초가지붕에도 오르지 못하여

베옷 한 벌 장만하기 시작한다    

      

천둥 번개 요란한 여름에도

베틀 소리 멈추지 않는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만가(輓歌)도 없이 숨 죽여 가신 님들     

    

해 좋은 날, 어욱꽃 마을까지 내려온다

수의 한 벌 챙겨 들고

요령소리 앞세우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잊지 않고 찾아온다     

     

무너진 돌담 하나 대답이 없어

빈 상여 소리에

빈 수의 한 벌 흩어져 날아가고

갈 곳 잃은 바람의 곡비

온몸이 휘청거린다     

    

뼈만 남은 한라산 억새

흰 눈 내려 헛묘에 묻히고

한라산 자락에는 해마다

메김소리 가득한 오름 하나씩 늘어난다



강산 2017년 7월 18일


순례 24(2) ― 백비


오후 네 시의 평화공원

온몸이 부서져 내린 보름달 부스러기들이

가을 억새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다시 보름달을 함께 만들기 위하여

가을바람에 온몸을 내던지며 

스스로를 반죽하는 저 빛나는 영혼들

아, 어머니가 밀어 만들어주시던

칼국수 반죽처럼

크고 둥글고 납작하게 늘어나는 흰 영혼의 숨소리들  


평화공원에 아직은 달이 뜨지 않는다

무지개도 검은 무지개만 떠 있다 

거친 오름 기슭에 너무 많은 관이 묻혀있다

관들이 병풍으로 쌓여있는 위패봉안실 뒤로

행방불명자 비석들이 

궤 속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아직은 밤이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국수 함께 먹으려면

우리들의 밤은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동굴 속 하얀 혼백의 관으로 누워 있는 저 백비에

저 많은 죽음이 통일의 첫걸음이었다고

저 많은 통곡이 평화의 씨앗이었다고

아직은 새길 수 없어

코스모스는 길 밖에서만 피어나고

어머니가 만드는 칼국수 반죽은 보름달이 되지 못한 채

검은 동굴 속에서 흰 관으로 묻혀 숙성되고 있다



강산 2017년 7월 18일

                               

1. 입춘굿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송곳처럼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제주 수선화도 금잔옥대 수선화도 매화꽃도

눈송이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다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날개 달린 눈송이들인지

온통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 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 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 치고 꽹과리 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댓불처럼 몰려온다

환한 세상 만들려고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관덕정 앞 아스팔트 길을 갈아엎으며 온다

땅을 갈아엎고 역사를 갈아엎으며 당당하게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 할머니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이번에는 천지왕 허락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 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 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 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함께 온다


대별왕과 소별왕이 다시 한번 함께 온다

세상에 또다시 해가 둘, 달이 둘

어지럽고 어수선한 세상이 도래하여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손을 잡고 온다

해 하나 잡으려고, 달 하나 잡으려고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 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세경은 땅이니, 땅을 관장하는 신들이 온다 

상세경 문도령, 중세경 자청비 

하세경 목축 신 

정이 없는 정수남이가 함께 온다  


신들이 모이는데, 설문대할망이 빠질 수야 없지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신명 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 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왼쪽 상의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마저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


2. 탐라국 입춘굿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가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제주 수선화가 피어

바다에서 산으로 올라간다

금잔옥대 수선화도 따라서 올라간다

매화꽃이 하얗게 피어

제 입김으로 향기를 불어대며

온 동네를 쏘다니기 시작한다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며 돌아다닌다  


시샘한 바람이 느닷없이 

눈송이를 뿌려댄다

눈송이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고 있다

바람 속에 칼날이 없다

금잔옥대 살짝 쓰러뜨려

독 잔 속의 독을 쏟아버린다  


수선화 꽃잎에 날개가 돋아난다

수선화 꽃잎들이

곧 날아오를 것만 같다

매화 꽃잎에도 날개가 돋아난다

하얀 날개를 사정없이 퍼덕인다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날개 달린 눈송이들인지

온통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고향처럼 다시 돌아오고 있다

섬나라 신들이 내려오는 길에

한라산 까마귀들을 궉새처럼 풀어놓는다 


동쪽을 지키는 동자복 미륵이

사라봉에서 큰기침을 한다

서쪽을 지키는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하늘에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섬나라 구석구석

