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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22. 2023

이어도공화국 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차례  

                                

자서(自序) 11

늦게 쓰는 일기 12

징검다리 13

연(鳶) 16

경운기 17

길이 있는 풍경 19

밤하늘은 반란이다 20

겨울수첩 21

봄날의 여행 22

집, 108번지 24

겨울포구 27

끊임없이 부대끼며 28

두근거리는 바다 29

취로사업장 30

삼굿이 있는 고향 31

고구마순 32

가을산 34

엇비슷하게 내리는 4월 36

감자를 캐며 37

쓰러지듯 간다 38

두꺼비집에는 이제 두꺼비가 살지 않는다 40

섬으로 떠서 42

돼지 잡기 44

끈을 풀기 위한 사랑 46

국민학교 수목원 48

밤 가운데 개구리가 50

겨울밤 52

칼을 간다 54

8월 하늘 56

개구리 합창 58

댄서 60

여수 어항단지 61

잎단배 62

봄 단풍 64

양계장 65

테이프를 들으며 66

여울물 소리의 고향 곡성 67

한우가 미국소에게 68

꽃이 지고 잎이 70

들국화 71

까치둥지 72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74

꿀벌에게도 침이 있다 75

돌고 돌고 또 도는 77

가위질 79

코끼리 코로 땅 짚고 도는 동안 80

태어나는 풍경 83

안산동 앞바다 85

굴뚝새 87

아그배 88

가슴이 아픈 아이 89

공단 쪽으로 걸어가는 가로수 91

시법 92

땅냄새 94

시인의 월급은 월마나 된다냐 95

길 98

신풍 애양원 100

동백원 가는 길 102

참혹한 사랑 혹은 문명 103

둘의 이름으로라도 하나 105

흐르는 이불 107

바닷가 사람들 108

해안선이 가끔 밀려와 110

김 씨의 역가위 111

대장간 112

맹이골 공섭이 113

왕골을 벗겨 돗자리를 114

거간꾼 115

무당집 117

여수 서시장에서 119

바닷가 풍경 120

섬마을 122

모순 124

아이시께에끼 126

별, 자꾸 벗더니 알몸이다 128

별, 하늘이 썩은 129

사람이 사람을 벗는 시대에 130

고향을 찾아서 132

당구장에서 134   


                           

자서(自序)


한 아이를 알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한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알고 있다 그는 나밖에 몰랐다 나 또한 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어쩌면 나인지도 모른다 그는 서럽도록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오직 그와 나밖에 몰랐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현대사와도 같았다 그는 죽도록 사랑하는 일과 그리하여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할 줄 몰랐다 다른 일을 해보려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람에 쓰러질 때마다 유서를 쓰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살아 있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편지와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가야 할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보고 싶었다 뛰어가고 싶었다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또다시 아무도 모르게 쓰러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쓴 유서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가족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어느 날 문득 가출을 결심했다 그와 나는 함께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꿈길까지라도, 저승길까지라도 ……,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리고 수 없이 많이 달아났다 우리들은 오늘도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또다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벌한 평화 속에서 40년도 넘게 함께 살아왔다 아직도 그의 투병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잠든 사이에 나는 그의 투병일지 혹은 유서들을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참으로 숨죽이는 순간이다 조심스럽게, 이 비밀들을, 속삭이고 싶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오늘도 유언처럼 발설하고 있다 이제 막 새로 태어난 길이, 빈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늦게 쓰는 일기



1966년 참꽃 불타는 2월 29일 새벽 두 시

그믐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눈썹이

떨어지고 닭도 울지 않았다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컴컴한 어둠을 향해

컹컹 짖었다 그리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 없는 아이로 태어나 누워만 있었다

송아지 울음소리가 걸어 나오는 물소리

가느다랗게 들리고 핑경 같은 별들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잠들지 못하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별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태어났다

그 자리에 나의 탯줄과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

무덤가 어린 쑥 잎에도 향기가 오르고

나는 어머니가 누운 만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숲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지상에

세상은 있었고 내가 태어나면서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러한 아침으로

때 아닌 비가 내리고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


멀리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보리논에서

솟아오르곤 했다 하늘을 들이받으며 뻑뻑하게

거슬러 올랐다 구름의 층계를 밟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 위에

비스듬히 떠오르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높이

이마에 별을 달고 떠 있는 방패연이

부러웠다 꼬리를 잘라 버린 마음으로

떳떳한 어깨는 떵떵거리고 있었다

나는 꼬리 끝까지

온몸으로 흔들리는 그리움으로

기어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단하게 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내 몸에 몰아쳤다 얼레가 정신없이 헛돌아

풀렸고 끈을 묶은 아버지 허리가

부서져 내렸다 너무 먼 곳에서 다시 내려다보았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겨울 허수아비가

꿈속으로 보였다 연실을 타고 올라온 소식

침 발라 붙인 편지가 아버지 목숨처럼 떨어졌다

나는 끈을 따라 내려가 음복 같은 바람에

취한 몸으로 땅에 깊이 엎드려야만 했다

끝내 나는 그렇게 겨울 밖으로 날아가지 못했다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고향의 밤 별들이 싸운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바람이 분다 쓰러진다 다시

넘어진다 별은 쌈질하는 입이다 주점

젊은 여자의 열린 자궁 속이다 길들이

제 골목을 찾아 들어가도 동네는 앞으로도

시끄럽다 물소리도 밤하늘을 쥐어뜯으며

이어져 흐른다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 우리 집은

골목 끝으로 몰렸다 동네의 개들은 무리 지어

일제히 짖어댔다 끝에 매달린 우리는 건너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바람에 쓰러진 곡식들이

줄기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솟아올랐다

태풍의 눈이 다시 무섭게 쏘아보았다 우리들의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포식한 어둠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악을 썼다 몽둥이질

낫을 들고 휘둘렀고 쇠스랑으로 후려

갈겼다 검은 까마귀는 떼로 몰려와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속에도 하늘이 있었다 떠가는

흰 구름 변두리에 걸린 빛의 폐곡선에

갈라진 고향의 고샅길들이 감기고 있었다 그

하늘 속에는 메마른 공동우물이

파헤쳐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겨울수첩


갈, 팡, 질, 팡, 눈은 내리고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눈은 내리고

걸레 쪼가리같이 거덜 난 구름

그늘 아래로만 고개 떨구고

날파람동이처럼 눈은 내리고

부서진 십자가의 겨울 포도밭

눈은 비렁뱅이처럼

예수처럼 내려 쌓이고     


잠이 많은 사람은

잠 속에 빠져 죽고

꿈이 많은 사람은

꿈속에 묻혀 죽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생각 속에 깊이 가라앉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하얗게

지워져 버리고 소복 입은

소식은 끊임없이 내려

겨울 깊이 쌓이는데

그 속에서 허기진 몸으로

보리밭을 본다 문득

풋보리인 내가 맨발로 눈을 뜨고          



봄날의 여행


물구나무서기로 오는 새벽

잠 밖으로 따라 나온 숫 갈매기가

나이 크기만큼 열린 새벽 속으로

날아올랐다 몸으로 내린 햇살이 나를

넘어뜨렸다 벌렁 누워버린 그림자쯤으로

낮게 젖어있는 나도 일어서 걷고 싶었다

벌건 대낮에도 속살을 벗어던지는

분수처럼 제자리 뛰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강의실 귀퉁이 태양이 버린

그늘에 그늘로 앉아 그 속으로 달려오는 햇발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였다 기웃거리는

얼굴들이 까마득히 지워져 깊은 칠판처럼

나도 나를 비워버리고 개나리 빗어주는

남서풍 속살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된 나는

바람보다 오랜 기슭을 넘어간다

어깨너머로 휘파람처럼 물러서던 어린 날

모래톱에 묻어두었던 발자국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여울물 소리를 실패에 감으며

부르시던 어머니보다 나이 크기만큼 먼저

도착하여 뒤돌아보면 징검다리에 서 계시는

어머니는 늘 강아지쯤으로만 바라보셨다

그러나 나는 들꽃 속에 숨어 손바닥에

귀 기울이고 잠든 강아지풀을 흔들면 복실이로 

깨어나 꼬리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좋았다

오요요, 오요요, 오요요요, 요요요요요요 ………,

손금을 밟으며 기어 온다 나도

어머니 손금 속으로 기어들고 싶은데

문득 돌아와 보면 시가지의 가슴마다

초라하게 작아진 희망의 형식을 안고

바람은 바람을 불며 바람 불어 간다


                                                                                                                        

, 108번지


()

미끄러지며 나갔고 다시 넘어지며 들어왔다 늘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문패 아래서 나는

나를 언제나 제대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한 칸

밤새 길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길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고

싶었다 아침부터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렸다

서부역 소화물들 묶인 채

실려 가고 있었다 온종일 실습복 차림이었던 고교 3년

베란다에 빨래쯤으로 걸려 온몸으로 그리워하던

기숙사 생활 꾸려 보낼 때

그곳은 왠지 모를 눈이 흩날렸다 나는 어디로

누구의 집으로 보내지는 소화물일까 문득 가야 할

주소가 없다 이사할 때만 있던 집 짐을 쌀 때 가장

편했고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도둑맞곤 했다 나의

집은 짓는 동안에도 한쪽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시나브로 내 몸의 집까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두 칸

먼 고향까지 가 닿고 온 기차들

엇갈리는 순간 속으로

어머니가 보이기도 했다

명절 때 귀성인파 용산 역 예매 장 나는

이슬을 맞으며 트럭 짐칸에 실려 귀향

밤 코스모스는 어둠 속에

그래도 등불처럼 켜들고 있었다

이슬은 짐칸 밖으로 물러서 내렸다 그러나

이미 젖은 마음까지 마르기도 전에 돌아왔다   

 

세 칸

서울역 광장 풀씨가 없어도 사람들은 모였고

다시 숨죽이며 흩어지곤 했다 건물 숲으로

이른 별똥별이 내리기도 했다 안내소에서는

입장권만 팔았다 늘 보이던 예수 같은 사람이

주먹질을 해도 여전히 손님 앞에서 고장이었다

헌혈 차와 전경 차는 오늘도

나란히 달라붙어 갉아먹고 있었다

…, 피를, 뽑아, 먹고, 사는, 여자, 사람들 …,

호텔 앞 자가용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꿈의 건널목은 얼마나,

시간의 깊이처럼 길었을까(?) 처녀 같은

우리나라 여자들이 주황 신호등에 걸려 있었다 


                                                                                   

