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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25. 2023

이어도공화국 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5

―  우리들의 고향

   



                    배진성 시집


                                                                                                             










배진성 (裵鎭星)     


1966년 출생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서울예대 졸업, 방송대학 졸업

           동국대학 대학원 중퇴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희망』

『이어도공화국 0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0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0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04 - 꿈섬』

 yeardo @ naver.com 

                                                                                                                                                                                                                                                                




아름다운 당신을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서천꽃밭에 초대합니다.


                                                                                                                                                                                                                                                                    

시인의 말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2023년 봄여름

연어의 종착역에서 배진성    




                                                                            

차례               



시인의 말     


징검다리  14

경운기  16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18

길이 있는 풍경  20

연(鳶)  21

밤하늘은 반란이다  22

겨울수첩  23

봄날의 여행  24

집, 108번지  25

겨울포구  27

끊임없이 부대끼며  28

두근거리는 바다  29

삼굿이 있는 고향  30

고구마 순  31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32

돌고 돌고 또 도는  33

가슴이 아픈 아이  34

땅 냄새  35

사람이 사람을 벗는 시대에  36

팽이  37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 꽃  38

붉은 염소  39

문  40

가난과 자유  41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42

살아서 흐르는 넋  43

지상에도 너무 많은 뜬구름이  44

나의 고향은……, 미래에서 찾습니다  45

산방산 안에서  46

바다로 가는 자전거  47

이어도  48

별빛과 불빛  52

잃어버린 혀를 찾아서  53

억새꽃  54

길 끝에 서 있는 길  55

사람의 고향  56

사과꽃망울  57

산을 내려오는 산 그림자  58

횡단보도  59

보아뱀  60

수혈에 대하여  61

나무 발전소 1  62

나무 발전소 2  63

월라봉  67

발로 하는 세수  68

액자  69

봄에는 그림자에도 새싹이 돋는다  70

도시 나무  72

산책  73

반듯하게 세우다  74

눈이 내린다  75

마중  76

눈부처  77

마당  78

틈 혹은 숨구멍  79

뼈  80

배추꽃  81

집  82

무심  83

발효  84

천칭  85

詩와 詩人  86

등나무  87

이어주는 섬  88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89       



                                                     

징검다리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질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개 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 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 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



멀리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보리논에서

솟아오르곤 했다 하늘을 들이받으며 뻑뻑하게

거슬러 올랐다 구름의 층계를 밟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 위에

비스듬히 떠오르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높이

이마에 별을 달고 떠 있는 방패연이

부러웠다 꼬리를 잘라 버린 마음으로

떳떳한 어깨는 떵떵거리고 있었다

나는 꼬리 끝까지

온몸으로 흔들리는 그리움으로

기어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단하게 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내 몸에 몰아쳤다 얼레가 정신없이 헛돌아

풀렸고 끈을 묶은 아버지 허리가

부서져 내렸다 너무 먼 곳에서 다시 내려다보았다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겨울 허수아비가

꿈속으로 보였다 연실을 타고 올라온 소식

침 발라 붙인 편지가 아버지 목숨처럼 떨어졌다

나는 끈을 따라 내려가 음복 같은 바람에

취한 몸으로 땅에 깊이 엎드려야만 했다

끝내 나는 그렇게 겨울 밖으로 날아가지 못했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고향의 밤, 별들이 싸운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바람이 분다 쓰러진다 다시

넘어진다 별은 쌈질하는 입이다 주점

젊은 여자의 열린 자궁 속이다 길들이

제 골목을 찾아 들어가도 동네는 앞으로도

시끄럽다 물소리도 밤하늘을 쥐어뜯으며

이어져 흐른다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 우리 집은

골목 끝으로 몰렸다 동네의 개들은 무리 지어

일제히 짖어댔다 끝에 매달린 우리는 건너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바람에 쓰러진 곡식들이

줄기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솟아올랐다

태풍의 눈이 다시 무섭게 쏘아보았다 우리들의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포식한 어둠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악을 썼다 몽둥이질

낫을 들고 휘둘렀고 쇠스랑으로 후려

갈겼다 검은 까마귀는 떼로 몰려와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 속에도 하늘이 있었다 떠가는

흰 구름 변두리에 걸린 빛의 폐곡선에

갈라진 고향의 고샅길들이 감기고 있었다 그

하늘 속에는 메마른 공동우물이

파헤쳐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겨울수첩



눈은 내리고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눈은 내리고

걸레 쪼가리같이 거덜 난 구름

그늘 아래로만 고개 떨구고

날파람동이처럼 눈은 내리고

부서진 십자가의 겨울 포도밭

눈은 비렁뱅이처럼

예수처럼 내려 쌓이고

 

잠이 많은 사람은

잠 속에 빠져 죽고

꿈이 많은 사람은

꿈속에 묻혀 죽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생각 속에 깊이 가라앉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하얗게

지워져 버리고 소복 입은

소식은 끊임없이 내려

겨울 깊이 쌓이는데

그 속에서 허기진 몸으로

보리밭을 본다 문득

풋보리인 내가 맨발로 눈을 뜨고,

         


                                     

봄날의 여행



물구나무서기로 오는 새벽

잠 밖으로 따라 나온 갈매기가

나이 크기만큼 열린 새벽 속으로

날아올랐다 몸으로 내린 햇살이 나를

넘어뜨렸다 벌렁 누워버린 그림자쯤으로

낮게 젖어있는 나도 일어서 걷고 싶었다

벌건 대낮에도 속살을 벗어던지는

분수처럼 제자리 뛰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강의실 귀퉁이 태양이 버린

그늘에 그늘로 앉아 그 속으로 달려오는 햇발의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였다 기웃거리는

얼굴들이 까마득히 지워져 깊은 칠판처럼

나도 나를 비워버리고 개나리 빗어주는

남서풍 속살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된 나는

바람보다 오랜 기슭을 넘어간다

어깨너머로 휘파람처럼 물러서던 어린 날

모래톱에 묻어두었던 발자국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여울물 소리를 실패에 감으며

부르시던 어머니보다 나이 크기만큼 먼저

도착하여 뒤돌아보면 징검다리에 서 계시는

어머니는 늘 강아지쯤으로만 바라보셨다

그러나 나는 들꽃 속에 숨어 손바닥에

귀 기울이고 잠든 강아지풀을 흔들면 복실이로

깨어나 꼬리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좋았다

오요요, 오요요, 오요요요, 요요요요요요 ………,

손금을 밟으며 기어 온다 나도

어머니 손금 속으로 기어들고 싶은데

문득 돌아와 보면 시가지의 가슴마다

초라하게 작아진 희망의 형식을 안고

바람은 바람을 불며 바람 불어 간다




, 108번지



()

미끄러지며 나갔고 다시 넘어지며 들어왔다 늘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문패 아래서 나는

나를 언제나 제대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한 칸

밤새 길을 걸어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길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고

싶었다 아침부터 비스듬히 미끄러져 내렸다

서부역 소화물들 묶인 채

실려 가고 있었다 온종일 실습복 차림이었던 고교 3년

베란다에 빨래쯤으로 걸려 온몸으로 그리워하던

기숙사 생활 꾸려 보낼 때

그곳은 왠지 모를 눈이 흩날렸다 나는 어디로

누구의 집으로 보내지는 소화물일까 문득 가야 할

주소가 없다 이사할 때만 있던 집 짐을 쌀 때 가장

편했고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도둑맞곤 했다 나의

집은 짓는 동안에도 한쪽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시나브로 내 몸의 집까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두 칸