탐라국 신들의 골목길이 되었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에 다녀온 신들은

올 한 해는 또 

어떤 임무를 부여받고 내려온 것일까

각자의 소임을 시작하기 전에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몰려오고 있다

깃발들을 앞세우고 관덕정 앞으로 몰려오고 있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 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 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깃발들과 신들과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 몰려온다

북 치고 장구치고 꽹과리 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들은 사람들 같고 사람들은 신들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댓불처럼 몰려온다

환한 세상 만들려고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농경신 자청비가

바퀴 달린 나무 소를 끌고

이리야 저리야 소리치며 온다

나무의 뼈와 나무뿌리로 만든 소가

검은 아스팔트를 갈아엎으며 온다

관덕정 앞 아스팔트 길을 갈아엎으며 온다

땅을 갈아엎고 역사를 갈아엎으며 당당하게 온다

깊이깊이 갈아엎은 역사의 흙에 

새로운 씨앗을 뿌리려고

새로운 오곡 씨앗을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영등할망이 함께 온다

영등 여왕이 함께 온다

아직 올 때도 아니 되었는데

이월 초하루 한림읍 귀덕리

포구로 들어와야 하는데

세상이 시끄러워 기다리지 못하고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둘러보려고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온다

바다도 뒤집어 바꾸고

권력도 다시 한번 갈아엎어

확,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이월 보름에는 우도로 나가야만 하는데

다시 나가야만 하는, 바람신(風神)이 온다

보름은 너무 짧으니, 세상이 바뀔 때까지

이번에는 천지왕 허락을 받아 

바닥까지, 밑바닥까지

뒤집어엎을 마음으로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를 갈아엎고 땅을 갈아엎고

세상을 갈아엎어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세상에도 알토란 같은 씨를 뿌리려고

탐라국 풍요 신이 온다

섬나라 풍요 신, 영등신이 온다  


대별왕과 소별왕도 함께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 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함께 온다

대별왕과 소별왕이 다시 한번 함께 온다

세상에 또다시 

해가 둘, 달이 둘

어지럽고 어수선한 세상이 도래하여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손을 잡고 온다

해 하나 잡으려고, 달 하나 잡으려고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섬나라로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 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세경은 땅이니, 땅을 관장하는 신들이 온다 

상세경 문도령, 중세경 자청비 

하세경 목축 신 

정이 없는 정수남이가 함께 온다  


신들이 모이는데, 설문대할망이 빠질 수야 없지

설문대여신이 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섬나라, 창조의 여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신명 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 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자를 심기 위해,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다른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왼쪽 상의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마저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강산 2017년 7월 18일

                                        

순례 22 ― 억장굴


제주도에는 만장굴보다 더 깊고 어두운 억장굴들이 많다


용암동굴과 해식동굴과 침식 동굴들은 그래도 숨통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환해장성을 따라 포문이 열려있는 진지동굴들을 좀 보라고

저것들이 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판 거라고

군인들이 총칼 들이대고 파라는데 민간인들이 어쩌겠어

그뿐인가

제주도 오름마다 수 없이 많이 파놓은 저 진지동굴들을 보라고

저것들이 다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아니겠는가

저 굴을 파다가 죽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말이야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억장굴들을 파야만 했다는 거야

큰 동굴 작은 동굴 할 것 없이 숨어들 수밖에 없었지

동굴이며 궤며 심지어 숨골에까지라도

숨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숨어들어가야만 했었지

그렇게 말이야 글쎄 그렇게

온 가족이 들어가고 온 마을이 들어가고 온 제주도가

검은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지금도 나오지 못하고 있지

가끔은 그런 동굴 속에서

사람의 뼈들이 먼저 걸어 나오고 무쇠 솥이 나오고 숟가락이 나와도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너무나 깊고 어둡고 차갑게 관통해 버린 억장굴

속에서 숨죽이고 있을 뿐 함부로 나와 볼 생각은 아예 못하고 있는 거지


지금 까지도 그날의 총탄이 심장을 뚫어버린 억장굴에서

붉은 피가 서쪽 하늘을 뼛 속까지 물들이더니

이제는 피도 말라 어둠이 쏟아져 나온다 세상이 온통 밤으로 출렁거린다



강산 2016년 7월 18일

                                     

3층에서

불타는 섬

을 읽다가

창 밖을 본다

제주도는

아직도

여자들이

일을

더 잘한다

멀리

한라산은

구름이 감추었다



강산 2016년 7월 18일           

                                     

이어도공화국 연꽃에서

금강 반야 바라밀경

독경소리 들린다

오늘은

아침부터

연꽃이 법문을 하고 있다



강산님이 이어도공화국에 있습니다.

