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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24. 2023

이어도공화국 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차례                         


• 자서(自序)   

  

나는 늙은 창녀였다 235

독신주의자 아파트 236

살아서 흐르는 넋 238

돔 239

지상에도 너무 많은 뜬구름이 240

나의 고향은……, 미래에서 찾습니다 241

소녀와 여자 242

알밤과 밤송이 243

그림 그리기 245

산방산 안에서 246

바다로 가는 자전거 247

바다에서 248

바다의 명절 250

이어도 251

벚꽃 고사리 소나무 256

별빛과 불빛 257

꿈 안팎으로 몰려오는 붉은여우 258

한라산에 올라가다 259

숨비소리 261

담배 나라에서 262

밤에는 검은 것이 왕이다 263

할딱새와 목탁새 264

폭포 265

잃어버린 혀를 찾아서 266

억새꽃 267

담쟁이와 거북이 268

길 끝에 서 있는 길 269

시론 270

성 이시돌 목장에서 271

해인사 생각 272

유배지에서 273

파종 274

사람의 고향 275

푸른 초원 276

제주도에는 강이 없다 277

소와 소나무 278

길에게 당하고 싶다 279

별 밭을 쟁기질하는 달 280

꿈을 꾸었다 281

지하철 282

무서운 출발 283

무서운 아이들의 길 284

쇼핑 수레 296

도벽 287

바람의 엽서 288

딱 하루 남았다 291

별과 무덤 혹은 길 291

小說詩・序  298 






                                                                                                   

• 자서(自序)  

        

꿈의 섬 이어도에서 꿈을 기획하고

꿈을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꿈의 섬 이어도는 이제

님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꿈의 연륙교를 개통하고 싶습니다  


  


                                                                                                                    

나는 늙은 창녀였다


밤,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에도 잠 못 들고 일을 하는 사람들

나는 늙은 창녀였습니다

나의 어머니 또한 창녀였습니다

밤에는 그냥

꽝,

잠들어버리고 싶습니다

무서운 아버지들은 서둘러 벗겨간 속옷을

노란 집이 있는 골목 끝에

펄럭이는 깃발로 매달아 놓고 

말없이 소리쳤습니다

번호로 불려 나와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벌건 벽돌집의 옐로 하우스에서

나는 창녀다운 창녀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내의 가슴을 단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순결한 늙은 창녀였습니다

내 안에는 길이 너무 많아서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길이 좀 보입니다

길은 질긴 목숨의 늙은 창녀였습니다

별들이 끊임없이 길을 따라 돌던

몸속에서 기침하는 안개

안개는 밤보다 더 어둡습니다

몸에서 피어나는 안개는 어둠보다 더 깜깜합니다

길은 늙은 창녀였습니다

나의 길은 이제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아버지들과

아버지가 될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독신주의자 아파트


밤마다 유령이 나타나곤 한다 

남자들이 모여 사는 독신자 아파트 

바람의 속치마가 나풀거린다 

늦은 밤이면 별다방 아가씨들이 

어둠의 향기로 찾아와 방을 물어 

오거나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밤마다 

유령의 숨 가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입을 틀어막아도 삐져나오는 바람소리 

나를 한때 애용했던 

세상의 남자들이여 조심하라 

소문의 바람 속으로 어느 

수녀가 찾아오기도 하고 

비구니가 목탁도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 그런 독신주의자 아파트의 비밀 

여자들은 누구나 가끔은 벗고 싶다 

그런 면에서 모든 여자들은 창녀답다 

대중목욕탕에 다녀오는 여자들이 

젖은 몸으로 쳐다보고 지나간다 

젊은 아가씨건 중년의 아줌마건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나간다 

자주 지나치던 젊은 과부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복도에서 

가끔 마주치던 눈빛들이 씩 웃고 

지나간다 수녀나 비구니들도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그러므로 

창녀답다 창녀들은 가끔 단 한 사람 

그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고 싶다 

그러므로 창녀도 때로는 지사답다 

한편으로는 성자답다 거사를 앞둔 

사람의 눈빛처럼 때로 깊어진다 

유성다방의 아가씨들이 이제는 

낮에도 들락거린다 참으로 신기하다 

비디오가 있는 방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 비디오 같이 살았던 나의 노란 집 시절 

― 삽입만 시켜주면 서둘러 환해지던 시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커피나 유자차를 집에 쌓아 두고도 

언제나 다방에서 시켜 먹는 남자들 

그들의 버릇을 별나라의 단골손님을 

식당에서 일하는 쌍과부의 사랑을     

청소를 하러 오는 젊은 여자의 비밀을 

우유를 배달하는 아줌마의 새벽 방문을 

門 앞에서 발견되는 유령의 그림자를 

독신주의자였던 몇몇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하나 둘 결혼을 

하거나 여자를 꿰차고 잠적한다 

그러다가 가끔 돌아와 결혼과 무덤을 

이야기하고 늦기 전에 돌아가는 뒷모습들 

그렇게 독신주의자 아파트에는 지금도 

밤마다 유령이 나타나고 알 수 없는 

숨 가쁜 유령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바람의 속치마가 독신자 

아파트를 휘어 감는다 나풀거린다 

오늘도 바람은 차고 복도에서 만나는 

낯익은 유령의 모습 유령의 목소리가      



살아서 흐르는 넋


강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달맞이꽃 

강물 속으로 흐르는 달빛을 따라 흐른다 

어머니가 흐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어머니의 젖가슴 

우리들의 젖줄이 맑게 흐른다 

강의 맨 끝자리 

섬진강은 끝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마음이 된다 

실성한 밤나무 골 할머니가 매일 밤 

머리를 감는다 

어렵게 늦장가 든 외아들 강춘이 

그 아들이 빠져 죽은 강물에 머리를 담근다 

그래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가난하게 사는 구차한 생활이 싫다고 

서울로 달아나 버린 강춘이 색시 

그러나 

남몰래 무덤 가에 찾아와 울다 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강은 그렇게 

말 못 할 사연으로 또다시 살아나고 있다      


강 건너 

밤나무 그늘이 그런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의 돔을 볼 때마다 

풀 한 포기 없는 

풀씨 하나 만들지 못하는 

무덤을 생각한다   

   

돔은 별무덤이다   

   

장마에 무너져 

둥둥 떠내려가는 뼈들을 본다 

제어봉도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우라늄의 화려한 정사를 본다  

    

그 돔 속에서도 아직 살아있는 나는       



지상에도 너무 많은 뜬구름이


시인과의 결혼을 앞둔 시인이 

나에게 말하더라 

“세상에게 복수하는 길은 오직 

아름답게 사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리라      


그 아름다운 길을 찾아 또다시 

떠나야 하는 이 막막하고 먼 길      


아직도 국방색을 벗지 못한 

치안본부 앞의 나무들을 지나 

단풍놀이 갈 여비를 찾아 나오는 

단풍잎 같은 얼굴들 

은행 앞 은행잎들은 벌써 

온몸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체국 앞으로 떨어지는 

엽서 같은 나뭇잎들이 

또한 머뭇거리고 있었다      


지상에도 너무 많은 뜬구름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지상의 뜬구름들은 겨울로도 가지 못하고 

꽉 막힌 서울 하늘로 부활처럼 떠올라라      


나는 오늘도 모과나무 거리를 모과나무로 걸어간다          



나의 고향은……미래에서 찾습니다


나의 고향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현재형으로 찾아가는 일이 삶입니다 

詩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배가 고픈 

새들이 더욱 열심히 날아오릅니다 

고향을 찾아 섬까지 걸어갑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 

바다는 늘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 닫히기도 합니다 답답합니다 

가끔 뱃길이 열리고 

바다는 그렇게 늘 한정적으로 열립니다 

우리를 오래도록 가두어두는 거기에도 

고향은 아직 없습니다 고향은 

과거보다도 더 오랜 옛날에 있었거나 

아직도 멀리 미래에 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늘 안개로 가득합니다 

먼 옛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내 등뒤에서 닫히고 미래로 찾아가는 고향 길은 

도시 안개로 까마득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저녁노을이 저녁 하늘과 함께 바다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바닷속 깊이 잠겨있는 유물들의 고향과 

납작 엎드려 환상의 나라를 꿈꾸는 

도다리나 가오리의 고향과 남해안 그 바다 

양식장의 부레로 떠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고향 

그러나 아, 

고향은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소녀와 여자


1

봄 햇살이 눈부신 살결로 내리고 있습니다 

시샘한 바람이 잠시 

배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나비 떼가 놀란 듯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하얗게 흐드러진 배나무밭 길로 

한 소녀가 하얗게 내려앉고 있습니다 

곧 날아오를 듯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얗게 차려입은 드레스 자락 사이로 

수줍게 붉어지는 순한 살결로 부서질 듯 

눈부십니다 환하게 날아오릅니다 

숨죽이며 뒤따라가던 바람이 들켰습니다 

슬쩍 들추어진 치맛자락 속에서 

숨어있던 나비 떼가 하얗게 날아오릅니다 

소녀는 홀로 가슴이 부풀어 나비가 됩니다 

그렇게 소녀는 하얀 미소를 날리며 

나비 떼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2

그런 소녀들이 여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을 길목에서 

우리나라 여자들이 겨울나무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떨어져 쌓이고 

겨울나무는 푸른 꿈의 여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알밤과 밤송이


벌어지고 있다 

벌어지고 있다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      


벌리고 있다 

벌리고 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벌리고 있다      


입 다물지 못해! 

밥상 치우란 말이야, 

내 말이 안 들려!      