먼 고향까지 가 닿고 온 기차들

엇갈리는 순간 속으로

어머니가 보이기도 했다

명절 때 귀성인파 용산역 예매장 나는

이슬을 맞으며 트럭 짐칸에 실려 귀향

밤 코스모스는 어둠 속에

그래도 등불처럼 켜들고 있었다

이슬은 짐칸 밖으로 물러서 내렸다 그러나

이미 젖은 마음까지 마르기도 전에 돌아왔다


세 칸

서울역 광장 풀씨가 없어도 사람들은 모였고

다시 숨죽이며 흩어지곤 했다 건물 숲으로

이른 별똥별이 내리기도 했다 안내소에서는

입장권만 팔았다 늘 보이던 예수 같은 사람이

주먹질을 해도 여전히 손님 앞에서 고장이었다

헌혈 차와 전경 차는 오늘도

나란히 달라붙어 갉아먹고 있었다

…, 피를, 뽑아, 먹고, 사는, 여자, 사람들 …,

호텔 앞 자가용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꿈의 건널목은 얼마나,

시간의 깊이처럼 길었을까(?) 처녀 같은

우리나라 여자들이 주황 신호등에 걸려 있었다




겨울포구



밤새도록 들쑤신다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들과

형들은 다음날도 돌아오지 못하고

기다리던 어머니들은 파도처럼 누워

몸 뒤채이며 앓았다 나는

부레 뜬 꿈으로 흔들리고


빈 생선 궤짝들 사이에 부서진 침묵이 쌓여 있고

입덧 난 바람이 파도 이랑을 갈아엎어도

봉해진 소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어둡게


뜨겁다 가슴 뜨겁다 아무리 불을 피워도

몸은 녹지 않고 얼어붙은 쥐고기들이

콤바인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폐선은 기울 대로 기울어 헤어나지 못하고

형님들 어머니들 그리고 아버지들이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 이 밤

바람 찬 난장에서 지새워야 하는

비릿하게 물씬 거덜 난 바닷가 사람들

겨울에 기댄 채 쌓여 있었다 콤바인으로

온 밤을

바닥까지 끌어올려도 꿈같은 꿈은 끌려

올라오지 않고 겨울 포구의 얼어붙은 꿈들만

하염없이 깊어 하염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부대끼며



생각의 갈피들이 버스 속에서 부대끼며

즐긴다 창밖에서 자전거 탄 네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넘어지며 자빠지며

미끄러지며 살자 끊임없이 부대끼며

가끔은 흔들리며 그 흔들림 속에서

보리밭 사이를 간다 멀리 산과 산 사이로

굽어 사라져 버린 길 속으로 돌아 들어가

나는 없다 온통 갈아엎어 놓은 땅

빈 논에는 토박이 새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보리 싹들이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보리논은 그래도 따스했다 속 깊이 파헤친 세상

그 속에서도 몸 비벼대며 살아갈 이웃이 있으면

가슴 따뜻하다 우리

겨울새들도 겨울 속에 갇혀

공동묘지의 비석 없는 무덤들도 함께

오래도록 기억된다 우리들은 아름답게

오랜 기억이고 싶다 그리고 꿈결 같은 바다

     

바다가 있는 풍경 그 속에서 바다는

집착을 버리는 몸짓으로

내가 있는 시간 속으로 끊임없이 다가와 닿고   



                                                                   

두근거리는 바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부두 서성이는 바다의

변두리를 돌아 나오는 방파제

고깃배 세 척이 기울어 있었다

침몰(?) 반파(?) 나는 따라 잠겼다 똑바로

서지 못하는 배들 쉴 새 없이 흔들리고 그런

배에서 늦은 밤을 하역하고 있었다 새우

상어새끼 ………, 갈고리로 찍어 비늘만

얼굴 가득 돋아나 전등 불빛에 빛나고

늘어선 포장마차 속에서 아무리 머리

맞대고 짜보아도 똑바로 빛나는 꿈은

걸리지 않았다 마무리 덜 된 일손들은

정박하지 못하고 오늘 같은 날 하느님은

이런 부두에도 들르실까(?) 바다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삐걱거리는 사랑은

고장 난 등대 아래서 갑자기 쓰러지고

바람은 그 위를 덮쳤다 하늘의 별들이 미끄럽게

쏟아져 기울어진 바다로 처박혀 마구 구겨지는

시간 속으로 보이는 멀리, 시가지의

화려한 불빛들이 바다 속에서 흥청거리고

     

그리움은 언제나 뒷모습만 따라가고 있다     



                                                                 

삼굿이 있는 고향



삼굿이 있는 고향에서 나는

베 짜는 소리에 자랐다 하늘소가

숨어 사는 삼밭에서는 물레질 소리를 내며

바람이 산다 숲처럼 무성히 자라 출렁이는

삼밭에는 사랑의 비밀도 자란다

― 비가 오기 직전 사랑의 비밀 터지는

   소리가 하늘을 쪼개며 번뜩이곤 했다 ―

삼굿에서는 삼나무 스물세 단이 나란히 누워

익고 나도 따라 익고 싶었다 삼굿의

아궁이에선 베 짜는 소리로 타들어가고

불꽃은 북처럼 재빨랐다 식구대로 모여 앉아

익은 삼을 벗긴다 하얗게 드러나는 살결

동네 아이들은 그 벗은 겨릅대를

가지고 논다 놀이터와 다리거리에는

초상집의 삼베옷처럼

삼이 걸려 흩날리곤 한다

할머니 머리칼 같은 삼이

하얗게 속마음을 풀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고구마 순



고구마 순을 붙인다

촉촉이 적셔주는

비 오는 날의 틈바구니에

고구마 순을 꽂는다

아침을 앉혀놓은 어머니는

텃밭에서 줄기를 베어오시고

서너 마디씩의 이야기를

뚝 뚝 분질렀다

물러나는 구름을 따라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뒷산을

올랐다 날마다 밤마다

애통 터지게 싸우던 강씨 아저씨가

둥그렇게 묻혀있는 산밭을 돌아

거름 가마니를 이고 기어 올라오는 아주머니

어머니는 차라리 그녀를 부러워했고

어젯밤의 시끄러웠던 이야기를

되돌려 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만든 밭두렁에 조심히

손가락으로 쑤셔 넣고 다독였다

손톱 속으로 파고는 흙

애통 터지게 그립던 아픈 날들

     

나는 하늘 그늘에서

허리 굽혀 고구마 순을 붙인다

끈질긴 순을 붙인다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섬진강을 따라 달이 흘러내렸다

달 속에 내가 있고 바람이 불고

물소리가 들렸다

깊게 뚫린 하늘 타원형

그 속으로 빠져드는 내 죽음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며 귀향하는

강물소리 곁에서

달빛 속으로 젖어든다

깊게 가라앉는다 언뜻언뜻

언뜻 뒤집히는 물빛을 헤아리며

들판을 건너는 바람

그 발걸음에 맞추어 나도

내 겨울을 건너뛰고 싶다

남도의 섬들처럼 서로를 못 잊어

돌아앉은 그리움이고 싶다

달이 쿵 쿵

하늘을 갈아엎으며 간다

가로수들이 우우 깨어나 쓰러지고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달빛

몸을 움츠려도 풀리지 않는 그러한

겨울 속을 강물 따라 흐르고 있다      



                                                                

돌고 돌고 또 도는



바다가 썰물이다

물새들이 하늘에서 돌고

공장들이 돌고 발전소가 돌아간다

그 속에 작은 보조 기기들이 돌고

펌프와 모타가 돌고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같이 돌아간다

거대한 회로 속으로 힘이 돌고

파이프 속으로 물이 흘러

혹은 증기가 돈다

길 위로 바퀴들이 돌고

나뭇잎에서 벌레 한 마리가 재주넘듯 뒹굴고

꽃이 나무가 땅이 

몸을 바꾸어가는 계절처럼

……, 돈다 돈다 돈다 ……,

과실들의 몸속으로

향기가 가득 돌고

해와 달이 돌아

밤과 낮이 심한 갈등으로 돌고

매일같이 시간이 돌고

비밀까지도 함께 돌아

나다니는데

비스듬히 지구가 돌고

세상이 삐딱하게 돈다

돌아가던 길들이 돌아오고 떠난 배들이 돌아오고

매일 밤 달빛에 칼을 갈고

그 소리에 몸으로 닳아 맑게 죽어가는 그믐달

다음날 밤 또다시

해말끔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목숨

사람들이 돌아오고

바다가 밀물이다 이제

우리의 숨결이 돌아오고 따뜻한 피가

우리나라 땅의 온몸에 돌아야 할,    



                     

가슴이 아픈 아이

  ― 별무덤의 비밀 혹은 아픈 시대를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나는 온몸

     으로 하늘을 끌어안고 싶다



1

가슴이 아픈 아이는 길목에서

계단 위에서 숨을 조여 오는 단추가

― 선천성 대동맥 판막 하 협착증(?)

