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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an 02. 2023

마라도 이야기

도박과 우울증 6




인생일기(현성, 20190919) 2. 마라도 이야기




도박 생각만 해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기분이다. 고통스러운 기억 떠올리니 탁 트인 마라도의 풍경이 떠올랐다. 봄과 가을의 마라도가 떠오른다. 여름의 마라도는 너무 습하고 답답하다. 겨울의 마라도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봄과 여름의 마라도는 다른 관광명소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내 가슴속엔 아름답게 남아있다.

그때는 오직 전역 날만 기다리며 생활했다.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전역하면 군대시절이 떠오르고 그때가 좋았지 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물론 내가 마라도에서 군대를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더럽혀진 나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내 근무만 하면 됐었던 그때가 그립다. 풍경도 몸도 마음도 푸르던 그때가 그립다.

다행이다. 방금까지 도박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다 다시 마라도를 생각하니 정신이 맑다. 도박했던 경험을 쓰라면 100장은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쓰고 싶을 때마다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 글들을 다시 읽으니 마라도 생활 중 정말 컸던 은지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 좀 더 보완을 하고 싶어졌다. 우선 은지 이야기는 뒷부분에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소위 말하는 관종이었다. 관심종자.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예전보다는 관심받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그렇게 관종인 나에게 있어서 군대를 마라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근무할 때에는 대원이 3명이었다. 2020년에는 의무경찰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제 경찰공무원이 배치되어 마라도 대원노릇을 할 것이다. 의무경찰이 사라진다고 하니 현동이가 떠오른다. 나는 왜 술만 마시면,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어느 정도 이성을 잡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현동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고 하염없이 울고 만다. 현동이가 언제면 나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하는 날이 올까 현동이가 보고 싶다. 현동이는 의무경찰 시험을 계속 보고 있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하루빨리 붙었으면 좋겠고 또 한편으로는 현동이가 입대를 한다면 내가 엄마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빨리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현동이가 입대를 한다면 엄마가 아마 절에 들어가실 것 같아. 벌써 죄책감이 들고 외롭고 쓸쓸하다.

다시 우울해졌다. 아무튼 내가 서귀포경찰서에서 타격대 신병 생활을 하면서 보물섬 이야기처럼 나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마라도와 가파도 이야기였다. 섬 이야기는(물론 제주도도 섬이지만) 주로 자기 전 밤에 몰래 몇몇 선임들과 몇몇 후임들끼리만 은밀하게 주고받았다. 일종의 찌라시였다. 이렇게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후임들이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선임들이 알면 서귀포경찰서에서 도망가는 것처럼 보여 찍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경은 일주일에 한 번 외출을 나가기 때문에 제주도에 그냥 남아있고 싶거나 여자 친구가 있는 대원들은 마라도나 가파도에 가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난 여자 친구도 없었고 개인정비시간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자기 계발을 하고 싶었던 나는 정말 가고 싶은 꿈의 섬으로 자리 잡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마라도와 가파도에는 서귀포경찰서에 소속되어있는 각 3명씩의 대원 중 한 명이 전역을 하거나 다시 서귀포경찰서로 복귀를 해야 다른 대원들이 꿈의 섬(몇몇 대원들에겐)으로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나랑 내 동기인 혁성이 둘 중에 한 명이 마라도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말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노골적으로 섬에 가고 싶다고 표현했다. 타격대장은 아마 섬에 가고 싶다는 내 말이 달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격대장 입장에선 힘들어하는 내가 걱정되어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존재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동기를 미워하고 나를 좋아하던 다른 선임들은 나를 보내기 싫어했다.

나와 같이 생활을 하고 싶어서 내 동기를 섬에 보내고 싶어 했다.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고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보내줬으면 싶었다. 그때 내가 마라도를 가게 결정적으로 도와주던 선임이 있었다. 그 선임은 바로 서귀포경찰서에 온 둘째 날 나와 내 동기를 혼냈던 무서운 선임이다.