겨울포구


밤새도록 들쑤신다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들과

형들은 다음날도 돌아오지 못하고

기다리던 어머니들은 파도처럼 누워

몸 뒤채이며 앓았다 나는

부레 뜬 꿈으로 흔들리고     


빈 생선 궤짝들 사이에 부서진 침묵이 쌓여 있고

입덧 난 바람이 파도 이랑을 갈아엎어도

봉해진 소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어둡게     


뜨겁다 가슴 뜨겁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몸은 녹지 않고 얼어붙은 쥐고기들이

콤바인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폐선은 기울 대로 기울어 헤어나지 못하고

형님들 어머니들 그리고 아버지들이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 이 밤

바람 찬 난장에서 지새워야 하는

비릿하게 물씬 거덜 난 바닷가 사람들

겨울에 기댄 채 쌓여 있었다 콤바인으로

온 밤을

바닥까지 끌어올려도 꿈같은 꿈은 끌려

올라오지 않고 겨울 포구의 얼어붙은 꿈들만

하염없이 깊어 하염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부대끼며


생각의 갈피들이 버스 속에서 부대끼며

즐긴다 창밖에서 자전거 탄 네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넘어지며 자빠지며

미끄러지며 살자 끊임없이 부대끼며

가끔은 흔들리며 그 흔들림 속에서

보리밭 사이를 간다 멀리 산과 산 사이로

굽어 사라져 버린 길 속으로 돌아 들어가

나는 없다 온통 갈아엎어 놓은 땅

빈 논에는 토박이 새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보리 싹들이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보리논은 그래도 따스했다 속 깊이 파헤친 세상

그 속에서도 몸 비벼대며 살아갈 이웃이 있으면

가슴 따뜻하다 우리

겨울새들도 겨울 속에 갇혀

공동묘지의 비석 없는 무덤들도 함께

오래도록 기억된다 우리들은 아름답게

오랜 기억이고 싶다 그리고 꿈결 같은 바다     


바다가 있는 풍경 그 속에서 바다는

집착을 버리는 몸짓으로

내가 있는 시간 속으로 끊임없이 다가와 닿고  


                  

두근거리는 바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부두 서성이는 바다의

변두리를 돌아 나오는 방파제

고깃배 세 척이 기울어 있었다

침몰(?) 반파(?) 나는 따라 잠겼다 똑바로

서지 못하는 배들 쉴 새 없이 흔들리고 그런

배에서 늦은 밤을 하역하고 있었다 새우

상어새끼 ………, 갈고리로 찍어 비늘만

얼굴 가득 돋아나 전등 불빛에 빛나고

늘어선 포장마차 속에서 아무리 머리

맞대고 짜보아도 똑바로 빛나는 꿈은

걸리지 않았다 마무리 덜 된 일손들은

정박하지 못하고 오늘 같은 날 하느님은

이런 부두에도 들르실까(?) 바다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삐걱거리는 사랑은

고장 난 등대 아래서 잡자기 쓰러지고

바람은 그 위를 덮쳤다 하늘의 별들이 미끄럽게

쏟아져 기울어진 바다로 처박혀 마구 구겨지는

시간 속으로 보이는 멀리 시가지의

화려한 불빛들이 바다 속에서 흥청거리고     


그리움은 언제나 뒷모습만 따라가고 있다                    



취로사업장


밤새, 고향이라고, 내려갔더니, 사정없이,

어긋난, 길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속살, 튼, 맨손으로, 흩어진,

돌을, 주워, 모으는, 고향, 사람들, 찌그러진,

세숫대야, 거덜, 난, 바지게로, 이고, 지고,

돌아와,

쌓았다, 나는, 십장이라도, 되고, 싶었다,

자주, 헛발, 딛는, 나는, 넘어지고,

아무리, 돌을, 쌓아, 길을, 고쳐도,

나의, 바른, 길은, 보이지, 않고,

아득히, 멀리, 떨고, 있는, 길에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나도 없고 길도 없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삼굿이 있는 고향


삼굿이 있는 고향에서 나는

베 짜는 소리에 자랐다 하늘소가

숨어 사는 삼밭에서는 물레질 소리를 내며

바람이 산다 숲처럼 무성히 자라 출렁이는

삼밭에는 사랑의 비밀도 자란다

― 비가 오기 직전 사랑의 비밀 터지는

   소리가 하늘을 쪼개며 번뜩이곤 했다 ―

삼굿에서는 삼나무 스물세 단이 나란히 누워

익고 나도 따라 익고 싶었다 삼굿의

아궁이에선 베 짜는 소리로 타들어가고

불꽃은 북처럼 재빨랐다 식구대로 모여 앉아

익은 삼을 벗긴다 하얗게 드러나는 살결

동네 아이들은 그 벗은 겨릅대를

가지고 논다 놀이터와 다리거리에는

초상집의 삼베옷처럼

삼이 걸려 흩날리곤 한다

할머니 머리칼 같은 삼이

하얗게 속마음을 풀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고구마 순


고구마 순을 붙인다

촉촉이 적셔주는

비 오는 날의 틈바구니에

고구마 순을 꽂는다

아침을 앉혀놓은 어머니는

텃밭에서 줄기를 베어오시고

서너 마디씩의 이야기를

뚝 뚝 분질렀다

물러나는 구름을 따라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뒷산을

올랐다 날마다 밤마다

애통 터지게 싸우던 강 씨 아저씨가

둥그렇게 묻혀있는 산밭을 돌아

거름 가마니를 이고 기어 올라오는 아주머니

어머니는 차라리 그녀를 부러워했고

어젯밤의 시끄러웠던 이야기를

되돌려 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만든 밭두렁에 조심히

손가락으로 쑤셔 넣고 다독였다

손톱 속으로 파고드는 흙

애통 터지게 그립던 아픈 날들     

나는 하늘 그늘에서

허리 굽혀 고구마 순을 붙인다

끈질긴 순을 붙인다                                                                                                                                                      

가을 산


가을 옷을 갈아입고 떠나는

산을 끌어안고 싶다     


도둑고양이를 안고 자던 어린 날

잠의 얼굴을 갈라놓던 발톱자국이

깊은 거울 속에 할퀴어 있는 모습

그 아침 뒤늦게 퍼 올리던 앙칼진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을 산 앞에 서면     


산을 짊어지고 오르내리시던 아버지

멜빵같이 부르튼 등허리와

천수답 가뭄처럼 쩍 쩍

갈라진 어머니의 손바닥이

보인다 가을 산을 바라보면     


굴렁쇠를 굴리며 동구 밖을 돌던 시절

― 지금은 무엇을 굴려

― 어디만치 왔는지도 모르면서

― 시간의 빈 나이만 홀로 굴러가지만

뭇갈림 논의 논두렁에 서 있는 허수아비

그 주머니에서 아버지 몰래 바람 한 다발

꺼내려다 광견병 걸린 개에게 물리던 날

그 개의 털을 깎으러 가셨다 또

물려 돌아오시던 어머니의

얼굴 모습이다 가을 산은                 


                                                                                                            

엇비슷하게 내리는 4


먼 산길을 내려와

지난겨울

밀린 생각을 풀 듯

머리를 푸는 개나리

그 길가에서 나는

풀릴 줄도 모르고

윗길로 와서 아랫길로 간다

늘 공사 중인 길로도

4월은 오고 또 잘도 가고 있다

길가로 밀려난 팬지꽃과

키 작은 앉은뱅이 꽃들이

스스로 비켜선다

그 사이로

엇비슷하게 내리는 4월

꽃집 화초들이

문 밖으로 기어 나오는 정오

들풀들이 산에서 당당하게 내려오고

속 터져 죽겠다고 소리치는 야산에서

나는 열병처럼 번지는 진달래

그리고 산발한 바람으로 살아있다   


                      

감자를 캐며


대가족이었다 봄에 쪼개어 심은 몸 하나에

줄줄이 매달려 살다 알몸으로 끌려 나왔다     


산 풀들이 머리를 산 쪽으로 두르고

기어오르는 산바람에

낮게 낮게 흔들리며 가라앉았다

산 풀들이 열어주는 산길을

올라갔다 거름 가마니 짊어진 지게를 지고

작대기로 버텨가며 오른 고개 마루

바람이 낮게 엎드려

높이뛰기 가로대 넘듯 넘어갔다

고추잠자리가 빨간 고추에 앉아있고

그 하늘에 잠자리비행기가 떠 있었다     


어머니가 캐낸 감자를

산 아래 손수레까지 지게 지고

내려갔다 그 사이에서 기어 나온

불개미 떼가 달라붙은 어머니의 몸

외설스럽지 않게 들판이 옷을 벗었고

어머니는

배추와 무를 갈아야 할 마음으로

서둘러 감자처럼 굴러다니셨다 그리고 나도                    



쓰러지듯 간다


간다

간다

내가 간다

우산은 아예 접어버리고

아이들이 간다

간다 간다

길을 간다

간다

간다

돌아간다

비가 와도

어머니들

아버지들은 간다

들로 간다

들이 간다

돌아 돌아 돌아들 간다

장마철 속으로

쓰러지듯 간다

간다

간다 바다가 간다

바다에 배가 뜨지

못해도 나는 간다

태풍이 장마를 몰고 와도

집배원이 간다

우편배달부 가방이 크다

빈 가방의 그리움은

끝없이 걸어간다

벌겋게 흘러내리는

산길

속살이 생피처럼 헐어

흘러내리는 길을

오늘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두꺼비집에는 이제 두꺼비가 살지 않는다


어머니의 외출이 잦아지고

내가 내려간 고향 길은 이제

고향 같지가 않다 푸석푸석 밟히던

유년의 가난만 어둠으로 고여

있었고 어둠을 걸러낸 바람은 가출하고

없었다 동구에 모여 앉은 소문들은 내가

들어서는 대로 달아나고 오래된 보안등만

낡은 빛을 앓고 있었다     

겨울 허수아비가 뭇갈림 논에서

쓰러지던 저물녘

산그늘처럼 고개 떨어뜨리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발을 씻겨드렸다

깊숙이 아려오는 눈물이 대야 가득 차올랐다     

밤마다 산짐승 울음소리가 내려오는

오래도록 낡아온 고향에서 나는

밤 빨래를 했다 밑바닥부터 몰래

썩어가는 냇물을 건져 올려 빨고 싶었다

아버지의 잠 밑으로 흐르던 물소리

그 속에 어머니는 빠져 있었다     

어머니가 떠나시던 밤길을 따라가다

올려다보았던 슬픈 별들이 어머니 같은 달 그늘이

물속에 다시 자빠져 있었다 건져 올려야 할

보름달이 더욱 깊이 가라앉을 때

젖어있는 것들을 말려야 할 빨랫줄은

어둠의 등뼈로 아득히 돌아누워 있었다    


                                                                                                                         

