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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24. 2023

이어도공화국 4

― 꿈섬





이어도공화국 4

―  꿈섬








 

서문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이어주는 섬, 이어도가 있다     

징, 검, 다, 리, 걸, 어, 간, 다,   


  



                                                                                               

차 례  

        

서문     

사과꽃망울  11

산을 내려오는 산 그림자  12

횡단보도  13

공동묘지  14

거대한 나무  15

낙타  17

보아뱀  18

탁발  19

화이트 크리스마스  20

수혈에 대하여  21

나무 발전소 1  22

나무 발전소 2  23

나무 발전소 3  29

월라봉  30

퍼물  32

등나무  34

이어주는 섬  35

새 입술이 달다  36

발로 하는 세수  37

나무를 본다  39

파도무늬  40

항아리  41

액자  42

거울  44

풀  45

봄에는 그림자에도 새씩이 돋는다  46

지구는 나무뿌리가 되고  48

바다와 나무  50

도시 나무  52

수선화  54

길 없는 길  55

바다의 발걸음  56

모래 한 알  58

시아노박테리아  59

평생  60

바다와 모래알  61

바다처럼  62

갈대는 봄부터 비운다  63

몽돌  64

바람  65

용설란  66

탱자나무 울타리  67

벌거벗은 어린왕자  68

로즈마리  69

라플레시아  70

섬  71

나무 숟가락  72

산책  74

이어도의 강  75

별무덤  76

붉은점모시나비  77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  78

연꽃  79

가파도에서  80

산방산 안에서  81

나는 늘  82

발전소에서  83

詩   84

靑藜杖  86

죽비  87

눈사람  88

평화로  90

반듯하게 세우다  92

눈이 내린다  93

동하동 할머니  94

눈부처  96

굴러서  97

마당  98

마중  99

시는 똥이다 100

새들의 소문 101

틈 혹은 숨구멍 102

뼈 103

발 104

배추꽃 105

세월 106

모자 107

집 108

의 109

거미 110

사과 꽃 111

똥 112

무심 113

민들레 115

발효 116

대나무 밭에는 117

촛불 118

침낭 119

밥시 120

달과 태양 121

日月 122

흔들리다 123

잡 124

시월 125

취사 127

맹지 128

천칭 129

수목원에서 130

돌탑 132

살아있는 詩 134

게으름 135

된장국밥 136

나무 가는 길 137

겨울잠 138

詩와 詩人 139     

이어도 공화국 서 ― 백 년 동안의 꿈과 희망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산을 내려오는 산 그림자  

   

어머니의 제사를 지낸다 손톱과 발톱 모두 뽑아서 제사상에 올린다 발의 뼈를 모두 뽑아서 올린다 무릎 뼈와 다리뼈 뽑아서 올린다 골반도 올린다 아랫도리가 철푸덕 주저앉는다 갈비뼈와 척추 뼈도 올린다 윗도리도 철푸덕 주저앉는다 두개골도 뽑아서 정성껏 올린다 얼굴도 역시 철푸덕 주저앉는다 일을 마친 팔뼈와 손뼈도 올린다 어머니 늦은 제사상 앞에 가죽 가방 하나 철푸덕 엎드려 운다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 어머니 두들겨 패는 것이 일이었던 아버지, 술에 취하여 길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마른 명태 북북 찢어 제사를 지낸다 뼈도 아닌 것이 가끔 뼈인 척 하는 것도 함께 올린다 가죽 가방에 든 잘 익은 술, 잔이 넘치도록 부어 올린다 아예 술독을 올린다 술독이 넘치도록 올린다 길에서 얼어버린 아버지의 제사상 앞에 빈 가죽 가방 하나 납작 엎드린다      


어머니 아버지 나란히 누워계신 산소에 간다 어머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유방암 수술로 일찌감치 제거된 어머니 젖무덤이 나란히 있다 늦은 오후에 빈 가죽 가방 하나 정신없이 젖꼭지를 빨기 시작한다 쪼그라든 가죽 가방 부풀어 오르고, 가죽 가방 속에서는, 다시 뼈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다    


                                

횡단보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문이 잠시 열린다     


길이 홍해처럼 잠시 갈라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밟고 지나간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고     


사다리를 밟고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투명한 유리문이 다시 닫힌다 길과 사다리를 함께 지우면서     


차들이 쏜살같이 밟고 지나간다     


신발과 타이어 그림자가 켜켜이 쌓이고 있다     


납작해진 사람들도 그 사이에 끼워져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유리문에 이마를 부딪치고 서 있다     


한 발 앞서 가던 사람이 유리문을 서둘러 통과하더니     


유리문과 유리문 사이에 그만 갇혀버리고 말았다     


신호등이 유리로 만든 관(棺)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공동묘지     


누가 저렇게 많은 밥그릇들을 엎어 놓았나     

누가 저렇게 잘 씻어서 가지런히 엎어 놓았나     


밥을 먹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떠났나     

밥을 먹던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먹고 사나     


아무리 보아도 숟가락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빛나는 숟가락으로 남고 싶다     


넓은 살강 저 끝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큰 숟가락 하나 하늘 한 수저 뜨고 있다  


                                                     

거대한 나무   

  

바퀴 달린 가죽 가방 하나 산을 오르고 있다


산에 올라 거대한 나무 한 그루 보고 있다

골짜기들이 나무뿌리가 되어 깊이 뻗어 있다 

겨울나무들이 하늘에 잔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덤들이 열매처럼 열려 있다 

무덤들이 겨울 감자처럼 땅속에 묻혀 있다 

동안거에 들어간 산사에서 두더지 숨소리 들린다 

지렁이 지나간 길을 따라 

새들이 땅속으로 길을 만들며 날아간다 


옹달샘에서 발원한 물이 바다를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작은 나무 한 그루 뽑혀 물관부를 타고 오른다 

물관부가 강으로 굵어진다 뗏목들이 강을 따라 오른다 


강물 속으로 달이 들어와 있다 저 달은 어떻게 상처도 없이 들어왔을까 거대한 나무속으로 달과 별들이 흐르고 있다 저 달과 별들이 떠나도 강물은 상처가 없다 아니다 강물 속을 다시 들여다보니 깨어진 유리조각 투성이다 강물은 가라앉은 유리파편까지 고스란히 끌어안고 흐르고 있다 그런 깊은 상처들이 강의 길이와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뿌리에서 기둥으로 기둥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나뭇잎까지 참 멀다 바람이 분다 파도가 일렁인다 나뭇잎이 반짝인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일렁인다 나뭇잎 같은 물고기들이 새가 되어 날아다닌다 거대한 나무에 빛나는 햇살이 꽃으로 피어난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크고 작은 섬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바퀴 달린 가죽 가방 하나 나무 속에서 툭 떨어진다  


                                                                     

낙타     


나는 한 마리 낙타였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한 마리 곱사등이 낙타였다

나에게는 온통 사막뿐이었다

지금껏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한

건조한 꿈의 힘으로 나는 날마다 길을 떠난다

내가 지나온 길을

또 다시 모래바람이 지워버리고 있다

이 도시에

나무가 없다 수목원도 없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길은 이제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급브레이크의 비명소리만 남기는 시대

나에게는 온통 검은 사막뿐이다

똑바로 누워 잠들고 싶었던

밤마다 무럭무럭 등허리에서 자라는

그 둥근 봉분 같은

그리움

아직껏 한 번도 업어주지 못한 도시의 옆얼굴

옆으로만 잠드는 곱사등이의 꿈     

나는 지금 바늘구멍을 겨우 빠져나오는 중이다    


                

보아뱀     


서귀포 화순해수욕장에는 섬을 꿀꺽 삼켜버린

커다란 보아뱀 두 마리 살고 있다

산방산을 삼키고 부처의 고뇌를 삼켜버린 보아뱀

보아뱀 두 마리 오늘도 바다로 기어가고 있다

추사의 세한도를 삼켜버린 용머리 보아뱀

횟집과 민박집을 삼키고 부른 배로 기어가는 보아뱀

보아뱀 두 마리 화산처럼 부글거리며

이어도로 가고 있다     


나는 그 보아뱀이 삼켜버린 많은 전설을 알고 있다

갈대숲의 새와 검은 쥐들과 취객이 토해 놓은

어둠과 욕망의 내력들을 다 알고 있다

보아뱀 뱃속에 좌선하는 부처님과 추사가 코끼리 꼬리에 대하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가끔은 무지개의 뿌리 쪽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보아뱀     


바람이 거세어 배들이 피항 하는 화순항

바람이 거세질수록 화순 앞바다를

기어가는 뜨거운 보아뱀 두 마리

지금 막 빠져나가고 있다

이어도로 가고 있다   


                      

탁발     


세한도만 그렸다

유배지에서

오직 세한도만 그렸다     


말도 잃었다

울음도 잃었다

나는 어느새 소나무가 되었다     


사람 밖에 있던 나는 사람 안으로

길 밖에 있던 나는 길 안으로

이제 돌아가련다

서툴게라도 말하고

서툴게라도 통곡하련다     


세한도 밖으로

솔가지 하나 빠져 나온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말씀이 내려오신다

하느님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와 쌓인다     


눈이 내린다 

눈의 발뒤꿈치가 조심스럽다 

노랗게 익은 귤이 병아리처럼 파고든다

감귤나무 위에도 사뿐히 눈이 내려쌓인다 

감귤나무 아래 허름한 개집을 눈이 기웃거린다 

개집 안이 은총으로 가득하다      


마리아의 자궁처럼 어미개의 문이 열리고 있다 

문밖으로 살짝 내미는 발가락 

멈칫, 하다가 슬며시 첫발을 내딛는다      


미끄러운 세상의 길을 핥아주는 

어미개의 혀,     


고요히 눈이 쌓인다 


                                  

수혈에 대하여  


가슴을 열고 심장에 칼을 대어본 사람은 안다

피 속에는 혈장과 혈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하지 못하는 엽록소가 가득하다는 것도 안다     


큰 수술을 받고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인공호흡기와 함께 회복실에서 깨어난 사람은 안다     


엽록소 속에는 단풍으로 가득함을 안다

처음부터 붉고 노랗고 푸른 단풍잎임을 안다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 같은 단풍도 다 지고

뼈만 남은 나무는

겨울에 땅 속보다 하늘이 더 춥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겨울나무는 하늘에 사는 식구들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 주사바늘을 꼽고 하늘에 수혈을 한다     


땅 속의 따뜻한 혈액을 수혈 받은 별들이 눈을 뜬다     

며칠 후면 고드름도 땅에 주사바늘을 꼽고

하늘의 영혼을 지상에 사는 식구들에게 수혈할 것이다

그렇게 땅과 하늘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함께 살 것이다 


              

나무 발전소 1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     


땅 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나무 발전소 2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을 찾아 백록담으로 간다     


11월 11일 농업인의 날, 서울 G20 정상회의가 있는 날, 나는 세상과 손잡고 나란히 걷지 못하고, 설문대할망을 찾아 한라산으로 간다 삼승할멈과 자청비를 찾아 한라산으로 간다     


엉덩이에 바퀴를 달고 앉아서 달려 올라간다

앞차 엉덩이에서 나무의 영혼이 검게 피어난다

깊은 땅 속에서 끌려나온 아스팔트와 다시 만난다     


자동차들은 바퀴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조상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나무의 영혼은 아스팔트, 뼈의 살이 되지 못한다     


먼 옛날 땅 속에 있던 거대한 발전소가 폭발하였다

바다가 뒤집히고 땅이 뒤집히고 나무들이 묻혔다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듯

용암이 분출되고 지상의 생명들이 땅 속에 묻혔다

그렇게 묻힌 것들이 석탄이나 석유로 부활 하였다     


성판악 휴게소가 미어터진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는 바퀴들

인간이 만든 바퀴들은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다

신이 만든 큰 바퀴로 갈아타야만 산에 오를 수 있다    


한미 FTA 재협상이 잠시 결렬되어도, 관세가 없어지듯 국립공원 입장료가 없어지고, 신들의 거처 한라산이 몸살을 앓고 있다 설문대할망이 물을 마시던 물 대접, 사라 오름이 열흘 전에 전면 개방되고, 사람들이 이제는 개밥그릇처럼 발로 걷어차기 시작한다     


