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제주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유채꽃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수선화 꽃들은 천천히 시들어가고 개나리며 매화꽃이며 살구꽃이며 복숭아꽃들이 피어나고, 유채꽃들이 제주도 전역을 물들이고 있다. 이렇게 환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우리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도, 어디선가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선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5년째 희귀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 5년째 지옥 같은 통증과 싸우고 있는 청년이 있다. 5년째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아들이 있다. 일상생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오늘도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어도서천꽃밭에 찾아오신 김소민 님의 브런치를 읽었다. 예쁜 김소민 님은 5년 차 희귀 난치병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환자다. 20대 청년의 때에 통증과 치열하게 싸워 일상생활을 영위하기까지, 절망과 희망과 기적을 담은 투병일기를 작성하고 있다. 그래도 이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매일 마약성 진통제를 먹어야만 견딜 수 있다는 사람, 하루에 100알이 넘는 약을 먹어야만 겨우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사람, 스스로 자신의 병을 저주받은 병이라고 말하는 사람, 케타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는 사람, 그 아프고 뜨겁고 절절한 투병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또다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같은 마약이라도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고, 어떤 사람은 쾌락을 즐기기 위하여 몰래 먹는 사람들을 함께 생각하니 마음이 참으로 찹찹해졌다. 대상포진 발생 이후에 오른쪽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된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어느 한 젊은 청춘을 망가뜨리는 과정을 읽으면서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마약을 복용하는 많은 연예인들도 나름대로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했으리라고 짐작은 한다. 그래도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세상에는 이렇게 희귀병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 또한 희귀병 중증환자로 산정특례를 받고 있지만 김소민 씨의 희귀병에 비하면 나의 희귀병은 그래도 복 받은 희귀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이라는 병이 참으로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니 함께 기뻐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잠 못 드는 댓잎 바람소리가 나의 꿈속까지 들어와 칼자국을 남긴다. 고양이도 꿈속으로 따라 들어와서 나에게 안긴다. 나에게는 고양이 같은 애인이 있다. 꿈속에서 만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도 있다. 나는 여자를 모른다.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고양이 같은 여자를 만났다. 꿈속에서 나는 여자를 배웠다. 설문대할망을 만났다. 백주또를 만났다. 한라산 같은 여자를 만났다. 해녀 같은 여자를 만났다. 제주도 같은 여자를 만났다. 돌 같은 여자를 만났다. 현무암 같은 여자를 만났다. 숨골 같은 여자를 만났다. 숨결 같은 여자를 만났다. 나는 그 여자에게 부드러움을 배웠다. 부드러운 사랑을 배웠다. 돌의 웃음을 배웠다. 부드러운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배웠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사랑의 고수가 되었다.
나에게는 이제 가장 부드러운 고양이 같은 애인이 있다.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가 찾아준 애인이 있다. 밤마다 꿈속으로 찾아오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봄처럼 부드럽다. 나의 애인도 한없이 부드럽다. 고양이 털처럼 부드럽게 빛난다. 연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목련꽃이었다. 목련꽃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산목련꽃이었다. 산목련꽃인 줄 알았는데 더 자세히 보니 목단꽃이었다. 목단꽃인 줄 알았는데 더 자세히 보니 모란꽃이었다. 고양이 같은 나의 애인은 목단꽃이었고 모란꽃이었고 작약꽃이었고 함박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또한 배웠다. 여자의 성기는 세 개라고 배웠다. 젖꼭지가 둘, 음핵이 하나, 이렇게 셋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비키니를 좋아한다. 성기만 살짝 가리는 비키니를 좋아한다. 내 눈에는 아직도 가슴은 성기로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는 아직도 아기들의 밥그릇으로 보인다. 소음순과 대음순과 질은 성기가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성기의 몸이 숨어있는 곳이라고 한다. 숨바꼭질할 때 눈을 가리고 어둠 속을 더듬듯이 더듬는 곳이라고 한다. 음핵 귀두만 살짝 보일 뿐, 음핵 몸통과 음핵 다리는 보이지 않지만, 여자의 성기도 남자의 성기처럼 발생학적으로 같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자에게는 남자의 성기가 세 개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생명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에서 태어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탐라국 신화가 더욱 옳다고 한다. 삼신할머니도 그렇고 삼태성도 그렇고 삼성혈도 그래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삼일절이다. 삼월은 우리들의 봄의 시작이고 삼일절은 우리나라의 시작이다. 삼일절의 씨앗이 새싹을 틔워 우리나라를 낳았다. 그렇게 태어난 우리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렵게 되찾은 우리나라는 지금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삼일정신은 지금 어디에서 피를 흘리고 있을까. 