섬으로 떠서


들뜬 바다가

들고

일어나는 오후

부러진 날개의

갈매기

처럼 미끄럽게

주저앉는다

고독처럼 길게

누워있는 섬

소외의 거리에

쪼그려 앉은

시간처럼 물러선 섬

굴 양식장

부레와 고기 잡는 발

나는

오후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고

작은 고깃배들이

흔들리며 돌아오고

그 앞에서 바다가 문득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기운다 나는

남해의 저만치 물러선

섬으로

있다  


                                                                                                                           

돼지 잡기


눈 감아다오 7월 장대비가 내 눈물인 줄 알 지언정 네 머리 제사상에 오르려니 한 번만 웃어다오 네 뇌수에 해머 소리 강타하니 제아무리 장사인들 살아나기 만무하다 네 발 꽁꽁 묶여 입마저 틀어막아 죽음의 똥이 기어 나와 제 몸에 칠하는구나 동공엔 피가 앞날을 덮어쓰고 떠나고 빈껍데기만 눕는다 눕는구나 너는 생각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없으면서 목이 뚫리는구나 저항도 반항도 투쟁도 없으면서 온몸에 피를 흘리는 오늘 길들이 질펀하게 나자빠지고 울음은 더욱 피를 부르는데  잠들어다오 내가 못 보겠다     

털이 잘 벗어지지 않네 칼이 왜 이리 안 든가 숫돌 좀 주소 안 되겠네 칼이 안 나가네 호미를 주오 주전가 뚜껑으로도 해보세 물도 부지런히 끓이게 자 자네도 생간 한 점 들게 소금도 여기 있네 콩팥도 한 점 하고 쐐주도 한 잔 하게나 구경하는 수고룔세 쓸개는 조심하게 터지면 볼 장 다 보네 보게나 쓸개와 간 사이는 이렇게 고속도로일세 그려 놈들이 자가용 타고 드나들었기 때문이지 자 내장은 또랑으로 가져가게 족과 몸통 머리는 여기서 하고 여기 소금도 가져가게     

― 또아리틀고있는대장은풀어줄넘기를할일이다소장은내가어릴때끊어울렸던가시내들이그때그모습으로고무줄놀이나했으면좋겠다우리는오줌보에바람을넣어축구를하고위벽은튼튼하고무늬도맘에드니하루종일아이들과농구를하고싶다서산너머로……, ―     

창자는 있는 대로 뒤집어라 똥이 묻은 속이 기름덩이 겉보다 깨끗하다 뿌려라 소금으로 씻어내라 이 오염을 다리몽둥이는 잘라서 매달아라 뼈는 불가 뼈대로 살은 살대로 해결하라 머리는 상전이다 머리부터 모셔라 눈 감고 웃는 턱 밑이 가렵다 잘린 목에서 풀씨가 싹튼다 언제나 올가미였던 네 꼬리 뼈대 있는 등뼈에 이어졌으므로 자유로울 날 없었으리라                                                                                                                                                 

끈을 풀기 위한 사랑


장마 끝으로 오는 여름

복숭아 수박 참외 실은 손수레 끌고 밀어

장사 나가던 길이 보이곤 했다

그 길로 앰프를 단 수박차가 들어와

샅샅이 휘젓고 그냥 돌아갔다     


강변에는 장마에 떠내려 와 쌓인 모래들

그 반짝거리는 눈빛들을 경운기로

실어 나르고 있다

탱자나무에 걸렸던 구름이 물러가고

깨끗한 세상(?)

장마 끝으로 날아와 달라붙은 매미

날개 같은 매미 소리가 시원하게 지나가고

다시 또 별밤

장삿길에서 돌아와 평상에 나란히 눕던

어머니와의 거리에

상행선 기적소리가 낮게 지나가고

떠났던 기차가 차마 잊지 못하고 돌아와

순금의 햇덩이처럼 밤의 한가운데

깊이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마루에서 길쌈을 하신다

나는 늘 사철나무 울타리를 기웃거리며

희망의 변두리를 돌아 나오곤 했다

뼈 굵어지는 바람이 지나고

사랑 그 알 수 없는 몸을 더듬어

끈을 만들고

그 끈을 풀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득하게 사랑하는 사랑을 오늘도      


                                                                                                                       

국민학교 수목원


무너진 교실을 짓는 동안 거적때기를 깔고 열리던

야외학당 비가 자주 내리고 밑이 허물어졌다 넓은

여름 나뭇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놀던 숲이었다 

사이렌이 울며 황색 깃발처럼 하늘 높이 피어

올랐다 아버지들의 계산된 투망질 속에서 날렵하게

파닥이던 우리들 교실 유리창을 열고 뛰어나와야

했다 앞사람의 좁은 등짝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도

나의 앞날이 자꾸만 불안했다 건장한 나무들도

속으로 떨리는 그 불안 위로 정찰기가 낮게

날아다녔다 손가락으로 눈과 귀를 틀어막아도

비행기가 궁금하게 보고 싶었다

왼쪽 눈만 살짝 뜨고 바라본 세상

장수하늘소가 위기처럼 내렸다 모자와 완장

메가폰 그리고 호루라기 소리가 다급하게

쫓아갔다 민방위 본부에서는 언제나 씩씩한 목소리로

무장 침투한 적기를 북서쪽으로 쫓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붕대를 감은 나는 그 위에 약효도

없는 빨간 약을 찍어 발랐다 흰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의 들것에 들려 어디로 날아갔을까

운동장 끝으로 몰려가 불을 끄는 아이들과

교실에서 부상당한 아이들이 타고 내려오는 사다리

그 사이에서

아버지들의 솜씨 있는 그물은 오늘도 습관처럼 다시

들판에 던져지고

그래도 새들은 끊임없이 내려와 부리를 갈았다     


                                                                                                                                       

밤 가운데 개구리가


개구리울음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밤길을 굴러다닌다    

 

밤이 온통 개구리이고

개구리울음소리가 밤이다 

    

개구리울음소리가

오르거니

내리거니

밤나무를 기어오른다   

  

개구리울음소리가

밤나무 키보다 크고

나무들이 개구리 숨소리에

자란다 밤 밖으로

     

논두렁을 간신히

빠져나오는 개구리는

밤 가운데서

자란다 흘러넘친다

밤과 꿈을

흘러넘쳐

아침까지

자꾸자꾸 자, 꾸, 자, 꾸, 자란다      


                                                                                                                                      

겨울밤


밤새 콩을 뚫었다 밤이

가로질러 뚫릴 때까지

어둠을 뚫었다 못 대가리를

납작 오그라뜨린 송곳으로

그리움을 뚫었다 죽음을 꿰뚫었다     


구멍에 싸이나를 넣고 막았다

어둠을 몰아넣고 죽음을 한 방울

쑤셔 박아 막아 버렸다 모든 입을

틀어막아 버려라 말 많은 놈은

문제가 있으니까 눈이 내렸다

죽음의 뒷모습으로 눈발이 날렸다     


아침처럼 막아 버렸다 촛농을

떨어뜨려 있는 대로 구멍을 막았다

신이대가 뒤란에서 흔들렸다

댓잎이 맨살을 비벼대고

바람이 살아나고 있었다

아침으로 가까스로 뻗은 길로

날은 밝았다 빈 밭에 나무

껍질을 엎어놓고 죽음을 놓았다     


겨울밤이 눈을 뜨고 아침으로

눈이 내려와 꿩은 날지 않았다

아버지들은 정부미 포대에 죽음을 담아 오시고

들판에 거꾸로 꽂혀 있는 창 같은 주검이 보였다     


겨울 속에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겨울을 건너뛰지 못한

숱한 사연들이 하얗게 묻히고 있었다      


                                                                                                                       

칼을 간다


칼을 간다 아버지가 쓰시던 삽을

뒤집어놓고 삽자루에 숫돌을 꽂아

칼을 간다 규칙적으로

칼날 상태를 확인한다 칼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칼을 간다 또

다른 준비된 칼을 간다 숫돌이 닳아

없어지도록 간다 미리 마련된 칼도

등까지 갈리고 삽자루도 삭아

바닥나면

담장 앞에 선다 수없이 많은 숫돌을

꽂아 갈 수 있는 돌담 앞에서 적당히

허리 구부려 칼을 간다

모든 벽들이 무너질 때까지 한없이 

    

꿈자리에 앉아 계시곤 하던 아버지

하얀 모시 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안개 속을 걸어 나오셨다 첫발에

비틀하며 동구 밖을 돌아

할아버지 산소에 삼배하시고

엎드리셨다

산에서 고기를 짊어지고 내려오셔

동네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시고

내게도 떼어 주셨다

옹골지게 먹은 다음 날부터 내 입에서는

애통 터지게 그리운 아버지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아득히 멀리 끝내 보이지 않고                                                                                                                                                 

8월 하늘


팔월 하늘에서는 깻잎 냄새가 난다  

   

잠자리 헤엄치는 푸른 하늘 속에서

자꾸만 떨어지는 깨꽃 일그러진

태양의 테두리에 거미줄을 걷어 들여

하늘을 휘저었다 집 잃은 거미들은

또다시 그물처럼 거미줄을 치고

― 일생 동안 태양에 거미줄을 친다면

― 거미는 태양을 잡을 수 있을까

― 질식시킬 수나 있을까 한 발짝이라도 끌고

― 갈 수 있을까

― 배고플 때 한 입이라도 물어뜯을 수 있을까     


옥수수나무가 햇살 같은 수술을 떨어뜨리며

자라나고 있다 콩 꽃이 피어 여물고 있다

들깨를 아무리 털어내도 모아지지 않던

식구들의 작은 소망 참깨를 털던

어머니는 늘 객지에 나간 자식들 생각에

자신의 거친 삶까지 털어내곤 했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잠자리 잡던

우리들 잠자리채에 달라붙은 날개의 꿈을

펼쳐보곤 했다 고추밭에 고추잠자리가 내려앉고

말로만 듣던 그날의 함성처럼 태양에

거미줄이 쳐지고 무겁게 끌려가는 발소리     


팔월의 하늘에서는 그렇게 돌아오는 태양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파란 하늘에서

파란 메뚜기 한 마리가 가볍게 건너뛴다   


                                                                                                                               