나는 한라산이 좋다 한라산 여신들이 참 좋다

그래서 나는 들병이처럼 여신들을 따라나선다     


한라산 아래쪽에 오름이 많다 신들의 밥그릇이 엎어져있다     


길에서 길로 태어난 나도 성판악 약수터에서 에너지를 보충한다 작은 수차라도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성판악 탐방로 입구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불타는 불덩어리가 붉고 노랗고 푸르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발전소 보일러 속이다 여신들이 잘 보이지 않는 한라산은 이제 나무들의 발전소가 되었다     


물은 불을 만들고 불은 물을 만든다     


제주 여신들이 옥황상제 만나러 갈 때, 가장 많이 이용했을 것 같은, 가장 완만해서, 유람하듯 오르내렸을 것 같은 성판악 탐방로, 동아줄이나 사다리가 아니라 그냥 구름길 같이 편안한 길, 나도 여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구름길로 들어선다     


내 몸 속의 발전소가 부실하여 나는 언제나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속도에 맞추어 걸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오를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세상과 함께 손잡고 나란히 동행 할 수 없어서 시인이다 천천히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속도를 찾아서 올라간다    


나에게는 언제나 입구가 문제다 나에게는 언제나 초반부가 문제다 땀 한 번 흥건히 흘리면 그때서야 비로소 한결 가벼워진다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서어나무 군락이다

위쪽은 벌써 잎이 다 떨어졌다

불 꺼진 발전소 보일러 속이다

나무 기둥들이 발전소 보일러 튜브처럼 나란히 서 있다     


낙엽 쌓인 길 가로 모노레일이 따라 오른다 바퀴가 아니라 톱니가 올라간다 세 칸 열차에 사발면과 삼다수 물병이 실려간다 한라산 여신들도 이제는 컵라면으로 연명하는 것일까 나도 한때 날마다 산을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날마다 지게질을 하던 때가 있었다 산에서 땔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던 때가 있었다 산밭에서 감자와 고구마와 참깨를 지고 내려오던 때가 있었다     


길 가 나무들이 쓰러져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서일까 길 가에 있어서일까

숲 속에 누워 천천히 죽음으로 스며드는 나무도 있다

야위어가면서도 제 가슴 속에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 키우는 주검도 있다    

희나리보다 썩은 장작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아예 통째로 썩어가는 나무들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나무의 주검은 죽음이 아니라 벌레들의 밥과 집이다     


바스락 바스락 나무들의 똥을 밟는다

나무들이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눕고 있다

기생충 검사용 변봉투 같은 낙엽들

바스락 바스락 낙엽을 밟는다 똥을 밟는다

나무들이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눕는다     


뒤샹이라는 사람이 미술관에 전시했다는 변기를

나는 다시 가져와 한라산 은밀한 곳마다 두고 싶다     


나의 시는 이제 나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가 나의 삶까지 변화시켜주기를 바란다     


올 해는 도토리가 많이 열리지 않았다

참나무 위에는 겨우살이 열매가 붉어지고 있다

참나무는 살아서도 제 몸에 다른 나무를 키울 줄 안다     


제주조릿대 군락이 나온다

풍차 날개 같은 조릿대가 흔들리고 있다

바람개비가 빛나고 있다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그 사이에서 노루 한 마리 나를 지켜보고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백록담으로 가지 않고 사라 오름으로 간다

백록담은 백록에게, 백록이 살도록 남겨두고 싶다     


사라 오름 분화구에는 햇살만이 빛나고 있다 설문대할망도 보이지 않고 삼승할멈도 보이지 않고 자청비도 보이지 않는다 빈 접시만 하나 있다 빈 접시 하나 깨끗이 비워져 빛나고 있다     


빈 접시 테두리를 빙 돌아서 전망대에 오른다

빛나는 빛의 테두리를 돌아서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 위에서도 여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올레길이 보이고 서귀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다

풍력발전기 날개가 바람을 물레질하고 있다

2월에만 온다는 바람의 여신 영등신이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영등신의 옷자락이 풍차의 날개를 돌리고 있다

멀리 거대한 나무 발전소가 풍차를 돌리고 있다

더 멀리 바다에서 태양광발전소가 빛나고 있다

태양전지 모듈이 빛나는 태양빛을 모두 흡수하고 있다

더 멀리,

그 너머로 이어도가 보인다 서천 꽃밭이 보인다    


흰 사슴 한 마리 이어도에, 서천 꽃밭에 살고 있다      


                                                                                         

나무 발전소 3    


하늘에도 발전소가 있고 땅 속에도 발전소가 있다 땅 속에 살고 계신 어머니께서도 이제는 별빛을 만들고 계신다 땅 속의 소식을 밤낮없이 전해주는 나무 발전소, 마그마 방에 마그마가 가득 차올라 폭발을 준비하고 있다     


하느님과 어머니와 내가 발전소에서 별빛을 만들고 있다 별빛을 켜고 꽃빛을 켜고 눈빛을 켜고 있다 반짝 반짝 반짝, 하느님과 어머니와 내가 발전소에서 그리움을 송전하고 있다 세상에는 발전소 아닌 곳이 없다     


스스로 스위치를 올려 환해지는 온갖 봄꽃들

세상이 온통 환하다

스위치 올리는 손길이 더욱 아름답다     


자, 이제 그대가 스위치를 올릴 차례다                                                       



월라봉   


내 기억의 출발점, 징검다리 건너 외딴집이 있다 옹달샘이 있는 섬진강 상류, 어머니 장사 나가시고 아버지 술집에 가시어 나는 언제나 외딴집이었다     


외딴집에서 나오는 길은 늘 외딴길이었다 한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항상 외길이어서 강을 건널 때에도 나는 늘 혼자였다 내 기억의 끝, 외딴길의 꽃이 되어 열매를 맺는, 황천교 건너 외딴집이 있다     


별들의 연못에 세수 하고 나오는 보름달

그 보름달처럼 다리 건너 월라봉(月羅峯)으로 간다

월라봉 외딴집에 살고 있는 이어도 시인을 만나러 간다     


아름다운 새벽의 나라 깨어나고 있다 새벽 세 시, 어지러운 꿈을 털어내고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다 숲에서 파도소리 들린다 나무들 깨어나기 시작한다 풍경소리 깨어나기 시작한다 바다가 숲으로 밀려온다 워싱턴 야자수 깨어나고 정자나무 깨어나고 능수버들 깨어난다 가지 하나 만들지 않는 워싱턴 야자수, 잎자루를 스스로 쪼개어 두 팔로 포옹하며 깨어나 하늘 높이 탑만 쌓아올린다 가지가 많아 더욱 아름다운 정자나무, 노스님 같은 팽나무도 큰 기침을 하며 일어나 능수버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계신다 능수버들은 연못에 긴 꿈을 다시 한 번 풀어 가다듬는다     


나도 이제는 이어도 시인과 함께 이어도 공화국에서 이어도 공화국으로 살기 시작한다 흙으로 부활하신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퍼물 


월라봉 입구에 퍼물(泥水)논이 있다   

  

맹지(盲地)에서 논병아리들이 살고 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좋아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맹지에도 물은 잘 찾아온다     

 

물이 잘 빠져나가는 비탈 밭에서 꿩들도 내려왔다 텃새로 자리 잡은 논병아리들 사이로 백로 한 마리 날아왔다 안덕 계곡을 넘어온 청둥오리들도 보인다 가끔은 원앙들도 찾아온다      


논병아리와 백로와 원앙과 청둥오리들을 위하여 연못을 만든다 땅을 판다 삽날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모내기 할 때처럼 말랑말랑한 흙이 아니다 물 없는 논바닥은 길보다 더 단단하다 수 백 년 동안 물이 밟고 지나간 길, 수 천 년 동안 물이 놀다가 떠나버린 놀이터, 켜켜이 쌓여있는 물의 발자국 아래 큰 바위 하나 떡 버티고 있다 호미로 주위 흙을 긁어내고, 괭이로 잔돌을 치우고, 곡괭이로 큰 돌을 뽑아주고, 지렛대로 조금씩 바위를 움직인다 지렛대가 휘어지며 천천히 흔들린다 바위의 뿌리가 뽑혀도 연못 밖으로 들어낼 수 없다     


연못 한 복판에 나보다 더 큰 바위 하나 자리 잡고 있다 내 가슴 한 복판에도 커다란 바위 하나 뿌리 내리고 있다 너무 크고 무거워 바위를 옮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 큰 바위를 가슴에 품고 살기로 한다     


제 가슴 속 큰 바위 하나 연못에 내려놓은 백로 한 마리

그 바위 위에 잠시 앉았다가 푸른 하늘 깊숙이 날아오른다         



* 퍼물(펄물/泥水) : 수세가 약하여 진흙을 몰아내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물통에 ‘펄’(뻘)이 고여 있어 ‘펄물’인데 발음이 변하여 ‘퍼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물을 근거로 논을 개척하고 취락이 형성되어 ‘퍼물동네’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등나무     


당신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버린 등나무였다

등만 보이던 그 등나무가 오늘은 등꽃을 켜고 있다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새 입술이 달다  


이어도 오두막 앞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까치 두 마리 날아와

감 하나를 함께 쪼아 먹는다     


이 요망한 것들이

감이나 쪼아 먹고 갈 일이지

혼자 사는 내 앞에서

기어이 뽀뽀를 하고 난리다     


감보다 먼저 몸이 더 달아오른다

에이, 이 몹쓸 것들 같으니라고     


지나가던 바람이

키득거리는 소리에 감이 떨어진다

나는 새들이 먹던 감을 주워 먹는다     


아, 참 달다

새 입술이 참으로 달고 맛있다                              



발로 하는 세수   


산책은

씻김굿이다

발로 하는 세수다

발로 씻는 씻김굿이다

발로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을 한다   

  

산토끼 한 마리 가만 앉아서

발로 세수를 한다

산토끼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산 새 한 마리 가만 앉아서

깃을 다듬던 부리를 발로 씻는다

산 새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바람소리가 내 몸을 씻어준다

쑥 향기가 내 코를 씻어준다

하늘을 쓸고 있는 나무들이 내 눈을 씻어준다

꽃들이 내 영혼을 씻어준다

하늘이 하늘까지 내 길을 닦는다

나의 산책은 바리데기를 만나

길을 닦는 씻김굿이다

바람소리가 나를 씻어준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내 발이 나를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눈을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길을 닦아준다  

  

나를 스스로 씻겨주는 씻김굿 춤이다

나의 산책은 스스로 씻는 씻음굿 춤이다  


                                                                                        

나무를 본다     


나뭇잎은 손일까 발일까 나뭇잎은 손 같기도 하고 발 같기도 하다 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같기도 하고 장갑 같기도 하다 나뭇잎은 또한 입 같기도 하고 귀 같기도 하고 코 같기도 하다 태어날 때 눈이었던 나뭇잎이 자꾸만 코가 되고 입이 되고 귀가 된다     


나뭇가지는 팔일까 다리일까 나뭇가지는 팔 같기도 하고 다리 같기도 하다 새와 새집을 끌어안고 포옹하는 것을 보면 팔 같은데, 나뭇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끼워 시집을 보내거나, 접을 붙이거나, 열매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면 다리 같기도 하다     


나무 기둥은 몸통이 맞는 것일까 그 가슴 속에 심장은 있는 것일까     


나무뿌리는 발일까 손일까 가장 낮은 곳에서 떠받들고 살아가니 발 같은데, 평생 흙만 파먹고 살아가니 시골 어머니 손 같기도 하다     


다시 나무를 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보니 나무가 나무로 보인다 그 동안 나는 나무를 자꾸만 사람으로 보려고 해서 나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무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뿐인 나무인 것이다    


                          

파도무늬     


모래밭이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파도 속으로 떠나간     


모래알 하나 때문에     


모래알 하나가 평생     


파도 속을 뒤지고 다닌다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찾아다닌다     


평생 찾아서 헤맨다     


그리하여 모래밭은 온통     


그를 찾아다닌 길로 가득하다     


가슴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항아리     


가랑비에 젖고 있는 가랑잎 한 잎

젖은 몸으로 겨우 묵언 수행 중이다  

   

바다에 던져졌던 빈 항아리 하나

20년 째 묵언 수행 중이다

뚜껑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그나마

허술한 밑까지 통째로 빠져버렸다     


처음 10년 동안은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시 10년 동안은

수없이 많은 말을 하여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다에 빠진 빈 항아리 하나

20년 째 몸과 마음을 비우고 있다

뻥 뚫린 가슴 속으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가고

푸른 바닷물이 수시로 넘나들었다     


하늘바다에 머릿속까지 감고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 가까스로 묵언 수행 중이다               



액자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가 있다

오지 못할 사람을 대책 없이 기다리는 때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새벽이 액자처럼 걸려있다     


방 안에 액자 하나 걸려있다

사연이 참 많은 액자 하나 걸려있다

나무틀 액자 하나 아침처럼 걸려있다

내 왼쪽 가슴 속 깊이 박혀있는 못 하나에

액자 하나 지금까지도 걸려있다     


그 액자 속에 있던 사람 대신

지금은 내가 들어가 갇혀있다

1986년 이었던가 1987년 이었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왔던 내가 들어있다

한라산 이었던가 어느 오름 이었던가

안경 쓴 내 뒤로 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시여, 내가 낳은 시들이여! 

