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죽는다는 병이 있다. 벽이 두꺼워지는 병이 있다. 심장의 벽이 두꺼워지는 병이 있다. 벽이 두꺼워지면 방이 좁아진다. 방이 좁아지면 따뜻한 피가 줄어들어서 돌연사의 원인이 된다.
5년 전 동짓날에 나는 비후성 심근증 재수술을 받았다. 나의 심장은 두 번 죽었고 세 번 태어났다. 나의 가슴속에서 째깍째깍 시계소리가 들린다. 금속판막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럴 때마다 뇌졸중의 확률은 높아진다. 나는 이제 얼마나 더 이 지상에 살아있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 이 하늘 아래서 함께 숨을 쉴 수 있을까. 그리고 도박에 중독된 아들과 세상의 어둠에 중독된 슬픈 아들들의 치료를 위하여 얼마나 더 머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지금 이어도서천꽃밭, 작은 농막의 침대에 누워있다. 서천꽃밭에서 나는 무슨 꽃부터 키워야만 할까. 도박 중독 치료에 좋은 꽃을 서둘러서 키워야만 하는데, 모든 중독은 진행성 질병이어서 완치가 어렵다고 하는데. 한 번 망가진 뇌는 되돌릴 수 없다고 하는데. 당뇨병처럼 평생 관리를 잘해야만 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결정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바로 그 기능이 이미 망가져버린 도박 중독자들은 혼자서는 도저히 관리하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곁에서 함께 생각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행동해 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데.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어둠에 중독된 아들 곁에서 아들과 함께 끝까지 오래도록 살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다른 길을 열어주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 꿈꾸며 사는 것이 더욱 익숙한 사람이다. 꿈속의 풍경이 더욱 현실 같고 현실이 더욱 꿈같은 사람이다. 오늘도 나는 꿈속에서 사랑을 한다. 그리운 사람을 꿈속으로 불러들여 사랑을 한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병을 안고 살지만 나는 끝끝내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서, 꿈속에서라도 사랑을 한다. 부드럽게 사랑을 한다. 나의 부드러운 사랑처럼 봄비가 부드럽게 내린다. 딱딱하게 얼어있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풀린다. 사랑의 몸이 서서히 열리고 우리들 모두의 어머니인 땅의 문도 서서히 부드럽게 열린다. 수선화와 제주수선화는 이제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고 매화꽃들은 벌써 만개하였다. 입춘 지나고 우수이니,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도 봄은 이미 당도하였다. 꿈속에서도 꿈 밖에서도 사랑비가 내리고 따뜻한 봄비에 영혼까지 깊숙이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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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물소리가 그리워서 아침 산책을 나간다. 이어도서천꽃밭에는 동백꽃이 하늘에서 피어나고, 또한 서둘러 떨어져서, 땅에서 다시 피어나는 동백꽃들도 있다. 밤새 그리움으로 뒤척이다가 길을 나선다. 먼저 시들어가는 금잔옥대 수선화와 뒤늦게 피어나는 제주수선화 향기가 내 몸과 영혼을 감싼다. 만발한 매화꽃에는 아직 벌들이 보이지 않는다. 부지런한 새들이 아침부터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입덧 난 고양이는 배가 불러오고 서둘러 짝을 찾은 꿩들은 알을 품는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일까. 나는 왜 자꾸만 잘 못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까. 어떻게 이 현실에서 빠져나가 꿈만 있는 세상으로 떠날까.