개구리 합창


갑갑하다 비가 내리고 보리들이

논에서 선 채로 때 아닌 싹이 돋는다

유월 아침으로 비는 내리고

개구리울음소리는 가운데가 비어 있다

물가로 밀려나 제아무리 울어도

가야 할 것은 떠나고 끝내

떠내려간다 무덤들은 있는 대로 파헤쳐지고

이 시대의 유언들이 둥 둥 동동동동

배꼽을 내놓고 떠내려간다 흘러 흘러 흘, 러,

저 물소리 가장자리로 밀려가 드나든다

나는 너를 불러들여 인신매매처럼

팔아넘겼다 부푼 가슴으로 논길을

몰래 빠져나온 오 나의 예쁜

사랑하는 개구리 처녀야

눈부시게 질려 있는 너의 허벅지

홀랑 홀라당 까발려 겁탈했다 꿰미에

꿰인 살아 있는 다리들과 껍질 벗은

깨끗한 뱀을 구워 먹어도 암 수술받은

술고래는 바다로 헤엄쳐 갔다 아저씨뻘 되는

먼 친척이 저 아득히 멀리 떠나고

해부한 개구리 심장을 갖고 놀던 나의 심장이

망가지고 대동맥으로 나가는 문에서 삐걱거렸다

내가 떠나면 세상은 문득 허전할까

길목에 돌솥이라도 걸어두렴 다래끼 묻은

눈썹 하나 숨겨두고 숨어서 기다리렴

지금 떠나면 울어줄 자식 하나 없어

차마 먼 그 길을 못 떠나고 개구리들은

가운데가 없이 텅 빈 울음소리 속에서 울고 있다    


                                                                                                                                   

댄서


아무래도 농사일이 싫다고

도망쳐 버린

우리 동네 순이 같다

고향 까마귀처럼 슬프게

춤을 춘다 조명 아래서

불빛으로 흐르는 서러움

숨 막히게 껴안고 싶은 밤

고향 냇물소리가 들리고

빙빙 빙글빙글

돌아가지 않는 밤을 돌린다

아무래도 뒷모습이

고향 뒷산처럼 굽었다

능선으로 떠오르는

야반도주 같은 모습 그리고 너는 


                                                           

여수 어항단지


온몸에 그물을 뒤집어쓰고 바느질하시던

아버지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머리끝 하나 보이지 않고

길거리에 늘어져 오후의 겨울만

구멍 난 그물에 걸려 떨고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모습 보이지 않고

갈매기 떼만 나른하게 날고 있었다

날다 가라앉으면 곧 묻어버리는 바다

온몸에 비늘을 처바르고 내리는 햇살이

묻히면서까지 살아나고 있었다 수산물

공판장은 비어 있고 빈 수화만 떠돌고 있는

내던져진 우리들의 시간     


배 귀퉁이에서 점심을 늦게 먹는 어부들

그 얼굴에 비늘이 달라붙어 피어나고 있었다                                             



잎담배


한여름 햇살 아래서 종일 다듬어도

우리들은 다듬어지지 않았다

매미의 가느다란 날개도

잠들지 못했다

담배 밭에서 풍년초를 말아 피우시는

아버지의 기침이 끓어올랐다

아무리 가지런히 잘 엮어도

헐렁하게 빠지는 삶

비닐하우스 건조장에서는

줄줄이 목이 매달려 말라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목이 언제부터인가 답답하고

기침은 밤새 끊이지 않았다

그 기침소리 그늘에 숨어

어둠처럼 잎담배를 빨아들이던 형들

바람으로 떠나간 이들은 소식이 없었다

잘 어울려 다니던 몇몇 처녀들이

소문처럼 때 아닌 배가 부르고

울면서 울면서 밤 기차를 타고 떠났다     


담배 밭은 다시 수상하다

물을 건너온 바람의 소식들이

마약처럼 침투하고 있다

바람소리만 우글거리는 빈 담배 밭

이제 한숨소리만 들린다

살아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그래도 살아간다                                                                                                                                                      

봄 단풍


반역이다 봄부터 타락해 버린

너는 거역이다

피 흘린 몸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마음

누그러지지 않는다

눅진하고 어눌한 날씨

다시는 눕지 않으리

어정쩡한 시가 아니라

어중간한 시가 아니라

선명하고 건강한 시의 마음

깝깝하다

눈 빤히 뜨고도 썩어가는 세상

진국이 되고 싶은 사람들

너와 내가 어둠의 피로 섞여

묻히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반역이다  


                                                

양계장


농협 연체료를 못 이겨

야반도주한 삼촌이 팽개쳐 둔

양계장을 시작했다

닭똥 냄새 같은 짙은 사랑으로

밀린 빚을 갚아 나가도

허전한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삼촌 소식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했고

외국으로 떠났다는 소문만

떠돌아다녔다 아버지는

늘 양계장에서 닭들과 함께

칩거처럼 홀로 살았다 장마철에는

막사가 물에 잠기곤 했다

밤새 내린 비로 냇물이 뚝을 넘어

생명의 발목을 적실 때도 아버지는

잠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건너와 닭들을

빈 돼지막으로 옮겨놓은 뒷소리에

일어났다 오늘도

머리로 거미줄을 걷으며 모이를 주고 있는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 뒷모습처럼 굽은

고향 산을 오, 래, 오, 래, 바라보고만 있다   


                 

테이프를 들으며


심란하게 비가 내리고

이란 전쟁 속에서 날아온

총탄 같은 목소리

테이프를 듣는다

가뭄으로 벌어진 땅 같은 지난날들

덮어버리겠다고

페인트 기술자로 떠난 매형

또다시 모래바람이 불고

총성 끝으로 연기처럼 사이렌이 불고

이어 대피하는 소리들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꽝!

중동근로자 탑승기 공중폭파

꿈의 폭파

우리는 모두가 일시에 유가족이 되고

우리들의 목을 휘감는 소식 소식들

심란한 비는 하늘에서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우리는 끝내 울지 않으려고 했었다                         



여울물소리의 고향 곡성


고향이다 고향뿐인 고향

아름다움이라는 나의 고향이다

가난의 고향 울음의 고향

고향 사투리의 고향 모든

우리들의 고향이다 아름다움의

고향이다 명물이라곤 여울물뿐

여울물 소리의 고향이다

바람의 고향 어둠의 고향이다     


사투리 같은 사람들과 사투리 같은

길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투리 같은 우리들의 삶

늘 삐걱거렸다

밤 깊은 곳까지 흔들려

허물어지곤 했다 곡성에서는

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여울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징검돌이 있고

추억은 되풀이 풀려 이어지고 있다     


아프게도 곡성은

별똥별이 다시 태어나 우는 곳이다   


                 

한우가 미국소에게


하학길이 늘 꼴베는 논두렁으로 이어지던

만복이 함께 산 밑으로 나가 들풀을 뜯을 때

눈부신 햇살이 서러웁게 자라는 일요일이었다

노을이 길게 드러눕는 저물녘

들잠 든 만복이 볼을 핥아

놀에 젖은 들길을 내려오는 길에도

허리 아픈 고향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발자국마다 배어 젖어들고 있었다

징검다리 건널 때는 꼴망태 질머진 만복이랑

자꾸만 헛발 디뎌 빠지곤 했다

외양간 앞마당에서는 매일밤

여물 같은 식구들의 한숨소리가

쇠죽처럼 들끓었다

연체료 걱정으로 모두가 뜬눈으로 잠들던

그날 밤 식구들의 꿈속으로 쌀밥 같은

때아닌 눈이 내려 쌓이고

눈을 뜨면 바닥까지 허물어져 강으로 흘렀다

시름 많은 그러한 땅에서 나는

오래도록 같이 살아야 한다

네가 돌아가야 할 먼바다 보다도

길게 이어지는 이 가난의 땅에서

우리는 묵묵히 

땅을 갈아엎으며 걸어가야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배 터져 죽더라도

너희 땅으로 돌아가야 할 일,     


멍에를 뒤집어쓰고라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발걸음을 그냥 그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할

그렇다 어쩌면 여기는 신의 땅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재는 영원 속에서 인정되지 않는 곳 


                                                                                                                  

꽃이 지고 잎이


꽃이 

먼저 피어

살다

가는 것은

모두 

무섭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

그리고 잊힌 것들

속으로

시퍼렇게 눈 떠오는

살기 혹은

이파리들

그 눈총을 받으며

지는 

그렇게 

떨어지는

이름들은

모두가 무섭다     


아침부터 뒷산에서

꽃잎이 지고 벙어리뻐꾸기가 울고 있다               



들국화


하얀 꽃들이 무작위로

쓰러져 있다

가을의 한쪽 끄트머리를

쥐어뜯으며

죽은 듯 주검처럼 뻗어가고

있다

허리가 유연한 등나무는

욕심껏 비틀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고

가느다란 허리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부드럽게 휘어져 등나무 줄기를

기어 돌아가는 들국화

땅에 낮게 엎드린 꽃들이

하얗게 질려 쳐다보는

저녁 시간이 두근거리며 오고 있다  


                                           

까치둥지


막막하다 소주잔 같은 별들이 나가떨어져

어둠에서 소주 냄새가 난다 밤하늘은

이제 온통 술이다 취하지 않는 것이 없다

마른나무 우듬지에 빈 까치집 하나

위태 위태하게 그래도

달라붙어 있다 그러한 고향에서 나의 길은     


아버지의 죄를 용서하소서 아버지들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어머니의 무죄를 우리 어머니들의

잘잘못을 용서하소서 그 사이로 흔들리는

싹도 트지 않는 빈 가지의 흔들림을 용서하소서     


빈 까치집에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소식

달들이 혀를 잘못 놀려 비뚤어진 입으로

달빛이 가득 퍼부어지고

쌈질처럼 비에 얻어터지는 나날

밤마다 나무는 취한 몸으로 뿌리까지 흔들리고

그 끝에 매달려 사는 파마머리 까치둥지

어머니는 그렇게 죽음으로 살았다

그리고 우리

잘못 자란 가지마다 어둠이 걸쳐지고

몸이 축 늘어져 팔과 발목을 삐었다

기울 대로 기울어져도 밤은

미끄러져 내리지도 않고 온 식구의 허리가

심하게 아팠다 발목 삔 시간이 떠나지도 못하고

소주잔 같은 별이

함부로 자빠져 어둠은 이제 취기가 가득하고

몬당에 까치집이 위, 태, 위, 태, 위태롭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네의 이웃집들이 한꺼번에


오늘도 진종일 빈 까치둥지에 비가 내리고 있다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섬진강을 따라 달이 흘러내렸다

달 속에 내가 있고 바람이 불고

물소리가 들렸다

깊게 뚫린 하늘 타원형

그 속으로 빠져드는 내 죽음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며 귀향하는

강물소리 곁에서

달빛 속으로 젖어든다

깊게 가라앉는다 언뜻언뜻

언뜻 뒤집히는 물빛을 헤아리며

들판을 건너는 바람

그 발걸음에 맞추어 나도

내 겨울을 건너뛰고 싶다

남도의 섬들처럼 서로를 못 잊어

돌아앉은 그리움이고 싶다

달이 쿵 쿵

하늘을 갈아엎으며 간다

가로수들이 우우 깨어나 쓰러지고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몸을 움츠려도 풀리지 않는 그러한