황소의 쟁기질처럼 끊임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강히 자라는 일꾼이길 바란다

이런 글자들도 함께 갇혀서 기침을 하고 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내린다

내 가슴 속에 갇혀있던 액자를 꺼낸다

그 액자 안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글자들을 꺼내어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시 비어있는 액자 틀만 벽에 건다

그 빈 액자에 느닷없이 새로운 아침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거울     


이어도 오두막 마루 위에 거울 하나 걸었다

방과 마루 사이 벽이 갑자기 뻥 뚫렸다

거울 속으로 마당과 하늘이 쳐들어왔다

하늘이 방 안으로 한꺼번에 들어왔다

마당이 들어오고 마당의 꽃들이 들어오고

감나무가 들어오고 하늘이 들어오고

하늘의 구름들도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울 하나 걸었을 뿐인데

마당이 넓어지고 하늘이 깊어지고 있었다

거울 하나가

풍경이 풍경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풍경이 풍경을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풍경도 오래도록 마주보면 날개가 돋는다

날개가 돋은 풍경 속으로

오래도록 마주보던 풍경 속으로

날개 달린 새와 나비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와 나비는 날개를 주체하지 못했다

오래도록 마주보다보면 만나고 싶은 것이

또한 사랑인가보다

사랑은 그렇게 언제나 목숨을 요구한다     


거울이 걸려있는 이어도 오두막 마루에

새와 나비들이 떨어져 쌓이기 시작했다               



     


흙은 작은 상처만 나도 푸른색 밴드를 붙인다

흙은 피가 나올 기미가 보이면 푸른색 생리대를 찬다

푸른색 속옷을 챙겨 입는다

푸른색 옷을 두껍게 입는다   

  

흙은 사막의 여인들처럼

눈만 남겨놓고 온몸을 옷으로 칭칭 감아버린다

흙은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흙은 겨울에도 옷을 벗지 않는다   

  

풀은

그런 흙이 가장 좋아하는 옷이다

풀은 흙의 푸른색 밴드다

풀은 흙의 푸른색 생리대다

풀은 흙의 푸른색 속옷이다

풀은 흙의 푸른색 외투다 

    

흙의 옷들은

굼벵이 지렁이 지네 도마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의

우산이 되고 지붕이 된다

풀은 사람들이 아무리 독한 제초제를 먹여도

끝끝내 다시 살아나

지구의 옷이 되고 밥이 되고 집이 되어 푸르고   


       

봄에는 그림자에도 새싹이 돋는다  


회춘,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돌아오고 있다

하얀 겨울의 처녀막을 다시 한 번 찢으며

얼음새꽃이 또다시 노랗게 피어나고 있다

겨울에 벗어놓았던 헌 발자국들도 녹아내려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이어도로 가고 있다

나무들의 손가락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드디어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며 일어난다

겨드랑이가 자꾸만 가렵다 영혼의 거처에서

아지랑이기 피어난다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새순 같은 손길이 느껴진다

다시 한 번 찾아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새싹은 벌써 새의 발자국 같은 나뭇잎이 되고

파랑새 한 마리 날아와 나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나의 심장 같은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산으로 올라갔던 발자국들도 다시 녹아내리고

동안거에 들어갔던 영혼들도 산길을 내려온다

봄은 그렇게 더 깊어진 사랑의 힘으로 돌아온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흘러가 쌓여있는 바다보다

더 깊어진 사랑으로 다시 한 번 봄이 돌아온다

이제는 자꾸만 그림자도 한없이 깊고 길어진다

그림자로 가득한 밤에도 나는 이제 외롭지 않다

나는 이제 밤마다

사랑하는 당신의 그림자라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회춘, 나는 다시 한 번 봄으로 돌아눕는다

춘투, 눈싸움이 사랑싸움으로 돌아눕는다    

칼이 지나간 자리가 결코 밖이 되지 못하는 사랑싸움

성질 급한 매화 목련 벚꽃 개나리 진달래꽃들이

속옷도 걸치지 못하고 속살로 뛰쳐나온다

봄에는 이제 그림자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봄에는 이제 그림자에도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봄에는 이제 그림자에도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찢어진 상처마다 상처를 한 번 더 찢으면서

새살이 오른다 새순이 돋는다 춘투가 한창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이제 이렇게

조금 늦더라도 모두가 함께 손잡고 가는 삶이다

그림자까지도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가는 삶이다    


                                                                  

지구는 나무뿌리가 되고     


오랫동안 나무 생각을 하다 보니 우주 전체가 한 그루 나무로 보인다     


지구는 나무뿌리가 되고

하늘은 나무 몸체가 된다     


하늘이 몸이 되고 지구가 정신이 된다

정신이 몸이 되고 몸이 정신이 된다     


땅과 바다에서 올라간 물들이

커다란 구름 나뭇잎을 만들고 있다     


내가 지금 지구에 있어서 그럴 것이다 나의 마음은 내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살고 있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내 몸을 담고 있는 그릇에 내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내가 태양에 살고 있다면 나무뿌리도 태양에 있을 것이다 내가 달에 살고 있다면 나무뿌리도 달에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지구에 살고 있으므로 나무의 뿌리는 지구일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흐르니 가까운 곳은 잘 보이지 않고 자꾸만 멀리 보인다     


나무뿌리에서 살고 있는 나는

모래알보다 더 작아지고     


꽃으로 피어나는 별들도 자꾸만 작아지고 열매로 익어가는 달도 자꾸만          


                                                                                                        

바다와 나무    


처음에는 바다에서 생겨났다

바다에서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네 개의 다리가 생겨났다

다리 네 개 달린 짐승이 나무에 올라갔다

나무 위에서 나뭇잎을 먹고 열매를 먹었다

나뭇가지를 꺾고 가지에 매달려 놀았다

두 개의 앞다리가 팔이 되었다

두 개의 발이 손이 되었다

두 개 달린 짐승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나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워졌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 짐승이 서운했다

하지만 나무는 찾아서 떠날 수 없었다

나무의 운명은 늘 제자리였다

한 번 떠난 짐승은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개 달린 짐승은

나뭇잎 같은 지폐를 뜯어먹고 살았다

나무는 떠나간 짐승이 그리워

지폐 같은 나뭇잎을 자꾸만

짐승들이 살고 있는 마을 쪽으로 날려보냈다

아무리 날려 보내도 소식이 없었다

고민하던 나무는 이제

제 가슴 속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다른

두 발 달린 날짐승과 신접살림을 차린 나무는

그래도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나서

처음 태어났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도시 나무     


청산에 살지 못하고 도시로 끌려가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들의 발목에서 쇠사슬 끌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이 지금도 독가스실로 끌려가고 있다

가스실 앞에 줄서있는 가로수들 떨고 있는 그 사이로

돼지들이 실려 가고 있다 끊임없이 실려 가는 울음소리

도살장 앞의 나무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돼지는 돼지들대로 가로수는 가로수들대로 떨어뜨리고 있다

나뭇잎이 떨어져도 돌아갈 곳이 없다

새벽부터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둥근 빗자루를 돌려

아스팔트길을 쓸어 담고 있는 청소차가 지나간다

쓰레기차를 피해 간신히 도망쳐 나온 나뭇잎은

하루 종일 길을 헤매다가 겨우 하수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어린 가로수들도 이제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버팀목으로 서 있던 세 개의 각목,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나무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고 있다

도시로 끌려나온 나무들은 뿌리 내릴 곳이 없다

땅 속에서라도 뿌리는 따뜻한 뿌리를 만나고 싶은데

만나는 뿌리마다 전기가 흐르거나 소리가 흐르는

너무나 뜨겁거나 너무나 차갑거나 너무나 시끄러운

무서운 전선들뿐이다 땅 위에도 땅 속에도

온통 전선들뿐이다 정녕 전쟁터 아닌 곳이 없다     


청산에 살지 못하고 도시로 끌려나온 나무들이 있다

아예 청산은 보이지 않고 가스실 문이 닫히고 있다   


                                                                                                                              

수선화     


수선화 피었다   

  

금잔옥대 피었다     


저 금잔은     


독을 마시기에     


딱 알맞겠다     


어젯밤에 또 누가     


왜 저렇게     


서둘러서     


사랑을     


완성하고 말았을까     


벌써 잔이     


깨끗이 비워져 있다               



길 없는 길     


긴 꿈을 꾸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아직도 온 몸이 젖어있다

모래를 털고 일어나

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저 끝없는 바다를

어떻게 건너온 것일까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빈 몸과 빈 마음으로  

길 없는 길을 걸어서 간다



바다의 발걸음     


바다의 발걸음에 맞추어

해변의 모래밭을 걸어본다

바다의 발걸음소리에 맞추어

해안선을 읽어본다   

  

바다는 이만큼 왔다가

다시 저만큼 물러난다

바다는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저기까지 물러난다     


바다는 날마다 그렇게

끊임없이 왔다가 간다

바다는 그렇게 끊임없이

왔다가 그냥 가 버린다     


바다처럼 걷다가 문득

나의 발자국을 들여다본다

바다가 벗어놓은

바다의 발자국을 들여다본다     


바다의 발걸음에 맞추어

바다를 따라가지 못한

모래밭의 모래들이 보인다     


모래들은 하루 종일

바다의 발걸음 소리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또 기다린다    


한 번 쯤 바다를 느껴본 모래들은

아직도 촉촉하게 젖어있다     


한 때 행복했던 모래들이

한 걸음 더 물러서서

눈부신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모래 한 알 


걷다가 문득 모래 한 알이 된다     


눈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본다

입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부른다

귀가 없는 모래 한 알이 듣는다     


몇 십 년째 바닷가를 구르고 있다                                                                                               



시아노박테리아  


전생에 한 마리 낙타였다   

  

그리하여

바늘구멍을 겨우 빠져나왔다     


전생에 낙타였던 나는

다시 시아노박테리아가 되어

산소를 만들기 시작한다                                                                                               



평생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평생 사랑하고 있다 

    

햇빛이 유혹하고

달빛이 유혹해도

평생 사랑하고 있다     


바람이 협박하고

파도가 협박해도

평생 사랑하고 있다     


참지 못한 파도가

보쌈해간 연후에도

평생 사랑하고 있다     


모래알 하나는

모래알 하나만을

평생 사랑하고 있다                                   



바다와 모래알  


또 다시 바닷가 모래밭을 걷고 있다

마음만 부자인 시인이 걸어가고 있다

바다 새들이 바다에서 날아오르고 있다  

   