떨어져 뒹굴 때 그 단추 구멍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아픈 詩를 본다     

2

바다는 풍경 밖에 서 있는 내 가슴을 적셔주었다

저물도록 구슬치기로 뒹굴던 어린 시절이

구슬더미로 쌓여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어깨에 걸머지고 하학 하던

목쉰 노을빛, 방파제에 걸려

흔들렸다 그 아래서 바다는 남몰래

누워 앓는 데 익숙해졌다 병원 침대에서

뜬눈이던 하얀 아픔이 매일 밤

파도로 부서져 내렸다 에테르 마취에서

풀리는 동안에도

병은 병의 다른 식구들을 불러 모아

나를 넘어뜨렸다 구겨진 한지 같은 얼굴로

고향을 떠나던 날부터 바다에서

무수한 유리창이 떠다녔고 밀물의 그리움은

늘 반짝였다 그러한 곳으로 나는 가고 싶다

차라리 바다는 거기에 하늘과 함께 있다    



                                              

땅 냄새



비가 개인 다음날

아침

마당이 없어지는 시대에

마당에 나갔다

덮쳐오는 땅 냄새

아, 

어머니 

    

우리들의 봄은

어머니 같은

사철나무 울타리 안으로

벌써

들어와

피어나고 있었다

     

강은 그렇게 땅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벗는 시대에



벗는다 사람들이 서둘러 벗는다  

   

하늘을 벗고 산을 벗고 바다를 벗고

강을 벗고 강물소리까지 벗는다

벗는다 여자들이 벗고

남자들도 서둘러 벗는다

겉옷을 벗고 속옷을 벗고 살을 벗고

속살을 벗고 뼈를 벗고

목숨까지도 쉽게 벗어던진다     


벗어야 할 것은 벗지 못하고

자꾸만 입으면서 욕심을 입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죄를 껴입으면서

이데올로기 전쟁 종교 전쟁 폭력

현실과 거짓 그리고 빚더미와 어둠     


벗어야 할 것과 벗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생각을 벗어 버리고

자꾸만 자꾸만 성급하게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몸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넋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양심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벗어던져

버린다 우리의 고향을, 땅을, 인정을,

이웃을, 뿌리 뽑아 내팽개쳐 하수구에 버린다     


쉽게 벗고 쉽게 다시 입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벗어던져 버린다 떠나버린다

사람이 사람됨을 벗어던져 버리는 시대에

나는 고향 여울물 소리를 추억처럼 입는다       



                  

팽이



헛발 딛는 내가 넘어지려 하면

곁에서 어머니는

옷고름 풀어 만든 팽이채로

아픈 허리를 감아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지쳐 쓰러진 만큼

나는 바로 설 수 있었고

발아래 흐르는 강물 소리에

늘 젖어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러한 겨울은 따뜻하였고

겨울 밖에서도 오오래오오래

무지개를 감아 들이며

제자리서기로 돌고 싶었습니다     



                                                                                                              

가시나무새와 누란의 양파꽃



당신과는 발가락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해는 서산마루를

붉게 걸어가고 나는 잠을 깬다 

    

밤에만 피는 꽃잎 속에서 나는

살아있다 어둠은 나의 집이다

그 집에는 천년을 열어도 다

열지 못할 많은 문이 있다

천년에 딱 한 번 한꺼번에

잠깐 어둡게 열렸다가 스스로 잠긴다

     

그 속에는 발가락도 닮지 않은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

고백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리하여 나는 고민한다

고민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러본다

불러본다 그리하여 나는 울어본다

울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웃어본다

웃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도망친다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는 쓰러진다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돌아본다

돌아본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기 위하여 저만치

저만치 피어있는 꽃 한 송이      



                             

붉은 염소



아버지는 붉은 염소였다  

   

해맑은 아침으로 나가

저물녘이면 언제나 붉은 노을이

되었다 우리들이 몰러가지 않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풀만 뜯던 염소는

저녁이 오는 줄도 모르고

우리들이

그의 말뚝이 되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 풀밭으로 무성하게

소문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도

바람에 낙엽 져 갔다

들판 가득 겨울이 내려 쌓이고

근심도 함께 내려 쌓였다 그런

겨울 속에 초원을 묻혀버린 염소

봄은 또 오고야 말 텐데 배고픔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뜯어먹을 풀을 찾아

서산을 넘어 하늘 끝으로 갔다     


그런 아버지의 말뚝이었던 나는

이제야 늦게 빈 말뚝을

뽑아 들고 염소를 찾아 나선다

또한 나의 말뚝으로 박히는 염소

그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지만,

저물녘마다 노을이

붉은 울음을 온몸으로 토해내고,      



                        



사람들은 문()을 믿지 못합니다

자물쇠를 먼저 준비하고 열쇠는

강물에 던져버립니다 문은 너무 잘 열려도

문답지 못합니다 쉽게 열리면 쉽게

낡아 갑니다 너무 열리지 않아도 우리는

질식해 죽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하나쯤의

열쇠는 누구나 갖고 싶습니다

문을 열어줄 때에는 언제나 머뭇거리면서

문만 보이면 언제라도 열어보고 싶습니다

문고리만 보여도 열고정작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문을 잘 걸어 잠급니다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문 잠그는 소리 속에 번번이 갇히고

맙니다 안에서는 쉽게 열 수 있는 문()

밖에서는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습니다

도둑들은 열려있는 문보다

닫혀있는 문()을 더 좋아합니다

문 앞에 서면 언제나 두들겨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문을 함께 열어보고 싶습니다

아무도 열지 못한 당신의 문을,

기꺼이 열어보고 싶습니다 시간처럼

열렸다가 곧 닫혀버리는 문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함께 살 수 있는 문을

열고 싶습니다 문은 낡을수록 사람 냄새가 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잎 하나에도 문이 있고 아침이슬 한 방울에도

그 세계 속으로 열려있는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길은

목숨으로라도 끝내 열어야 하는 문입니다    



                

가난과 자유



난장에 내던져진 삶 속에서도

들풀들은 사랑을 소중히

간직할 줄 압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소하게 만들고

사람을 섬세하게 만들어

기릅니다

가난한 들판에 피어난

제비꽃 가슴의 자유를 보며

삶터와 장터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바람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가을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 날더러 단풍이 돼라 하네

마지막 남은 목숨 사랑만 하라 하네

오직 사랑으로만 타오르는 꽃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단풍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가을이 돼라 하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돼라 하네

봄으로 다시 꽃피는 가을이 돼라 하네

가을바람은 자꾸만 날더러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돼라 하네     



                                                                                                         