2016년 7월 18일  · 제주도 서귀포

                               

벌 나비 수국의 사랑 끝나고

산수국 헛 꽃잎 뒤집어지니

장마는 이제 꼬리만 보인다


밤새 내려와

젖을 빨던 별들 돌아가고

젖꼭지마다

별들의 숨소리만 묻어있다











서시(序詩)




꿈만 꾸었다 너무 오랫동안 꿈의 섬 이어도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돌아왔다 꿈속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세상을 이 지상에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꿈과 삶과 글이 하나로 만나 행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어도 공화국』을 쓰기 시작한다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쓴 모든 글들은 『이어도 공화국』을 쓰기 위한 습작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은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연습이었다 나는 앞으로 100권의 『이어도 공화국』을 쓸 작정이다 나는 앞으로 백 년 동안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 작정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시나브로 할 것이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아야만 하리라 나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넘어, 백 년 동안의 꿈과 희망을 위하여 출발한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세상 읽기와 나만의 세상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나팔을 불며 시작한다


긴 꿈을 꾸었다 눈을 떠 보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 없는 길을 걸어서 간다


바다의 발걸음에 맞추어 해변의 모래밭을 걸어본다 바다의 발걸음 소리에 맞추어 해안선을 읽어본다


걷다가 문득 모래 한 알이 된다 가슴 하나가 전부인 모래알이 된다 눈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본다 입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부른다 귀가 없는 모래 한 알이 듣는다


모래밭이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가슴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전생에 나는 한 마리 낙타였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한 마리 곱사등이 낙타였다 나는 이제 다시 시아노박테리아가 되어 산소를 만들기 시작한다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평생 사랑하고 있다 모래알 하나는 모래알 하나만을 평생 사랑하고 있다


또다시 바닷가 모래밭을 걷고 있다 너무나 먼 강을 따라 내려와 모래가 된 바위를 알고 있다


당신은 바다처럼 울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바다보다 깊이 울어본 적이 있는가


갈대는 봄부터 몸을 비운다 갈대는 봄부터 마음을 비운다 그런 갈대의 숲 속에 작은 개개비 둥지 하나 만들기 시작한다


아직 황금빛 모래에 도달하지 못한 몽돌들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몽돌 속에는 저마다 빛나는 모래 한 알 들어있다


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되라고 한다 자꾸만 나에게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되라고 한다


모래밭 끝에 숲이 하나 있다 그 숲으로 간다 용설란 가로수 길을 걸어서 들어가고 있다 길 가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용설란 가로수 길 끝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탱자 꽃으로 꽃피어있다


탱자나무 울타리 밖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문이 보이지 않는다 용설란 꽃대를 타고 내려온 한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나에게 비밀을 속삭여 주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는 로즈마리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로즈마리는 자줏빛 꽃잎을 터트렸고 나 또한 로즈마리처럼 자줏빛 꽃잎을 터트리며 걸었다


로즈마리 숲을 지나 비익조를 만났다 삼광조와 팔색조도 만났다 비익조가 아직도 숲 속에 살고 있다


라플레시아,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기 위하여 손도 잘라버리고 다리도 잘라버리고 오직 붉은 심장 하나로 살아가는 꽃


깊은 숲 속에 옹달샘이 하나 있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옹달샘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푸른 하늘 깊은 가슴속으로 날아오른다


옹달샘 곁에 오두막이 한 채 있다 숲 밖이나 숲 위에 집을 짓지 않고 숲 속에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다


오두막에서 나무처럼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이어도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큰 나무 같은 촌장님 이셨다 