바다는 모래 한 알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

보고 싶은 모래 한 알 때문에

밤새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 모래 한 알 또한 잠들지 못한다

바다의 깊은 사랑을 잘 알면서도

쉽게 따라 나서지 못하는 모래 한 알

그리움 때문에 목말라 야위어가면서도

끝끝내 따라가지 못하는 모래 한 알     


바닷가를 걷고 있는 시인은 알고 있다

바다의 숨소리를 들어본 시인은 알고 있다

석간수로 태어났던 그 물방울을 알고 있다

모래 한 알의 가슴을 만져본 시인은 알고 있다


먼 강을 따라 내려와

모래가 된 그 바위를 이제는 알고 있다                         



바다처럼     


당신은 바다처럼 울어본 적이 있는가   

  

바람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주고

오직 뼈로만 서 있는 갈대숲을 지나

빈 갈대가 되어 바다에서 운다     


당신은 영혼의 뼈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바람의 뼈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소리의 뼈를 본 적이 있는가     


깊은 숲 속에서 옹달샘으로 살고 싶은 나는

오늘도 산으로 가지 못하고

바다에서 이렇게 해안선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일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또한 죽어 갈 길은 어디에 있을까     


꿈도 사랑도 원망도 모두 버리고

밤새 바닷가에서 파도로 일렁인다

그래도 길이 보이지 않아서 다시 운다     


당신은 바다보다 깊이 울어본 적이 있는가               



갈대는 봄부터 비운다 


갈대는 봄부터 몸을 비운다

갈대는 봄부터 마음을 비운다

겨우내 울면서 겨울을 버티다가     


몸과 마음을 비운다

다른 꽃들이 온 몸으로

사랑을 춤추며 노래하기 시작할 때

갈대는 조용히 몸과 마음을 비우고

뿌리 쪽에서부터 더 고요하게

가을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가을을 기억하는 갈대는

모두가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봄부터

노출증이 심각한 꽃들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만의 가을을 키우기 위하여

갈대는 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비운다

그리고 따뜻한

그런 갈대의 숲 속에

작은 개개비 둥지 하나 만들기 시작한다                                   



몽돌     


아직 황금빛 모래에 도달하지 못한 몽돌들이

쟈그르륵 쟈그르륵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아직도 이별을 인정할 수 없는 돌멩이들이

바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흐느끼고 있다

언젠가는 모든 이별이 완성되겠지만

아직은 이별보다 사랑을 더 믿고 싶은 몽돌들

자그락 자그락

그러나 저 몽돌들은 언젠가 모래가 되리라

황금빛 모래가 되어

저 바다의 그림자까지도 조용히

조용하게 가슴 속 깊이 안아줄 수 있으리라

모래와 바다가 함께 깊이 젖을 수 있으리라

사르르 사르르

가슴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 수 있으리라

몽돌 속에는 이미

저마다 빛나는 모래 한 알 들어있으므로

이별은 또한 언젠가 더 큰 사랑으로 완성되리라    


                                    

바람     


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되라고 한다

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가을이 되라고 한다

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단풍이 되라고 한다

마지막 남은 목숨 사랑만 하라고 한다

오직 사랑으로만 타오르는 꽃이 되라고 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되라고 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단풍이 되라고 한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가을이 되라고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먼저 가을이 되라고 말한다

봄으로 다시 꽃피는 가을이 되어보라고 말한다

겨울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되라고 한다     


                                                                 

용설란


모래밭 끝에 숲이 하나 있다

그 숲으로 간다

모래밭 해안선을 걷다가

몽돌밭 해변 길을 걷다가

갈대밭 사랑 길을 걷다가

길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숲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하나 발견한 것이다

바다에서 숲으로 들어가는

고향, 그 길 가에

용설란이 심어져 있다

용설란 가로수 길을 

걸어서 들어가고 있다 

길 가의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그 중의 몇 놈이 수상하다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기다리는 님이 있는지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다 

용설란 꽃 

그 높은 전망대 위에서 

손차양을 하고 

저 멀리 

바다 밖을 바라보고 있다   


       

탱자나무 울타리  


용설란 가로수 길 끝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문은 보이지 않고

헌 날개와 헌 옷들이 걸쳐져 있다

가끔은

붉은 피와 붉은 상처들도 걸려있다

탱자나무 꽃들이 하얗게 피어있다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탱자 꽃으로 꽃 피어있다  


                                                                              

벌거벗은 어린왕자  


아무리 돌아보아도 문이 보이지 않는다    

 

용설란 꽃이 용설란 그늘에 잠들어 있다     


그 높은 용설란 꽃대를 타고 내려온

벌거벗은 어린왕자가 잠들어 있다     


발걸음 소리에 깨어난

멋진 옷까지

남김없이 벗어버린 어린왕자     


나의 손을 잡고 비밀을 속삭여 준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통과하려면

바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람의 속살이 되어야만 합니다     


바람의 속살이 되어 다시 보니

탱자나무 울타리는 문 아닌 곳이 없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모두가 벽이 아니라 문이다   


                           

로즈마리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로즈마리 세상이 펼쳐져 있다   

  

화려하지 않은 로즈마리, 꽃     


탱자나무 울타리 밖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던

벌거벗은 어린왕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앞서가던 바람이

로즈마리를 살짝 흔들어준다     


로즈마리 향기는

온몸으로 감싸주고

나 또한 로즈마리를

온 몸으로 안아준다     


자줏빛 꽃잎을 터트리며 함께 걸어간다                                   



라플레시아     


손도 잘라버리고 다리도 잘라버리고

붉은 심장 하나로 살아가는 꽃

잎도 없이 가지도 없이 뿌리도 없이

결정적으로 꽃잎마저도 없이

오직 꽃 하나만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의 마음을 아는가

평생 단 하나의 꽃을 위하여

스스로 시체가 되어야만 하는 시체 꽃

나 또한 이제는 스스로

시체가 되어서라도 라플레시아가 된다

단 하나의 사랑을 위하여

단 하나의 붉은 꿈을 위하여

차라리 라플레시아의 숙주식물이 된다

라플레시아의 큰 숙주 나무가 된다  


                                                     

     


숲 속에 섬이 있다

조촐한 오두막에 한 노인이 살고 있다     


울타리 밖에서 꿈결처럼 만난

벌거벗은 어린왕자의 할아버지인지도 모른다     


섬은 무인도가 아니라 유인도가 분명하다     


이어도,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쉼터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섬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섬     


노인은 나무를 심고 가꾸는

정자나무 같은 촌장님이시다     


억울한 사람들, 세상에 대하여 너무나 분노한 사람들, 한 때의 실수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주로 그런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는 그들의 나무를, 그들과 함께 정성껏 심어준다     


그런 섬 속에 섬이 살고 있다          



나무 숟가락     


하늘을 휘휘 젓다가 하늘을 떠먹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어준다 소나무도 좋고 감나무도 좋고 사과나무도 좋다 이어도에서는 사람과 나무가 함께 자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나무로 한 번 더 태어난다  

    

짐승들도 죽으면 나무로 한 번 더 태어난다 짐승들도 사람을 닮았다 나무를 닮았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사람의 길로 노루가 다니고 토끼가 다닌다 짐승들과 사람들이 같은 길로 함께 다닌다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당당히 서고 싶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나무 곁에 자신의 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다 숲에는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있다  

   

나는 오늘도 무덤 위에 나무를 심는다 잔디 대신 나무를 심는다 세상에서 무덤을 만들 때, 무덤 가운데 꽂았다가 노잣돈들과 함께 다시 뽑아내는, 그런 세상의 작대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나무를 심는다 바퀴달린 꽃상여가 판을 치고 포클레인으로 무덤을 구축하는 이 시대에도, 무덤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이어도에 살고 있다 

     

먼 훗날 먼 후손들이 이 숲으로 찾아오리라 찾아와서 나무 그늘에서 놀리라 나무를 끌어안고 펑펑 울 때도 있으리라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을 때도 있으리라 나뭇잎 하나 책갈피에 넣어가기도 하리라 낮에 내가 다니던 길로 밤이면 착한 꽃사슴들이 둘러보리라 나무 숟가락들은 그들에게도 하늘 한 수저 떠먹여 주리라     


                                                                                                                       

산책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여러 번 

정독하는 책은 자연이다      


산책은 자연이다 

자연은 산책이다      


산책은 

자연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일이다      


산책은 시간을 주고 산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이어도의 강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아직 철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덜컹거리며 흘러가는

바다의 열차가 있습니다

협괘 열차의 추억이 있습니다  


                                                                    

별무덤    


이어도는 별무덤 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 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늘에 뿌리를 박고 

반짝이는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별들의 뿌리를 사람들은 

푸른 잔디라고 말 합니다 

잔디로 덮여있는 무덤을 보십시오 

무덤들은 달을 닮았습니다 

달의 일부가 자꾸만 보이지 않습니다 

없어진 달은 바로 

그 무덤 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이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붉은점모시나비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모시나비가 날고 

상제나비가 날고 

붉은점모시나비가 

개미들의 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연꽃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내가 세상의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를 사랑으로 건져 올려준

너무나 고마운 연꽃이지요

나를 죽음에서 들어 올려준

너무나 크고 은혜로운 연꽃이지요

넓은 연잎으로 더러운 세상을 가리고

그 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이지요

그 보다도 더 중요한 진실은

그 넓은 연잎 아래서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고 있지요

그리하여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가파도에서     


가오리 한 마리 바다 위에 납작 엎드려있다 

나는 가오리 등을 타고 바다에 떠 있다 

하멜이 지나갔던 길 위로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모세의 지팡이 같이 생긴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가 아니므로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그대로 놓아둘 수밖에 없다 

고개를 들어보니 

송악산 산방산 군산 한라산이 순서대로 나를 부른다 

저기 산방산 아래쪽이 좋겠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잠시 쉬어가면 참 좋겠다 

붉은 해가 하늘과 바다를 하나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가오리 등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야겠다 

가오리 등을 타고 송악산으로 가야겠다 

가오리 등을 타고 산방산으로 가야겠다  


                                                           

산방산 안에서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절반쯤은 늘 안개에 잠겨 있는

가끔은 이어도가 희미하게 보이는

그런 산방산 안에서 나는

나의 탯줄을 너무 늦게 자른다

나의 태반을 너무 늦게 묻는다   

  

그런 산방굴사 안에서 부처님께서

먼 바다를 지그시 꿈꾸고 계신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     


전망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불빛을 만들고 있습니다

별빛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움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 깜깜한 전기 줄 속에 있습니다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스위치만 올려 주십시오

스위치만 눌러주신다면

나는 언제라도

당신의 가슴 속으로 단숨에 달려가

환하게 불 켜지는

사랑하는 당신의 빛나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나의 시는 크로키가 아니라 정밀화다


무비카메라를 내 마음 쪽으로 고정시켜두고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내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 나의 시다

나는 언제나

처음 이전부터 마지막 이후까지 기록하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한계 때문에 나는 겨우

내 마음의 발자국 몇 개만을 기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시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요즘에는 고양이가 나를 대신해서 나를 쓰고 있다

이어도 오두막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산다

꼬리가 절반쯤 잘린 얼룩무늬 고양이와

다리를 절뚝거리는 검은 고양이가 살고 있다

두 마리 모두

죽음의 덫을 간신히 빠져나온 기억이 선명하다


고양이 두 마리가 하루 종일 나를 읽고 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나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의 시는 언제나 크로키가 아니다 나의 시는

내 마음의 잔털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세밀화다

그래서 나의 시를 읽으려면    

내 마음의 가장 부드러운 잔털부터 읽어야만 한다 


                                                                                                                  

청려장(靑藜杖)   

  

한 살 먹은 아이가

백 살 잡수신 어른의

손을 이끌고 걸어간다 

    

백 살 잡수신 어른이

한 살 먹은 아이의

발을 잡고 따라간다     


거꾸로 선 명아주를 만나면

사람들도 비로소

거꾸로 자라기 시작한다     


백 한 살 먹은 아이는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 잠들고

한 살 잡수신 어른은

더욱 아름다운 길로 남는다                                                  



죽비     


밤새 바람의 성깔을 고자질하던 대나무들이 쉬엄쉬엄 하늘을 쓸고 있다 구름이 조금씩 쓸려가고 있다     


떠났다 나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쪼개진 죽비소리 속으로 떠나간 다음부터 나는 다시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의 몸과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그는 결국 나에게 등을 보였고 그렇게 떠나간 그는 나의 도반이 되었다 그의 등짝은 나의 부처가 되었다     