큰 일 벌어지기 전에 모두들 

입을 다물라니까 

내 말이 안 들려 

개새끼, 일곱 마리 

숯이랑 고추랑 솔가지가 함께 걸린 

금줄을 모두 걷어버려라      


벌어지고 있다 광양에 밤송이들이 벌어지고 있다 광양과 광양 밤나무 밭이 벌어지고 있다 그와 그녀가 벌어지고 있다 그와 네가 벌어지고 그와 우리가 우리와 네가 우리와 우리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벌어지고 있다 책상과 책상이 땅과 땅이 남과 북이 집과 집이 문과 문이 사랑과 사랑이 슬픔과 슬픔이 기쁨과 기쁨이 믿음과 믿음이 종교와 믿음이 종교와 종교가 신앙과 믿음이 무좀 도진 발가락 사이가 벌어지고 있다 가을밤과 여름밤이 벌어지고 있다 팔월과 구월이 벌어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 삶과 삶이 삶과 살아있음이 죽음과 죽음이 죽음과 주검이 추억과 추억이 밤 서리와 원두막이 어린이와 어른이 살과 살이 목숨과 목숨이 몸과 몸이 손과 손이 마음과 마음이……,      


모두들 벌어지고 있다 

벌어져야 할 것은 모두 벌어지고 있다 

벌어지지 말아야 할 것까지도 모두 벌어지고 있다 

가을밤, 풀벌레와 풀벌레 울음소리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고요와 고요 사이가 벌어지고 있다 

술판이 벌어지고 싸움판이 벌어지고 놀음판, 

판, 판, 판, 입이 마구잡이로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벌어지는 것투성이다 

그렇다면 벌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벌어진 밤송이에서 

벌어진 땅으로 떨어져 

입 다문 몸으로 벌어지는 알밤 하나     



그림 그리기


나는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네 

누군가 다가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했네 

생각해 보니 

혼자보다 둘이 함께 그리는 그림이 

더욱 아름다울 것 같았네 

우리는 둘이 함께 그림을 그렸네 

도화지 한 장에 함께 그림을 그렸네      


바람 같은 여자가 우리 앞을 지나갔네 

나는 언뜻 붉은여우의 꼬리를 보았네 

그림을 그리던 그가 갑자기 화를 내었네 

그리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림 그리던 도화지를 찢어버렸네 

나에게 한 장밖에 없는 도화지를 찢고 

흙 묻은 발로 밟고 떠나가 버렸네 

내가 울면서 붙잡아보려 했지만 

그는 이제 붉은여우와 함께 그림을 그리네      


그가 찢어서 밟고 지나간 도화지를 

재생용지로 만드는데 꼭 10년이 걸렸네 


나는 이제 다시 

재생용지에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네 

팔색조와 삼광조와 사람을 그리고 있네     



산방산 안에서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절반쯤은 늘 안개에 잠겨 있는 

가끔은 이어도가 희미하게 보이는 

그런 산방산 안에서 나는 

나의 탯줄을 너무 늦게 자른다 

나의 태반을 너무 늦게 묻는다      


그런 산방굴사 안에서 부처님께서 

먼바다를 지그시 꿈꾸고 계신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위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파도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또 다른 파도가 

자전거를 밀어주고 있다 

그렇게 바다로 가서 

바다가 되어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밑으로 달려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닷속 깊은 곳으로 달려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뱀장어처럼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로 가는 뱀장어가 있다 

바다로 가는 뱀장어는 강을 닮았다 

강에서 강물을 배운 뱀장어가 

바다로 가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줄 아는 강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사기와 사랑이 잘 구별되지 않는 이 시대에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다 

연어들이 거슬러 돌아오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 

바람 부는 파도에 현혹되지 않고 

바다의 깊이를 간직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빛보다 더 많은 별빛을 싣고 가는 

빛나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에서


깜깜한 어둠 속을 한없이 흐르다가 

더듬어서 더듬어 더듬어서 

쪼개진 바위틈을 겨우 찾아내었지 

이 지상에 태어날 때에는 그렇게 

참으로 꿈도 많고 희망도 많았었지      


작은 옹달샘에 잠시 모였다가 

골짜기를 골 골 골 내려오며 

아이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많은 사연들을 간직한 물줄기를 만났지 

생각해 보면 그때가 그래도 아름다웠지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 만나면서 

때로는 다시 헤어지기도 하고 

속 깊은 곳까지 다치기도 하였지 

그렇게 몸을 섞으면서 내려가는 것만이 

우리들의 사랑이라고 믿었지 

우리들의 타고난 운명이라고 믿었지      


그렇게 함께 가야 할 길이 있어서 

우리들은 차라리 행복했었지 


그래, 지금도 함께 

가야 할 길이 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지 

그렇게 우리들은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었지 

강은 그렇게 단순해서 더욱 행복했었지 

강은 늘 그렇게 단순해서 때로는 아름답지      


가끔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물고기들을 가슴에 품고 흐를 수 있어서 행복했지 

그러나 우리들의 긴 꿈이었던 

바로 그 바다에 도착한 물들은 지금도 행복할까      


바다에 도착한 강물은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바다는 오늘도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 

어디로 더 가야 할지 모르는 

바다에 도착한 물들이 강 문을 들락거린다 

흐르는 것만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물들이 

아직도 그 믿음을 잊어버리지 못하여 산발한 바다 

해안선 가득 몰려와 하얗게 쓰러지며 울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한쪽으로만 흐를 수 없는 막막함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속 깊이 흔들리고 있다 

밤새도록 바다는 바다에서 바다를 넘나들고 있다      



바다의 명절


바다는 명절날에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 

오늘 같은 날 

바다는 더욱 쓸쓸하다 

오늘 같은 날은 

배들도 보이지 않는다 

들뜬 보름인데도 

보름달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같은 날 나는 

바닷가를 서성거리는 

사내 하나 잡아다가 

몰래 함께 잠든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섬이 있는 바다 기슭에서 

사내 하나 먹고 

아침이 오기 전에 

하얗게 다시 토해 놓는다               



이어도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를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나라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어도를 당신은 아시나요  

    

1. 용설란

이어도 가는 길가에 용설란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오래된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그중의 몇 놈이 수상하다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기다리는 님이 있는지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다 그 높은 전망대 위에서 손차양을 하고 먼 곳을 본다   

   

2. 탱자나무 울타리

이어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어도와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어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가야만 한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가득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꽃 피어있다   

  

3. 전혀 다른 세상

용설란 가로수 길을 지나 탱자나무 울타리 건너 이어도에 들어온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헌 옷을 모두 벗고 들어온 바람의 살결이 부드럽다 빈 몸이 된 나는 잠시 부끄러웠지만 이어도에서는 모두가 옷을 입지 않는다 옷을 입지 않는 세상에서는 옷을 입으면 더 이상하다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 그런 이어도에서 나는 시나브로 이어도가 된다   

   

4. 비익조

이어도에는 비익조가 살고 있어요 삼광조와 팔색조가 살고 있어요 세상에서 눈을 잃은 새가 이어도에 돌아와 세상에서 눈을 잃은 또 다른 새를 만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세상에서 날개를 잃은 새가 이어도에 돌아와 세상에서 날개를 잃은 또 다른 새를 만나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어요 팔색조와 삼광조 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살고 있는 비익조가 아직도 이어도에 있어요   

   

5. 이어도의 강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철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덜컹거리며 흘러가는 바다의 열차가 있습니다 협괘열차의 추억이 있습니다   

       

6. 게으른 몽상가

이어도에는 게으른 몽상가가 살고 있어요 그는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가끔은 가지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그 나무에 올라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또 다른 이어도를 바라보곤 하지요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요      


7. 산책

산책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입니다 

     

8. 별무덤

이어도는 별무덤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별들이 하늘에 뿌리를 박고 반짝이는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별들의 뿌리를 사람들은 푸른 잔디라고 말합니다 잔디로 덮여있는 무덤을 보십시오 무덤들은 달을 닮았습니다 달의 일부가 자꾸만 보이지 않습니다 없어진 달은 바로 그 무덤 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은 지금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9. 붉은점모시나비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아직도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오늘도 이어도에는 모시나비가 날고 상제나비가 날고 붉은점모시나비가 개미들의 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그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10. 멍텅구리 배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멍텅구리 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때 갇혀 살았던 지옥의 멍텅구리 배 생각에 다시 멀미 납니다 나를 멍텅구리 배에 팔아넘기고 검은 멧돼지와 함께 동굴에서 살고 있는 붉은여우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이어도에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그 거친 바다를 건너온 그도 역시 멍텅구리 배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바다에 젖어 있습니다 바다의 시퍼런 파도가 칼날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이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고 합니다 나도 한 때는 복수하기 위해 발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역시 사랑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멍텅구리 배에서 새우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멍텅구리 배에 팔아넘긴 그의 아내는 함께 공모하여 팔아넘긴 그 사내와 함께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날아와 꽂혔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복수의 칼날을 품고 그 짐승들에게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수의 칼날이 녹슬어 사랑의 꽃으로 부활하기 전에는 이어도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배가 있습니다    

 

11.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12. 시인

이어도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너나들이가 살고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이 시대에 너는 나고 나 또한 너인 그런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시인이 이어도에 살고 있어요 “시란 사람을 열고 사람에게 비로소 열리는 사랑의 문입니다” “나는 땅의 눈물 같은 그런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영혼이 투명한 시인이 살고 있어요 맑고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붉은 동백꽃의 시인이 살고 있어요   

   

13. 애련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내가 세상의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를 사랑으로 건져 올려준 너무나 고마운 연꽃이지요 나를 죽음에서 들어 올려준 너무나 크고 은혜로운 연꽃이지요 넓은 연잎으로 더러운 세상을 가리고 그 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이지요 그보다도 더 중요한 진실은 그 넓은 연잎 아래서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고 있지요 그리하여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14. 이어도 카페

가장 아름다운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꽃입니다 이어도 카페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억새꽃과 유채꽃 이어도의 사람꽃이 10월의 메밀꽃과 감자꽃으로 지금 한창 흐드러지고 있습니다  

    

15. 이어도 사랑촌

이어도에는 없는 사랑이 없습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어도에서는 당신이 꿈꾸는 어떤 모습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배우고 익혀 온 모든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랑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또한 섹스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섹스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이어도 사랑촌은 그런 곳입니다 

    

16. 이어도 부활촌

이어도에는 부활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이어도 부활촌에는 수목원이 있습니다 나무는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나무는 먼저 떠나지도 않고 배반하지도 않고 한없이 베풀어 주며 가르쳐줍니다 길은 결국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말없이 가르쳐줍니다 수목원 입구에는 워싱턴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습니다 워싱턴은 워싱턴에 두고 워싱턴 야자수만 가져왔습니다 나무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부활촌에서 부활합니다    

 

17. 이어도 창작촌

이어도에는 풍경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길을 잃은 당신은 이어도 창작촌에서 당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어도 사랑촌을 거쳐 이어도 부활촌을 지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도만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이어도는 오직 우리들을 위한 아름다운 섬입니다 강한 나라가 아니라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벚꽃 고사리 소나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간 새들 

창 밖으로 왕벚꽃이 분분하다 

새들의 발자국마다 서둘러 

어지럽게 피어나고 있는 꽃들 

그리하여 이제는 꽃들이 무섭다 

꽃부터 피어나는 꽃들이 무섭다 

속살로 피어나는 꽃들이 너무나 무섭다      


고사리 장마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젖는다 

산책길에 꺾어 온 

어린 고사리 한 움큼 

꽃병에 꽂아 둔 고사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자꾸만 젖는다      


돌아보면 

우리들의 모든 이별에는 

눈물과 어둠과 바람이 함께 섞여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세한도(歲寒圖) 속으로 걸어 들어가 