그 선임은 다른 선임들과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물론 그 선임도 나를 훨씬 더 좋아했다. 그만큼 내 동기를 싫어했다. 그 무서운 선임의 생각은 생활 잘하는 친구를 섬에 보내고 못 하는 친구를 서귀포경찰서에 남겨서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내 동기 입장에서는 정말 무서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정말 아이러니하고 세상이 좁다고 생각이 드는 건 그 선임은 몇 달 전 헤어진 리은의 전 남자친구였다. 아무튼 그 선임의 큰 지지와 더불어 덕분에 나는 원하던 꿈의 섬 마라도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꿈의 섬 마라도로 떠나는 날이 왔다. 운이 좋게 배가 외출을 나왔지만, 배가 뜨지 못해 마라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귀포경찰서로 복귀를 한 당시 마라도 선임인 김준현 수경과 같이 복귀를 하게 되었다.

복귀하면서 규정상 그러면 안 되지만 마라도에 처음 온 나를 위해 치킨도 사주고 술도 사준 후 그걸 몰래 갖고 들어갔다. 마라도는 모슬포항에서 25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데 앞으로 2년간 매주 배를 탈 것도 모르고 그저 마라도에 가는 것이 행복했다. 그래서 멀미도 하지 않았다. 마라도는 자리덕과 살레덕 이렇게 두 개의 선착장이 있는데 처음 온 날은 자리덕에서 내렸다.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자리덕에는 살레덕엔 없는 계단이 있는데 서귀포경찰서에서 모든 짐을 가져온 나는 그 계단을 오르는 게 마치 군장을 메고 산을 오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마라도 치안센터에 도착해서 내가 지낼 방을 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조금 실망했다. 어느 누가 다 큰 성인 남자 셋이 지내게 될 방이 혼자 쓰던 자신의 방보다 작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당황스러움을 감춘 채 나는 선임들을 따라 마을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러 나갔다. 그때 나는 약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지내게 될 곳이라는 것도 모른 체 패기 있게 마을 이장님, 보건 소장님, 우리 의경식당 사장님과 이모, 등대소장님, 기원정사 주지 스님과 보살님, 그리고 식당 영업을 하시던 마을 주민 분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그날 그렇게 인사를 하고 다니면서 내 설렘 때문이었는지 눈부시게 파란 하늘, 내 긴장 때문이었는지 내 볼에 결이 느껴지던 가을바람, 제복을 입은 나를 쳐다보던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역시 무엇이든 인생의 첫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이게 내 인생의 첫 마라도였다. 그렇게 인사를 끝마치고 난 후 마라도 선임들과 나는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신입이 들어왔다고 우리는 정해진 식당이 아닌 그 옆에 있는 식당 사장님과 가족관계인 분이 운영하시는 중국집을 가게 되었는데 마라도에 처음 온 날 본 광경들도 잊을 수 없지만, 그날 느꼈던 짜장면과 탕수육 맛은 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도 수도 없이 먹었으니까. 그 중국집은 철가방을 든 해녀라는 중국집인데 백년손님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 나오시는 분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선착장기준 맨 앞에 차지하고 있는 이장님 댁과 더불어 사람이 늘 붐비는 곳이었다. 이곳 이야기를 더 적고 싶은 것이 여기서 일하시는 대부분의 분은 의경 대원들이랑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형들이고 서빙을 하는 분들도 학생이었는데 의경대원들을 친형처럼 대해주셨다. 그리고 내 지인들이 마라도에 놀러 오거나 할 때마다 해산물 등 서비스도 많이 주시고 심지어는 돈도 받지 않으셨다. 우리 엄마도 정말 고집이 만만치 않은데 끝까지 돈을 내겠다는 우리 엄마의 고집까지 꺾어주었던 사장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맨입으로 그렇게 대우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틈틈이 마라도 치안센터로 전화가 와서 심부름을 시킨다면 군말 없이 달려가서 도와드렸고 우리가 점심을 먹고 가게가 아주 바빠 보일 때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일손을 도왔다.

마라도에서 나는 순찰업무, 관광객 안내, 마라도 입도 현황 파악, 대민지원 등 주로 이런 일을 했다. 마라도에서는 일반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는데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딱 맞는 근무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의경 대원이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지 않으면 우린 세 명이 돌아가면서 근무를 섰다. 근무를 선다고 해봤자 컴퓨터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센터를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또 점심을 먹고 난 후나 저녁을 먹고 난 후 마라도를 돌면서 순찰을 하였다.