하늘을 쓸던 대나무가 마당을 쓸기 시작한다 절 마당을 쓸던 대나무 빗자루가 대나무 사립문을 걷어차며 열어젖히더니, 나의 등짝을 힘껏 후려친다 이제는 더 이상 두드릴 목탁도 없으니, 네 몸뚱이로 세상을 두드려라, 온 몸으로 땅바닥을 들이받으며 나아가라 하신다     


오늘도 대나무들이 하늘을 쓸고 있다 대나무들이 마당을 쓸고 있다 대나무들이 나를 문 밖으로 쓸어내고 있다 대나무 빗자루가 자꾸만 나를 후려치고 있다 느닷없이 대나무 울타리 밖으로 쫓겨 나온 나는, 죽비(竹篦)와 죽비(竹扉)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이제 겨우 길을 쓸기 시작한다 대나무 몽당 빗자루로 길을 쓸기 시작한다 내 몸뚱이로 영혼의 마당도 함께 쓸면서 길을 쓸기 시작한다 죽비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눈사람     


발전소 굴뚝 아래 사무실이 하나 있다

주식이 상장되어 대박을 터트린 회사다  

   

누가 이렇게 아침 일찍 눈사람을 만들어놓은 것일까

어른이 만든 눈사람은 확실히 그 사람의 직업을 반영한다

안전모를 쓰고 있는 눈사람

귀마개까지 꽂고 있는 눈사람

방진마스크까지 단단히 차고 있는 눈사람

빨간색 고무 코팅이 된 장갑을 끼고 있는 눈사람

검정색 펜 뚜껑으로 눈을 만들어준 눈사람

눈사람이 아침 일찍 사무실 앞을 지키고 있다     


밤새 야간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길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털목도리를 눈사람에게 감아주고서야

겨우 가볍게 아침 퇴근을 한다     


주가는 뜨겁게 상한가를 치고

굴뚝 아래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눈사람처럼 춥다

발전소의 지저분한 일들만 도맡아하는 하청업체 직원들과

광산개발 호재로 날마다 뜨겁게 환호를 질러대는

주주들이 같은 하늘 아래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따뜻한 방에서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 주주들과

굴뚝 아래서 독가스와 싸우며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도 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아, 눈사람도 이제는 주인을 잘 만나야만 하는 세상이다    


                                                                                                          

평화로     


1

시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제주도에도 평화로가 있다 이름이 몇 번 바뀌어서 평화로가 되었다 산업도로였다가 서부산업도로였다가 서부관광도로였다가 관광도로였다가 드디어 평화로가 되었다 하지만 평화로에는 아직도 평화가 없다     


평화로에는 중앙선이 없다 노란 중앙선이 없다 평화로 중앙에는 중앙분리대가 있다 낮은 경계석으로 만든 중앙분리대 안에 다정큼나무들이 줄지어 살고 있다 다정큼나무들은 늘 불안하다 언제 들이받을지 몰라 잠 한 숨 잘 수 없다     


넘지 말아야할 국경이 그렇게 다정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선을 그을 때에는 확실히 그어야만 한다 비정하고 냉정해야만 한다 다정큼나무가 아니라 차라리 호랑가시나무나 탱자나무를 심어야만 한다 아니다 중앙분리대에는 아예 나무를 심지 말아야만 한다     


중앙분리대에 살고 있는 나무들은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무에게 그런 고문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겨울마다 염화칼슘을 먹이고 밤낮으로 자동차들이 들이받고 노상강도 같은 자동차들이 왼쪽 귀도 썰어가고 오른쪽 귀도 썰어가고 왼쪽 눈도 뽑아가고 오른쪽 눈도 뽑아가고 왼손도 베어가고 오른손도 베어가고 겉옷도 벗겨가고 속옷도 벗겨가고 팬티까지 몽땅 벗겨 가는데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진정으로 그대들이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로에는 나무를 옮겨 심지 말라 어떤 나무를 옮겨 심더라도 그 나무는 곧바로 꽝꽝나무가 되리라 꽝꽝 터지는 꽝꽝나무가 되리라 팡팡나무가 되리라 펑펑나무가 되리라 끝끝내 작살나무가 되리라 평화로에 사는 나무들은 끝끝내 평화롭지 못하리라         


나무들은 제발 길에 심지 말고 숲에 심어라 나무들은 숲에서 살고 싶다     


2

사람들은 길을 둘로 갈라놓고 길도 서로 마주 달리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어깨라도 스치면 끝장날 수밖에 없는 엇갈린 길의 운명, 인간들은 순록처럼 혹은 기러기처럼 나란히 어깨동무하며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사자나 호랑이처럼 한 지점을 향하여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마주 달려오는 욕망의 열차들만 사는 세상에서, 욕망의 바람들만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제는 제발, 휴전선을 걷어내듯 우리들은 이제 길의 노란 중앙선을 지워야만하리라 중앙분리대를 깨끗이 치워야만 하리라 그 때에 비로소 평화로에도 평화가 찾아오리라                         



반듯하게 세우다  


봄에 고개를 쭈욱 내민다 죽순으로 태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잔뜩 외투를 껴입은 죽순은 눈빛이 순하다 그러던 죽순이 7월 장대비를 맞으며 겁 없이 쑥쑥 자란다 죽죽 자란다 웃통을 벗어 던지며 정신없이 쭉쭉 자란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대나무는 그렇게 딱 1년 동안에 모두 자란다 한꺼번에 자란다 마디를 미리 만들고 마디마다 생장점을 미리 만들고 마디마다 한꺼번에 자란다 마디에서 키도 자라고 마디에서 가지도 자란다 그렇게 1년 동안에 모두 자라버린 대나무는 남은 평생 마음을 다스린다 평생 마음만을 다스린다 비어있는 마음을 더 깊이 비우고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대나무는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느라 등이 굽을 시간이 없다   


                                                         

눈이 내린다     


꿈속에도 눈이 내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도붓장사 나가신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한다

머리에 인 커다란 보따리 위에 눈이 쌓인다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가야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은 그치지 않고 하염없이 내려 쌓인다

어머니 머리 위 보따리가 묻힌다

어머니의 발자국이 묻히고 어머니가 묻힌다

생전에 드시지 못한 쌀밥이 고봉으로 담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신이 되신다

꿈밖으로도 눈이 내린다

오름과 한라산이 온통 하얗다

신들의 밥그릇에도 쌀밥이 고봉으로 쌓여있다

오백장군의 어머니만이 벌써 밥그릇을 비우셨다

설문대할망의 밥그릇 안에서 백록이 물을 마시고 있다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지상에 사는 신들에게 쌀밥 밥상을 차려준다   


                 

동하동 할머니   

  

사람들이 서둘러 떠나버리는 낡은 마을

나는 이 낡은 마을에서 가장 낡은 집을 청소한다

마당을 송두리째 점령해버린 대나무를 베어낸다

낡은 마을보다 낡은 집보다 더 낡아버린

할머니 한 분이 자꾸만 기웃거리신다

얼마 전에도 뵈었던 할머님이시다

윗마을에 사는 아들네 집으로 가고 싶다는 할머니

혼자 살고 계시는 낡은 집을

나에게 자꾸만 사달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집이 없어져야 아들네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할머니

그래서 그 할머니를 모시고

그 아들네 집으로 갔다가 나와 함께 쫓겨났던

바로 그 낡은 할머니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낡은 것들이 더 좋아지는 것일까

그 낡은 할머니는 오늘도 빈 마을 골목마다

홀로 다니시며 안부 인사를 전하고 계신다

아들 내외에게 쫓겨날 때의 그 할머니 표정 때문에

나는 자꾸만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였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몇날 며칠씩 잠도 못 잤는데

오늘은 자꾸만 나에게

잃어버린 아들을 대하듯 너무나 살뜰하시다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서 자꾸만

우영 밭의 감귤을 따오시는 낡은 할머니

그만 따오시라고 말려도 자꾸만 가지째 꺾어 오시는 할머니

이 마을에는 이제    

친구도 하나 남아있지 않고

자식 한 번 찾아오지 않는 낡아빠진 동하동 할머니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그 할머니가 바로 동하동의 첫 번째 친구가 되었다  


                                                                                   

눈부처    


나는 당신의 눈부처입니다

당신이 눈을 감으면

나는 곧 없어지고 맙니다    

 

당신은 나의 눈부처입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당신은 곧 내가 되고 맙니다     


                                                                      

굴러서  

   

이어도 오두막 가는 길

겨울답게 바람이 차고 매섭다

가로수로 심어진 벚나무 잎들이 뒤늦게 떨어진다

이제는 시골에도 흙길이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들이 아스팔트길 위를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서 길을 찾는다

나뭇잎이 머물 따뜻한 흙이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이 돌아갈 따뜻한 고향이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들은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따뜻한 흙의 가슴을 찾아서 한없이 구른다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뿌리가 보이지 않는다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서

구르고 구르고 또 다시 굴러서

나뭇잎이 찾은 곳은 결국 하수구 뿐이다


세상을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서

세상을 구르고 구르고 또 다시 굴러서

이제 겨우 이어도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두막에 도착해서도 나는 아직껏

하수구까지 흙을 찾아 들어간

그 나뭇잎의 안부가 자꾸만 궁금하다  


                       

마당     


이어도 오두막 마당에 자연이 한 장 펼쳐져 있다

겨울에도 달래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민들레꽃이 낮에는 노란 꽃등을 켜고 있다가

밤에는 꽃 문을 닫고 달빛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푸른 조릿대들은 울타리 쪽으로 물러나 조용히 일렁이고

로즈마리 향기는 오두막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들국화가 한 쪽에서 피어나 환하게 빛나고

겨울에도 딸기는 부지런히 봄을 준비하고 있다

수선화가 막 꽃대를 만들어 올라오고

백합 알뿌리는 땅 속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다

부추와 치커리와 배추와 무, 상추와 쪽파는

아침상에 누가 먼저 올라갈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다

들깻잎은 아직도 싱싱하고 브로콜리는 힘이 불끈 솟는다

앙증맞은 야콘 꽃은 좀 추운지 입술부터 떨고 있다

나는 이런 이어도 오두막 마당에서

달빛을 타고 내려온 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시를 쓸 생각도 잊어버리고

밤새도록 이어도 오두막 마당에서 자연을 읽는다

백일홍과 해바라기와 수수와 옥수수 그늘 아래서

별들과 함께 숨바꼭질 하는 그림을 서둘러 그리고 있다   


                           

마중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미리 나와서 기다리면

혹시나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나와서 기다려봅니다

당신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은 벌써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와서

봄을 만나고 있습니다

바람의 숨결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물소리가

한결 힘차게 들려옵니다

어떤 나무에서는 아이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립니다 

복도를 뛰어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이 움직이듯이

곱았던 나무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서둘러 동구 밖까지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이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기다리면 올 것만 같아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시는 똥이다     


나의 시는 내가 싸버린 똥이다

나는 너무 시가 마려워

사람 만날 시간도 없이 시를 싼다

나는 날마다 똥만 쓰고 있다

나는 날마다 시만 싸고 있다

내가 가득 담겨있는 똥통에

구더기들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싸놓은 똥들이

하루 빨리 거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거름이 되어

나는 다시

내가 싸놓은 똥을

내가 다시 먹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새들의 소문     


이어도 오두막에는 비밀이 없다

비밀이 여물 틈이 없다

새들은 확실히 소문을 따라다니며 산다

소문은 새들의 길이다

길이 따로 없는 새들은 언제나

소문을 따라서 날아다닌다

길이 없다는 것은

어디든지 길을 만들며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텃밭에 씨앗을 뿌리고 

일부러 흙을 덮지 않았더니

스프링클러처럼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버렸다   


                                                              

틈 혹은 숨구멍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사람도 틈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다