이어도에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이어도 사람들은 이어도 숲에 나무를 함께 심고 함께 가꾸어준다 사과나무도 좋고 소나무도 좋다 이어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깊은 숲 속에 조촐한 집을 짓는다 옹달샘 곁에 옹달샘 집을 짓는다 무덤 같은 집을 짓는다 이어도에 나의 집을 짓는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이어도에 온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요한 방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 공동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어도 공동체 그런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이어도 사람들은 모두가 나무와 함께 태어난다 이어도 사람들은 무덤 대신 한 그루 나무와 등대로 남는다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것이 진리라고 모두가 믿고 있을 때에도 나무는 홀로 고요하게 물을 온몸으로 뿜어 올리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거대한 나무 숟가락들이 숲을 이루었다 하늘을 휘휘 젓다가 하늘을 떠먹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낮에 내가 다니던 길로 밤이면 착한 꽃사슴들이 둘러보리라 나무 숟가락들은 그들에게도 하늘 한 수저 떠먹여 주리라


이어도에는 게으른 몽상가가 살고 있다 가끔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죽어도 죽지 않는 책이다


산책길에 어느 게으른 몽상가를 만났다 그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태어났다 바다를 건너온 그는 오늘 나를 만났다


겨울나무는 모래시계처럼 몸을 크게 한 번 뒤집는다 나무들은 그렇게 하늘과 땅의 영혼을 제 몸 안으로 가득 끌어들인다


이어도 사람들은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자서전을 쓴다 아름다운 자서전을 한 권 남기기 위하여 더욱 아름답게 살기를 꿈꾸고 실천한다


이어도 숲 농장이 있다 이어도 숲 전체가 이어도 숲 농장인 셈이다 이어도 숲 농장에는 온갖 과일나무들과 온갖 채소들이 많다 이어도는 축복받은 땅이다


이어도 수면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수면실이 있다 이어도 수면실을 찾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 속에서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하나 찾을 수 있다


이어도 자살촌이 있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희망촌이 있다 이어도 자살촌은 가난할수록 좋다


이어도 사랑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없는 사랑이 없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랑이 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언제나 몸부터 사랑하지 않고 마음부터 사랑을 한다 영혼부터 사랑을 한다 이어도 사랑촌은 그렇게 깊은 곳이다


이어도 부활촌이 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어도 부활촌에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부활하고 있다


이어도 창작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풍경소리가 있다 세상에서 길을 잃은 당신은 이어도 창작촌에서 당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어도 생명촌이 있다 옹달샘처럼 끊임없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이어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어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 이어도에서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이어도에는 이어도의 꿈을 이어주는 이어도 생명촌이 있다


이어도 꿈동산이 있다 어린이들의 꿈동산이 있다 옹달샘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꿈동산이 있다 이어도에는 아직도 그런 아이들의 이어도 꿈동산이 있다


이어도 명상촌이 있다 이어도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모든 생활 속에는 명상이 들어있다 그리하여 이어도에는 깊은 이어도 명상촌이 있다


이어도 하늘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오래된 사람들이 많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어도에는 참으로 많은 어른들이 있다 이어도 하늘촌은 이어도 생명촌과 이어도 꿈동산 바로 곁에 있다


이어도에는 군주도 따로 없고 백성도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오직 다른 생명들처럼 사람은 모두가 오직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이어도에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무한한 행복이 최고의 덕목이다


이어도에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서는 처음부터 결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어도는 다른 어떤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다


이어도를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나라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어도를 당신은 아시나요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이어도에는 황조롱이가 살고 있습니다 황조롱이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젖과 자궁이 없어서 가장 안타깝습니다 


이어도는 별무덤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 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이 지금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아직도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그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멍텅구리 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때 갇혀 살았던 지옥의 멍텅구리 배 생각에 다시 멀미가 납니다 오늘도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배가 있습니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이어도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너나들이가 살고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이 시대에 너는 나고 나 또한 너인 그런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가장 아름다운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꽃입니다 이어도 카페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향기를 선물하는 시인이 있다 그는 평생 로즈마리를 길렀고 사람들은 평생 그에게서 로즈마리 향기를 가져갔다


이어도에 한 아이가 찾아왔다 아직 오지 말아야 할 아이가 서둘러 찾아왔다 그 아이는 인천 효성동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놀랍게도 아버지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단다 준수의 아버지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내가 전생에 살았던 세상 속으로 걸어서 간다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에 은어들을 만났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은어축제에 초대받은 그들은 그냥 불러주기만 해도 고마운 고향에서 자신들을 위하여 축제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인간들에 대하여 너무나 황송하다며 온 몸이 빛나는 꿈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이어도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배를 타고 왔으며 나는 헬기를 타고 왔다 이어도는 내 꿈의 고향이었고 그가 새롭게 부활한 낙원이었다