살아서 흐르는 넋



강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달맞이꽃 

강물 속으로 흐르는 달빛을 따라 흐른다 

어머니가 흐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어머니의 젖가슴

우리들의 젖줄이 맑게 흐른다 

강의 맨 끝자리 

섬진강은 끝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마음이 된다 

실성한 밤나무 골 할머니가 매일 밤 

머리를 감는다 

어렵게 늦장가 든 외아들 강춘이 

그 아들이 빠져 죽은 강물에 머리를 담근다 

그래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가난하게 사는 구차한 생활이 싫다고 

서울로 달아나 버린 강춘이 색시 

그러나 

남몰래 무덤가에 찾아와 울다 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강은 그렇게 

말 못 할 사연으로 또다시 살아나고 있다      


강 건너

밤나무 그늘이 그런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지상에도 너무 많은 뜬구름이



시인과의 결혼을 앞둔 시인이 

나에게 말하더라 

“세상에게 복수하는 길은 오직 

  아름답게 사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리라 

     

그 아름다운 길을 찾아 또다시

떠나야 하는 이 막막하고 먼 길     


아직도 국방색을 벗지 못한 

치안본부 앞의 나무들을 지나 

단풍놀이 갈 여비를 찾아 나오는 

단풍잎 같은 얼굴들 

은행 앞 은행잎들은 벌써 

온몸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체국 앞으로 떨어지는 

엽서 같은 나뭇잎들이 

또한 머뭇거리고 있었다      


지상에도 너무 많은 뜬구름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지상의 뜬구름들은 겨울로도 가지 못하고 

꽉 막힌 서울 하늘로 부활처럼 떠올라라      


나는 오늘도 모과나무 거리를 모과나무로 걸어간다       



                            

나의 고향은……미래에서 찾습니다



나의 고향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현재형으로 찾아가는 일이 삶입니다 

詩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배가 고픈 

새들이 더욱 열심히 날아오릅니다 

고향을 찾아 섬까지 걸어갑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 

바다는 늘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 닫히기도 합니다 답답합니다 

가끔 뱃길이 열리고 

바다는 그렇게 늘 한정적으로 열립니다 

우리를 오래도록 가두어두는 거기에도 

고향은 아직 없습니다 고향은 

과거보다도 더 오랜 옛날에 있었거나 

아직도 멀리 미래에 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늘 안개로 가득합니다 

먼 옛날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내 등 뒤에서 닫히고 미래로 찾아가는 고향 길은 

도시 안개로 까마득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저녁노을이 저녁 하늘과 함께 바다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바닷속 깊이 잠겨있는 유물들의 고향과 

납작 엎드려 환상의 나라를 꿈꾸는 

도다리나 가오리의 고향과 남해안 그 바다 

양식장의 부레로 떠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고향 

그러나 아, 

고향은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산방산 안에서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절반쯤은 늘 안개에 잠겨 있는 

가끔은 이어도가 희미하게 보이는 

그런 산방산 안에서 나는 

나의 탯줄을 너무 늦게 자른다 

나의 태반을 너무 늦게 묻는다      


그런 산방굴사 안에서 부처님께서 

먼 바다를 지그시 꿈꾸고 계신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위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파도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또 다른 파도가 

자전거를 밀어주고 있다 

그렇게 바다로 가서 

바다가 되어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밑으로 달려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 속 깊은 곳으로 달려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뱀장어처럼 바다로 가는 자전거가 있다 

바다로 가는 뱀장어가 있다 

바다로 가는 뱀장어는 강을 닮았다 

강에서 강물을 배운 뱀장어가 

바다로 가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줄 아는 강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사기와 사랑이 잘 구별되지 않는 이 시대에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다 

연어들이 거슬러 돌아오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 

바람 부는 파도에 현혹되지 않고 

바다의 깊이를 간직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빛보다 더 많은 별빛을 싣고 가는 

빛나는 자전거가 있다    



                      

이어도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를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나라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어도를 당신은 아시나요      


1. 용설란

이어도 가는 길가에 용설란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오래된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그중의 몇 놈이 수상하다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기다리는 님이 있는지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다 그 높은 전망대 위에서 손차양을 하고 먼 곳을 본다      


2. 탱자나무 울타리

이어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어도와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어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가야만 한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가득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꽃 피어있다      


3. 전혀 다른 세상

용설란 가로수 길을 지나 탱자나무 울타리 건너 이어도에 들어온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헌 옷을 모두 벗고 들어온 바람의 살결이 부드럽다 빈 몸이 된 나는 잠시 부끄러웠지만 이어도에서는 모두가 옷을 입지 않는다 옷을 입지 않는 세상에서는 옷을 입으면 더 이상하다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 그런 이어도에서 나는 시나브로 이어도가 된다      


4. 비익조

이어도에는 비익조가 살고 있어요 삼광조와 팔색조가 살고 있어요 세상에서 눈을 잃은 새가 이어도에 돌아와 세상에서 눈을 잃은 또 다른 새를 만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세상에서 날개를 잃은 새가 이어도에 돌아와 세상에서 날개를 잃은 또 다른 새를 만나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어요 팔색조와 삼광조 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살고 있는 비익조가 아직도 이어도에 있어요      


5. 이어도의 강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철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덜컹거리며 흘러가는 바다의 열차가 있습니다 협괘열차의 추억이 있습니다          


6. 게으른 몽상가

이어도에는 게으른 몽상가가 살고 있어요 그는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가끔은 가지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그 나무에 올라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또 다른 이어도를 바라보곤 하지요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요      


7. 산책

산책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입니다      


8. 별무덤

이어도는 별무덤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 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별들이 하늘에 뿌리를 박고 반짝이는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별들의 뿌리를 사람들은 푸른 잔디라고 말합니다 잔디로 덮여있는 무덤을 보십시오 무덤들은 달을 닮았습니다 달의 일부가 자꾸만 보이지 않습니다 없어진 달은 바로 그 무덤 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은 지금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9. 붉은점모시나비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아직도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오늘도 이어도에는 모시나비가 날고 상제나비가 날고 붉은점모시나비가 개미들의 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그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10. 멍텅구리 배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멍텅구리 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때 갇혀 살았던 지옥의 멍텅구리 배 생각에 다시 멀미 납니다 나를 멍텅구리 배에 팔아넘기고 검은 멧돼지와 함께 동굴에서 살고 있는 붉은여우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이어도에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그 거친 바다를 건너온 그도 역시 멍텅구리 배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바다에 젖어 있습니다 바다의 시퍼런 파도가 칼날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이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고 합니다 나도 한 때는 복수하기 위해 발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역시 사랑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멍텅구리 배에서 새우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멍텅구리 배에 팔아넘긴 그의 아내는 함께 공모하여 팔아넘긴 그 사내와 함께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날아와 꽂혔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복수의 칼날을 품고 그 짐승들에게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수의 칼날이 녹슬어 사랑의 꽃으로 부활하기 전에는 이어도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가 있습니다     


11.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12. 시인

이어도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너나들이가 살고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이 시대에 너는 나고 나 또한 너인 그런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시인이 이어도에 살고 있어요 “시란 사람을 열고 사람에게 비로소 열리는 사랑의 문입니다” “나는 땅의 눈물 같은 그런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영혼이 투명한 시인이 살고 있어요 맑고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붉은 동백꽃의 시인이 살고 있어요      


13. 애련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내가 세상의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를 사랑으로 건져 올려준 너무나 고마운 연꽃이지요 나를 죽음에서 들어 올려준 너무나 크고 은혜로운 연꽃이지요 넓은 연잎으로 더러운 세상을 가리고 그 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이지요 그보다도 더 중요한 진실은 그 넓은 연잎 아래서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고 있지요 그리하여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14. 이어도 카페

가장 아름다운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꽃입니다 이어도 카페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억새꽃과 유채꽃 이어도의 사람꽃이 10월의 메밀꽃과 감자꽃으로 지금 한창 흐드러지고 있습니다      


15. 이어도 사랑촌

이어도에는 없는 사랑이 없습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어도에서는 당신이 꿈꾸는 어떤 모습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배우고 익혀 온 모든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랑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또한 섹스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섹스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이어도 사랑촌은 그런 곳입니다     