하늘에도 틈이 있고 허공에도 틈이 있다

땅에도 틈이 있고 바다에도 틈이 있다

그 틈에는 저마다의 숨구멍이 있다

하늘의 숨구멍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숨을 쉬고 있다

허공의 숨구멍에는

새들과 바람이 숨을 쉬며 살아간다

땅의 숨구멍마다 나무들이 자라고

바다의 숨구멍마다 물고기들이 자란다 

숨구멍이 또 다른 숨구멍을 키운다

사람들도

숨구멍마다 땀이 나오고 털이 자란다

심지어 돌담에도 숨구멍이 있고

돌멩이에도 숨구멍이 있다

삶에도 숨구멍이 있고 죽음에도 숨구멍이 있다

숨구멍이 숨구멍 속으로 스며든다

오늘은 빗방울이 숨구멍으로 스며들더니

밤에는 또 다시 하늘의 숨구멍이 반짝거린다

나는 수 없이 많은 빈틈으로 숨을 쉬고 있다

빈틈 많은 나는 오늘도 그 빈틈으로 살아간다   


                 

     


뼈가 아프다 사랑이 아프다

아픈 뼈를 가만히 만져본다

내 몸 속의 하얀 뼈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뼈를 직접 볼 수 없다

내 뼈들은 모두

나의 살과 나의 가죽에 갇혀있다

나의 살들이 글쎄

나의 뼈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다

뼈의 감옥, 하얀 뼈의 감옥

나는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살 수 있다

감옥 속에서 비로소 살 수 있는 나

당신은 나의 통뼈다 아닌가

나는 당신의 통뼈다 아닌가

나는 다시

사랑의 감옥에 갇혀야만 살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감옥에서만 살 수 있다

통뼈인 나는

살과 가죽이 가두어주어야만 살 수 있다

당신이 나를 가두어주어야만 살 수 있다

뼈 속으로 사랑의 피가 흐른다

장대비 철창이 하늘을 가두어버리는

오늘 나는

당신의 따뜻한 감옥 속으로 숨어들고 싶다   


            

     


발을 너무 오랫동안 담그고 있는

섬은 벌써 목까지 잠겨버렸다   

  

바다의 발걸음은 어찌하여

아담의 갈비뼈를 닮았을까  

   

한 쪽 발만 담그고 있는 바다 새의

시선이 멀리 섬에까지 걸어가고 있다 

    

살아있는 나무들은 모두가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풀들도 저마다 발을 담그고 있다   

  

나도 이제는 발을 담그고 싶다

당신의 깊은 곳에 발을 담고 싶다

아주 오랫동안 담고 있어서

목까지 얼굴까지 통째로 가라앉고 싶다  

   

섬을 바라보던 새가 드디어 

파도를 타고 올라서 섬으로 가고 있다   


                           

배추꽃     


이어도 오두막 텃밭에 배추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 동안

가슴 속에 꼭 껴안고 있던

배추 잎들의 깨끗한 가슴을 찢고 나와

하나 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그래도

찢어진 가슴으로 봄을 확인하시고

흙으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어머니 가슴을 열고 나온 꽃대에서

노랗고 예쁜 배추꽃들이

환하게 봄을 맞이하고 있다

작은 배추 잎들이 새로 돋아나고

배추꽃들이 만개하니

나비들도 행복하게 날아 오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철없는 배추꽃들만 

어머니 마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벌과 나비들에게 초대장을 쓰느라 바쁘다   


                                     

세월     


세상을 떠받칠 기둥 하나 깎으려고

도끼를 찾아 헤매던 시절 다 지나고

― 나의 삶처럼 너무 상투적이다

― 삶이 상투적이니 상투적일 수밖에

도끼 자루가 모두 삭아버렸다

세월은 그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흘러가 버렸다


숲에서도

도끼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숲 속 빈 옹달샘에

손잡이가 부러진

낡은 바가지만 하나

덩그렇게 앉아 비를 맞고 있다


세월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상투적이다   


                                     

모자   


헝클어진 머리 때문에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도 모자를 쓴다 나는 오늘도 시를 쓴다 나는 지금껏 안전모와 밀짚모자만을 써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의 영혼 위에 시의 모자를 쓴다     

모자를 써도 비가 오면 온 몸이 다 젖는다 모자는 결코 우산이 될 수 없다 모자는 결코 우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모자를 쓰면 젖지 않는다 비가 와도 나의 영혼은 결코 젖지 않는다 그래서 모자는 옷이 아니라 詩다 그래서 시는 우산이 아니라 모자다   

  

나는 이제 나의 모자를 쓰고 싶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자를 쓰고 싶다 거리에 모자들이 넘쳐난다 허공에 떠다니는 모자들이 몰려다닌다 나는 이제 나의 모자를 만들어야겠다 그 동안 나는 옷을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모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모자를 먼저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야겠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모자를 쓴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시를 쓴다 


                                           

     


나는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낡은 집입니다

당신이 돌아와 살지 않으면

곧 허물어지고 말 낡은 집입니다

당신이 끝내 돌아오지 않아도 

나는 당신의 체온을 잃지 않는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집입니다

당신과의 아름다운 기억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입니다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사람입니다     


                                        

     


왜 사람들은 식의주가 아니라 의식주라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늘 그 이유가 궁금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사람들은 왜 자꾸만 솔직하지 못하고

식보다 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늘

의식주가 아니라 식의주라고 우기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이제 겨우 그 이유를 알았다

의는 단순히 옷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는 바로 사람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의는 바로 사람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분명히

먹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정신이 죽어있는 사람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결국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어도 죽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식도 중요하지만 식보다 먼저 의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거미     


거미집에 풍뎅이 한 마리 걸려있다

거미집 주인이 둘러보러왔다가

깜짝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큰 먹이를 잡아서 좋기는 한데

망가진 집을 다시 고치려니

앞이 캄캄한 눈치다

아침부터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을 고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거미는 평생 집을 벗어날 수 없다

거미집은 거미에게

집이면서 직장이며

또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길이다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면 달릴 수 없듯이

거미는 거미줄을 벗어나면 살 수 없다  

   

나는 그런 거미를 닮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침 또 다른 거미를 만났다

애어리염낭거미와 별늑대거미였다

별늑대거미 한 마리 새끼들을 업고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그 거미를 닮지 않아서 더욱 아프다    


                

사과 꽃     


사과는 다섯 쪽으로 쪼개야 맛이 있다     

푸른 접시에 쪼개 놓은 하얀 속살     

감쪽같이 누가 다 먹어버렸을까     

내가 잠시 딴 눈 파는 사이에     

빈 접시에 못 먹는 씨앗만 남아있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 나고 똥 싼 종이에서 똥내 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똥 싼 종이에서도 향내가 난다 나는 이제 똥도 향기롭다 나도 이제는 향기로운 똥이 되고 싶다 


                                                                                                                  

무심  

   

무심이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무심한 마음으로 아침 산책을 한다

화순 곶자왈 생태 숲길을 걷는다

벌써 아침 공기가 쌀쌀하다

소들도 숲길에서 아침 산책을 한다

소들은 어제의 생각을 되새김질하며 걷는다

하지만 나는 무심한 마음으로 산책만을 한다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집에서 화장실 가는 일을 잊고 그냥 나왔다

나는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야만 하는데 깜박했다

무심했던 마음이 자꾸만 화장실을 찾고 있다

생태숲길에는 화장실이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면사무소까지 가야만 했다

아, 나도 누군가의 화장실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다시 무심하게 걷는다

아침 산책길이 푸른 하늘 속으로 뻗어간다

소들도 여전히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노루 한 마리 갑자기 뛰어도     

소들은 놀라지 않고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다

산책을 하던 소 한 마리가 갑자기 꼬리를 들고

텅 텅 텅 내 마음을 울리며 똥을 싼다

멈추지도 않고 걸어가면서 텅 텅 텅

무심을 떨어뜨리며 무심하게 걸어가고 있다  


                                                                                         

민들레

―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호의 / 니체


마당이 자꾸만 없어지는 시대에

오두막에 작은 마당이 있다

제주도에는 잔디마당 천지다

오두막에도 잔디마당이 있었다

민들레 홀씨가 날아와 자리를 잡았다

나는 잔디보다 민들레가 더 예뻤다

수시로 꽃이 피고 날개가 돋아나는 

그 민들레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오두막 주인은 잔디밭이 깔끔하지 못하다고 짜증을 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잡초 하나 없이 깨끗했다고 침을 튀겼다

이 세상에는 잡초가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잡초라고 뽑아버린다

그래도 나는 친구를 뽑아버릴 수 없었다

나의 친구는 다른 친구들도 불러모았다

나는 그냥 친구를 버리지 않았을 뿐인데

오두막 마당은 꽃밭이 되었다

오두막 주인이 자꾸만 마당으로 온다

오두막 주인도 이제는

잔디보다 민들레를 더 좋아한다

민들레 식구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아예 자기 몸으로 만들어버린다

민들레를 먹은 육체는 민들레의 영혼이 된다

오늘도 오두막 마당에 꽃이 피고 날개가 돋는다  


        

발효     


오늘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가스보일러를 켠다

허리에 파스를 혼자 붙이고 파스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

아주 먼 곳에서 시조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공룡들의 울음소리와 나무들 조상이 땅에 묻히는 소리가 들린다

땅 속에서 오래도록 발효된 그들이 가스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연탄이 되거나 석유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되살아난 그들의 눈빛이 그들의 불꽃이 나의 허리를 지진다

방바닥 밑으로 흐르는 불물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내 몸과 영혼이 이렇게 다시 따뜻해지는 것은

가스 때문일까 보일러 때문일까

아니면 허리에 붙인 파스 때문일까 파스 같은 그 사람 때문일까     


꿈속에서 나는 산투르를 연주하고 있었다

영혼이 잘 발효된 음악은 춤을 만들고 사랑을 만든다

영혼이 잘 숙성된 그림은 시를 낳고 종교를 낳는다

음악은 한 순간의 꿈이지만 영원히 남고

그림은 오래도록 남지만 영혼의 눈빛이 부족하다

지극히 오래도록 잘 발효된 예술만이 행복의 문으로 인도한다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보일러가 되고싶다

나도 누군가의 잘 발효된 예술을 낳고 싶다

가장 잘 발효된 영혼만이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예술이 되리라               



대나무 밭에는     


대나무 밭에는 대나무만 자란다

대나무 밭에는

다른 풀들이 얼씬도 못한다

대나무 밭에는 대나무들만 자란다

반듯한 것들은

반듯한 것들과 함께 자란다

반듯한 것들은

반듯한 것들과만 어울린다

반듯한 것들은

반듯한 것들과만 함께 어울려 자란다

죽을 때에도

반듯하게 죽는 대나무들은 오늘도

반듯하게 반듯반듯하게만 자란다 

    

반듯하게 살다가

반듯하게 죽은 대나무가

반듯한 죽비로

다시 태어나

반듯한 죽비 소리를 낸다  


                                 

촛불     


이어도 오두막 마루에 촛불을 켰다

키가 다른 초 열 한 자루에 불을 붙였다

열 한 자루의 초를 한 데 모아 불을 켰다

마당의 대나무들이 일제히 절을 하였다

키가 큰 초는 허리를 녹여

키를 낮추었다

바람이 불었다 대나무 울타리가

다시 한 번 한꺼번에 촛불에 절을 하였다

바람도 따라서 촛불에 절을 하였다

바람과 대나무의 숨결이 하나가 되었다

키가 다른 초들은 서둘러 키를 맞추었다

이어도 오두막에 숨결이 돌기 시작했다

고양이도 한 마리 다가와 함께했다

달빛과 별빛에도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촛불을 끄기가 무섭게 이어도 오두막은

또 다시 달과 별들의 차지가 되었다

대나무들이 아무리 쓸어내어도

달빛과 별빛은 쉽게 쓸려나가지 않았다

달과 별들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침낭     


나는 요즘 밤마다 누에가 된다

나는 요즘 밤마다 고치 속에서

쭈글쭈글한 번데기가 된다

나는 요즘 날마다 나비가 된다


나도 내 자신이 스스로

이렇게 따뜻한 사람인 줄을

이제야 겨우 알았다

냉혈인간이 아님을 이제야 알았다

나도 이제는

한 사람쯤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오직 사랑 하나 때문에

그 추운 겨울 내내

온전히 따뜻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밤마다 쌍둥이 누에고치가 된다

나는 이제 날마다 쌍둥이 나비로 날아간다



밥시     


밥 짓기가 쉬운 것 같아도 

밥다운 밥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과 불과 기다림이 관건이다


아무리 반찬을 맛있게 잘 만들어도

사람들은 

반찬상이 아니라 밥상이라고 말한다


나는 반찬시가 아니라

밥시를 쓰고 싶다


밥값이 되지 못하더라도

우리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밥시다운 밥시를 써야만 하겠다


밥시의 관건은

밥과 시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영혼의 바람이다


나는 밥다운 밥을 짓고 싶다

나는 시다운 시를 쓰고 싶다   


                      