바람에 젖고 있는 검은 소나무가 된다 

대정향교에 아직까지도 그렇게 서 있는 

바로 그 살아있는 소나무가 된다           



별빛과 불빛


하늘의 구멍가게 같은 십자가들 

붉은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도처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어린 나를 시장에 버려두고 

몰래 지켜보던 눈빛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처음 배우던 시장에서도 

늘 붉은 십자가로 빛나던 

그 깊은 숲 속 고아원에서도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눈빛을 닮은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별을 닮은 

불빛을 만들어 나무마다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하늘의 별빛과 지상의 불빛 

우리들은 이제 그렇게 늘 반짝이고 있습니다                                    



꿈 안팎으로 몰려오는 붉은여우


나의 꿈속에는 언제나 

붉은여우 한 마리가 있다 

아무리 쫓아보아도 

이제는 도망가지도 않는다 

허공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고 있던 

붉은여우 한 마리 

바바리코트 허리띠로 목을 매었던 

끈을 풀어주기가 무섭게 

나에게 달려들던 붉은여우 

입에 칼을 물고 

달려들던 붉은여우 

그 붉은여우는 

나의 성기부터 물어뜯더니 

이제는 드디어 

나의 영혼까지 잡아먹고 있다      



한라산에 올라가다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한라산을 오른다 

1100 도로를 달려 올라간다 

영실 휴게소에서 약수를 떠먹는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한라산 훼손지 복구용 흙 

그 흙 한 봉지를 배낭에 짊어지고 올라간다      


키 큰 나무들 아래는 조릿대들이 무리 지어있다 

등산은 언제나 초반부가 문제이다 

숨이 차 오를 무렵 나는 계곡에서 잠시 쉬어간다 

그 계곡에서 나는 사향노루와 토끼를 보았다      


병풍바위 앞에서는 잠시 뒤돌아보아야 한다 

아기를 잘 낳는 여자들의 엉덩이 같은 

허리가 잘 생긴 여자들의 허리선 같은 

다리가 잘 생긴 여자들의 다리선 같은 

깊이 끌어안고 싶은 여자들의 젖가슴 같은 

혹은 너무나 깊고 오래도록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들의 등허리 같은 

그런 오름들이 길게 펼쳐지고 

곧 구상나무 숲이 나오리라 

곧 주목나무 숲이 나오리라     


알게 모르게 상처 입혔을 사람들의 가슴에 

입구에서 짊어지고 올라온 흙을 정성껏 부어준다 

아래 계곡에서 보았던 사향노루와 토끼를 

노루 샘 부근 주목나무 숲에서 다시 보았다 

너무나 맑은 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산을 오를 필요가 없었다 

여자들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 듯 

산은 언제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흰 사슴을 찾아 백록담에 오르던 나는 문득 

그 사향노루와 토끼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그 숲 속에 집이 하나 있었고 그 집 속에 

사향노루 같은 여자와 토끼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흰 사슴은 백록담에서 홀로 살아가게 풀어놓고 

사향노루와 토끼와 함께 한라산으로 살기 시작했다     



숨비소리


숨비소리가 바다 가득 꽃으로 피어난다      


숨을 오래 참았던 해녀들이 휘파람을 불고 있다 

제주 바다 가득 휘파람 소리가 피어난다 

오래 참았던 숨은 휘파람 소리로 피어난다 

오래 참았던 고통은 때로 꽃으로 피어난다      


바다의 제 몸속 깊이 숨겨둔 

전복 소라 해삼 성게 오분자기 ……, 

그런 보물들을 찾아내느라 바쁘다 

몸속 깊은 곳을 구석구석 만져주니 

바다는 제 홀로 키득거리다가 흥분한다      


밤낮으로 그 짓이 생업인 여자들 

오늘도 숨비소리 가득하다 

숨비소리가 바다 가득 고통의 꽃으로 피어난다                    



담배 나라에서


너무나 천천히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너무나 

느 

리 

게 

살인하고 

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또한 용서하고 있다      



밤에는 검은 것이 왕이다


밤에는 모두가 검어진다 

하늘이 검어지고 

바다가 검어지고 

결정적으로 

내가 먼저 검어진다      


끝까지 반항하는 별들에게 

일제히 소환장이 발부된다 

그리고 별들은 하나 둘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달도 없는 밤에 

달맞이꽃들은 

홀로 기다리다 스스로 쓰러진다      



할딱새와 목탁새


오래된 사찰 주변에는 할딱새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특히 절간의 선방 숲에는 할딱새들과 목탁새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어여쁘고 향기로운 보살님과 젊은 스님이 엉큼한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할딱벗고 할딱벗고 할딱벗고 할딱새들이 온 숲이 떠나가도록 떠들어댄다고 한다 그렇게 할딱새에게 죽비를 얻어맞고 돌아온 젊은 스님은 헐떡거리는 욕망을 할딱 벗어버리고 드디어 목탁새가 된다고 한다      



폭포


폭포를 만나지 못한 강물들은 

넓고 깊은 바다에 갈 수 없다 

폭포가 상류에 많을수록 

강물에게는 좋은 강이다 

일찍 폭포를 경험한 강물들은 

하류로 내려 갈수록 

잔잔하게 흐를 줄 안다 

바다를 앞두고 

맨 끝에서 맞이하는 폭포는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마음을 다스릴 겨를도 없이 

바다에 다 와 버린 강물들은 

깊은 바다의 중심으로 갈 수 없다 

그런 강물들이 

바닷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잃어버린 혀를 찾아서


너무 불순해진 혀를 잘라 

숲 속에 버려 버렸다 

말랑말랑했던 혀가 굳어 

누군가에게 

면도날이 되었던 

바로 그 혀를 잘라 

숲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 숲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혀 같은 단풍잎들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혀는 없이 

검붉은 거머리 두 마리만 

달라붙어 있는 입은 이제 

부드러운 혀를 찾고 싶다 

나는 이제 다시 

그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혀가 그립다 

무섭고 딱딱한 혀들이 무성한 숲에서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혀를 찾고 싶다                



억새꽃


아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직까지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억새꽃은 억새꽃만큼 울고 

바다는 바다만큼 울며 살아간다 

오직 사람들만이 

슬픔 때문에 못살겠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나에게만 슬픔이 있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누구에게나 

그만큼의 슬픔은 있는 법인데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억새꽃이며 바다의 혀들이 

오늘따라 너무나 조용히 빛나고 있다          



담쟁이와 거북이


푸른색 화분에 푸른색 담쟁이 하나 심었어요 

푸른색 어항에 푸른색 거북이 한 마리 넣었어요 

푸른색 2층 베란다에서 

푸른색 담쟁이와 푸른색 거북이가 그렇게 만났어요 

푸른색 담쟁이는 푸른색 화분을 푸르게 넘었어요 

푸른색 담쟁이는 푸른색 베란다를 

더욱 푸르게 만들었어요 

푸른색 거북이도 푸른색 어항을 푸르게 넘었어요 

푸른색 거북이도 푸른색 베란다를 푸르게 다녔어요 

푸른색 담쟁이는 푸른색 베란다 

푸른색 바닥뿐만 아니라 

벽이며 천장이며 유리창까지 빠짐없이 점령했어요 

푸른색 담쟁이는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라도 

푸르게 뿌리를 내릴 줄 알아요 

빨판처럼 혹은 만화영화의 거미인간처럼 

어디라도 올라가 뿌리를 만들어 붙이고 

제 영토로 만들어요 

이제는 그런 담쟁이 숲 속에서 살고 있는 

거북이를 쉽게 찾을 수가 없어요 

2층 베란다까지 올라온 창 밖의 벚나무들도 

거북이를 쉽게 찾을 수가 없어요 

벚나무가 놀이터인 새들도 요즘에는

거북이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어요 

베란다 안은 이제 완전히 창 밖의 바다가 되었어요 

담쟁이 잎들이 파도로 출렁거릴 때마다 

가파도와 마라도 그리고 이어도가 언뜻 보이는 

베란다에서 살던 거북이가 어쩌면 

저 깊은 바닷속으로 떠났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늘도 창 밖의 바다와 베란다 안의 바다가 

한 몸으로 몸을 섞어 출렁거리고 있어요 푸른색 

베란다에서 나는 문득 거북이가 보고 싶어요          



길 끝에 서 있는 길


길 끝에서는 언제나 

또다시 길이 열린다 

길을 찾아가는 길 

나는 언제나 그렇게 

길이 있으면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  

    

희망은 늘 그렇게 있다      



시론


시인에게는 사족이 필요 없다 

시인에게 

시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뱀을 그리는 데 

발까지 그려 넣는다고 

그 뱀이 용이 되지는 않는다 

뱀은 뱀이고 용은 용이다 

나의 삶도 

주석이 필요 없는 

딱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싶다     



성 이시돌 목장에서


젖소들이 사람들을 키우고 있었다 

뱀 한 마리가 

설교를 듣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성소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해인사 생각


뻐꾸기가 자주 울고 있는 요즘 

왜 자꾸만 범종소리가 들리는가 

왜 자꾸만 금고소리가 들리는가 

왜 자꾸만 운판소리가 들리는가 

왜 자꾸만 목어소리가 들리는가 

왜 자꾸만 

해인사의 행자 시절에 보았던 

무슨 말사 올라가는 사잇길 

그 숲 속에 없는 듯 숨어있던 

노스님들만의 집이 생각나는가 

세월이 흐른다고 

모두가 큰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살던 

독거노인처럼 홀로 담배를 피우던 

그 늙은 할아버지들이 

왜 자꾸만 생각나는가 

뻐꾸기는 아직도 밤새 울고 있는데     



유배지에서


이 세상은 나에게 어느 곳 한 곳 

유배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이곳은 먼 옛날부터 유배지였습니다 

가장 멀리 보내버리던 가장 가혹한 유배지 

이곳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님께서는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리셨습니다 

세한도에서는 늘 유배지의 

가혹하고도 쓸쓸한 바람냄새가 납니다      


나는 스스로 더 깊은 유배자가 되기 위하여 

이곳으로 흘러서 들어왔습니다      


전생에 나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었나 봅니다 

이곳 비바람과 바다에 몸을 씻고 죄를 씻고 

마음까지 씻고 살아보니 

너무나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너무나 맑은 마음이 되어 

날아오를 듯 가볍고 행복한 생각이 듭니다 

나는 유배지에서도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파종


아파트 옥상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어요 

낡은 아기침대에 흙을 채워 만들었어요 

그 침대에서 놀던 아기는 이제 없어요 

그제 아침에 그곳에 배추씨를 뿌렸어요 

어여쁜 아기가 영원히 잠들어버린 

바로 그 아기침대 

그 텃밭 가득 푸른 새싹이 돋아났어요 

나도 이제는 당신의 그 깊은 

가슴속 가득 

푸른 새싹으로 돋아나고 싶어요      



사람의 고향


당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향이 바로 당신 가슴에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무덤입니다 