16. 이어도 부활촌

이어도에는 부활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이어도 부활촌에는 수목원이 있습니다 나무는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나무는 먼저 떠나지도 않고 배반하지도 않고 한없이 베풀어 주며 가르쳐줍니다 길은 결국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말없이 가르쳐줍니다 수목원 입구에는 워싱턴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습니다 워싱턴은 워싱턴에 두고 워싱턴 야자수만 가져왔습니다 나무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부활촌에서 부활합니다      


17. 이어도 창작촌

이어도에는 풍경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길을 잃은 당신은 이어도 창작촌에서 당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어도 사랑촌을 거쳐 이어도 부활촌을 지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도만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이어도는 오직 우리들을 위한 아름다운 섬입니다 강한 나라가 아니라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별빛과 불빛



하늘의 구멍가게 같은 십자가들

붉은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파도처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어린 나를 시장에 버려두고

몰래 지켜보던 눈빛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처음 배우던 시장에서도

늘 붉은 십자가로 빛나던

그 깊은 숲 속 고아원에서도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눈빛을 닮은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별을 닮은

불빛을 만들어 나무마다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하늘의 별빛과 지상의 불빛

우리들은 이제 그렇게 늘 반짝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혀를 찾아서



너무 불순해진 혀를 잘라 

숲 속에 버려 버렸다 

말랑말랑했던 혀가 굳어 

누군가에게 

면도날이 되었던 

바로 그 혀를 잘라 

숲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 숲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혀 같은 단풍잎들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혀는 없이 

검붉은 거머리 두 마리만 

달라붙어 있는 입은 이제 

부드러운 혀를 찾고 싶다 

나는 이제 다시 

그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혀가 그립다 

무섭고 딱딱한 혀들이 무성한 숲에서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혀를 찾고 싶다  



                                                                          

억새꽃



아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직까지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그만한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억새꽃은 억새꽃만큼 울고 

바다는 바다만큼 울며 살아간다 

오직 사람들만이 

슬픔 때문에 못살겠다고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나에게만 슬픔이 있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누구에게나 

그만큼의 슬픔은 있는 법인데 

야단법석을 떨며 아우성이다 

억새꽃이며 바다의 혀들이 

오늘따라 너무나 조용히 빛나고 있다   



                                                                                  

길 끝에 서 있는 길



길 끝에서는 언제나 

또다시 길이 열린다 

길을 찾아가는 길 

나는 언제나 그렇게 

길이 있으면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

      

희망은 늘 그렇게 있다          



                                                                                                                                   

사람의 고향



당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향이 바로 당신 가슴에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무덤입니다 

아직은 따뜻한 나의 무덤입니다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산을 내려오는 산 그림자



어머니의 제사를 지낸다 손톱과 발톱 모두 뽑아서 제사상에 올린다 발의 뼈를 모두 뽑아서 올린다 다리뼈를 뽑아서 올린다 골반도 올린다 아랫도리가 철푸덕 주저앉는다 갈비뼈와 척추뼈도 올린다 윗도리도 철푸덕 주저앉는다 두개골도 뽑아서 정성껏 올린다 얼굴도 역시 철푸덕 주저앉는다 일을 마친 팔뼈와 손뼈도 올린다 어머니 늦은 제사상 앞에 가죽 가방 하나 철푸덕 엎드려 운다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 어머니 두들겨 패는 것이 일이었던 아버지, 술에 취하여 길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마른 명태 북북 찢어 제사를 지낸다 뼈도 아닌 것이 가끔 뼈인 척하는 것도 함께 올린다 가죽 가방에 든 잘 익은 술, 잔이 넘치도록 부어 올린다 아예 술독을 올린다 술독이 넘치도록 올린다 아버지의 제사상 앞에 빈 가죽 가방 하나 납작 엎드린다      

어머니 아버지 누워계신 산소에 간다 어머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젖무덤이 나란히 있다 늦은 오후에 빈 가죽 가방 하나 정신없이 젖꼭지를 빨기 시작한다 쪼그라든 가죽 가방 부풀어 오르고, 가죽 가방 속에서는, 다시 뼈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다     



                                                                                           

횡단보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문이 잠시 열린다     


길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밟고 지나간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사다리를 밟고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투명한 유리문이 다시 닫힌다      


한 사람이 유리문을 서둘러 통과하려다     


유리문과 유리문 사이에 그만 갇혀버리고 말았다     


길과 사다리를 함께 지우면서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신발과 타이어 그림자가 켜켜이 쌓이고 있다     


납작해진 사람이 그 사이에 끼워져 있다     


보이지 않는 유리문에 이마를 부딪치고 서 있다     


신호등이 유리로 만든 관棺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보아뱀



서귀포 화순해수욕장에는 섬을 꿀꺽 삼켜버린

커다란 보아뱀 두 마리 살고 있다

산방산을 삼키고 부처의 고뇌를 삼켜버린 보아뱀

보아뱀 두 마리 오늘도 바다로 기어가고 있다

추사의 세한도를 삼켜버린 용머리 보아뱀

횟집과 민박집을 삼키고 부른 배로 기어가는 보아뱀

보아뱀 두 마리 화산처럼 부글거리며

이어도로 가고 있다

     

나는 그 보아뱀이 삼켜버린 많은 전설을 알고 있다

갈대숲의 새와 검은 쥐들과 취객이 토해 놓은

어둠과 욕망의 내력들을 다 알고 있다

보아뱀 뱃속에 좌선하는 부처님과 추사가 코끼리 꼬리에 대하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가끔은 무지개의 뿌리 쪽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보아뱀     


바람이 거세어 배들이 피항하는 화순항

바람이 거세질수록 화순 앞바다를

기어가는 뜨거운 보아뱀 두 마리

지금 막 빠져나가고 있다

이어도로 가고 있다  



                                                                    

수혈에 대하여



가슴을 열고 심장에 칼을 대어본 사람은 안다

피 속에는 혈장과 혈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하지 못하는 엽록소가 가득하다는 것도 안다     


큰 수술을 받고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인공호흡기와 함께 회복실에서 깨어난 사람은 안다     


엽록소 속에는 단풍으로 가득함을 안다

처음부터 붉고 노랗고 푸른 단풍잎임을 안다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 같은 단풍도 다 지고

뼈만 남은 나무는

겨울에 땅속보다 하늘이 더 춥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겨울나무는 하늘에 사는 식구들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 주삿바늘을 꽂고 하늘에 수혈을 한다     


땅속의 따뜻한 혈액을 수혈받은 별들이 눈을 뜬다

며칠 후면 고드름도 땅에 주삿바늘을 꽂고

하늘의 영혼을 지상에 사는 식구들에게 수혈할 것이다

그렇게 땅과 하늘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함께 살 것이다   



                                                              

나무 발전소 1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


땅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나무 발전소 2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을 찾아 백록담으로 간다 

    

11월 11일 농업인의 날, 서울 G20 정상회의가 있는 날, 나는 세상과 손잡고 나란히 걷지 못하고, 설문대할망을 찾아 한라산으로 간다 삼승할멈과 자청비를 찾아 한라산으로 간다     


엉덩이에 바퀴를 달고 앉아서 달려 올라간다

앞차 엉덩이에서 나무의 영혼이 검게 피어난다

깊은 땅속에서 끌려 나온 아스팔트와 다시 만난다     


자동차들은 바퀴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조상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나무의 영혼은 아스팔트, 뼈의 살이 되지 못한다     