수선화 향기와 로즈마리 향기를 몸에 걸치고 문 밖으로 나간다. 발전소로 내려가는 큰 도로를 파고 가스관을 묻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가스관 공사를 못하다가 최근에 다시 겨우 공사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요구사항에도 일리가 있다. 자기 집 앞으로 가스관이 지나가는데 정작 본인들은 가스를 쓸 수 없다. 모두가 경제적인 논리 때문이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가스관을 설치해야 하는데, 여러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아파트와 달리 뚝뚝 떨어져 있는 시골집은 공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수익성으로만 판단하는 공기업들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공기업 위에는 또한 효율성만 따지는 정부가 있다. 소외된 사람들의 복지보다 부자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부자들에게서 정치자금을 많이 받고 싶은 정치가들에게도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하여 어찌어찌하다가, 가스공사에서 5억 원 발전회사에서 5억 원, 마을에 기부를 하는 조건으로, 겨우 공사가 재개되었다. 얼마 전 마을 임시 총회에서 그렇게 들었다. 화순 곶자왈에 미디어센터도 건립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바람의 정원이 바람에 날아간 이후로 새로운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들었다.
가스관 매립공사 중인 큰 길만 건너면 월라봉 입구가 나온다. 그 입구에 퍼물이 있고 퍼물논이 있다. 내가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약 5천 평 가량의 퍼물논이 있다. 그 퍼물논 전체를 연못으로 만들어서 연꽃을 재배하고 싶은 나는, 이제 겨우 두 필지 7백여 평의 논에만 연꽃을 심었다. 그리고 나머지 논에는 마늘이 심어져 있다. 물이 많고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밭농사는 좀 어려운데 그래도 해마다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퍼물논에 얄밉게 심어진 마늘들도 봄을 준비하고, 어렵게 만들어진 연못의 연꽃들도 물속에서 봄의 땅을 일구고 있으리라. 그런 사연 많은 퍼물논과 연못을 지나면 개끄리민교가 나온다. 개끄리민교를 건너면 월라봉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보막은소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황개천과 바다가 나온다. 나는 평소에는 대부분의 산책을 김광종 수로길로 올라간다. 가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바다 쪽으로 내려간다. 황개천에서 마라도와 가파도와 형제섬을 감상하고, 돌돔과 감성돔 포인트라서 낚시꾼들이 좋아하는 주상절리를 지나, 박수기정 절벽 아래서 바람과 파도가 시간으로 조각해 놓은, 내가 아는 세계 최고의 야외조각전시장의 예술품들을 감상한다.
오늘도 나는 개끄리민교,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올라가는 산책길을 선택했다. 조금만 올라가면 김광종 언덕길이 나온다. 언덕 위에는 ‘김광종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언덕 아래 계곡에는 도채비빌레가 있다. 도깨비들이 춤을 추며 놀았다는 넓고 평평한 너럭바위들이 펼쳐져 있다. 이 언덕은 커다란 암반으로 되어 있는데, 장비가 부족했던 옛날에는, 이 암반을 깨뜨려서 물길을 만든다는 것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1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과 망치로 바위를 깨뜨려서 물길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런 악착같은 집념과 끈기와 배짱이 나에게는 과연 얼마나 있을지, 깊이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길이 바로 이 김광종 수로길이다. 나도 어느정도 조금은, 은근과 끈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김광종 선생님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내가 좋아하는 물소리에 젖으며 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힐링이 된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때도 조금은 벗겨진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무렵이면 보막은소가 나온다. 작은 저주지가 나온다. 자연적으로 흐르는 안덕 계곡물을 막아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수로를 통하여 퍼물논 등에 물을 공급했던 시설이다. 이 보막은소 절벽에는 또한 내가 좋아하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커다란 소의 머리처럼 보인다. 거대한 소가 저수지 물을 먹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소의 혓바닥이 저수지 물을 핥아서 먹는 것처럼 반짝이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어쩌면, 이 보막은소에 오는 이유가, 바로 그 소의 얼굴 바위를 보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닐까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면서, 나와 아들은 왜 이렇게 사는 것이 다를까를 생각하였다. 성격도 다르고 노는 것도 다르다. 혼자 조용히 놀기를 좋아하는 나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끄럽게 놀기를 좋아하는 아들에 대하여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좀 더 깊이, 그리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한다. 아들은 어쩌면 나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에게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나는 늘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