안중근 의사는 지금 저승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작나무 숲 눈밭에서 손가락을 자르고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쓰던 안중근 의사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하게 죽으라고 편지를 쓴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또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등의 친일파들은 지금 저승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주도에는 수많은 신화가 있지만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제주도 땅을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 이야기, 제주도 각 고을의 안녕을 관장하는 신들의 고향 송당 본향당의 백주또 이야기, 그리고 제주도에서 살기 시작한 고·양·부 삼 씨 시조가 태어난 삼성혈 이야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에서 지금도 가장 신성시 여기는 삼성혈과 송당 본향당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제주시에 삼성혈이 있고 벽랑국에서 왔다는 삼공주와 혼인을 했다는 온평리 혼인지도 잘 보존이 되어 있다. 삼성혈에는 숨골 같은 구멍이 세 개 있는데 그 구멍에서 세명의 신인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주도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삼성혈 주위의 녹나무들이 삼성혈을 향하여 절을 하는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러니까 세 개의 구멍은 대지의 자궁인 셈인데 다른 신화들보다 오히려 현실감이 있는 신화라는 생각이 든다. 삼태성과 세 개의 성기와 세 개의 자궁은 온평리 혼인지의 동굴 속 세 개의 신방도 일맥상통하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삼성혈 주변에 국숫집 거리가 더욱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삼성혈과 혼인지에도 관심이 많지만 더욱 제주도다운 신화는 송당 본향당의 백주또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많다. 제주도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이어서 더욱 마음에 든다. 제주도 신들은 하늘의 천사들보다 땅에 사는 인간들을 더욱 닮아서 나는 참 좋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신은 인간답고 인간은 신다운 그런 어우러짐이 참으로 정답고 좋다. 구좌읍 송당리 아부오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처럼 제주도의 신들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백주또는 농사와 가정을 돌보는 여신이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농사의 신 자청비보다 더욱 제주도다운 신이 백주또라는 생각이 든다. 당에 관한 신화인 ‘송당본풀이’가 바로 백주또 이야기이다. 백주또의 자손들은 삼백일흔 여덟이나 되며, 이들은 제주의 당신이 되어 마을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백주또는 ‘당신들의 어머니’며, 송당 본향당은 ‘제주도 무신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백주또의 이야기를 보면 생활 형태를 수렵에서 농경으로 바꾸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네 소를 잡아먹고, 남의 소까지 잡아먹은 소천국에게 여성인 백주또가 먼저 살림을 가르자는 이야기는,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제주여성의 강인한 독립성과 생활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옛날 강남천자국의 백모래밭에서 백주또가 솟아났다. 그녀의 나이 십오 세가 되어 천기(天機)를 짚어 보니, 자신의 배필이 제주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백주또는 제주도로 왔다. 알송당에서 솟아난 소천국과 혼인하여 살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다섯이 생겼고 여섯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사냥으로 연명해 왔으나 식구가 늘어가니 백주또는 이 상태로는 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백주또는 소천국에게 농사 지을 것을 권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농사를 지을 땅은 많았기에 소천국은 농사짓기 알맞은 땅을 찾아서 소로 밭을 갈았다. 그 사이 백주또는 점심을 준비해 가져왔다. 밥 아홉 동이, 국도 아홉 동이 나 되었다. 소천국이 밭을 갈고 있는데, 지나가던 중이 배가 고프다며 밥을 좀 달라고 했다. 소천국은 먹으면 얼마나 먹겠나 싶어 자신의 점심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며 먹으라고 한다. 그런데 이 중이 밥 아홉 동이와 국 아홉 동이를 모두 먹고 달아나 버렸다. 소천국이 점심을 먹으려고 보니 빈 그릇만 남아 있었다. 배가 고파진 소천국은 밭을 갈던 소를 잡아먹었으나 배가 차지 않자 옆에서 풀을 뜯고 있는 남의 소까지 잡아먹어 버린다.
백주또가 그릇을 찾으러 와보니 남편이 잠대(쟁기대)를 쇠가죽으로 묶어 배에 대고 밭을 갈고 있었다. 이상하여 이유를 물어보니, 소천국은 중이 점심을 모두 먹고 도망가 자기네 소와 남의 소까지 잡아먹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백주또는 남의 소까지 잡아먹은 것은 소도둑놈이라며,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을 분산하자고 한다.
백주또는 웃송당에 자리를 잡아 살고, 소천국은 알송당에 자리를 잡아 첩을 하나 얻어 사냥하며 산다. 살림을 가르고 나서 여섯째 아들(궤눼기또)이 태어난다. 백주또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기 위해 소천국을 만나러 간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수염을 뽑는 등 어리광을 부리는데, 소천국은 화를 내며 뱃속에 있을 때도 살림을 가르게 만들더니 나서도 불효한다며 무쇠석함에 넣어 바다에 던져버린다.
무쇠석함은 요 왕국으로 흘러들게 되고 궤눼기또는 용왕의 셋째 딸과 혼인하고, 요 왕국에서 잠시 머물다 강남천자국으로 나온다. 당시 강남천자국은 이웃 나라와 전쟁 중이었고, 궤눼기또는 무장이 되어 쳐들어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친다. 이에 천자는 크게 기뻐하며 땅과 물을 떼어주겠다고 하지만, 거절하고 제주도로 돌아온다.
제주도에 돌아온 궤눼기또는 부모를 찾아가는데, 이에 놀라 도망을 치던 소천국은 알송당에서 죽어 당신이 되고, 백주또는 웃송당 당오름에 가 당신이 된다. 그 후 궤네기또는 김녕리의 알궤눼기에 좌정하게 된다. 그래서 제주도의 당신들은 모두가 백주또와 소천국의 후손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른 지방에는 많은 당신들과 많은 신들이 세월에 따라 차차 잊히고 있는데 제주도 아직도 신들과 인간들이 한 식구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김소민에세이스트 https://brunch.co.kr/@kimsomin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