먼 옛날 땅속에 있던 거대한 발전소가 폭발하였다

바다가 뒤집히고 땅이 뒤집히고 나무들이 묻혔다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듯

용암이 분출되고 지상의 생명들이 땅속에 묻혔다

그렇게 묻힌 것들이 석탄이나 석유로 부활하였다     


성판악 휴게소가 미어터진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는 바퀴들

인간이 만든 바퀴들은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다

신이 만든 큰 바퀴로 갈아타야만 산에 오를 수 있다     


한미 FTA 재협상이 잠시 결렬되어도, 관세가 없어지듯 국립공원 입장료가 없어지고, 신들의 거처 한라산이 몸살을 앓고 있다 설문대할망이 물을 마시던 물 대접, 사라 오름이 열흘 전에 전면 개방되고, 사람들이 이제는 개밥그릇처럼 발로 걷어차기 시작한다     


한라산이 좋다 한라산 여신들이 참 좋다

그래서 나는 들병이처럼 여신들을 따라나선다     


한라산 아래쪽에 오름이 많다 신들의 밥그릇이 엎어져있다


길에서 길로 태어난 나도 성판악 약수터에서 에너지를 보충한다 작은 수차라도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성판악 탐방로 입구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불타는 불덩어리가 붉고 노랗고 푸르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발전소 보일러 속이다 여신들이 잘 보이지 않는 한라산은 이제 나무들의 발전소가 되었다     


물은 불을 만들고 불은 물을 만든다    


제주 여신들이 옥황상제 만나러 갈 때, 가장 많이 이용했을 것 같은, 완만해서, 유람하듯 오르내렸을 것 같은 성판악 탐방로, 동아줄이나 사다리가 아니라 구름길 같이 편안한 길, 여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구름길로 들어선다     


몸속의 발전소가 부실하여 나는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속도에 맞추어 걸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동료들과 함께 오를 수 없다 세상과 함께 손잡고 나란히 동행할 수 없어서 시인이다 천천히 나의 속도를 찾아서 올라간다     


입구가 문제다 나에게는 언제나 초반부가 문제다 땀 한 번 흥건히 흘리면 그때서야 한결 가벼워진다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서어나무 군락이다

위쪽은 벌써 잎이 다 떨어졌다

불 꺼진 발전소 보일러 속이다

나무 기둥들이 발전소 보일러 튜브처럼 나란히 서 있다     


낙엽 쌓인 길 가로 모노레일이 따라 오른다 바퀴가 아니라 톱니가 올라간다 세 칸 열차에 사발면과 삼다수 물병이 실려 간다 한라산 여신들도 이제는 컵라면으로 연명하는 것일까 나도 한때 날마다 산을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날마다 지게질을 하던 때가 있었다 산에서 땔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던 때가 있었다 산밭에서 감자와 고구마와 참깨를 지고 내려오던 때가 있었다     


길 가 나무들이 쓰러져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서일까 길 가에 있어서일까


숲 속에 누워 천천히 죽음으로 스며드는 나무도 있다

야위어가면서도 제 가슴속에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 키우는 주검도 있다    


나무의 주검은 죽음이 아니라 벌레들의 밥과 집이다     


바스락바스락 나무들의 똥을 밟는다

나무들이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고 있다

기생충 검사용 변 봉투 같은 낙엽들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는다 똥을 밟는다

나무들이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눕는다     


뒤샹이라는 사람이 미술관에 전시했다는 변기를

나는 다시 가져와 한라산 은밀한 곳마다 두고 싶다     


나의 시는 이제 나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가 나의 삶까지 변화시켜 주기를 바란다     


올해는 도토리가 많이 열리지 않았다

참나무 위에는 겨우살이 열매가 붉어지고 있다

참나무는 살아서도 제 몸에 다른 나무를 키울 줄 안다     


제주조릿대 군락이 나온다

풍차 날개 같은 조릿대가 흔들리고 있다

바람개비가 빛나고 있다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그 사이에서 노루 한 마리 나를 지켜보고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백록담으로 가지 않고 사라오름으로 간다

백록담은 백록에게, 백록이 살도록 남겨두고 싶다     


사라오름 분화구에는 햇살만이 빛나고 있다 설문대할망도 보이지 않고 삼승할멈도 보이지 않고 자청비도 보이지 않는다 빈 접시만 하나 있다 빈 접시 하나 깨끗이 비워져 빛나고 있다         


빈 접시 테두리를 빙 돌아서 전망대에 오른다

빛나는 빛의 테두리를 돌아서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 위에서도 여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올레길이 보이고 서귀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다

풍력발전기 날개가 바람을 물레질하고 있다

2월에만 온다는 바람의 여신 영등신이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영등신의 옷자락이 풍차의 날개를 돌리고 있다

멀리 거대한 나무 발전소가 풍차를 돌리고 있다

더 멀리 바다에서 태양광발전소가 빛나고 있다

태양전지 모듈이 빛나는 태양빛을 모두 흡수하고 있다

더 멀리,

그 너머로 이어도가 보인다 서천 꽃밭이 보인다     


흰 사슴 한 마리 이어도에, 서천 꽃밭에 살고 있다 



                                                      

월라봉



내 기억의 출발점, 징검다리 건너 외딴집이 있다 옹달샘이 있는 섬진강 상류, 어머니 장사 나가시고 아버지 술집에 가시어 나는 언제나 외딴집이었다     


외딴집에서 나오는 길은 늘 외딴길이었다 한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항상 외길이어서 강을 건널 때에도 나는 늘 혼자였다 내 기억의 끝, 외딴길의 꽃이 되어 열매를 맺는, 황천교 건너 외딴집이 있다     


별들의 연못에 세수하고 나오는 보름달

그 보름달처럼 다리 건너 월라봉月羅峯으로 간다

월라봉 외딴집에 살고 있는 이어도 시인을 만나러 간다     


아름다운 새벽의 나라 깨어나고 있다 새벽 세 시, 어지러운 꿈을 털어내고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다 숲에서 파도소리 들린다 나무들 깨어나기 시작한다 풍경소리 깨어나기 시작한다 바다가 숲으로 밀려온다 워싱턴 야자수 깨어나고 정자나무 깨어나고 능수버들 깨어난다 가지 하나 만들지 않는 워싱턴 야자수, 잎자루를 스스로 쪼개어 두 팔로 포옹하며 깨어나 하늘 높이 탑만 쌓아 올린다 가지가 많아 더욱 아름다운 정자나무, 노스님 같은 팽나무도 큰기침을 하며 일어나 능수버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계신다 능수버들은 연못에 긴 꿈을 다시 한번 풀어 가다듬는다     


나도 이제는 이어도 시인과 함께 이어도공화국에서 이어도공화국으로 살기 시작한다 흙으로 부활하신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발로 하는 세수



산책은

씻김굿이다

발로 하는 세수다

발로 씻는 씻김굿이다

발로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을 한다     


산토끼 한 마리 가만 앉아서

발로 세수를 한다

산토끼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산새 한 마리 가만 앉아서

깃을 다듬던 부리를 발로 씻는다

산새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바람소리가 내 몸을 씻어준다

쑥 향기가 내 코를 씻어준다     


하늘을 쓸고 있는 나무들이 내 눈을 씻어준다

꽃들이 내 영혼을 씻어준다

하늘이 하늘까지 내 길을 닦는다

나의 산책은 바리데기를 만나

길을 닦는 씻김굿이다

바람소리가 나를 씻어준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내 발이 나를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눈을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길을 닦아준다     


나를 스스로 씻겨주는 씻김굿 춤이다

나의 산책은 스스로 씻는 씻음굿 춤이다 



              

액자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가 있다

오지 못할 사람을 대책 없이 기다리는 때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새벽이 액자처럼 걸려있다     


방 안에 액자 하나 걸려있다

사연이 참 많은 액자 하나 걸려있다

나무틀 액자 하나 아침처럼 걸려있다

내 왼쪽 가슴속 깊이 박혀있는 못 하나에

액자 하나 지금까지도 걸려있다     


그 액자 속에 있던 사람 대신

지금은 내가 들어가 갇혀있다

1986년이었던가 1987년이었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왔던 내가 들어있다

한라산이었던가 어느 오름이었던가

안경 쓴 내 뒤로 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시여, 내가 낳은 시들이여! 