겨울 속을 강물 따라 흐르고 있다  


                  

꿀벌에게도 침이 있다


꽃가루를 집어 나르는 벌들의 꿈

꿈꾸는 벌들을 넣고 돌리는 검정고무신 한 짝

어지러웠다 꽁무니에서 꿀을 빨았다

― 꿀벌에게도 침이 있다

그러한 하학길은 언제나 입술이

부어오르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징검다리 사이로 거슬러 올라가

다슬기랑 송사리를 잡았다 고무신짝에

담아가는 길은 맨발이었다

그 아득한 코스모스 길이 계속되고

집이 가까울수록 발밑이 허전하게

허물어졌다 늘 소풍날이었다 날만 잡으면

비가 내리던 소풍

― 하늘로 기어오르려는 이무기들

― 천둥 번개를 깨치고 용이 되려는 꿈을

― 소사 아저씨가 낫으로 잘라

― 연못에 다시 빠뜨린 그 해부터 해마다

― 소풍길을 가로막는 이무기 울음 섞인

― 먹구름 늘상 비가 내린다고 했다

쟁기질하러 가는 소처럼

논길을 잘도 걸어가는 아이들

늘 처지기만 하던 나는 아직껏

보물 하나 찾지 못했다 애써 헤매다 찾아도

확인도장이 없는 빈 낙엽만 찾았고

잘 접힌 나의 꿈은 늘 높은 나뭇가지나

돌 밑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물통은 늘상

비어 있었고 오랜만에 만들어온 김밥은 속 터져

있었다 수건 돌리기 하다 걸린 나는 머뭇거리다 

끝내


호박벌과 땅벌들이 속으로 몰려 날아왔다  


                                                                                                                 

돌고 돌고 또 도는


바다가 썰물이다

물새들이 하늘에서 돌고

공장들이 돌고 발전소가 돌아간다

그 속에 작은 보조 기기들이 돌고

펌프와 모타가 돌고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같이 돌아간다

거대한 회로 속으로 힘이 돌고

파이프 속으로 물이 흘러

혹은 증기가 돈다

길 위로 바퀴들이 돌고

나뭇잎에서 벌레 한 마리가 재주넘듯 뒹굴고

꽃이 나무가 땅이 

몸을 바꾸어가는 계절처럼

……, 돈다 돈다 돈다 ……,

과실들의 몸속으로

향기가 가득 돌고

해와 달이 돌아

밤과 낮이 심한 갈등으로 돌고

매일같이 시간이 돌고

비밀까지도 함께 돌아

나다니는데

비스듬히 지구가 돌고

세상이 삐딱하게 돈다

돌아가던 길들이 돌아오고 떠난 배들이 돌아오고

매일밤 달빛에 칼을 갈고

그 소리에 몸으로 닳아 맑게 죽어가는 그믐달

다음날 밤 또다시

해말끔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목숨

사람들이 돌아오고

바다가 밀물이다 이제

우리의 숨결이 돌아오고 따뜻한 피가

우리나라 땅의 온몸에 돌아야 할,       


                                                                                                                      

가위질


늦바람 난 여자가//

키득거리며 지나가고//

바람이 사람보다 먼저//

길가로 비켜 돌아간다//

오후의 뿌리 깊은 곳까지//

치맛자락 속으로 들쑤신다//

곁에서 바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죽이고 있다//

조경사의 가위질 소리는//

너무나 정치적이다//

잘 자라는 나무를//

서정 없이 잘라버리고//

웃자란다고//

조화로워야 한다고//

머리들을//

목을//

간단히 잘라버린다//

죽음 이후에도//

아픈 시대의 전단 가위는//

오후의 뿌리 깊숙이//

잘라버린다//

그리고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코끼리 코로 땅 짚고 도는 동안


왼손으로 코 있나 찾아보기

닫힌 그 팔 사이로

오른손 짚어 넣어 땅까지 닿기

늘어난 긴 코로

우물을 파며 놀았다

저녁까지 파고 들어가도

사랑의 샘물은

솟아나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도는 팽이,

그림자는 쓰러져

따라 돌았다

그 자리에서

풀어져 나온 노을이 허리를 감았다

돌아오는 그 길가에서

흔들림으로 잠드는

부들 이파리

아!

밤이 오고 있었다

얼굴 붉히며

밤으로 

걸어 들어가는 태양

― 태양도 부끄러울 때가 있다

― 나는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았다

노을빛으로

문 닫을 즈음

돌아서야 했다

발소리가 너무 컸을까

등뒤에 누워 있던 그림자

계면쩍은 모습으로

느티나무 아래서 돌아누웠다

서서히 다시 일어서는 그림자

강가에서 놀고 싶은

나를 데리고

언덕을 올랐다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 안으로

달려가던 나

나를 끌고 가던

그림자가

언덕을 올라

다시 넘어질 때

깜박

낮게 숨으면

또다시 찾아내

언덕 아래로 손을 뻗고

미끄러져 내렸다

나를 끌고 가는 그림자가

자꾸 자라나

무서웠고

그 길을 딛고 뒤돌아보면

내게 끌려오던 어둠

밤 가득 쌓여

아무렇게나

버려진 별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태어나는 풍경


반 추상의 풍경화다

아침부터

기울어진

수평선을 따라 미끄러진다

바다가

젖은 몸으로

속살까지 헐벗고 있다

나와 바다 사이

방파제 끝에서 줄 서 돌아오는

우리 어머니들

광주리 가득

바다가 벗어버린

낡은 속옷을 구겨 넣고

걸치고

딛는 무거운 몸뚱이

헛발 짚는 가벼운 꿈이

무섭게 깨지고 있었다

섬들은 그냥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평선을 비스듬히 따라

쓰러지듯 밀려

고향 같은 섬의 이마가

부딪쳐

물 그늘로 젖어 있었다     


멀리 아득한 끝에서부터 감겨오는 수평선이 다시 풀어져 내 목을 감았다 답답 워라 나보다 섬이 먼저 기침을 했고 해소기침을 하며 빈 밭에 서 계시는 늙은 어머니 그렇게 나의 시는 태어나 걷다가 넘어지다가 다시 일어나 걷고 있었다   


                                                                                                                          

안산동 앞바다

― 울화통이 밤새 터져도 잠꼬대처럼 신음하는

    그 바다에서 실뱀장어를 잡고 있었다


500촉 전등을 밝혀도

실뱀장어들은 모여들지 않았다

양어장이나

일본으로 200원씩에

팔아넘겨야 할 잠 못 자는 꿈은

가물가물가물가물가물가물가물가물가물

아련히 보이지 않았다

뜰 것에는 빈 꿈의 껍질만 건져지고

인근에 들어서는 공장이나 아파트

하나 둘 떠나던 사람들도

한숨만 푹 푹 내쉬고

바닷가 술집들은 휘청거렸다

공장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과

노가다꾼들의 거친 손찌검으로

길들이 나가떨어지고

아무 데나 싸 갈기는

폐유나 도시의 버릇으로

바다가 처박혀 썩었다

실뱅장어도 이제 없다고 투덜거리는 바닷가에서

밤새 드나드는 궁리

빈 속에 시름만 쌓이고

실눈 뜨고 내려다보는 그믐달

그 곁에서 별들은 말똥 말똥 뜬 눈으로 밤을 

지샌다 울화통이 밤새 터져도 잠꼬대처럼 신음하는

바다의 헛꿈만 떠올리고 바다는 그대로 말이 없다  


                                                                                                                                          

굴뚝새

― 우산이 망가진 세상에서

    나는 하늘을 들이받고 싶다


작은 어른으로 태어났다

나는 낫을 가는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

속에서 태어났다

차라리 

휘파람새가 되고 싶었다

곡괭이질 하다

저물어버린 어제

파일을 내 몸에 때려 박는 함마소리

머리통이 깨지고

핏줄이 툭툭 불거지는

저물녘

끝내 높이 날지 못하는 새

자꾸만 목이

걸, 걸, 해, 지, 는, 밤, 에, 도,

비는 자꾸자꾸 내리고

우산이 망가진 세상에서 나는

허물어져 흐르고 있다                                   



아그배

― 오월부터 배가 아팠다


오월부터 배가 아팠다

산으로 쏘다니며

아그배를 따먹고

아그배 아그배 아이고 배야 아, 이, 고, 배, 야

소리치며 뒹굴었다

흐트러져도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 꽃잎들은 늘 속옷 바람으로

                    나와 논다 ―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옷 차림으로 모든 꽃들이 나와 놀아도

외설스럽지 않은 오월부터

나는 배가 아팠다

― 봄에는 우리 비밀을 말하자

― 진달래꽃이 무참하게 쓰러졌다

― 칼을 품은 가슴을 드러내고

― 손을 한 번 잡자

― 아지랑이 아지랑이 아지랑이

― 지상의 모든 꽃들은 비밀을 발설하며 피어난다

아그배를 따먹고

아그배야 아이고 배야

거북스러웠다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늘 밖에 나가있는 들판이었다                



가슴이 아픈 아이

― 별무덤의 비밀 혹은 아픈 시대를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나는 온몸

    으로 하늘을 끌어안고 싶다


1

가슴이 아픈 아이는 길목에서

계단 위에서 숨을 조여 오는 단추가

― 선천성 대동맥 판막 협착증(?)