아직은 따뜻한 나의 무덤입니다      



푸른 초원


제주도에는 아직도 푸른 초원이 많다

제주도는 아직도 섬이 아니라 바다다    

 

소들이 한가롭게 바다를 뜯어먹고 있다

조랑말들이 바다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산을 내려온 노루와 꿩 몇 마리가

푸른 바다 위를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다

푸른 초원은 그렇게 잔잔하게 평화롭다 

    

한라산 중턱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푸른 초원이 출렁거린다

축사에 숨어 도박하던 여자들이 뛰기 시작한다

엉덩이에 뿔 달린 망아지들이 급하게 뛰어간다     


제주도에는 아직도 그렇게 푸른 초원이 많다

제주도는 아직도 섬이 아니라 온통 바다다     



제주도에는 강이 없다


제주도에는 강이 없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더 높은 산이 있다

더 깊은 바다가 있다

강보다 

더 긴 이어도가 있다     



소와 소나무


제주도에서는 소가 죽으면

소나무로 다시 태어난다

제주도에서는 소나무 숲에

아직 살아있는 소들이 모여서

먼저 죽은 소 이야기를 한다  

   

제주도 소들은 고삐도 없이

코뚜레도 없이 자유롭다

그러나 제주도 소나무들은

덩굴성 식물들에게 얽매여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제주도에서는

소보다 소나무가 더 슬프다     



길에게 당하고 싶다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강간당하고 싶다

길에게 당하고 싶다

힘센 사내에게

압사당하고 싶다

사랑은 모르고

섹스만 아는 X세대답게

그런 무서운 사내가

어둠 속에서 덮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쓰러뜨려

치마만 걷어올리고 

방뇨하고 싶다

벌건 대낮에도 

힘센 사내를 먹고 싶다

달빛이 어둠을 핥으며 

헉헉거리는 황홀한 밤

발달된 내 자궁 속으로

그 사내를 통째로 집어넣고 싶다 

    

길은 오늘도 그렇게 길을 가고 있다          



별 밭을 쟁기질하는 달


이곳에는 아직도 

쟁기질하는 소가 지나간 다음 

하얀 감자들을 

부지런히

주워 담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쟁기질하는 달이 지나간 다음 

빛나는 별들을 

밤새 주워 담는 가슴들이 있다   

   

오늘밤에도 이곳의 달은 

그렇게 

깊은 어둠을 갈아엎어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을 밤새 캐내고 있다                     



꿈을 꾸었다


똥구멍이 없는 여자가 있었다 

오줌구멍도 없는 여자가 있었다 

오직

성기 하나만 있는 여자가 있었다 

이제는 항문도 

성기도 없는 여자가 있었다

오직

입 하나만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가 

너무나 무서웠다 

꿈 밖으로 

정신없이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꿈 밖에도 

그런 여자들이 

이미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지하철


목이 너무 답답하다

목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창 밖을 보니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앉아서 졸거나

아가씨 엉덩이를 만지거나

아가씨 가슴을 만지거나

핸드백을 찢거나 

지갑을 훔치고 있다  

   

문에 낀 채로 달리는

목이 너무 답답하다

어둠이 너무 무섭다

달리는 거대한 관에서

겨우 빠져나온 얼굴이

공동묘지를 먼저 발견한다     



무서운 출발


어머니 고맙습니다 

저도 이제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따뜻한 양수 속에서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저도 이제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문만 좀 열어주십시오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드디어 문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제 힘으로 나가겠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까부터 자꾸만 

밖에서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제발 잠들지 마십시오 

저에게는 지금이 

너무나 중요한 순간입니다 

제발 잠들지 마시고 

저를 좀 지켜봐 주십시오 

제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는 

우렁찬 저의 모습을 지켜봐 주십시오 


어머니 큰일 났습니다 

고무장갑을 낀 어떤 손길이 

자꾸만 느껴집니다 

어머니 무섭습니다 

벌써 

날카로운 칼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를 가르고 

저까지 가를 것만 같은 

저 빛나는 칼날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무서운 아이들의 길


처음부터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었다  

    

어머니의 문을 열고 나오려고 했는데 

조급한 어른들이 기다려주지 못했다 

어른들은 처음부터 믿어주지 않았다 

떳떳하게 스스로 나오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먼저 이상한 기계를 들이대거나 

고무장갑을 낀 무서운 손으로 

빨리빨리 나오라고 협박을 했다 

끝까지 제 길로 나오고 싶은 아이들을 아예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끄집어내 버렸다 

가슴 두근거리며 열 달을 기다렸던 아이들은 

그렇게 처음부터 완벽한 패배자로 태어났다  

    

마지막 희망처럼 문 밖에 서 계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허리를 껴안고 

별이 보일 때까지 

신작로 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대형 할인매장으로 끌고 가 

쇼핑 수레에 거꾸로 앉히기 일쑤였다 

출생지를 알 수 없는 물건들과 함께 

쇼핑 수레에 싣고 다니며 

사랑보다 먼저 싸우는 법부터 가르쳤다  

    

아이들은 자꾸만 어른들의 허리를 껴안고 싶은데 

차가운 쇼핑 수레 손잡이를 마주 붙들고 

힘 겨루는 법을 가르치기 바빴다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사랑법을 가르치지 않고 

힘이 없으면 밀리고 힘센 사람들만이 

세상을 밀고 갈 수 있다는 

그런 잘못된 싸움질만을 가르치기 바빴다  

    

사람들이 필요해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던 

그런 시대는 이미 가고 

돈이 사람을 마음대로 만들어 사용하는 시대 

그런 시대의 아이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지금도 자신들만의 또 다른 길을 만들고 있다    



쇼핑 수레


너는 우리 시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얼굴이다 

타임캡슐에 넣어야 할 일순위가 바로 너다 

일이 없을 때마다 틈만 나면 

깊숙이 삽입하고 있던 너희들 

사람들이 다가서면 투덜거리면서도 

금방 정색을 하고 사람들을 끌고 간다 

사람들이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너희들이 사람들을 끌고 다닌다 

너희들은 햇빛보다 조명 아래서 

더욱 오래도록 살리라 

그것이 또한 너희들의 운명이다 

너는 암수가 한 몸에 있는 자웅동체이다 

그럼에도 너는 여자들을 더 좋아해서 

여자들 따라다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거꾸로 앉은 아이가 빤히 보는데도 

남자들은 성기를 바짝 세우고 

너에게 홀려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다 

너는 평평한 에스컬레이터는 잘 타지만 

계단을 잘 오르지 못하는 

바퀴 달린 짐승들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너는 바퀴들의 시대를 대변한다 

너희들이 아무리 

입이 크고 성기가 한 몸으로 커도 

바퀴의 운명은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미워할 수도 없다          



도벽


큰일이다 

나의 도벽이 

재발할 것만 같다 

다시 

당신을 

자꾸만 

훔쳐 오고 싶다          



바람의 엽서


한 장

섬은 사람들 시선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길이 넓습니다 바다는 모두가 길입니다 바다에는 바닷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섬에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섬에는 죽음까지도 도착할 수 없습니다      


두장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죽음을 배워 가는 일입니다 나는 나의 모습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를 것에게 끊임없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잘못 걸어가는 길인지도 아직은 모릅니다     


석장

다시 한번 간절히 뿌리내리고 싶습니다 별 뿌리, 둥둥 떠다니는 우리들의 꿈은 어디에 뿌리내려 사랑으로 흐르는 강물 소리에 귀를 열어놓을 수 있을까 죽음이 늘 곁에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사랑, 사랑과 미움과 아픔과 부질없이 얻어터지는 바람 그 속에서     


넉장

살림꾸러미를 짊어진 가을 햇살이 이사를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빈 몸만 떠나야 할 죽음의 방 한 칸 그 방에서 나의 사랑은 실개천 하나로라도 흐를 수 있을까 샛강이 흐르고 가을 하늘 아래 벼들이 나란히 누워 긴 겨울 꿈속으로 잠들고 있습니다 겸허하게 비워지는 가을 들판을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다섯 장

정신없이 돌고 있는 정신 나간 세상, 말을 걸고 싶습니다 싸움이 아니라 농담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에게 메아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 산울림으로 산을 무너뜨리고 강으로 함께 흐르고 싶습니다     


여섯 장

경지정리가 끝난 들판에 트랙터가 가을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천수답 다랑이 논에서 한 포기 두 포기 우리 어머니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집중호우로 떠내려 가버린 논에서 우리들의 꿈은 지금도 방천 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라도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일곱 장

무등산을 바라볼 틈도 없이 빈 틈 없이 쏘아보고 있습니다 안으로 상처 입은 영혼을 끌어안고 어둠을 껴입은 산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요의 몸짓이 너무 무겁습니다 그런 무등산 아래로 엠블런스가 급하게 울며 돌아오고 있습니다 광주의 햇살이 길게 드러눕는 저물녘 병원 십일 층 난간을 붙들고 헛기침을 해대고 있습니다 죽음은 놓칠세라 무섭게 호통치듯 쏘아보고 있습니다     


여덟 장

걸어가는 나무였습니다 거리를 걸어가는 가로수였습니다 가끔 들판을 걸어보기도 하고 낮은 산을 남몰래 올라보기도 했습니다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홀로 쓰러지는 일로 다시 태어나곤 했습니다 새봄은 사랑을 꿈꾸는 죄인이었습니다 나뭇잎들은 거짓말처럼 반짝거렸고 뿌리 깊은 속은 늘 젖어 있었습니다     


아홉 장

나무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랑의 새는 나뭇잎을 헤치고 들어와 둥지를 틀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였고 바람은 비극적으로 불었습니다 걸어가는 빈약한 나무는 겨울을 건너뛰지 못하고 겨울 숲으로 쓰러져 하얗게 묻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하얀 새 한 마리 따뜻하게 품어 줄 체온을 날려 보내고 꿈속으로 꿈속으로 사랑의 하얀 새 그 따뜻한 가슴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열 장

또다시 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웃습니다 병신이 병신을 보고 웃습니다 조금 병신이 많이 병신을 보고 웃습니다 입원실이 응급실을 보고 웃습니다 만성 병신이 중환자를 보고 웃습니다 성한 병신이 병신 병신을 보고 웃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웃습니다 병신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웃어젖힙니다 그리고 웃음에 지친 사람들이 이제는 수술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립니다                              