황소의 쟁기질처럼 끊임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강히 

자라는 일꾼이길 바란다

이런 글자들도 함께 갇혀서 기침을 하고 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내린다

내 가슴속에 갇혀있던 액자를 꺼낸다

그 액자 안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글자들을 꺼내어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시 비어있는 액자틀만 벽에 건다

그 빈 액자에 느닷없이 새로운 아침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봄에는 그림자에도 새싹이 돋는다



회춘,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돌아오고 있다

하얀 겨울의 처녀막을 다시 한번 찢으며

얼음새꽃이 또다시 노랗게 피어나고 있다

겨울에 벗어놓았던 헌 발자국들도 녹아내려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이어도로 가고 있다

나무들의 손가락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드디어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며 일어난다

겨드랑이가 자꾸만 가렵다 영혼의 거처에서

아지랑이기 피어난다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새순 같은 손길이 느껴진다

다시 한번 찾아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새싹은 벌써 새의 발자국 같은 나뭇잎이 되고

파랑새 한 마리 날아와 나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나의 심장 같은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산으로 올라갔던 발자국들도 다시 녹아내리고

동안거에 들어갔던 영혼들도 산길을 내려온다

봄은 그렇게 더 깊어진 사랑의 힘으로 돌아온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흘러가 쌓여있는 바다보다

더 깊어진 사랑으로 다시 한번 봄이 돌아온다

이제는 자꾸만 그림자도 한없이 깊고 길어진다

그림자로 가득한 밤에도 나는 이제 외롭지 않다

나는 이제 밤마다

사랑하는 당신의 그림자라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회춘, 나는 다시 한번 봄으로 돌아눕는다

춘투, 눈싸움이 사랑싸움으로 돌아눕는다

칼이 지나간 자리가 결코 밖이 되지 못하는 사랑싸움

성질 급한 매화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들이

속옷도 걸치지 못하고 속살로 뛰쳐나온다

봄에는 이제 그림자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봄에는 이제 그림자에도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봄에는 이제 그림자에도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찢어진 상처마다 상처를 한 번 더 찢으면서

새살이 오른다 새순이 돋는다 춘투가 한창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이제 이렇게

조금 늦더라도 모두가 함께 손잡고 가는 삶이다

그림자까지도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가는 삶이다                                                                                                                                                      

    

도시 나무



청산에 살지 못하고 도시로 끌려가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들의 발목에서 쇠사슬 끌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이 독가스실로 끌려가고 있다

가스실 앞에 줄 서 있는 가로수들 떨고 있는 그 사이로

돼지들이 실려 가고 있다 끊임없이 실려 가는 울음소리

도살장 앞의 나무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돼지는 돼지들대로 가로수는 가로수들대로 떨어뜨리고 있다

나뭇잎이 떨어져도 돌아갈 곳이 없다

새벽부터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둥근 빗자루를 돌려

아스팔트길을 쓸어 담고 있는 청소차가 지나간다

쓰레기차를 피해 간신히 도망쳐 나온 나뭇잎은

하루 종일 길을 헤매다가 하수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어린 가로수들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버팀목으로 서 있던 세 개의 각목, 버팀목이

되지 못하고 나무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고 있다

도시로 끌려 나온 나무들은 뿌리내릴 곳이 없다

땅속에서라도 뿌리는 따뜻한 뿌리를 만나고 싶은데

만나는 뿌리마다 전기가 흐르거나 소리가 흐르는

너무나 뜨겁거나 너무나 차갑거나 너무나 시끄러운

무서운 전선뿐이다 땅 위에도 땅속에도

온통 전선뿐이다 정녕 전쟁터 아닌 곳이 없다     


청산에 살지 못하고 도시로 끌려 나온 나무들이 있다

아예 청산은 보이지 않고 가스실 문이 닫히고 있다                                             




산책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여러 번 

정독하는 책은 자연이다      


산책은 자연이다 

자연은 산책이다      


산책은 

자연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일이다      


산책은 시간을 주고 산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반듯하게 세우다



봄에 고개를 쭈욱 내민다 죽순으로 태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잔뜩 외투를 껴입은 죽순은 눈빛이 순하다 그러던 죽순이 7월 장대비를 맞으며 겁 없이 쑥쑥 자란다 죽죽 자란다 웃통을 벗어던지며 정신없이 쭉쭉 자란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대나무는 그렇게 딱 1년 동안에 모두 자란다 한꺼번에 자란다 마디를 미리 만들고 마디마다 생장점을 미리 만들고 마디마다 한꺼번에 자란다 마디에서 키도 자라고 마디에서 가지도 자란다 그렇게 1년 동안에 모두 자라 버린 대나무는 남은 평생 마음을 다스린다 평생 마음만을 다스린다 비어있는 마음을 더 깊이 비우고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대나무는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느라 등이 굽을 시간이 없다          



                                                                                                                                  

눈이 내린다



꿈속에도 눈이 내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도붓장사 나가신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한다

머리에 인 커다란 보따리 위에 눈이 쌓인다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은 그치지 않고 하염없이 내려 쌓인다

어머니 머리 위 보따리가 묻힌다

어머니의 발자국이 묻히고 어머니가 묻힌다

생전에 드시지 못한 쌀밥이 고봉으로 담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신이 되신다

꿈밖으로도 눈이 내린다

오름과 한라산이 온통 하얗다

신들의 밥그릇에도 쌀밥이 고봉으로 쌓여있다

오백장군의 어머니만이 벌써 밥그릇을 비우셨다

설문대할망의 밥그릇 안에서 백록이 물을 마시고 있다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지상에 사는 신들에게 쌀밥 밥상을 차려준다   



                                                                                       

마중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미리 나와서 기다리면

혹시나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서둘러 나와서 기다려봅니다

당신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은 벌써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서둘러 봄 마중을 나와서

봄을 만나고 있습니다

바람의 숨결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물소리가

한결 힘차게 들려옵니다

어떤 나무에서는 아이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립니다 

복도를 뛰어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이 움직이듯이

곱았던 나무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서둘러 동구 밖까지 봄 마중을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이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기다리면 올 것만 같아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눈부처



나는 당신의 눈부처입니다

당신이 눈을 감으면

나는 곧 없어지고 맙니다     


당신은 나의 눈부처입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당신은 곧 내가 되고 맙니다                                                                                                                                                 


마당



이어도 오두막 마당에 자연이 한 장 펼쳐져 있다

겨울에도 달래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민들레꽃이 낮에는 노란 꽃등을 켜고 있다가

밤에는 꽃 문을 닫고 달빛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푸른 조릿대들은 울타리 쪽으로 물러나 조용히 일렁이고

로즈마리 향기는 오두막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들국화가 한쪽에서 피어나 환하게 빛나고

겨울에도 딸기는 부지런히 봄을 준비하고 있다

수선화가 막 꽃대를 만들어 올라오고

백합 알뿌리는 땅속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다

부추와 치커리와 배추와 무, 상추와 쪽파는

아침상에 누가 먼저 올라갈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다

들깻잎은 아직도 싱싱하고 브로콜리는 힘이 불끈 솟는다

앙증맞은 야콘 꽃은 좀 추운지 입술부터 떨고 있다

나는 이런 이어도 오두막 마당에서

달빛을 타고 내려온 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시를 쓸 생각도 잊어버리고

밤새도록 이어도 오두막 마당에서 자연을 읽는다

백일홍과 해바라기와 수수와 옥수수 그늘 아래서

별들과 함께 숨바꼭질하는 그림을 서둘러 그리고 있다                                                                      




틈 혹은 숨구멍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사람도 틈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다