떨어져 뒹굴 때 그 단추 구멍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아픈 詩를 본다     


2

바다는 풍경 밖에 서 있는 내 가슴을 적셔주었다

저물도록 구슬치기로 뒹굴던 어린 시절이

구슬더미로 쌓여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어깨에 걸머지고 하학 하던

목쉰 노을빛 방파제에 걸려

흔들렸다 그 아래서 바다는 남몰래

누워 앓는 데 익숙해졌다 병원 침대에서

뜬눈이던 하얀 아픔이 매일 밤

파도로 부서져 내렸다 에테르 마취에서

풀리는 동안에도

병은 병의 다른 식구들을 불러 모아

나를 넘어뜨렸다 구겨진 한지 같은 얼굴로

고향을 떠나던 날부터 바다에서

무수한 유리창이 떠다녔고 밀물의 그리움은

늘 반짝였다 그러한 곳으로 나는 가고 싶다

차라리 바다는 거기에 하늘과 함께 있다    


                                                                                                                                        

공단 쪽으로 걸어가는 가로수


이제는 꿈도 연작으로 꾼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쳐 꿈꾼다 낭떠러지에 서면

벌써 절벽이다 죽음 앞에서는

정말 눕는다 꽃이 피어도 배고픈 꽃만

피어난다 유채꽃이 기호처럼 피었다

한꺼번에 진다 장다리꽃이 무작위로

쓰러지고 이제는

철쭉만 더 짙게 피를 토해낸다

아침부터 해와 하늘이

잔뜩 질려 있다 세상은 온통 안개다

안개 안개바다 바다 그러한 바다의 신음소리를

이고 오는 어머니들 발이 무겁다

젖은 다리가 어젯밤 꿈처럼 무겁다

가라앉는다 내가 먼저 깊이 빠진다

까마득하다

들은 모두가 빈 땅으로 남아 있다 새도

보이지 않는다 공단 쪽으로 가는 길가의

가로수들 물이 오르고 잎들이 제 허리뼈를

뜯고 나와도 상심한 얼굴이다 버팀목이 

문득 쓰러지고 나는 허리가 허전하게 아프다

바다는 비워지고 바지락 잡던 어머니들이 없다                         



시법

― 이제 시를 살고 싶다


나는 눕는데 조심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첫날밤처럼

아름답게 누운 날부터

순산을 기대하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해도

수없이 생략돼야 하는 허전함을 신맛 나는 과일을

씹어 메꿔야 했습니다 몸이 무거워지면서 나는

다시 눕는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배 위에서 

꿈틀거리는 애기의 이쁜 얼굴을 서둘러 보고 

싶었습니다. 아! 아아, 생명의 문이 열리는 경쾌함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신비의 문이 둔탁하게

다시 닫히고 생명이 곧 죽었습니다

?,  ?,  ?,  ?,  ?, 수없이 계속되는 난산의 밤들

그날부터 함부로 사랑을 행했습니다 아무 데나 

누워도 불편함을 몰랐습니다 부끄러움도 이제 

모릅니다 바람에게 즐거운 강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스스로 잉태하기도 

했고 성급하게 성황당을 찾기도 했습니다 공사판의 

어둠 속에서 캠퍼스의 귀퉁이에서 허리 가는 나무

아래서 남몰래, 나뭇잎 밑에서 광장에서 공장에서 

길거리에서 그리고 술집과 매음굴에서 마구잡이로

임신을 했습니다 나의 포주는 내 몸 하나에서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포주의 아들과도 동침을 

해야 했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여 죽은 아이를 꺼내

노랑봉투에 담아 버리곤 했습니다 가족계획을 하고

싶은 오늘도 나는 느닷없이 강간당하기를 서럽게 

기대하며 출근합니다 문득 하늘을 들쑤시는 굴뚝이

보이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내 몸에 꽂히기 위해 

거꾸로 서려고 합니다 나는 오늘도 난산을 

염려하며 시의 가족계획 속에서 젊고 싶습니다  


                                                                                                                      

땅냄새


비가 개인 다음날

아침 

마당이 없어지는 시대에

마당에 나갔다

덮쳐오는 땅냄새

아, 

어머니     


우리들의 봄은

어머니 같은

사철나무 울타리 안으로

벌써

들어와

피어나고 있었다     


강은 그렇게 땅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의 월급은 가난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월마나 된다냐

   먹고살 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씨가 낼 모래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 일어서 걸어가고 싶다


나는 항상 망가져 있다 우리나라

길들이 늘 성치 않은 몸으로

쓰러져 있듯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허물어진다

우리나라 길들은 우리나라 역사처럼

언제나 들쑤심 당하고 있다

서울의 길들 만 아니라,

분주한 도로만 아니라,

바퀴가 구르지 않는 그 작은 길들까지도

시대처럼 허리 아프게 돌아눕고 있다     


개나리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겨우내 밀린 생각을 푼다 헝클어진

머리를 풀고 있다

꽃잎 찢어지는 마음으로 봄은 오고

환하다 선착장에서 먼 뱃길을 열어

떠나고 우리들은 만나기 위해 떠나고

있다 봄날 아침같이

속으로 키득거리며 열리는 바다의 얼굴

저 멀리 담장을 넘겨다보는,

담장 아래 개구쟁이처럼 모여 앉은,

꽃들이 까르르까르르 웃고 있다

꽃집 앞에는 앉은뱅이 꽃들이 기어나와

눈치를 보아가며 일어섰다 앉곤 한다     


그렇게 

허리 아픈 시간들이 일어서 걷고 싶다   


                                                                                                                                         

신풍 애양원

― 나병환자들의 삶터인

   여기도 분명 우리들의 고향이다


들판이 바쁘게 비워지는 가을 저물녘

애양원에 가며 나는 생각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혹시 늙은 두룩저어지가 아닐까

이 마을 사람들은 짐승들과 함께 산다

산에도 거미줄이 가득하다 독거미라도

함께 살겠다는 마음으로 바람이 돌아

돌아 돌아나가지 못한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그냥 사는 것은 아닐까

죽지 못하여 차마 살아지는 것은

차라리 죽을 때까지 죽도록 사랑을 하자

닭과 돼지들의 마을이었다

닭똥이 눈물 나게 쌓여가는 양계장

그 그늘에 고양이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문패마다 번호로 불려 나와 있는 이름들

그 아래 손이 뭉툭한 한 사람이

문설주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 문뎅이, 나야!

바다에서 낚시질이나 할거나 저 인간들처럼

한쪽 바다에 통나무를 박아놓은 꼬막 양식장

흔들리고 있었다 바다가 밀려가고 있었다

다시 밀려와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 건너에 여천공단이 보이고 

섬에서 배가 배를 끌고 돌아오고 있었다     


노을이 흘러 들어온 골목으로 붉은

두룩저어지 한 마리가 불알을 흔들며 걸어간다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당당하게 몰고 간다    


                                                                                                                              

동백원 가는 길

― 불구자의 꿈은 불구가 아니다


늦은 밤이었습니다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다가가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별들이 제 몸을 비벼대며

따뜻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달무리에 휩싸인 달이 오늘밤

반쪽이입니다 다리도 잘리고

없습니다 팔도 잘리고 몸통도 없이

얼굴만 반쪽 남았습니다

그러나 울지 않습니다 수다쟁이처럼

방정맞게 큰 소리로 웃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길을 걸어갑니다

떠벌이처럼 설치고 다녀도

혼자가 되어

밤길을 걸어보면 떠들 수 없습니다

그렇게 슬픔은 깊이 고입니다

참으로 혼자가 되어본 사람이면

밤길을 걷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수지가 됩니다 거기에 또한

저수지가 있습니다 그 부근에는

하늘까지 젖어 있습니다

가장 깊은 슬픔의 아름다움이

늦은 밤 언덕을 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응어리진 불구자의 꿈은

불구가 아닙니다 바람이 앞서 걸어갑니다 


         

참혹한 사랑 혹은 문명


별빛이 알전구 속에서 다시 태어날 때부터

들풀들은 불안하게 떨었다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1세기 전부터

필라멘트가 벌겋게 타 죽을 때까지

우리들의 가슴은 위험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처녀의 깨끗한 가슴 위로 철로가 놓이고

우리들의 국토는 돌아눕지도 못하고 앓기 시작했다     


참새가 달리는 기관차 속으로 숨어들고

겨울 눈발이 창문에 부대끼며 쓰러졌다

온통 무너지고 있었다 내 가슴 위로

끊임없이 기차가 지나가고 기적소리가

하늘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별나라     


그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길 끝에서

나는 드디어 나로 태어난다 1936년

아버지는 어렸고 전라선이 태어났다

그 잔인한 길 위에서 나도 태어났다

비둘기 뱃속에서 차라리 창녀의 몸에서

태어난다 태어난다 태어난다 태어난다


지리산을 돌아가며 나는 거꾸로 앉아 태어난다

배고픈 꽃으로 태어나 가파른 산을 기어오른다

돌밭을 쟁기질하는 아버지가 보습 끝에 걸려

넘어진다 보리밭이 위험하고

나는 허리 삔 몸으로 짧게 태어나다     


겨울 참새들이 

투명한 차창으로 날아들어 쓰러지고 있다    


                                                                                                               

둘의 이름으로라도 하나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미워할까 두려운 때문이다

내 가슴이 늘 아픈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줄 수 없어

염려하는 까닭이다

바람이 불고 봄은 나른하게 기어 오는데

이처럼 모두가 하나였으면 싶다

여수여천 둘의 이름으로라도 하나의 몸이었으면     


한 잎 두 잎 그리고 또 한두 잎

붉은 마음 제 홀로 피어나는데 나는

방파제 다리를 끝내 건너지 못하고

사랑의 변두리만 돌아 나오는,

너와 나 사이에 오동도

만날 수 없는 마음으로 강이 흐르고

가슴만 바다로 출렁거린다     

한 걸음

다시 물러서는 먼 사랑의 산

나의 사랑은 늘 통화 중이고

거리에 그리움은 오늘도 머뭇거리고 있다                                                                                                                                                      

흐르는 이불

― 그리고 꿈꾸기 시작했다


바다 한 꺼풀 눈썹까지 끌어올려 덮고

잠들곤 했다 나는 꿈속까지 밀물 져

흔들리는 꿈으로 허물어져 깨지곤 했다

집들이 비스듬히 기울어 잠기고

꽃과 나무들이 일시에 물들어

나자빠졌다 사탕과 모자가 아이들 앞으로 

쏟아져 내렸고 풍선은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고 있었다

우산을 아무리 받쳐 들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젖고 때아닌 무지개는 먼 산 너머

마을에서만 언뜻 피었다 지곤 하였다

그 아래로 걸어가는 사내는

돌아선 섬처럼 흐르고

아침 섬에 이르는 가느다란 길

낮은 산으로 자라나는 모습

그 섬으로 바다가 걸어가고 있었다     


산봉우리를 갉아먹던 저녁 어스름

해의 열정을 삼켜버리 산

그 산 그늘 속에서 내 꿈을 봉우리부터

야금야금 깨물어 허무는 나 그리고

산 그늘이 어둠으로 걸어 나오는 저 산

속의 무리들 우우 나무들이 부딪치며

난데없이 들국화가 무작위로 쓰러지고 있었다           



바닷가 사람들


통발과 묶인 스티로폼이 쌓여 있는 바닷가에서

붕어빵을 굽는다 작은 어선이라도 있으면

살아 있는 고기를 잡을 수 있으련만 아버지는

매일 바닷가에서 죽은 고기만을 만든다

해변에 사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눈만

맑게 껌벅이고 군침처럼 둘러서서 떨고 있다

기름집 아이는 오늘도 온몸에 기름을 처바르고

손가락만 빨고 자질구레한 아이들이

속으로 파닥이고 있다 그 곁으로

도시에서 놀러 온 것들이 빈둥빈둥 팔짱을 끼고

간다 그러한 자식들을 한쪽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아버지의 음지에서 붕어빵을 굽니다     