날이 좋아지면 사람들이 텐트를 치는데 우리는 텐트를 친 사람들에게 텐트를 치지 말고 민박이나 펜션이 많으니 거기서 자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했다. 텐트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명확한 법은 없었던 것 같지만 이미 치안센터와 주민들이 이야기를 끝낸 부분인 것 같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우리 센터 장님과 순찰을 하다가 밤에 우연히 텐트 하나를 발견했는데 내 또래의 남자 관광객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텐트를 치면 안 되는 상황을 설명했고 그 관광객은 수긍했다.

그러더니 지금 돈이 없기 때문에 텐트를 거두고 자기가 가져온 간이의자에 앉아 밤을 지새우겠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그렇게 둘 수가 없었지만, 옆에 경사님이 계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경사님이 그러면 저기 뒤쪽이나 우리 치안센터 쪽에 주민들 눈에 안 띄게 몰래 가서 텐트를 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경사님의 모습이 멋있게 보였고 지금도 2년 동안 같이 지냈던 센터장님 중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감사한 분이다.

마라도는 3명의 의경 대원이 초소에서 생활하고 2명의 경찰공무원이 교대근무를 한다. 작은 섬에서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섭을 하게 되고 부딪히는 일도 많게 되는데 이렬승 경사님은 부산 분이셨는데 모든 센터장님들 중 가장 간섭을 덜해주시고 우리를 배려해주시려는 모습이 보이는 센터장님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의경 대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이 있는데 대원이 외출을 나갈 때마다 돈을 주시면서 햄버거를 사주셨다.(가끔 몰래 맥주도) 그렇게 저녁을 먹고 난 후 야식으로 햄버거와 맥주를 마시는 것이 요즘 말로 우리들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이렬승 경사님은 내 의경 생활 말년에 인사이동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정이 많이 든 이렬승 경사님이 떠나실 때는 정말 슬프고 아쉬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그때 나름 군인인 척하고 싶었나 보다.

요즘 만남과 이별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게 된다.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이별이 따라온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이별하게 된다. 앞으로 현대의학이 얼마나 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평생 함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든 연인이든 이별을 할 때의 아픔과 힘들어질 나를 위해 어느 정도는 이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상상 정도는 해봐야 하는가? 정말 언젠간 혼자가 될 수도 있는 나를 위해 강해 져야 하는가?

현재 23살의 현성이 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을 해본 결과는 이별을 염두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이별을 염두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조차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위해 써야 이별을 하게 될 때도 나 스스로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민 없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 이 말은 내가 잘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씩은 나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을 해보고 그 질문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보는 것은 앞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해볼 기회를 준 아빠에게 감사하고 온전히 글을 쓰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낳아준 엄마에게 감사하고 지금까지 살아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도 감사하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렬승 경사님 다음으로 떠오르는 센터장님은 이웅재 경위님인데 이분도 이렬승 경사님과 같이 고향이 부산이셨다. 하지만 이렬승 경사님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계시는 분이었다. 우선 40대 후반인 이렬승 경사님보다 10살 정도 많으셨고 사투리를 쓰는 티가 거의 안 나는 이렬승 경사님과는 다르게 누가 봐도 부산사람이다 느낄 정도로 억양이 강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안 그래도 무서운 말투를 가지신 센터장님인데 억양 때문에 정말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웅재 경위님은 소위 말하는 꼰대의 기질을 가지신 분이셨다. 자신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 없이 화를 내셨고 또 그에 따라서 벌을 주셨다. 하지만 또 우리가 생활을 잘하고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만큼 잘해주시는 분이었다. 이웅재 경위님은 또 정말 깔끔하셨고 무엇보다 일 처리가 확실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자기 신념이 뚜렷한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하고 뭐든 확실하지 못한 나에게는 가장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고. 또 이웅재 경위님을 보며 나에 대해 돌아보기도 했었다. (물론 그때는 많이 싫어했지만) 이웅재 경위님은 이렬승 경사님과 같이 이 인사이동으로 인해 마라도를 떠나셨는데 우연히 내 외출 날과 이웅재 경위님이 마라도를 떠나는 날이 겹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용기 있게 건넸다. 그때 당시 선임이 이웅재 경위님에 대해 한 말이 있었는데 그 말에 크게 공감을 했기 때문에 똑같이 전해드렸다. 센터장님 덕분에 배운 점도 많고 군인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센터장님은 이웅재 경위님과 이렬승 경사님이 떠나고 난 후 부임하신 고석창 경위님이다.