딱 하루 남았다


나는 이제 드디어 일 할의 성공률에 매달려야만 한다 딱 하루 남았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삼십 년 동안을 함께 살아온 당신과의 단호한 이별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답답한 병실을 나와 영안실로 간다 영안실에는 자리 하나가 너무 고요하게 비어있다 내일이면 나의 영정이 모셔질지도 모르는 빈자리 그 빈자리가 불길하다 그런 영안실에서도 웃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러나 구 할의 불길함을 각오해야만 하는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그렇게 돌아 나오는 영안실 뒤쪽에 회색 철문이 하나 있다 삐죽이 열려진 그 철문을 열고 꼼짝꼼짝 들어간다 써늘한 그곳에서 두 노인이 시체를 닦으며 염을 하고 있다 나에게 나가라고 하시던 노인이 소주 한 병만 사 오라고 말한다 나는 소주 두 병과 오징어를 사갔다가 다시 혼난다 시체 옆에서 어떻게 오징어 시체를 먹겠느냐 하시며 소주만 병째로 마신다   

   

자신의 삶도 이제는 정리해야 할 노인들이 시체를 닦는다 그런 일자리도 뇌물을 주고 얻었다는 노인들이 염을 하고 있다 그곳의 시체들은 멀쩡한 것이 없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진 시체와 수술실에서 곧바로 내려온 시체들이 대부분이다 허연 골이 튀어나온 시체와 내장이 나와있는 시체도 있다 수술 중 실패하여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꺼내놓은 심장과 내장은 제 자리에 넣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수술을 마무리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의사들보다도 그 노인들이 더욱 고맙다      


더욱 심란한 마음으로 병실에 돌아온다 아침에 수술실에 들어간 옆 침대를 벌써 정리하고 있다 오늘도 이렇게 또 다른 내가 수술 중에 시체실로 버려졌다 나는 오늘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제는 정말 하루도 남지 않았다           



별과 무덤 혹은 길


1

휴거, 예수의 공중재림을 말하던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간다 그러나 지금 

공중묘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몰래 하는 이사처럼 달빛을 짊어지고 

야반도주하던 밤처럼 아직도 어두운데 

이삿짐을 끌어올리던 크레인 줄에 매달려 

고층건물에 棺 하나가 내려오다 걸려있다 

다시 길이 내려온다 

길은 가끔 하늘에서도 내려온다      


새벽 영구차 안에서 나는 졸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정동 오거리에서 일가족이 몰사하는 아침 

별들은 아직도 제 무덤을 스스로 파지 못한다      


고속도로의 속력을 잃어버린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검은 리본을 두른 승용차를 따라 

주검은 지금 달리고 있다 그토록 잘 막히던 

지옥 속에서도 죽음만은 호락호락 잘도 

빠져나간다 棺 속에 누워서도 길은 길을 간다 

그러나 길은 역시 오늘도 걸어서 간다     


욕망의 화물차들은 길가에서 

아침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잠시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길은 제 혼자 길을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회나무 숲으로 가고 있다 

들판은 모두 몸을 비우고 

하늘은 깊이 가득하다 

빈 집뿐인 홰나무 숲을 향하여 가는 길 

살아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떠나고 

죽어서 죽은 것들만 돌아오는 곳 

길은 모두 서둘러 회나무 숲으로 간다      


아침이 보이는 시간의 길목 

오직 뼈로만 직립하는 11월의 나무에 

11월로 기대어 서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나뭇잎이 끌어내리는 하늘의 길을 본다 

밥, 사람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 

집, 사람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편안한 것 

길, 사람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렇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길이다 

아무리 뒤집어 생각해도 길은 아름답다 

그 많은 길 중에서도 물길은 더욱 아름답다     


우리는 험한 산길을 따라 하늘에 이르는 길을 간다 

회나무 숲으로 가고 있다 하늘은 아직도 어둡고 

길은 여기서도 자주 막힌다 

회나무 숲으로 우리는 가고 있다 

살을 버리고 뼈로만 하늘 향하고 있는 가을나무들 

그러나 길은 수직의 길을 따라 하늘을 매달고 있다      


언제나 누워만 계셨던 아버지가 자리만 옮겨 깊이 누우시던 날도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다만 그냥 목이 터지게 울다가 몇 번 기절을 하였고 작은어머니가 주신 우황청심환을 먹고 깨어났다 그러나 하관이 끝나고 칠성 판으로 덮고 묘가 완성된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슬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자리에는 이제 군불을 지피지 않아도 흙이 따뜻하게 감싸주고 그 자리에 내가 누워보면서부터 아버지를 진심으로 가슴에 안을 수 있었다 시간의 육체는 그렇게 사그라지고 잔디가 자라날수록 나는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길은 또한 아버지의 길을 밟아가고 있었다     


몸을 벗고 뼈로만 남아있는 立冬 

우리는 홰나무 숲으로 간다 

길이 많이 묻혀있는 하늘까지 

우리는 지금 회나무 숲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다      


2

요즘에는 무덤도 포클레인으로 구축한다 

혹시, 다시 살아날까 봐 꽉꽉 눌러 다진다 

이제는 정말 발각되지 않도록 

한 번 더 압사시켜 매장한다 

꽈다당, 나는 포클레인이 너무 무섭다 

단 하나뿐인 나의 애인 

나의 죽음을 이제는 편히 잠들게 하고 싶다      

천간 지간이 그려진 나침반을 들여다보던 

地官이 먼 山 봉우리, 하늘을 바라본다      


    

주인 없는 감나무들만 썰렁하게 

붉은 감을 매달고 있는 빈 마을을 지나 

능선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뼈의 나무들 

뼈의 영혼들 

그 틈으로 사라지는 저녁노을 

돌아오는 석양 길 서산마루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해 덩어리가 어째 

덩굴째 버려진 호박덩이 같다      


사람들이 저마다 호박 한 덩이와 

감나무 한 가지씩을 꺾어 들고 돌아온다 

밤이면 산이 먼저 어둡게 눕고 

아침이 오면 또한 가장 먼저 어둠을 털고 

일어나는 山 그리하여 

산은 아직도 건강한 큰길을 키우고 있다      


4

골목길이 너무 많아서 

슬퍼지는 길이여 

나는 하나의 큰길이 되고 싶다 

그러나 길은 길에서 살아간다     


길은 이제 수평이 되지 못하고 

수직으로 뻔질나게 길을 만든다 

그러나 길은 길에서 살아간다      


갈수록 계단이 많아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수직의 길 

그 깜깜한 길 속에 갇혀 죽는다 

그러나 길은 길에서 살아간다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다만 

바퀴자국만 길게 늘어져 

압사당하는 아스팔트 

사람의 길은 없어지고 찻길만 늘어가는 시대 

그러나 길은 회나무처럼 길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길가에 집을 만들고 

그 집 속에 누워 수직으로 뻗치는 

성욕에 충실하는 밤 

곧 금속성의 나무들이 무섭게 

자라날 것이다 길은 길에서 살아간다     


길에는 늘 짐승들의 발톱이 묻혀있다 

날로 화려해지는 맹수들의 길 

우리의 길은 자꾸만 가슴속으로 묻히고 

나의 가슴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된다      


마당은 없어지고 자꾸만 

수직으로 자라는 건물 숲 속에서 

산이 허물어지고 있다 홰나무 숲이 파헤쳐지고 

강물은 저 깊은 바닥 아래로 침몰하고 있다 

그러나 길은 길에서 여전히 살아간다      


모든 죽음의 시작과 끝은 그렇게 겨울이다 

우리는 그런 겨울 속으로 가고 있다 

꺼칠한 물기둥으로 서 있는 나무들 

그런 겨울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밀양 땅 

표충비는 오늘도 일곱 말의 땀을 흘릴 것이고 

그러나 길은 여전히 길에서 연명할 것이다      


종교 철학자가 되고 싶은 나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은 나는     

고고학자가 되고 싶은 나는 

선돌이 되어 

드디어 인천에 상륙했다 

그날의 상륙 작전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이 땅에서 

적(?)의 교두보를 공격하리라      


길은 그렇게 육탄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늙은 창녀가 되었다 

길은 늙은 창녀가 되었다 

사랑 또한 늙은 창녀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지나가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온몸으로 눕는다 

아낌없이 주고도 

길은 그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자꾸만 발자국을 지운다 




小說詩序 



1. 들어가는      


나는 삶과 죽음의 혼혈아였습니다. 그렇게 25년을 죽음 속에서 홀로 살아온 나는 90년 6월 8일부터 3일 동안, 또 한 번의 완전한 죽음을 통하여 예수가 아니라 한 유복자로 부활했습니다. 그런 유복자들이 지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길을 찾아 길을 가는 유복자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나의 아버지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천성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던 전생의 나는 아무도 모르는 바람 속에서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가로수였습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던 나는, 나의 아픔을 내 가슴속 깊숙이 묻어두고 홀로 쓰러지다 홀로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인공호흡기를 입에 물고 인공심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초음파 촬영기로 헐떡거리는 가슴을 들여다보며, 배꼽을 세 개씩이나 달고 회복실에서 태어난 나는 알았습니다. 아, 삶이란 이렇게 퉁퉁 부어오르는 아픔으로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로구나! 

전생의 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겨우 살려내시고 환갑을 앞둔 마지막 겨울에 이른 봄 눈으로 녹아내리시고, 할머니 또한 그 해 봄에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흐르던 강이 산으로 머문다는 것은, 이 얼마나 편안한 잠이며 또한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일까. 나는 이제 전생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 그 십자가의 수술대 위에서, 꿈속으로 걸어갔던 그 길과, 부활을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의 그 슬픈 눈빛을 기억합니다. 외롭고 슬프고 우울하고 소외된 세상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상한 새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새들의 상한 날개는 나의 손길에 의하여 치료될 것이며 맑고 밝은 하늘 속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것입니다. 계단이 제일 무서웠던 나는, 자꾸만 계단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바퀴 달린 영혼들을 위하여 사람의 길을 찾아가는 일이 나의 詩이고 나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런 내 삶의 길에서 꿈속처럼 깊은 90년대의 특별한 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고,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나의 어머니로 부활한 성인해, 그리하여 그는 우리들 마음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울의 힘이며, 내가 스스로 나의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절실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2. 길처럼 나부끼는 전면광고

― 마을 어귀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나는 늙은 창녀입니다

사내의 가슴을

단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순결한

늙은 창녀입니다 


창녀다운 창녀가 되고 싶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오셔서

나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당신 욕망의 입이 간지러울 때

마다 오셔서

나의 가려운 性器를

물어뜯어 주십시오

그리고 核 폐기물처럼

저 바다에

나를 버려주십시오     

나와 함께 오입(悟入) 하고 싶은 분은

언제라도, 지금 연락하여 주십시오

전화 : (032) 588-1255, 8945, 4545

( 하루 24시간 벗은 몸으로 대기 중 )     