팔딱 붕어빵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고     


누군가가 또 섬에 갇히러 가나보다 생활처럼

허드렛일의 세간을 낡은 목선에 싣고

벌써

얼굴 가득 바람만 살아나고 그늘이 휘감고 돌았다

어머니들은 오늘도 바지락과 파래를 헹구고

있었다 삼천포나 부산 쪽에서 싣고 온 대파를

언제나처럼 다듬고 있는 오래된 어머니들 가슴속

바다가 거세게 숨차 오르고 흉흉한 바다

그 곁에서 바다를 길어 올리는 소녀

횟집으로 실려갈 바다의 한쪽 귀퉁이를 퍼올리는

우리나라 그 바닷가의 딸들이 밤 골목으로

불려 나가고 ,  ,  ,  ,  ,  ,  ,  ,  , 있었다



해안선이 가끔 밀려와     


해안선이 가끔 밀려와 걸리는 

시장 한쪽 귀퉁이에서

꼬막을 팔고 있었다 배 타고 나간 형과

아버지는 바다가 풀어놓은 바람 그물에 걸려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꼬막 채취용 널을 타고

떠나시곤 했다 꼬막 양식장에서 형과 아버지의 빈

신발짝이라도 찾으려고 갯벌을 뒤져 훑었다

가끔 목소리만 퍼담아 들고 돌아왔다 꼬막 채취용

널을 장난스럽게 타고 떠나간 작은형

좀 더 멀리 찾아 나선 작은 형도

밀려오는 바다에 휩쓸려 정신없이 썰물 져 갔다

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밭일을 했다 

늘 바빴던 우리

식구들 그늘에서 나는 누워 있기만 했다

모기장 속에서 내가 모기처럼 살아 있고

작은 것들만 저마다의 호흡법으로 살아 숨 쉬는데

해안선이 가끔 

잠 속까지 밀려와 내 젖은 목을 감았다                                   



김 씨의 엿가위

     

하얗게 포장된 겨울을 가위질로

뜯었다 겨울 들판을 가위질하여

엿을 팔았다 눈이 오는 날은

엿치기하는 구멍 속으로 눈처럼 녹아

숨어들고 싶었다

정 씨와 나는 25년을 손수레 밀며

오르내리며 돌아다녔다 엿맛은 없고

엿먹이는 소리만 있는 세상에서

잃어버린 입맛을 팔고 싶었다

주인 밑에서 살며 남은 것은

가위질로 익숙해진 서글픈 기쁨

헐거운 사랑뿐이었다 무쇠 같은 몸도

이제 녹이 슨 고물이 되어 손수레 한쪽

고철쯤으로 들어앉았다 더울 때는

손수레 아래로 들어가 낮잠을 즐겼다

오늘도 아이들이 달려들어 맛보기 엿을

달라고 졸라대고

반 가락씩 들고 물러나는 저물녘

콧노래를 부르며 오르막길 밀며 올라간다                              



대장간     


성녕깐이라고 했다 뜨거웠다

노 속에 꽂아둔 쇠

풀무질하는 내 팔뚝이 뜨거웠다

벌건 열정을 힘껏 두들겨

낫 호미 괭이 도끼를 만들었다

망치질 소리에 맞춰 어머니는

드러 누었고 아버지의 허리가

뼈저리게 아팠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속살까지 그을렸다

자주 아파 쓰러지곤 했다 형은

태권도를 배워 잘 얻어맞았고

끝내 눈이 나빠져

안경 만드는 기술자가 되었다

대문을 만들어도 우리 집 대문은

없었고 와상을 만들어 팔아도 

우리는 편히 꿈꿀 자리가 없었다

우리 와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꿈자리보다 벌써

병원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맹이골 공섭이

     

맹이골에서 살았다 다섯 가구의 주민

깊은 산속에서 산사람으로 살던 마을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곳

뒤꼍 무너진 돌담 뒤에서 대나무들이

몸을 비벼대며 사는 두메산골이었다

허물어진 지붕들

무너진 사연들 사이에서 다람쥐들이

나와 놀다 가는 폐촌

변장한 오차석을 간첩으로 신고하여

푸짐하게 상을 받은 형은

그 해 여름 꼴베다 뱀에 물려 죽고

교실 뒤에 붙어 있던 내 그림 속 공장지대로

우리는 새벽에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다시

아무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

서산 노을에 젖어 서 계시기 일쑤였다     


나는 오늘 문도 없어진 집에 돌아와

아직도 꺼지지 않은

호롱불을 몸에 옮겨 붙여 돌아간다                              



왕골을 벗겨 돗자리를     


삼각형, 불안한 삼각형은 늘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다 왕골을 벗겨 돗자리를 만들곤 했다

아버지가 돗 틀의 바디를 잡고 어머니는 바늘로

왕골을 밀어 넣어

엇갈리게 짜곤 했다 짜는 동안에 두 분은

헐겁게 풀려 짜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네 장씩을 만들어 팔아도 연체료를

갚지 못했다 우리는 낮 동안 봉숭아물도 들여보고

비석 맞추기 놀이도 하며 놀았다 아무리 고집 세게

뒹굴어도 즐겁지 않았다 읍내로 뛰쳐나가

학교 다니는 형들은 몇 달째 소식이 없고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쌀이랑 용돈을 보내주곤

했다 별들이 무섭게

불안처럼 돋아나 흔들리고 뿌리가 떠다니는 하늘     


그런 하늘 아래서

돗자리를 깔고 싶다 우리 식구 모두가

모여 앉을 수 있는 자리를 펴고 오손도손 나란히,                                   



거간꾼     


아버지는 거간꾼이었다 동네 소랑 돼지 개를

도맡아 흥정하셨다 충혈된 눈의 아버지는

늘 취해 있었다 검게 그을린 키 작은 어머니

논 밭 일을 하시느라 밤늦게 흙 묻은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같이 한 몸으로 살아 보자고 

매일 밤 시끄러웠고 어머니는 대책 없이 며칠씩

눕곤 했다 어머니가 수동식 동력기로 

농약을 뿌리던 그날도 아버지는 여전히 

성난 모습으로 빈둥빈둥 기다려지고 있었다 

포도시 밥상만 들어가고 그 상이 가세처럼 

사정없이 기우는 동안 어머니는 헛간에서 농약을

그 절망을 털어마셨다 밤새 까맣게 굳어버린

어머니는 이른 봄부터 일구던 뒷산 밭머리에

간단히 묻혔다 아줌마를 애간장 녹이다 농약으로

먼저 보낸 아저씨 자식들도 떠나버린

이웃 마을 홀아비와 아버지는 맨날 같이 술 마시는

깨복쟁이 친구였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몰래

묘지에 풀을 뽑고 서툴게 성묘도 했다

제재소로 실려갈 소나무 원목이 쌓여 있는 곡성역

주인 몰래 벗겨 온 소나무 껍질로 아침을 지을 때

풀무질 소리에 목울음이 잠겨오기도 했다 

타버린 아침

점심 도시락에서 싼 내가 나고 숨어서 까먹곤 했다

아버지 속옷을 밤늦게 빨다가 물소리 따라 남몰래

울음 녹이던 여름 큰 장마는 어머니 무덤을 덮쳐

뼈까지 떠내려가고 동네 사람들이 빈 무덤으로

이장하고 돌아오던 날부터 아버지는 내내 

보이지 않고 우리는 희망의 변두리만 돌아,       


                                                                                                                           

무당집     


무당집이었다 할머니는 매일밤 오색천이

거미줄과 섞여 쳐진 부엌에서 징을 치며

주문을 외웠다 부뚜막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방울 달린 이쁜 칼을 휘둘러

어둠의 몸을 베곤 했다 사람들은 좀도리 한

쌀을 가져와 점을 치기도 하고

서울까지 점치러 다니시곤 했다 우리들은

할머니가 가져온 돼지머리랑 떡 과자들이

좋았다 아버지를 사람들은 까다라고 불렀다

키가 짝달막하고 고개를 잽싸게 젖히곤 했다

그러한 아버지가 봄 눈 녹은 물길 따라

떠나더니 비 오는 밤에 객사하여 돌아왔다

아버지의 식은 몸은 문을 들어서지 못한 채

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한대잠을 웅크리고

잤다 다음날 아침 간단히 묻어버렸다 모두가

할머니의 외고집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옷을 태우고 그 연기를 따라

― 그때 나는 아버지 냄새가 나는

― 연기를 온몸에 감고 뒹굴었다

부자집 영감의 첩으로 들어앉았다고 했다

삼촌들은 우리만 보면 마구 때렸고 자주

집에서 쫓겨나곤 했다 동생과 함께

담장 아래 채송화쯤으로 달라붙어 귀 기울이곤

했다 담장 무너지는 소리가 온몸을 덮었다

무당인 할머니가 내팽개쳐져

아파 누워도 동네 사람들은 쌀만 

좀도리처럼 걷어오곤 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여수 서시장에서

― 발언하는 고기들


깊숙이 파고 들어와 앓다가

포도시 빠져나가는 바다

조용했다 그리운 바다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바다의 주민들

마르고 있다 제 배를 발언처럼

가르고 길바닥에 누워버린 농성

소리가 없었다 허연 물거품을

입에 악물고 달라드는 바다

입이 없어 술렁거린다 우리들의 항쟁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 괘기는 얼마다요

도다리 오징어 명태 갈치 가물치

앗따, 오살나게도 비싸부네

아니어라우, 물건이 참말로 좋아부러라우

우리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당개라우

물 좋은 이 괘기 좀 봇쇼

자 들여갔쑈 천 원짜리 팔백 원만 줘불고,

― 팔백 원에 팔면 팔백 원짜리인 것을

싸게 싸게 팔아 분께 후딱후딱 사불랑께

허벌나게 매워 분 요 꼬치도 있당개라우

갈비를 빈 손으로 뜯어내는 정육점 앞에서

나는 아버지의 왕골 돗자리와 모자를 사고 싶다                    



바닷가 풍경

― 내던져진 삶들은 언제나 일어설 수 있을까


바다새들이 제 그림자를 물속으로

길게 빠뜨려 끌고 낮게 날아간다

머리카락 사이로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이

물길을 열며 눈부시게 돌아온다

물풀들도 비켜서 길을 열어주고     


썰물이다 나는 뚝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 뚝처럼 완만하게

기우는 시간 새떼들의 마을이다

바닷가 어머니들이 몰려나와 혼자처럼

열중하여 조개를 줍는다 허리가

아프다 떼로 몰려다니는 새떼 속에서

허리가 무거운 새처럼 굽혀

고독을 줍는다 서럽게 쩍 쩍 갈라진

삶을 줍는다 장화 신은 어머니들

그 얼굴에 깊이 가라앉은 그늘을 캔다     


쥐취포 공장이 달라붙은 풍경 속

즐비한 건조장에 어머니들이

가난하게 시간을 널어 말리고 있다

서둘러 헐벗은

알몸으로

달라붙는다

시무룩하게 짓물러버린 얼굴이

갈라지고 바람이 분다 굴뚝이

번쩍 높다   


                                                                                                                     