고석창 경위님은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하셨고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남아계신 분이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하지만 그에 따라서 말도 많으셨다. (이건 안 좋은 쪽으로) 같이 생활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고 가끔 우리에게 음식도 직접 해주시면서 잘 챙겨주셨다. 또 전역을 한 후에 나에게 안부 전화도 해주셔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센터장님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자꾸 내 주위에 사람들에 대해 적게 되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주위 사람들을 평생 잊지 않게 해주는 나만의 일기장이 되는 것 같아 정말 좋다. 또 약 1년 반 동안 같이 지냈던 동료 의경 대원은 가장 오래 지냈고 일도 많았던 선임이었던 김현승 대원과 후임이었던 이우용 대원이 떠오른다.

우선 현승이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다. 심지어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내가 처음 서귀포경찰서에 왔을 때 눈앞에 중학교 동창이 있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고 내가 먼저 갔지만, 마라도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나보다 3달 먼저 입대한 선임이었는데 마라도에는 내가 한 달 정도 먼저 왔기 때문에 일이나 생활은 내가 가르쳐주었다. 현승이는 소심한 편이었지만 할 땐 하는 화끈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외모에 대해 말하자면 피부는 눈에 띄게 하얀 편이었다. 체구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고 또 눈에 띄는 특징은 머리가 컸다. 그래서 별명도 가리였다. 대가리의 가리만 따서 지은 별명이란다. 현승이는 우리 셋 중에 가장 깔끔한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생활하는 방 청소도 주로 현승이가 하자고 했고 일 처리도 셋 중에 가장 깔끔했다. 학교는 성균관대학교를 다녔는데 노는 것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9월에 처음 마라도를 왔고 10월에 현승이가 왔다. 다음 12월에 이우용이라는 후임이 처음으로 생겼다. 마라도에서의 첫 후임이었다. 우용이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또 성격은 현승이와 마찬가지로 소심한 편이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다. 나와는 다른 점이 많은 친구였다. 그리고 우용이는 서강대를 나왔다. 외모는 우선 굉장히 말랐고 코가 큰 편이었다.

그리고 또 우용이는 말을 많이 더듬었다. 처음에는 내가 우용이가 말을 더듬는 것을 매일 듣다 보면 나도 말을 더듬을까 봐 무서울 정도였다. 우용이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아주 답답하고 듣기가 힘들었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이해도 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세 동갑내기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나와 우용이가 조금 부딪히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 이해를 많이 해줬고 그다음부터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우용이와의 사이를 통해 아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서로 이해를 하면 맞춰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와 우용이 사이와는 다르게 현승이와 우용이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싸우고 부딪혔다. 보통 다른 부대였으면 상하 관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고 그럴 일이 있다고 해도 하극상이었을 상황들이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하자고 했던 우리 셋에게는 참 곤란한 상황으로 다가왔다. 선임과 후임이 싸우는 사이에 나는 항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려 노력했다. 사실 나는 나름 군대의 상하 관계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에서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용이가 이해가 안 됐다. 물론 우용이에게 할 말이 있으면 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현승이 편을 들지는 않았다. 내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용이가 다시는 우리와 어울리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용이는 융통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리고 군대의 상하 관계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다 같이 생활하면서 우용이는 많이 변해갔고 또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줬다. 난 우용이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또 우용이는 장점도 많은 친구였다. 여가시간에 현승이와 나는 게임을 하고 놀기 바빴을 때 우용이는 늘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런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우용이를 보며 많은 걸 느꼈다. 언제 그런 공붓벌레와 같이 생활할 수 있겠는가? 글을 쓰는 지금도 우용이의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현승이와 우용이 둘에 대한 마음은 그리움이 아닌 고마움이다. 얌전한 둘 사이에 얌전하지 않은 내가 사이에 껴있었으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리고 마라도에서 힘들 때마다 가장 의지가 되었던 건 당장 옆에 있는 선임과 후임인 현승이와 우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승이와 우용이가 나를 이해하려 많이 노력해준 것 같아 더 고맙다. 