주) 悟入 : 불교용어, 道를 깨달아서 實相의 세계에 들어감     



3. 길은 늙은 창녀였다     


골목길을 걸어 나오며 큰길을 본다      

사람의 길을 찾아 나선 꽃사슴

청춘, 그 화려한 20대에도

꿈만 꿈꾸는 몽상가이다

그러다가 잠만 자는 잠의 포로

어둠의 삐에로이다

토성의 나라에서 쫓겨난

유배자, 나는 죄인이다

나를 늘 감시하는 바늘구멍들

나는 아직도 안개문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막의 낙타이다

그래, 안개는 밤보다도 어둡다  


이제 겨우 부활하여 다시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놈의 꿈은 야무지다 

길이 있는, 역사와 꿈과 철학과 죽음까지도 있는

사람을 읽어내어 길을 찾고 싶다

삶이라는 살아있는 책을

살고 싶다 사람의 길은 역시 사람 속에 있다     


인천에 오거든 월미도에서 西海를 바라보라

영종도와 작약도 그리고 복수가 차오르는

어머니의 뱃가죽 같은 개펄이 있을 것이다

연안부두의 노랫가락과 을왕리해수욕장의

건강한 바람도 불어오리라 자유공원

그 우울한 하늘 아래 거대한

포신을 들이대고 나란히 서서 쏘아대는

굴뚝들이 또한 있을 것이다

栗島가 있고 그곳에서 나는

지금은 없어져버린 밤나무 숲에서

밤송이를 털어내고 있을 것이다

봄의 밤섬, 밤송이에서 나는

가을을 꺼내고 있을 것이다

두루마리에 감겨있던 계절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죽은 새떼들이 또한 날아오를 것이다

그때 당신들은 잃어버린 애인을 만날 것이다     


젬병, 어느 별의 후레자식인 나는

저녁에 출근을 한다 혹은

밤에 출근한다

아직 나의 아이가 없다

아이를 가질만한 틈(?)이 없다

여유(?)가 없다

나의 자궁이 없다

밤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발전한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나는 망설인다     


나는 『¿』 이다 머리 다 큰 녀석이

고민하고 있다 부하변동에 맞춰

발전소를 운전하고 있다

교대근무자들이 지금

불구덩이 옆에서 졸고 있다

경비원이 담을 넘고 있다

야간열차 기관사가

탈선한 기차 옆에서 가락국수를

먹는다 방범대원이

칼에 찔려 죽는다

밤의 여자들이 불타고 있다

그들의 꿈과 함께 얼어 죽는다

드디어 울고 있는 누이들

나는 그들을 너무 사랑한다

젠장, 구질구질하게 비까지 내린다     


밤에 출근하는 남자는

낮에는 또 무엇을 하는가

극장 전용 게시판 앞으로 나와

여자들은 화려하게 벗어젖힌다

흘러내리는 살결로 유혹한다

그렇게

시간은 벗은 몸으로 달려가고

밤에 출근하는 남자의 여자는

밤에는 또 무엇을 하는가

밤에 출근하는 여자들의

남자들은 또한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외롭지만은 않으리라

그들의 여자 혹은 남자들은

무섭거나 고독하지만은 않으리라     


늙은 창녀는 언제나 벗고

살았다 알몸인 채로

온몸으로 살았다

오늘도 밤의 어둠 속으로

출근을 한다

생활보호대상자인 나는

그 생활을 위하여 밤새

뜬 눈으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감당해야만 한다

위에서 누르면 누르는 만큼

신음소리를 먹어 삼키며

사랑처럼 웃어야 한다

위에서 더욱 세차게 들쑤셔도

비명을 울부짖지 못하고

거짓 욕망의 불꽃으로 환해야 한다     


겨울나무들이 그렇게 바람의 뼈를 추려내고 있다

그러나 나무는 언제나 뿌리에서부터 자란다     


하늘을 향해 경배하는

짙푸른 나무들

그 뿌리의 꿈

가로수로 떠나온 고교시절

그 기름 투성이인 실습시간을 팔아

이제는 몸과 정신을 팔아먹는

나는 창녀가 되었다

순결할 것도 없는 가슴을 찢기고

밑을 털려버린 늙은 창녀

― 지금도 순결하다고 말하는

당신의 어처구니없는 그 눈빛은 

그야말로 창녀답다 ―     


홀로 떠나는 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주로 밤에 출근한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

아이가 없다 바람이 분다

이상한 일이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검은 제왕의 아들이 울고 있다

밤샘을 했으므로 꿈은 아닌데

능지처참하고도 남을

무엄한 바람이 휘젓고 간다

나를 몰수해 가버린다

바람의 발톱 아래서 나무가

흔들린다 아기 울음소리가

나무 가지에 걸려 있다

나뭇잎처럼 지는 아이들

그 가지마다 다시 어둠이 내걸린다

울어재끼는 밤이 깊을수록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몸속

쓰러지는 나무를 따라 나도 쓰러진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울음소리

간절하게

간절하게 머리를 풀어헤친다

때로는 서글픈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던 머릿속까지

샅샅이 쥐어뜯는다 파헤쳐버린다

그 사이로 도둑고양이 한 마리

바람의 뒤를 밟아가다 밟아가다

돌아서서 어둠의 발톱으로 나를 덮친다     


교대근무자의 꿈은 소박하게 가련하다

밤에는 차라리 잠들고 싶다

밤에는 잠을, 잠자고 싶다

밤에는 잠자고 싶다

밤에는 차라리 잠들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어도

그냥 꽝, 잠들어버리고 싶다

첫눈이 말없이 내렸듯이 봄눈도 기습적으로 내려

몇몇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얼어 죽는다

불현듯 겨울 추위로 돌아서는 나날

실수도 없이 성공도 없이

밤에는 그냥 잠들어버리고 싶다

보름달이 밤길에서 잠들지 못하고

꿈처럼 온몸이 얼어터진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앞바다가

검은 울음으로 몰아붙이는

암담한 시간, 암청색의 시대

모습 보여주지 않는 미래를 향하여

귀를 열어놓은

그 귀를 썰어가는 시퍼런 냉기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는 겨울 밤바람

그 미친바람이 발전소를 강타하고

나를 집어삼킨다

어제 주말정지한 2호기를

오늘은 밤새워 또다시 끙끙 살려낸다

아, 나는 소음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잠시 잠들고 싶다

30년을 한결같이 견디어 살아온

순하디 순한 코끼리 대리님이

새벽 세 시 나의 잠을 들이받는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나의 잠 밖으로 쫓겨 나온다

나는 그렇게 잠의 혼령이 된다

발전소를 돌아다니는 귀신이 된다

밤에도 귀를 틀어막고

눈을 부릅뜨고 꼬박

뺑글뺑글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야만 겨우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밤새 

잠을 허락하지 못한다

잠의 육신들은 집에 뉘어두고

발전소를 서성거리는 잠의 혼령

우리는 배전반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핵분열 같다

쏟아지는 공람에 서명을 하고

“과연 원자력은 악마인가”

이런 공람까지도 건성으로 읽고 

서명한다 서명한다 서명한다

계기들이 우리를 감시한다

현장에서는 또한 신통찮은 것들이

밤 가운데로 불러들여 수작을 건다

그래, 나는 가장 인간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빛은 처음부터 밤의 그림자였다

빛은 처음부터 잠의 그림자였다

가슴이 가렵다 꿈의 가슴이 

쪼개지도록 기지개를 켜보고 싶다

눈치를 살피며 아침 샤워를 한다

끝내 몸속으로 침투하지 못한

잠의 혼령을 씻어 내린다

하얗게 거품을 물고 벗겨지는 몽롱함

하수구를 타고 집을 찾아 멀리

물러나는 잠, 거울 속에는 이제

잠의 육신만 남아있다

나는 그렇게 벌겋게 충혈된

잠의 육신이다 바람 부는 길을 찾아 

또다시 나선다 

내가 끝내 떠날 수 없는 이 길에서,     


밤을 남몰래 헤엄쳐 건너온 태양

오 나의 희망이

새벽 동산을 상투적으로 떠올라도

이제는 정말 아침 같지가 않다

태양이 침실에서 기지개를 켜도

나의 아침은 이제 쉽사리 오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는 오늘도 

장갑을 끼고 있다

버려지는 태아를 모은다

커튼을 치고

항아리에 담는다

의사는 간호원을 시킨다

덜 자란 태아를

항아리 가득 긁어 담는다

항아리에 독한 소주를 붓는다

독할수록 좋단다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태아를 밀어 넣고 봉합한다

(생명은 이제 이다지도 우습다)

공기 한 점 들어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묶는다

숨통을 끊는 방법도

날로 잔인하게 웃는다

기밀 누설죄로 언제 끌려갈지

나는 모른다 나는 이렇게

천기를 누설하고 있다

두꺼운 비닐을 뒤집어 씌운다

검은 고무줄로 칭칭 감는다

무거운 뚜껑으로

무섭게 덮어버린다

항아리들이 산속으로

몰래 옮겨진다

무덤처럼 땅에 묻힌다

(애장이 아니라 살인이다)

우리나라 산에서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묻힌다

묻혀버린다

사람들은 그냥 무덤으로만 본다

사람들은 그냥 산으로만 본다

생각 없이 곁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이제 생각 없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누군가에 의해 이미

처녀가 아니었던 간호원

또한 입을 열지 않는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그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모두가 그런 거라고

무서운 생각만 보편적으로 생각한다

계절이 말없이 바뀐다 봄에도

눈발이 내려 세상을 덮어본다

당돌한 세상은 이미

깨끗해지려는 생각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술에 담가놓았던 뱀들이

되살아난다

되살아나 몰려오고 있다

보무도 당당하게 쳐들어오는

화사한 어둠의 군단

죽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울어재껴도

사람들은 이제 돌아보지 않는다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 뻔뻔스러운 가죽 얼굴