달과 태양     


달은 밤새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린다

태양은 하루 종일 꽃을 피운다

달과 태양은 평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을 경작한다

그렇게

평생 경작한 하늘을

달과 태양은 결코 소유하지 않는다

소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도 남기지 않는다

그런 글도 남기지 않는다

달과 태양은 그냥 그렇게

오늘도 어제처럼 하늘을 경작할 뿐이다   


                                                              

日月     


평생 어둠을 갈아엎어도 어둠은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씨앗은 어둠 속에서 발아한다

별들이

갈아엎은 어둠 속에서 발아한다   

  

오늘도 쉬지 않고 갈아엎고 있다

바다 밑 어둠까지 갈아엎으러 간다 

    

가는 곳마다 워낭 소리 피어난다   


                                                              

흔들리다   


바람이 분다 나무들이 흔들린다

바람이 분다 나도 흔들린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나무들의 발가락 손가락들이 꼼지락거린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나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다시 바람이 분다

죽은 나뭇가지가 뚝 부러진다

죽은 나무는 이제

바람이 불어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몸과 마음이 자꾸만 딱딱해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살아있으므로 흔들리고 있다   


                                                         

     


야생초 밭을 일구는 나는

잡초라는 말이 궁금해졌다

초는 알겠는데 잡이란 말이

알쏭달쏭 하였다

잡이란 말을 검색해보았다

잡은 ‘직업’이라고 검색된다

그렇다면

잡초는 풀의 직업이란 말인가?

풀들의 직업은 무엇일까

풀들의 임무는 무엇일까

풀들은 흙의 옷이다

잡이란 말을 다시 한 번 검색한다

잡은 ‘섞이다’라고 검색된다

그렇다면

잡초는 섞여있는 풀이란 말인가?

섞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잘 섞이지 못하는 나도 이제는

누군가와 잘 섞이고 싶다

나도 이제는 잡초가 되고 싶다   


                           

시월     


시월에는 과일들도 꽃이 된다

시월에는 잎새들도 꽃이 된다

시월에는 그림자까지 

화려한 가을 빛깔로 물든다

시월에는 그림자까지

가장 아름다운 자태로 눕는다

나는 지금

저 아름다운 가을의 빛깔을 본다

환하게 꽃피는 잎들의 가을을 본다

환장하게 황홀한 가을을 보고있다

저 붉게 불타는 잎들의 석양을 본다

노랗게 물드는 잎들의 노을을 본다

마지막 남은 목숨을 스스로

활활 불사르는 다비식을 보고있다

그들은 곧 하늘을 날아서

여신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연의 젖꼭지를 물고 잠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그들은 또 다시

떠나온 나무를 타고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하늘로 반짝일 것이다

그러니까 시월은 결국    

잎들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쓰는 계절이다


                                                                                                              

취사    


압력밥솥 취사버튼을 누른다

불 조절이 가장 어려운데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불 조절이 되지 않는다

취사금지구역인 당신의 몸에

나는 자꾸만 불을 넣고 싶다  

   

삑삑 삐익 기적소리 울린다

들끓던 쌀알들이 밥이 되어

모두 제 자리를 찾아 앉는다  

   

격정의 정거장을 지나온 사랑이

서로의 가슴을 끌어안고

은근한 따뜻함으로 스스로 바꾼다 

    

기적소리 멀어지고

보온버튼에 불이 들어와도

나는 여전히 불을 넣고 싶다  

   

끝까지 취사선택이 되지 못해도

취사금지구역인 당신의 영혼에

나는 자꾸만 군불이라도 넣고 싶다 


                   

맹지    

 

나는 맹지입니다

나는 오늘도

그대에게 갈 수 없습니다

길이 없어서

나는 갈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 드디어 갑니다

저 푸른 하늘로 솟아올라

나는 이제

꿈에 그리던

그대를 만나기 위하여

드디어 창공을 날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맹지입니다

나는 이제 푸른 창공입니다   


                                                    

천칭     


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

천칭자리 별들을 바라본다    

 

새해 계획표를

아직도 작성하지 못했다  

   

계획표에 당신을 넣으려니

눈물이 너무 많을 것만 같다   

  

당신을 아예 빼려고 하니

내가 통째로 없어져 버린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당신 때문에

나는 도저히 계획표를 작성할 수 없다  

   

하늘의 천칭자리 별들을 본다

밤새도록 궁리를 깊이 하여도

하늘의 저울은 기울어지지 않는다  


                                      

수목원에서  


나무가 없다 수목원에 나무가 없다

풀 한 포기도 없다

수목원에 글쎄 수목이 하나도 없다

낙타만이 터벅터벅 길을 가고 있다

그 낙타가 지나온 길을

또 다시 모래바람이 지워버리고 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지금껏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한

나의 삶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 마리 낙타였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한 마리 곱사등이 낙타였다

나에게는 온통 사막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도 오아시스처럼

또 다른 낙타가 다가와

우리는 한 때 쌍봉낙타가 되어

사막에서도 푸른 초원을 걸었다     


길은 이제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고

급브레이크의 비명소리만 남기는 시대

그런 아스팔트길에서

새벽 청소를 하다가 떠나간 낙타

급브레이크의 바퀴자국 속으로

영원히 떠나가 버린 사랑하는 낙타    


똑바로 누워 잠들고 싶었던

그 꿈은 이제 겨우 이루었지만

이 지상에 아직도 남아있는 꼽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생각에

밤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리움

그 낙타 등 같은 둥근 봉분 하나

그 그리움으로 자라나는 잔디들

그 잔디 위에 별이 피고 보름달이 뜨고     


잠들었던 나를 퍼뜩 깨워주는 낙타     


나무 그늘에서 함께 잠들었던 아들과 나

나를 흔들어 깨우는 남편 손길 같은 햇살

그 눈부신 햇살로 꿈꾸고 있는 낙타

아직껏 한 번도 업어주지 못한

옆으로 잠든 곱사등이 아들을 보면서

바늘구멍은 아직껏 빠져나가지 못했지만

그 바늘구멍 속으로 보이는 오아시스

그 바늘구멍 속으로 보이는 푸른 수목원에서     


낙타는 드디어 쌍봉낙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돌탑     


제주도 한라수목원 입구에 돌탑이 있다

그 돌탑은 완성되지 않고 아직도 살아있다   

  

나는 벌써 몇 년째 그 돌탑을 보고 있다

어느 할아버지 한 분이 쌓고 있는 돌탑   

  

그 할아버지는 아마도

내가 알기 훨씬 전부터 그 일을 했으리라    

 

어디서 그 돌들을 가져오시는지

하루에 하나씩 돌을 돌탑에 얹으셨다  

   

산책길에 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면

나도 따라서 돌 같은 시를 쓰곤 하였다   

  

작은 돌탑 모양이 만들어지면

그 할아버지는 그 돌탑을 무너뜨리셨다 

    

그런 날은 나도 나를 무너뜨리곤 하였다     

돌탑 아랫부분을 좀 더 넓게 자리 잡고

다시 좀 더 큰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시도 함께 넓어졌다  

   

그렇게 탑의 넓이와 크기를 키워가던

어느 날    

돌탑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길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실어가 버렸다 

    

한 동안 그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시 쓰기 또한 어느 날 멈추고 말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멈추고 말았다

나는 그냥 그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새 해 첫날 나는 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 할아버지는 큰 돌을 하나 가져오셔서

다시 돌탑 쌓을 자리를 정리하고 계셨다

     

순전히 그 할아버지 때문에 나는

다시 나의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돌탑 때문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 때문에

나는 다시 나의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살아있는      


책상에서 시를 쓰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시를 쓰던 종이는 없어지고

꽃게 한 마리 바다로 가고 있다  

   

바다에서 시를 쓰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았다

시를 쓰던 수평선이 없어지고

섬 하나 하늘로 떠오르고 있다   

  

하늘에서 시를 쓰다

길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시를 쓰던 태양이 없어지고

검은 새들이 내려앉고 있다   

  

캄캄한 가슴 속에 시를 쓰다

보름달 한 번 올려다보았다

시를 쓰던 가슴이 없어지고

그 큰 나무 한 그루 하늘을 덮고 있다    


                               

게으름  

   

런닝런닝런닝런닝런닝런닝런닝팬티팬티팬티팬티팬티팬티팬티양말양말양말양말양말양말양말

메리야스 일곱 개 팬티 일곱 장 양말 일곱 켤레

마당 빨래줄 가득 걸려 뚝뚝뚝 일주일을 흘리고 있다     


팔만대장경 빨래판을 읽고 다시 방에 들어와 눕는다     


게으름은 방바닥에 산다

게으름은 등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게으름은 사랑과 같아서

질투심 많은 게으름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게으름은 문을 싫어하고

게으름은 길을 미워한다

사랑이 문 열고 길로 떠나려 하면

등에 착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는다     


게으름은 사랑의 발을 아예 못쓰게 만들어버린다

게으름은 우리들의 발을 지우고 몸을 지우고

갑자기 날개를 달아준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것은 주검이다

꿈쩍도 하지 못하는 주검에서 자꾸만 날개가 돋아난다     


               

된장 국밥   


단순하게 산다

단순하게 먹고

단순하게 쓴다   

  

뚝배기에 물을 붓고

밥을 안치고

된장을 한 숟갈 푼다   

  

불만 넣으면 끝이다     


내가 개발한 된장 국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내가 쓰는 시들은

내가 개발한 나만의 된장 국밥이다  

   

밥과 된장과

물과 불만 있어야 진짜 된장 국밥이다   

  

고춧가루 하나라도 들어가면

된장 국밥이 아니라 잡탕이다  

   

나는 된장 국밥을 먹고

된장 국밥 같은 그런 시를 쓴다  


        

나무 가는 길  


배은망덕한 나는 스승님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너무나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스승님을 직접 찾아뵙고 사죄하려고 길을 떠난다


누군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다 

                       

아, 스승님께서는 산으로

나무 하러 가신 것 이었구나  

   

제자의 찬 방에 군불을 지펴주시려고

날마다 이 길로 나무하러 가시는 구나 

    

여전히 긴 목에 스카프를 하시고

둥그런 안경 너머로 말씀하고 계신다 

    

선생님께서는 나무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행갈이가 서툰 나에게 행갈이부터 다시 가르치신다   


       

겨울잠  

   

집이 통째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겨울이 깊을수록 나는 완전히 곰이 되었다

곰도 나처럼 자다가 자다가 지치면

잠시 일어나 아픈 허리를 풀어주고 다시 잠들었으리라

곰도 나처럼 또 자다가 자다가 지치면

물 한바가지 마시고 다시 잠들었으리라

쑥도 마늘도 먹지 않고 물만 마시고 잠들었으리라

곰도 나처럼 또 다시 자다가 자다가 지치면

잠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와 보고

하얗게 눈 쌓인 눈 세상이 너무 눈부셔 다시 들어갔으리라

똑바로 누워도 보고 옆으로 누워도 보고 턱을 괴고 엎드려보다가

두꺼운 그리움을 덮고 겨우 겨우 다시 잠들었으리라

곰도 나처럼 겨울 내내 꿈속에서

봄이 오는 발자국 소리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봄이 오면 나도 곰처럼 사람으로 환생하리라   


                                          

와 詩人   

  

言語에 칼질을 잘 해서

詩 비슷한 것을

잘 만드는 사람이

詩人이 아닙니다

사람의 길을 찾아

그 사람의 길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그런 사람이 바로

진짜 詩人입니다

그런 詩人의 삶이

바로 진짜 詩입니다  

   