마라도에서 있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들이 몇 개 있다. 마라도에서는 몇 달에 한 번씩 바지선으로 물이 들어온다. 들어올 때 대부분 가구마다 몇십 개씩 주문을 하니 물의 양이 많지 않을 수 없었다. 마라도에는 젊은 남자가 거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은 우리가 물을 가구마다 배달해 주었다. 바지선으로 정말 큰 트럭이 들어오고 그 트럭에 있는 포장된 삼다수의 비닐을 벗기고 전부 바닥으로 내린다. 그리고 마을트럭으로 가구마다 주문한 개수에 맞춰 직접 날라 배달을 해준다. 정말 종일 했다. 그래도 그때는 물을 나르는 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운동도 됐고 또 무엇보다 일이 다 끝나면 저녁에 치킨도 이장님이 많이 사 와주시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도 주셨다. 저녁에 있을 치맥 파티를 위해 낮에 고된 노동을 버텼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어버이날에 진행되었던 마을행사였다. 그날은 저녁부터 밤새 마을 어르신들의 고기를 구워드렸는데 정말 뿌듯했다. 그때 한우 소갈비를 먹었는데 태어나서 먹어본 고기 중에 가장 맛있었다. 이런 게 마을잔치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은 마라도 치안센터의 외벽을 페인트로 칠했던 날이다. 2017년 봄에 제주지방청장님이 방문하시기로 되어있어서 센터장님과 의경 대원들이 발 벗고 나섰다. 페인트칠은 정말 힘들었고 고됐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마라도에 있던 덕분에 페인트칠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마라도에서 근무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2의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라도 주민들은 마라도에 있던 어떤 대원보다 나를 사랑해주었고 나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었다. 그것만으로 나의 군 생활은 행복했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마라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여기에 적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빙산의 일각을 제외한 빙산의 몸통은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나씩 꺼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나의 제2의 고향인 마라도를 생각해야겠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마라도 대원들은 두 번 다시는 마라도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일하게 나만 나는 다시 한번 꼭 올 거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 은지와 마주쳤다. 은지는 나의 마라도 생활의 거의 전부였다. 은지와 10개월 정도 만났는데 그 10개월은 가장 지루하고 힘들 수 있었던 마라도에서의 10개월이었기 때문이다. 또 은지는 나를 많이 위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단 몇 시간 볼 수 있었는데 왕복 3시간을 나를 위해 모슬포로 와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맙다.

내가 지금 이렇게 뇌리에 은지가 강하게 박혀있는 것은 은지가 다른 사람과 임신해서 애를 낳았기 때문이다. 정말 놀랐다. 얼마 전까지 몇 번 인가 마주쳤을 때는 산후조리 때문인지 몸이 많이 부어있었다. 전혀 내가 은지에게 마음이 남아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만났던 아이가 임신을 했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콘돔 없이 섹스를 해본 것이 은지였기 때문에 나에게 은지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나에 대해서 또 나의 삶에 대해서 한 번 더 돌아보게 해 주었다. 생리날에는 정말 희박한 확률을 제외하면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안 후 합의 후에 콘돔 없이 처음 해보게 되었다, 생리 중이라 좀 찝찝했던 기억이 강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용감했는지 궁금하다. 그때를 떠올리니 신기하다. 벌써 2년 전이다 그 후로 벌써 2명의 여자를 더 만났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는 것을 생각하니 새삼 내 나이가 느껴진다. 벌써 25살이다. 어렸을 때의 내가 생각하던 25살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본다. 정말 한심하다. 25살인데도 이런 기분이다. 아빠와 엄마는 어떤 느낌일까 아직도 학생 때의 자신과 같은 기분일까 내 한 몸 챙기기도 이렇게 힘든데 가족들까지 부양한다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기계가 된 기분일까? 혼란스러운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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