오히려 배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사람들은 산으로 몰려간다

남자들은 야음을 틈타 

산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밤낮없이

무덤을 파헤쳐 항아리를 찾는다

항아리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하루살이 떼들이 윙윙거린다

윙윙거리는 꿈들 사이에서

불을 끄고

불을 끄고 술을 마신다

돌려가며

술을 퍼 마신다

멀리 목탁소리 급하게 들린다

풍경소리는 밤의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남은 것은

요란하게 깊어지는 정적뿐

사내들은 쌍봉산 사이로 

흘러내리는 계곡주를 마신다

쌍바위골의 옹달샘에 머리를 처박고

물소리를 가늠하느라 여념이 없다

때로는 그 틈 사이에

푯말처럼 지폐를 꽂아두기도 하고

거칠어진 날것의 메아리는

아이들의 울음을 통째로 잡아먹는다

진하게 우러난 사람술

술을 마신다 술잔이 돌아간다

여자들은

무덤 앞의 뻣뻣한 용두석을 붙들고

소리친다

울지도 않고 몸으로 소리친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보름달도

그러나 잊어버린다

우울하게 흘러가는 보름달이 먼저

먹구름 뒤로 숨는다 멀어져 간다     


그렇게 얼크러진 사람들

밤의 동굴 속으로 사라지고

역사는 그렇게 

변태의 계절이 계속되고 

통속적으로 깊어만 간다 

그 시간의 동굴 속

화사한 꿈의 종유석은

가장 깊었던 그리움으로

녹아내린다 산을 내려간다

골목을 찾는다

골목들이 

골목으로 숨어 들어간다

탯줄 같은 골목길을

거슬러 들어가고 있다     


나도 산에 오른다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여

평일 대낮에 산을 오른다

텅 빈 산

공단동의 숱한 굴뚝들마다

버려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피어오르고 있다

거대한 연기

거대한 항아리 속에

사람들은 담겨있다

나는 답답하다

너무 독한 술로

나를 우려먹으려는 세상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核은 언제나 폭발을 꿈꾼다

언젠가는 안전핀을 뽑아 던질

지구의 공동전선

곰삮기도 전에

무서운 손들이 뚜껑을 열고 있다

내 머리의 뚜껑을 열고

자꾸만

나의 샘물을 퍼마시는 검은손

검은 입들이 보인다

또다시 술에 담글 태아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보이지 않던 무서운

사람들이 먼저 산을 내려가고

산은 이제 나와 함께 텅 비어 있다     


또다시 태어난 운 좋은 아이들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이

적당히 건강한 얼굴로 몰려다닌다

소리를 질러대며 흘러 다닌다

나는 오늘도 밤에 출근을 한다

나는 이제 죽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다 주소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밤새 만나고 함께 살아간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현행법에는 없는 法에 의하여

지명수배자가 될 것이다

너와 나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끝내 

끝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너무 이뻐서 탈이다

그래도 내 평생의 직업은 

사람의 길을 찾아가는 일이며 

그 길에 사람의 집을 짓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은 무덤다운 무덤, 

별무덤으로 남아     

죽어서도 행복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주) 나는 오늘 지난날의 모든 나를 지워버리고 다시 너를 입력한다. 개인용 컴퓨터에 입력된 나의 생각과 나의 글들을 지우면서 나는 드디어 늙은 창녀가 된다. 온통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상에서 나의 시와 나의 몸을 차라리 전염시킨다. 그리고 백신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나는 창녀다운 창녀가 되고 싶다. 그렇게 벗은 몸으로 또한 나의 사랑하는 애인인 창녀를 찾아 길을 떠난다. 맨 정신으로 사람을 찾아간다. 나의 사랑은 이제 처녀가 아니어야 비로소 진짜 사랑이듯이 아, 나는 죽음 속에서 드디어 사랑의 길을 발견했다.     



4. 나의 집에는 방이 많다 


003호

우리들은 언제나 시간의 네거리에서 망설인다. 강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그리고 길이 있는 우리들의 사랑은 그렇게 아래로 가는 길이 가장 길고 아득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그렇게 언제나 깊이를 더해주는 길이다. 가장 깊은 사랑은 그래서 가장 아래로 내려왔을 때 만날 수 있다. 그 깊은 곳에서 나는 병든 몸으로 成人解(?)를 만났다. 지리산 아랫마을 구례에서 태어난 그의 어머니는 맑은 섬진강 물에 실려가 흉흉한 바다를 만나던 날부터, 그 긴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근로정신대의 짐승이 되었다. 해방처럼 겨우 몸을 푼 그의 어머니는 가출하여, 그를 노란 집에서 유복자로 낳아 길렀다. 옐로하우스가 고향인 그는 무서운 아버지들에 의해 또다시 그 어머니의 길을 걸었고 진짜 우리들의 아버지를 찾아 나선 그는 결국 시인이 되었다. 聖人解(?), 그래 맞다. 그는 몸을 벗고 길이 되었다. 길은 이제 유복자를 낳은 늙은 미혼모가 되었다. 나는 그 길에서 性人解(?), 그를 만난 날부터 살아있는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신화는 역시 오늘날에도 익명으로 살아있다. 그렇게 成人海(?)는 조용히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요즘 십자가들은 모두 빈 몸뚱이로 하늘을 향해 벌겋게 발기하기만 한다. 밤하늘 아래 너무 많은 빈 십자가들이 제 홀로 불타오르고 있다.      


006호

그렇게 긴긴 어둠 속에서 퉁퉁 부어오르는 아픔으로 또다시 부활한 성인해. 그가 만나던 어머니들은 모두 속옷을 입지 않았었다. 맹모삼천지교를 강조하시던, 구례가 고향이라는 그의 어머니는 그를 결국 여기에 살게 하셨다. 거짓말과 섹스 그리고 풍자나 유머가 아니라, 앙칼진 욕설이 그를 키웠다. 노란 집이 있는 골목길이 그를 길로 키웠고 그런 여인들만이 그를 언제나 반겨주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과, 언제나 사랑이신 예수님이 들러가셨고, 원효대사님과 프란치스코님은 단골손님이셨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를 미워하던 무서운 아버지들은 늘 그를 어떻게 내다 버릴까 궁리하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못생기고 병든 몸에서도 시간이 가져다준 꽃향기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몸서리치기도 전에 그들은, 서둘러 벗겨간 그의 속옷을 골목 끝에 깃발처럼 매달고 말없이 소리쳤다. 그리하여 번호로 불려 나와 다리 꼬고 앉아있는, 그가 살던 빨간 벽돌집을 사람들은 옐로하우스라고 불렀다. 펄럭이는 바람결 따라 밀려들어간 꿈속 같은 연못에는 그때부터 미꾸라지와 우렁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연꽃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아버지들에 의하여 처녀막이 터지고 크게 울부짖던 다음 날에야 비로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믿겠다는 듯이 그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고, 또 다른 아버지들을 실어 나르는 기사들의 야식을 위해 기사식당을 개업하셨다. 그날부터 그는 추하고 병들고 늙고 더럽고 가난하고 무식하고…… 길을 가리지 않고 쏘다니는 바람이 되어 창녀다운 창녀가 되려고 코피 흘렸다. 그러나 그는 조루증이 가장 싫었고 조루증의 시대가 죽도록 미웠다. 그렇게 늙은 창녀가 되어서야 겨우 꿈속 같은 그의 연못에는 온몸으로 연못을 뚫고 나오는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009호

그리하여 그는 오늘도 인천에서 가장 인천다움을 찾아 헤매며 사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90년대의 시인답게 우리 인간의 본질을 찾아 온몸으로 길을 가고 있다. 1992년의 인천, 전국에서 가장 환경오염이 심하다는 인천. 그러나 미추홀은 지금도 역시 미추홀이다. 그 이후로도 먼먼 오늘날까지 상륙작전은 계속되고 사람들의 조수간만의 차는 여전히 심하다. 화도진공원에는 이제 바람만 들락거리고, 싸가지 없는 것들만 몇몇 깔깔거리며 사진을 박는다. 인천은 이제 시립박물관에 관음좌불상으로 들어앉아있다. 그리하여 먼지도 낄 리 없지만 큰 산으로 자라지 못하는 산들과, 꿈과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바다로 머뭇거리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는 아직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 영종도와 용유도처럼 인천으로 편입된 나는 어떤 모습의 야망과 사랑의 몸짓으로 살아야만 할까. 그렇게 불안하게 편입된 내가 공사장처럼 시끄럽다. 인천 개항 100주년 기념탑의 검은 누이들이 지금도 위험하다. 뱃놈들을 맞이하는 우리의 누이들. 그런 누이들의 거덜 난 자궁을 꿰뚫고 지나가는 역사는 지금도 갑문으로 입항하고 있다.    


011호

그러나 길을 가는 나그네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그곳의 여자들은 떠나는 사람들을 붙들지도 않고, 그냥 크고 많은 유리벽 안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고 있다. 웃음 속으로 몰래 울고만 있다. 곁에 있는 다사랑 교회에서는 대낮에도 하느님 찬양에 여념이 없고, 흑염소 집에서는 개소주와 흑염소를 달이느라 바쁘다. 낮에는 주로 자가용들이 줄을 서므로 입구에 있는 기사식당과 황제 약국의 문은 닫혀있다. 길 건너 강원연탄 공장에서 검은 비둘기들이 솟아오르고 분수대는 언제나 틀어 막혀있다. 그런 네거리에서 비둘기들은 대답 없는 갈증의 빈 수도꼭지만 빨다가 곡물차가 흘린 먹이를 주워 먹는다. 살벌하게 달리는 차량들의 틈바구니에서 잽싸게 아스팔트를 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살벌한 평화도 오래가지 못하리라. 길을 가로질러가는 욕망의 검은 화물열차가 겁 없이 달려오고 있다. 두려움 없이 달려드는 욕망, 그러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날아온 노란 새 같은 작은 골프공에 몇 개의 유리창이 더 깨지고 그것도 모르는 채 포주의 딸들은 섹시한 몸매를 위하여 짧은 치마를 입고 테니스를 하고 있다. 낮에는 이제 단골손님이 없는, 전성기를 지나온 여자들도 좀 더 예뻐지기 위하여, 혹은 그때를 추억하기 위하여 미장원에 모여 앉아 다리를 벌리고 새 잡기놀이를 한다. 棺만 한 지하방에서 내내 잠만 자던 성진은 드디어 유리창마다 커튼이 열리고, 다사랑 교회 지붕의 십자가에도 하느님께서 불을 켜두고 돌아가신 뒷길로 일어나 또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막차가 도착해도 이제는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는 늙은 창녀처럼,  


주) 성진 : 『구운몽』의 주인공 혹은 전혜린이 죽은 다음 해에 부활한 보이지 않는 나의 모습     


013호

소래 포구에 갈랬더니 남동공단에 내려놓는 13번 시내버스, 수인선 협괘열차가 오후의 시간을 달려가고 있었다. 모아둔 것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처럼, 하나만 믿고 키워온 자식들에게 미천하게 버림받아 밀려나는 세월, 늙는다고 해서 모두가 가벼워질 수는 없는 것이리라. 세 칸 남은 수인선 열차 또한 이제는 위험하다. 낡은 철로는 이제 하루 세 번만 몸을 내어주고 온종일 누워있다. 새들의 발자국이 떠나버린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쫓겨 나온 새들이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햇빛을 따라 짹짹짹 철로 위를 불안하게 달려가는 묵은 노랫소리.   