섬마을


끝없이 헛바퀴 도는 바람

그 바람에 패이는 물결 아래로

건너온 파란 철선

뱃길은 섬으로 이어지고

난간에 버텨선 섬마을 버스

우리는 버스 옆구리에 바람으로 올랐다     


섬은 도시 바람을 거부했으므로

바퀴는 길바닥에서 튕겨져야 했으므로

몸과 마음은 뛰었으므로

고장 난 의자의 스프링 위에서

섬과 함께 흔들려야 했으므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므로

버스는 이제 굴러오지도 않았으므로

우리는 걸었으므로

장대로 박히는 여름비는 포위망이었으므로

그래도 우리는 떠나는 길이었으므로

트럭 한 대가 지났으므로

길은 우리를 넘어뜨렸으므로

온몸 흙투성이 되었으므로

끝끝내 해변으로 돌아왔으므로

출발신호 울리던 배를 포도시 잡아 탔으므로

두 손을 섬의 유리창에

윈도 브러시처럼 흔들었으므로

배는 여전히 소록도의 아픔을 비켜왔으므로     


섬마을 방파제 아랫도리에

바다는 낮게 낮게 숨어들고 있었으므로  


                                                                                                                                

모순


방파제를 걸어가는 하오의 햇살

그 곁을 돌아나가 해안선에 걸터앉아

바라본 섬 등이라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풀어져 나간 고향길이 발목부터

삐어 돌아오고 어머니는 돌아앉아

앞모습이 없었다 빈 밭에 갈대만 우거지고

철새들도 빙, 빙, 둘러보고 그냥

떠나기만 했다 마중 나간 뱃고동은

고개 숙이고 홀로 돌아오고 나른한

남해가 생각난 듯 가슴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문을 걸어 잠가도 쥐는 잡을 수 없었다

천정에서 뽀시락거리는 너와 나의 모순

구멍 뚫린 귀퉁이는 있어도 녀석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가끔 어렴풋 깨어

일어날 때 번뜩이는 이빨만 보이곤 했다

또다시 잠의 머리맡으로 모여들어

화사한 꿈의 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위층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가 아파오고 뒷머리가

들쑤셨다 누워도 이제 잠들 수 없었다

창문을 열어젖혀도 가슴은 열리지 않았다

들꽃들의 월동 준비는 완벽할까

가슴속 갈대들은 스스로 모순의 몸짓으로

흔들리고 나는 문득 다시 춥다 들판이

안개를 벗어도 들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나는 나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갈대의 속울음소리만 끝없이 들린다  


                                                                                                                 

아이시께에끼


겨울 골목으로 눈발처럼 왔던 아저씨

자전거를 끌고 여름 그늘로 또 왔네

토끼털 염소털 족제비털 머리털을 찾아

골목마다 드나들던 가죽 가방

뱀을 잡는다고 잠든 겨울을 들쑤시던

아저씨가 아이시께에끼 여름으로 왔네

짐빨이를 타고 안 가본 곳이 없다는 사람

걷어올린 다리는 아버지보다 건강했네     


마늘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네

빈병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네

비료포대라도 있었으면

시멘트포대라도 떨어진

흰 고무신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네

헌 책이라도 있었으면 나는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하여 차라리

어머니가 잠들었으면 싶었네 어머니의

고무신이라도 신고 뛰어나가고 싶었네

아이스케이크 장수 목소리에 여름은 깊어

배고픈 매미들이 종일 허기지게 울었네

하얀 그리움으로 감기던 분홍색 얼음주머니

그 시원한 고무 주머니라도 만져보고 싶었네     


먹고 싶은 우리들은 부잣집 아이를 따라다녔고

들로 갔네 산으로 갔네 옥수숫대를 빨며 갔네

멀리 그 해에 새로 태어난 꿩 새끼들이 날았네                                                       



자꾸 벗더니 알몸이다


별, 자꾸 벗더니 알몸이다 벗은 사람은

강가에서도 옷을 젖지 않는다

고무신으로 만든 짐차에 모래를 실어 나르던

강변 모래밭 길로 호명하며 별이 떠올랐다

우리들의 검정고무신 트럭은 꿈속까지

별들을 실어 날랐다 열두 시와 한시

오늘의 별빛과 내일의 별빛 별과 별 사이의

고독 그 사이로 모래길이 열리고

우리의 은하수가

강물 따라 떵떵거리며 흘렀다 그러한 별들이

전쟁 속 이란으로 떠난 매형 손 끝에서

페인트칠되어

또다시 흩어질 것이다 모래바람에 실려

배웅 나간 누이의 눈동자 속에

빨갛게 피 묻은 별이 뜨곤 했다

호남선이 태풍 6호 버넌과 홍수로 끊어지고

젖은 기적소리에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썩은


곱게 썩은, 길가엔 온몸에 풀뿌리를 감고

누워계시는 동네 사람들, 가끔은

바람 따라 하산하고도 싶었으리라

나무가 썩고 뿌리가 따라 썩고 산이 썩고

산 그늘이 덩달아 누워 썩고

술이 썩고 썩은 술을 마신 사람들이 함께

썩고 내가 오르는 비탈길을, 내려오는

저녁 해거름이 썩고 이어 하늘이 썩었다

썩을 것은 아름답다

시간이 썩고 밤이 썩고 상처 난,

아픔이 깊게 썩고 그 썩은 별의 피가

………………… 썩은 새 …………………

가지런히 흐르는 은하수의 가슴

나도 별처럼 아름답게 썩어 가라앉고 싶다

바람이 불고 풀밭으로 썩은 별이 목숨처럼 내리고                                                       



사람이 사람을 벗는 시대에


벗는다 사람들이 서둘러 벗는다     


하늘을 벗고 산을 벗고 바다를 벗고

강을 벗고 강물소리까지 벗는다

벗는다 여자들이 벗고

남자들도 서둘러 벗는다

겉옷을 벗고 속옷을 벗고 살을 벗고

속살을 벗고 뼈를 벗고

목숨까지도 쉽게 벗어던진다     


벗어야 할 것은 벗지 못하고

자꾸만 입으면서 욕심을 입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죄를 껴입으면서

이데올로기전쟁 종교전쟁 폭력

현실과 거짓 그리고 빚더미와 어둠     


벗어야 할 것과 벗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생각을 벗어 버리고

자꾸만 자꾸만 성급하게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몸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넋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양심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고향을, 땅을, 인정을,

이웃을, 뿌리 뽑아 내팽개쳐 하수구에 버린다     


쉽게 벗고 쉽게 다시 입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벗어던져 버린다 떠나버린다

사람이 사람됨을 벗어던져 버리는 시대에

나는 고향 여울물 소리를 추억처럼 입는다 


                                                                                                                            

고향을 찾아서


죽음을 먼저 배워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태어나 말이 없었던 그는

왼쪽 가슴이 무거웠습니다 끊임없이 꽃잎이

말없이 지고 나무들은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습니다 선천성 대동맥 판막 하 협착증

심장병을 안고 태어난 그는

혼자서 혼자서 혼자서 그리고 또 홀로

허약한 하늘 한 귀퉁이 아래서 울었습니다.

가난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고

말 못 할 아픔으로 쓰러져 자랐습니다

숲이 잠자듯 조용해도 그 고요 속에서

나무는 늘 불안하게 누워 떨었습니다

그 떨림 속으로 죽음의 얼굴이 보이고

앞서가는 죽음의 뒷모습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무는 유서를

썼습니다 쓰러질 때마다 그는 유서 같은 시를

마지막처럼 썼습니다 고향을 찾아 헤매는 그러한     


그는 죽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수술을 받을 거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는 수술을 받아 이제 건강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깥의

더 큰 병듦 속에서 아프게 아프게 

우리들의 고향을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언제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을

가슴에 안고 가출하여 그는

무수한 쓰러짐 속에서 투병처럼 홀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직 혼자만으로

아픈 가슴을 견디어 사랑으로 만날 때까지  


                                                                                                                      

당구장에서


오늘도 참고로만 해둬라 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일까 땀 흘리며

삥삥 돌아도 만나는 것은 희멀건 내 식구들

뿐이다 하루종일 발전소 그늘에서

회로 속 깊이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었다

노조창립기념으로 2만 원을 받았고 색깔만 다른

넥타이로 목을 한 번씩 고쳐 맸다 하늘은 오늘도

힘껏 기울어 서산으로 쏟아부었고

노을만 쫓겨났다 직장에서 만난 고향 형이

탕수육과 짜장면을 샀고 커피를 마시고

국화와 다방 레지를 불문율처럼 칭찬했고

초저녁부터 붉게 닳아 오르는 창문

장급여관 사이를 지나 따라 들어왔다 나는

※로라도 낄 수 있을까 나인볼을 치는

사람들은 한결 조심스럽게 표정을 접어 넣고

아무리 돌아도 만나는 것은 그 얼굴이 그 얼굴

이었다 쿠션, 카운터에서는 이 나이에 내가

하느냐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보통 사람의 시대와

마음을 비워도 무거운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나는 뒷다마라도 까고 싶었다 맡세이를 찍어

단 한 큐에 끝내고 싶었다 벽에는 헬스클럽광고와

큐대를 잡은 여자가 뜨거운 가슴을 드러내고

육체미처럼 근육질로 서 있었다 거울 속 나는

담배 냄새나는 안개에 묻혀 있었다 부엉이 두

마리가 날아와 눈동자를 쪼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두 눈알을 양손에 들고 안 보이는 세계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처럼 ※처럼 ※처럼 ※처럼 


                                                                                                                                 

에필로그


이미 세상에 발표된 글들이기에

크게 손질을 하지 않았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찌하겠는가

못난 자식도 내 자식들인 것을

그러나 나는 또한 믿는다

내 자식들을 믿는다

못난 내 자식들이

나를 이렇게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나를 이렇게 다시 살려주고 있다     

아침 다섯 시

노란색 청소차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둥근 빗자루를 돌리며

쓸고 닦고 빨아들이며 지나가고 있다     

너는 네 안에 내가 들어있는 나다

나는 내 안에 네가 살고 있는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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