나는 지금 이어도 공화국에서

그런

영혼이 맑은 당신과 함께

가장 향기로운

詩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어도 공화국 서

― 백 년 동안의 꿈과 희망


꿈만 꾸었다 너무 오랫동안 꿈의 섬 이어도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돌아왔다 꿈속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세상을 이 지상에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꿈과 삶과 글이 하나로 만나 행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어도 공화국』을 쓰기 시작한다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쓴 모든 글들은 『이어도 공화국』을 쓰기 위한 습작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은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연습 이었다 나는 앞으로 100권의 『이어도 공화국』을 쓸 작정이다 나는 앞으로 백 년 동안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 작정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시나브로 할 것이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아야만 하리라 나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넘어, 백 년 동안의 꿈과 희망을 위하여 출발한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세상 읽기와 나만의 세상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나팔을 불며 시작한다     


긴 꿈을 꾸었다 눈을 떠 보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 없는 길을 걸어서 간다     


바다의 발걸음에 맞추어 해변의 모래밭을 걸어본다 바다의 발걸음소리에 맞추어 해안선을 읽어본다     


걷다가 문득 모래 한 알이 된다 가슴 하나가 전부인 모래알이 된다 눈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본다 입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부른다 귀가 없는 모래 한 알이 듣는다     


모래밭이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가슴 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전생에 나는 한 마리 낙타였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한 마리 곱사등이 낙타였다 나는 이제 다시 시아노박테리아가 되어 산소를 만들기 시작한다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평생 사랑하고 있다 모래알 하나는 모래알 하나만을 평생 사랑하고 있다     


또 다시 바닷가 모래밭을 걷고 있다 너무나 먼 강을 따라 내려와 모래가 된 바위를 알고 있다     


당신은 바다처럼 울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바다보다 깊이 울어본 적이 있는가     


갈대는 봄부터 몸을 비운다 갈대는 봄부터 마음을 비운다 그런 갈대의 숲 속에 작은 개개비 둥지 하나 만들기 시작한다     


아직 황금빛 모래에 도달하지 못한 몽돌들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몽돌 속에는 저마다 빛나는 모래 한 알 들어있다     


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되라고 한다 자꾸만 나에게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되라고 한다               

모래밭 끝에 숲이 하나 있다 그 숲으로 간다 용설란 가로수 길을 걸어서 들어가고 있다 길 가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용설란 가로수 길 끝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탱자 꽃으로 꽃피어있다     


탱자나무 울타리 밖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문이 보이지 않는다 용설란 꽃대를 타고 내려온 한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나에게 비밀을 속삭여 주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는 로즈마리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로즈마리는 자줏빛 꽃잎을 터트렸고 나 또한 로즈마리처럼 자줏빛 꽃잎을 터트리며 걸었다     


로즈마리 숲을 지나 비익조를 만났다 삼광조와 팔색조도 만났다 비익조가 아직도 숲 속에 살고 있다     


라플레시아,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기 위하여 손도 잘라버리고 다리도 잘라버리고 오직 붉은 심장 하나로 살아가는 꽃     


깊은 숲 속에 옹달샘이 하나 있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옹달샘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푸른 하늘 깊은 가슴 속으로 날아오른다     


옹달샘 곁에 오두막이 한 채 있다 숲 밖이나 숲 위에 집을 짓지 않고 숲 속에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다         


오두막에서 나무처럼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이어도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큰 나무 같은 촌장님 이셨다      


이어도에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이어도 사람들은 이어도 숲에 나무를 함께 심고 함께 가꾸어준다 사과나무도 좋고 소나무도 좋다 이어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깊은 숲 속에 조촐한 집을 짓는다 옹달샘 곁에 옹달샘 집을 짓는다 무덤 같은 집을 짓는다 이어도에 나의 집을 짓는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 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이어도에 온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요한 방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 공동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어도 공동체 그런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이어도 사람들은 모두가 나무와 함께 태어난다 이어도 사람들은 무덤 대신 한 그루 나무와 등대로 남는다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것이 진리라고 모두가 믿고 있을 때에도 나무는 홀로 고요하게 물을 온 몸으로 뿜어 올리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거대한 나무 숟가락들이 숲을 이루었다 하늘을 휘휘 젓다가 하늘을 떠먹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낮에 내가 다니던 길로 밤이면 착한 꽃사슴들이 둘러보리라 나무 숟가락들은 그들에게도 하늘 한 수저 떠먹여 주리라     


이어도에는 게으른 몽상가가 살고 있다 가끔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죽어도 죽지 않는 책이다     


산책길에 어느 게으른 몽상가를 만났다 그는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태어났다 바다를 건너온 그는 오늘 나를 만났다     


겨울나무는 모래시계처럼 몸을 크게 한 번 뒤집는다 나무들은 그렇게 하늘과 땅의 영혼을 제 몸 안으로 가득 끌어 들인다     


이어도 사람들은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자서전을 쓴다 아름다운 자서전을 한 권 남기기 위하여 더욱 아름답게 살기를 꿈꾸고 실천한다     


이어도 숲 농장이 있다 이어도 숲 전체가 이어도 숲 농장인 셈이다 이어도 숲 농장에는 온갖 과일나무들과 온갖 채소들이 많다 이어도는 축복받은 땅이다         


이어도 수면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수면실이 있다 이어도 수면실을 찾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 속에서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하나 찾을 수 있다     


이어도 자살촌이 있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희망촌이 있다 이어도 자살촌은 가난할수록 좋다     


이어도 사랑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없는 사랑이 없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랑이 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언제나 몸부터 사랑하지 않고 마음부터 사랑을 한다 영혼부터 사랑을 한다 이어도 사랑촌은 그렇게 깊은 곳이다     

이어도 부활촌이 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어도 부활촌에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부활하고 있다     


이어도 창작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풍경소리가 있다 세상에서 길을 잃은 당신은 이어도 창작촌에서 당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어도 생명촌이 있다 옹달샘처럼 끊임없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이어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어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 이어도에서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이어도에는 이어도의 꿈을 이어주는 이어도 생명촌이 있다     


이어도 꿈동산이 있다 어린이들의 꿈동산이 있다 옹달샘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꿈동산이 있다 이어도에는 아직도 그런 아이들의 이어도 꿈동산이 있다         


이어도 명상촌이 있다 이어도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모든 생활 속에는 명상이 들어있다 그리하여 이어도에는 깊은 이어도 명상촌이 있다     


이어도 하늘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오래된 사람들이 많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어도에는 참으로 많은 어른들이 있다 이어도 하늘촌은 이어도 생명촌과 이어도 꿈동산 바로 곁에 있다     


이어도에는 군주도 따로 없고 백성도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오직 다른 생명들처럼 사람은 모두가 오직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이어도에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무한한 행복이 최고의 덕목이다     


이어도에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서는 처음부터 결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어도는 다른 어떤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다     


이어도를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나라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어도를 당신은 아시나요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이어도에는 황조롱이가 살고 있습니다 황조롱이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젖과 자궁이 없어서 가장 안타깝습니다      


이어도는 별무덤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 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이 지금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아직도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그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이어도 앞 바다에 멍텅구리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멍텅구리 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때 갇혀 살았던 지옥의 멍텅구리 배 생각에 다시 멀미납니다 오늘도 이어도 앞 바다에 멍텅구리배가 있습니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이어도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너나들이가 살고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이 시대에 너는 나고 나 또한 너인 그런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가장 아름다운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꽃입니다 이어도 카페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향기를 선물하는 시인이 있다 그는 평생 로즈마리를 길렀고 사람들은 평생 그에게서 로즈마리 향기를 가져갔다     


이어도에 한 아이가 찾아왔다 아직 오지 말아야할 아이가 서둘러 찾아왔다 그 아이는 인천 효성동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놀랍게도 아버지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단다 준수의 아버지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내가 전생에 살았던 세상 속으로 걸어서 간다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에 은어들을 만났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은어축제에 초대받은 그들은 그냥 불러주기만 해도 고마운 고향에서 자신들을 위하여 축제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인간들에 대하여 너무나 황송하다며 온 몸이 빛나는 꿈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이어도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배를 타고 왔으며 나는 헬기를 타고 왔다 이어도는 내 꿈의 고향이었고 그가 새롭게 부활한 낙원 이었다     


바람이 차다 바람이 파도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파도가 높다 파도가 마라도 가슴팍을 후려친다 고구마같이 생긴 마라도에서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 퉁소를 불던 사람이 불을 놓아버린 이후로는 아무리 퉁소를 불어도 뱀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가오리 한 마리 바다 위에 납작 엎드려있다 나는 그 가오리 등을 타고 바다에 떠 있다 하멜이 지나갔던 길 위로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모세의 지팡이 같이 생긴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가 아니므로 그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한라산을 오른다 1100도로를 달려 올라간다 영실 휴게소에서 약수를 떠먹는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한라산 훼손 지 복구용 흙 그 흙 한 봉지 배낭에 짊어지고 올라간다      


준수와 함께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에 나는 은어들을 만났다 은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만 준수를 잃어버렸다 준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 낡은 집에서 살기로 작정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니다 우연과 필연은 어차피 같은 말이다 나도 처음에 문을 열어보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     


첫날밤을 치러 내기 위하여 밤새 청소를 한다 속옷까지 모두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온 몸으로 청소를 한다 몸과 마음을 청소하다가 그냥 쓰러져 잠을 설친다     


바다와 하늘과 바람의 섬 이어도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지상으로 다시 건너왔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새롭게 출발 한다 출발은 이렇게 늘 가슴 설레며 아득하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살았던 이어도와 이 세상은 참 많이 다르다 이어도에서는 집은 집이고 땅은 땅이다 빈집이 있으면 그냥 살고 싶은 사람이 살면 되고 빈 땅에 씨를 뿌리고 싶으면 아무라도 씨를 뿌리면 되었다     


거실과 방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와야만 했다 어느 누가 살았었는지 몰라도 떠나간 뒷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전기를 만드는 사람이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것은 전기 탓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 투성이다     


빈 집은 빨리 낡는다 비어있는 사람도 일찍 죽는다 새로운 집을 만들기 보다는 헌 집을 고쳐 쓰기가 더 어렵다 거실 청소를 한다 해탈이 따로 없다 해탈과 탈피는 어디라도 있다     


청소는 끝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많은 여자들의 주 업무가 청소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청소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듯 싶다 하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청소를 한다     


뼈대 없는 내가 뼈만 있는 발전소에 있다 나는 지금 뼈대 속에 살아 있다 발전소에서 나는 지금 가랑이를 쫘악 벌리고 불을 지피고 있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하늘 발전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계신다     


나무들 속에는 발전소가 있다 부지런히 퍼 올리고 있다 나무들은 밤낮없이 땅의 소식을 하늘에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남자는 숟가락으로 팍팍 퍼서 먹는다 여자는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는다 나는 잠을 자다가 가끔 나의 숟가락을 만져본다          


첫눈이 어지럽게 내린다 나는 이제 첫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언제나 시작만 있었다 길 입구에서 나는 언제나 나의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전기를 만들고 있다 불빛을 만들고 있다 별빛을 만들고 있다 그리움을 만들고 있다     


전생에 나의 이름은 鎭星 이었다 아버지 친구 분이셨던 신발가게 아저씨가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들었다     


쩨쩨하게 살지 말고 통 크게 살아보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살아보자 목숨을 걸어볼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에 목숨을 걸어볼 것인가 내 평생의 소망에 목숨을 한 번 걸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공화국]을 기필코 만들어보자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살고 싶다 옹달샘의 샘물이 되고 싶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그 병든 새들이 옹달샘에서 나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한 새들이 다시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이미, 그 새의 몸이 된 나 또한, 그와 함께 깊은 궁창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먼저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오두막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나무와 함께 살다가 나무로 부활하고 싶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무덤 대신에 나무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죽어서도 서로 곁에서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부는 날은 가끔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이어도 베이스캠프를 친다 서귀포 화순항 내려가는 길, 월라봉 입구 퍼물논에 본거지를 먼저 만든다 [이어도 공화국]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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