016호

하루종일 지나와도 푸른 나무를 만나지 못한 바람이 그 뒤를 따라간다. 연수동 아파트단지 부지 조성 공사장에는 거대한 금속의 새들이 묵시록을 파먹고 있다. 아, 가볍게 떠오르는 먼지의 세상.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의 하늘에도 더 이상의 숲은 자라지 않는다. 인천에는 그렇게 산다운 산이 없다. 숲 다운 숲은 더욱 없어 숲 속의 사랑과 새들의 집이 없다. 먼지의 길을 따라 남동공원에 올라도 소박맞은 새들의 흉흉한 뜬소문만 있을 뿐, 바다는 멀리 물러서서 침묵이다. 병원에 입원한 형수님의 둥그런 배 같은 갯벌에 복수가 차오르고 열을 헤아리던 태아는 다급하게 끄집어내어 져 하수구에 버려진다. 또한 그렇게 달이 빠진다. 그러나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드는 달빛. 그리하여 서둘러 집으로 갈랬더니 월미도에 토해놓는다. 달의 양면 같은 월미도. 오, 나의 아프로디테여! 그대는 지금 어느 먼 곳에서 나를 꿈꾸고 있는가.     


017호

폐허의 도시를 위장하기 위하여 흘러넘치는 달빛으로 도색한다. 편두통을 앓는 그곳의 사람들은 들고일어나거나 심하게 뒤집히는 바다가 되기보다 차라리 유리창 밖으로 그런 바다를 보거나 카페의 음악 속에 잠긴다. 그 뒷길의 부서진 해안초소를 지키는 젊은 사내의 어깨 위에도 달빛은 부서지고 있다. 나의 편견 때문만은 아니리라. 냄새나는 간이변소보다는 잡목나무 숲에 오줌을 내갈기는 나와 달의 마음은 오늘밤도 잠만 잠재우고 또다시 깊이 깨어있다. 그럴수록 나는 그의 모습이 또다시 간절하게 그립다. 밤하늘이 그의 혀처럼 검게 젖는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의 입술을 훔쳐내고 싶다.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018호

“계집애 하고 키스를 하면서도 침 맛을 아는 놈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부터 틀린 수작이다.”라고 후려갈기고 떠나가는 그런 바람이 더욱 푸르게 깊어진다.      


021호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는, 진심 하나 없는 이 적막한 도시에서 오늘도 늦게 잠이 든다. 늘 달아나기만 하는 당신. 꿈속에서나 만나보는, 시멘트를 뚫고 나온 달맞이꽃. 그 달맞이꽃을 그리워하는 달그늘. 그 곁으로 흘러가는 강물. 안개가 자주 되살아나는 마음속 강변 갈대밭으로, 영문 모를 쥐들이 뱃속에 구더기 떼를 가득 품고 있다. 그런 쥐새끼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꽃뱀은 그냥 지나갈 뿐이었다. 그래도 갈대는 갈대라고 울지 않았고, 불현듯 처녀들은 그렇게 젖은 갈대숲에 말 못 할 사연으로 누웠다. 가끔 생각난 듯 그 생각 속에서 오래도록 일어서지 못하고 박쥐들이 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숲 속 어둠의 동굴 속을 지나 이미 죽은 처녀의 뱃속에서 썩고 있는 추억을 물어뜯으며 박쥐들이 또다시 날아오르고 있었다. 박쥐들의 세상, 그런 갈대숲에는 이제 강물도 말없이 왔다가 아무것도 남김없이 멀어져 간다. 그리고 먼 다음날, 그 자리에 남몰래 수선화 하나 피어, 떠나는 강물을 오래도록 바라보고만 있다.     


033호

그렇게 인천 앞바다는 벗은 몸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그런 기다림 속으로 배들은 돌아오고, 우리들과 함께 젖어있는 바다가 또한 그렇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반짝이는 깨진 유리들의 바다에 나의 모습이 그와 함께 있었다. 나는 그렇게 꿈속처럼 성인해, 그가 되어 부활하고 있었다.    


036호

방 ? 방  


039호

방 ! 방    


― 성인해의 집에는 아직도 방이 많다. 방이 너무 많다. 그냥 그렇게 방이 참으로 많이 있다. 방이 넘치도록 많은 집에서 성인해는 그렇게 살고 있다. 그 많은 방 안에서 지금은 또다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5. 나오는      


하나 ― 어머니의 방에서


어머니 방에는 정액 묻은 글귀들이 꿈틀거린다     

사랑의 정의 ― 사랑은 봄에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마음의 힘이다

사랑의 정열 ― 불붙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항상 불타고 있는 사랑도 사랑은 아니다

사랑의 모순 ― 사랑한다고 강조해야 할 때는 이미 사랑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사랑의 고뇌 ― 사랑받지 못하는 영혼은 

               사랑의 진주를 품지 못한다

사랑의 미학 ― 사랑에는 제왕이 없지만

               연인들은 언제나 왕궁에서 산다     


그런 벽지의 검은 꽃잎 사이로 짐승들이

울며 혹은 살을 물어뜯으며 지나간다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 쥐와 소와 범과 토끼와 용과 뱀이 지나간다

말과 양과 원숭이와 닭과 개와 돼지가 지나간다     


그런 짐승들이 지나간 길 위로

늙은 창녀의 아들인 나의 평생사주가 기어 나온다     


운명의 총괄 ― 양이 변하여 공작이 되니 심성이 유순하고 아량이 넓다 구변이 능하여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남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항상 남을 이해하는 입장이니 17, 8세 신수가 환히 트여 빛을 본다  23, 4세에는 영화가 오거나 신병이 겹칠 수 있고 27, 8세에는 다시 신수가 평탄치 못하니 집념이 부족한 탓이다 만약 30세에 죽지 않으면 34세를 넘어 42세에 이르러 마침내 만사가 여의하게 되니 닦아온 공덕이다

초년운 ― 앞뒤로 재물을 쌓고 살아갈 운명이다 재원은 한이 없고 덕과 이름 높으니 호강할 운명이라 만일 살성이 비치게 된다면 머리 깎고 속세를 떠날 운명이라

중년운 ― 무복을 할 팔자로다 꽃 사이에서 나비가 춤을 추니 옷과 밥이 남아돈다 고향을 떠나 재물을 얻으니 빈주먹으로 집을 일으킨다

말년운 ―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오는구나 고기가 바닷물을 얻은 격으로 만사가 잘 되리라 상서빛이 오게 되니 경사가 들어오며 하늘이 열려 대성할 수

성격 및 적성 ― 성격 : 신비로운 직감력의 소유자 

                적성 : 훌륭한 몽상력과 직감력을 충분히 살려 생활의 즐거움을 누린다 은행원처럼 돈을 만지는 직업은 좋지 않고 자유 분방하고 창조적인 것이면 다 좋다

건강 ― 두뇌의 직감력이 좋아 위와 심장이 피로하다 악성 심장병의 원인이 극심한 쇼크나 트러블에 있으니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52, 62세를 주의하고 26, 40, 44세 때도 주의함이 좋다

부부운 ― 사랑의 마술사가 되니 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몇 생을 두고 만나야 할 운명처럼 사랑에 승부를 걸고자 할 것이다 부부금실이 흠잡을 데가 없으나 늘 초조하게 사니 애달픈 사랑이다

직업 ― 솜씨가 빼어나고 신통한 재주를 가졌도다 서예를 하면 서도가로 그림을 그리면 화가로 명성을 얻고 손재주를 부리는 일이 좋다 교육자가 되어도 유년이나 소년들 대상이 좋고 성인을 대한다면 철학이 좋다

자식운 ― 자식의 위치가 공을 만나면 자식이 없게 된다 너무 과하면 손해수가 있으니 도리어 허망하게 된다 도액하면 가장 좋으니 극히 지성을 다해야 한다 길성이 비쳐주면 가는 곳마다 공이 있게 된다     


프린터기에서 성인해의 컴퓨터 평생 사주가

띠띠딕 띠띠딕 텔레파시처럼 찍히는 동안

누워있던 방바닥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방바닥 장판을 떠들어보니 소리 없이 

진을 치고 있는 검은 욕망들이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甲乙丙丁戊 ……,  

줄지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벽지 위로도 기어올라가는

붉은 혀의 검붉은 욕망의 자식들

구들구들한 그 사이로 나도 기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방을 샅샅이 뜯어내고 

어머니 같은 여자들의 몸속 깊숙이 

파 들어가고 있었다 몸을 털려버린 

여자들이 짧게 비명을 질렀고 

몇몇 영혼들이 강물 위로 떠내려갔다

그렇게 어머니를 파먹은 다음에도 

어머니의 방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둘 ― 아버지의 방에서


할아버지는 내시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

아버지는 강변에 걸려 나풀거리고 있었다

錦紅과 동거하던 <제비>의 지하둥지에서

아다링을 먹고 꿈꾸던 아버지

죽어서도 눈 감을 수 없는 나의 아버지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내시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내시가 없어도 모두가 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멀고도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

아버지를 끊임없이 흔들어 깨우며 살아나는

도시의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지하로 흘러가는 

강물소리 같은 그런 아버지로 부활하고 싶다  


셋 ― 처용에 대한 명상


처용은 그의 아내를 인간적으로

참으로 인간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애인을 나는 어젯밤

죽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여버렸다


날이 밝아 다시 보니 어머니의 목이 없었다  


주) 인도의 신 중에 파괴의 신 <쉬바>가 있다. 하루는 밤새도록 놀다가 들어와 보니 다리가 넷이었다. 그리하여 울분을 참지 못한 <쉬바>는 달려들어 목을 베었는데, 자기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목을 얼른 갖다 붙인다는 게 코끼리의 목을 붙였다. 그 아들 이름이 <가네쉬>이다. 인천 신포동에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들어와 방을 보니 다리가 넷이었다. 나는 질투에 눈이 멀어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날이 밝아 살펴보니 아들의 모가지였다. 나는 아들을 죽였지만 그래도 나는 꽤 인간적이었다.  


대문 ― 심장의 춤이 되고 싶다


문을 열고 따라 나와 보니

성인해, 사랑하는 나의 당신은 없고

바람만 하염없이 불고 있었다

양팔 벌린 안개의 식구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안개를 뚫고 나온

너무 많은 길들이 엉켜 들고 있었다

옆으로 강이 흐르고

山이 떡 버티고 있었다

큰길은 아직도 잘 보이지 않고

골목길로

유복자들이 빈 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럴수록

지금껏 가보지 못한 사람의 고향에 

가 닿고 싶었다 그곳에

전혜린의 죽음으로 부활한 전생의 아내

성인해가 있었다 그곳에는 또한 

언제나 붉은 바다가 있었다

드러난 개펄을 아직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나는 오늘도

그 바다의 심장에서 춤이 되고 싶었다    


아, 나는 또다시 심장의 춤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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