바람이 차다 바람이 파도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파도가 높다 파도가 마라도 가슴팍을 후려친다 고구마같이 생긴 마라도에서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 퉁소를 불던 사람이 불을 놓아버린 이후로는 아무리 퉁소를 불어도 뱀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가오리 한 마리 바다 위에 납작 엎드려있다 나는 그 가오리 등을 타고 바다에 떠 있다 하멜이 지나갔던 길 위로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모세의 지팡이 같이 생긴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가 아니므로 그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한라산을 오른다 1100 도로를 달려 올라간다 영실 휴게소에서 약수를 떠먹는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한라산 훼손 지 복구용 흙 그 흙 한 봉지 배낭에 짊어지고 올라간다 


준수와 함께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에 나는 은어들을 만났다 은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만 준수를 잃어버렸다 준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 낡은 집에서 살기로 작정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니다 우연과 필연은 어차피 같은 말이다 나도 처음에 문을 열어보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


첫날밤을 치러 내기 위하여 밤새 청소를 한다 속옷까지 모두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온 몸으로 청소를 한다 몸과 마음을 청소하다가 그냥 쓰러져 잠을 설친다


바다와 하늘과 바람의 섬 이어도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지상으로 다시 건너왔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새롭게 출발한다 출발은 이렇게 늘 가슴 설레며 아득하다


내가 지난 30년 동안 살았던 이어도와 이 세상은 참 많이 다르다 이어도에서는 집은 집이고 땅은 땅이다 빈집이 있으면 그냥 살고 싶은 사람이 살면 되고 빈 땅에 씨를 뿌리고 싶으면 아무라도 씨를 뿌리면 되었다


거실과 방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와야만 했다 어느 누가 살았었는지 몰라도 떠나간 뒷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전기를 만드는 사람이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것은 전기 탓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 투성이다


빈 집은 빨리 낡는다 비어있는 사람도 일찍 죽는다 새로운 집을 만들기보다는 헌 집을 고쳐 쓰기가 더 어렵다 거실 청소를 한다 해탈이 따로 없다 해탈과 탈피는 어디라도 있다


청소는 끝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많은 여자들의 주 업무가 청소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청소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듯싶다 하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청소를 한다


뼈대 없는 내가 뼈만 있는 발전소에 있다 나는 지금 뼈대 속에 살아 있다 발전소에서 나는 지금 가랑이를 쫘악 벌리고 불을 지피고 있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하늘 발전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계신다


나무들 속에는 발전소가 있다 부지런히 퍼 올리고 있다 나무들은 밤낮없이 땅의 소식을 하늘에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남자는 숟가락으로 팍팍 퍼서 먹는다 여자는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는다 나는 잠을 자다가 가끔 나의 숟가락을 만져본다 


첫눈이 어지럽게 내린다 나는 이제 첫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언제나 시작만 있었다 길 입구에서 나는 언제나 나의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전기를 만들고 있다 불빛을 만들고 있다 별빛을 만들고 있다 그리움을 만들고 있다


전생에 나의 이름은 진성(鎭星)이었다 아버지 친구 분이셨던 신발가게 아저씨가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들었다


쩨쩨하게 살지 말고 통 크게 살아보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살아보자 목숨을 걸어볼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에 목숨을 걸어볼 것인가 내 평생의 소망에 목숨을 한 번 걸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공화국]을 기필코 만들어보자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살고 싶다 옹달샘의 샘물이 되고 싶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그 병든 새들이 옹달샘에서 나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한 새들이 다시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이미, 그 새의 몸이 된 나 또한, 그와 함께 깊은 궁창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먼저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오두막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나무와 함께 살다가 나무로 부활하고 싶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무덤 대신에 나무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죽어서도 서로 곁에서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부는 날은 가끔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이어도 베이스캠프를 친다 서귀포 화순항 내려가는 길, 월라봉 입구에 본거지를 먼저 만든다 문을 먼저 만든다 [달문moon]을 먼저 만들기 시작한다



청산별곡 (brunch.co.kr)




매거진의 이전글 백미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