하늘에도 틈이 있고 허공에도 틈이 있다

땅에도 틈이 있고 바다에도 틈이 있다

그 틈에는 저마다의 숨구멍이 있다

하늘의 숨구멍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숨을 쉬고 있다

허공의 숨구멍에는

새들과 바람이 숨을 쉬며 살아간다

땅의 숨구멍마다 나무들이 자라고

바다의 숨구멍마다 물고기들이 자란다 

숨구멍이 또 다른 숨구멍을 키운다

사람들도

숨구멍마다 땀이 나오고 털이 자란다

심지어 돌담에도 숨구멍이 있고

돌멩이에도 숨구멍이 있다

삶에도 숨구멍이 있고 죽음에도 숨구멍이 있다

숨구멍이 숨구멍 속으로 스며든다

빗방울이 숨구멍으로 스며들더니

밤에는 또다시 하늘의 숨구멍이 반짝거린다

나는 수 없이 많은 빈틈으로 숨을 쉬고 있다

빈틈 많은 나는 그 빈틈으로 살아간다                                                                 






뼈가 아프다 사랑이 아프다

아픈 뼈를 가만히 만져본다

내 몸속의 하얀 뼈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뼈를 직접 볼 수 없다

내 뼈들은 모두

나의 살과 나의 가죽에 갇혀있다

나의 살들이 글쎄

나의 뼈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다

뼈의 감옥, 하얀 뼈의 감옥

나는 감옥에 갇혀 있으므로 살 수 있다

감옥 속에서 비로소 살 수 있는 나

당신은 나의 통뼈다 아닌가

나는 당신의 통뼈다 아닌가

나는 다시

사랑의 감옥에 갇혀야만 살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감옥 안에서만 살 수 있다

통뼈인 나는

살과 가죽이 가두어주어야만 살 수 있다

당신이 나를 가두어주어야만 살 수 있다

뼛 속으로 사랑의 피가 흐른다

장대비 철창이 하늘을 가두어버리는

오늘 나는

당신의 따뜻한 감옥 속으로 숨어들고 싶다  



                                                          

배추꽃



이어도 오두막 텃밭에 배추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 동안

가슴속에 꼭 껴안고 있던

배춧잎들의 깨끗한 가슴을 찢고 나와

하나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그래도

찢어진 가슴으로 봄을 확인하시고

흙으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어머니 가슴을 열고 나온 꽃대에서

노랗고 예쁜 배추꽃들이

환하게 봄을 맞이하고 있다

작은 배춧잎들이 새로 돋아나고

배추꽃들이 만개하니

나비들도 행복하게 날아오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철없는 배추꽃들만 

어머니 마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벌과 나비들에게 초대장을 쓰느라 바쁘다  



                                                                                   



나는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낡은 집입니다

당신이 돌아와 살지 않으면

곧 허물어지고 말 낡은 집입니다

당신이 끝내 돌아오지 않아도 

나는 당신의 체온을 잃지 않는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집입니다

당신과의 아름다운 기억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입니다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입니다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집입니다     


나는 당신의 집사람입니다   



                                                                                       

무심



무심이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무심한 마음으로 아침 산책을 한다

화순 곶자왈 생태 숲길을 걷는다

벌써 아침 공기가 쌀쌀하다

소들도 숲길에서 아침 산책을 한다

소들은 어제의 생각을 되새김질하며 걷는다

하지만 나는 무심한 마음으로 산책만을 한다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집에서 화장실 가는 일을 잊고 그냥 나왔다

나는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야만 하는데 깜박했다

무심했던 마음이 자꾸만 화장실을 찾고 있다

생태숲길에는 화장실이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면사무소까지 가야만 했다

아, 나도 누군가의 화장실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다시 무심하게 걷는다

아침 산책길이 푸른 하늘 속으로 뻗어간다

소들도 여전히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노루 한 마리 갑자기 뛰어도 

소들은 놀라지 않고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다

산책을 하던 소 한 마리가 갑자기 꼬리를 들고

텅 텅 텅 내 마음을 울리며 똥을 싼다

멈추지도 않고 걸어가면서 텅 텅 텅

무심을 떨어뜨리며 무심하게 걸어가고 있다    



                                               

발효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가스보일러를 켠다

허리에 파스를 혼자 붙이고 파스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

아주 먼 곳에서 시조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공룡들의 울음소리와 나무들 조상이 땅에 묻히는 소리

땅속에서 오래도록 발효된 그들이 가스가 되어 돌아온다

연탄이 되거나 석유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되살아난 그들의 눈빛이 그들의 불꽃이 나의 허리를 지진다

방바닥 밑으로 흐르는 불물이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내 몸과 영혼이 이렇게 다시 따뜻해지는 것은

가스 때문일까 보일러 때문일까

아니면 허리에 붙인 파스 때문일까 파스 같은 그 사람 때문일까     


꿈속에서 나는 산투르를 연주하고 있었다

영혼이 잘 발효된 음악은 춤을 만들고 사랑을 만든다

영혼이 잘 숙성된 그림은 시를 낳고 종교를 낳는다

음악은 한순간의 꿈이지만 영원히 남고 

그림은 오래도록 남지만 영혼의 눈빛이 부족하다

지극히 오래도록 잘 발효된 예술만이 행복의 문으로 인도한다     


나도 누군가의 따뜻한 보일러가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의 잘 발효된 예술을 낳고 싶다

가장 잘 발효된 영혼만이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예술이 되리라 



                                                           

천칭



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

천칭자리 별들을 바라본다     


새해 계획표를

아직도 작성하지 못했다     


계획표에 당신을 넣으려니

눈물이 너무 많을 것만 같다     


당신을 아예 빼려고 하니

내가 통째로 없어져 버린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당신 때문에

나는 도저히 계획표를 작성할 수 없다     


하늘의 천칭자리 별들을 본다

밤새도록 궁리를 깊이 하여도

하늘의 저울은 기울어지지 않는다    



                                                                                 

와 詩人



言語에 칼질을 잘해서

詩 비슷한 것을

잘 만드는 사람이

詩人이 아닙니다

사람의 길을 찾아

그 사람의 길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그런 사람이 바로

진짜 詩人입니다

그런 詩人의 삶이

바로 진짜 詩입니다     


나는 지금 이어도공화국에서

그런

영혼이 맑은 당신과 함께

가장 향기로운

詩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등나무



당신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버린 등나무였다

등만 보이던 그 등나무가 오늘은 등꽃을 켜고 있다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상심한 별빛이 내리던 감나무

그런 나뭇가지들이 이제는 부러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내려와 꽃피던

별꽃들의 가슴속으로 썰렁한 바람이 일고

감꽃은 떨어져 수심만 가득 피어났다

그래도 몇몇 아이들은 감꽃을 모아

가난의 목걸이 속에서 웃을 줄 알았다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던 여울물소리도

이제는 떠나버린 아이들처럼 감나무를

기어오르지 못하고 가지만 부러지고 있었다

왠지 모를 근심과 물소리는 하류에서부터 쌓이고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고향 사람들은 하나 둘 쓰러져 간단하게 묻혔다

제 무덤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없이 떠나가거나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그렇게 날아가 버린 새들은

실성한 만길이 할머니가 남겨놓은 까치밥이

모두 떨어지고 눈꽃이 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깊이 상처 입은 감나무들은 낡은 바람만 휘감고

이제는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락하고 있었다 그런 유배의 땅에서도

작은 기쁨들로 채워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시간은 헛되지 않으련만,

이제는 꽃도 없고 까치밥도 없이

그저 늙은, 

어둠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앙상한 감나무에서 또한

상심한 별빛이 지고 드디어 가지가 부러지고 있다

이제는 

새가 돌아와도 둥지를 틀만한 감나무 하나 없고

보리이삭 피어도 보리피리 불어 젖힐 아이들도 없는,

부질없이 미나리아재비만 피어나는 그런 고향에서 

또 

다른 고향을 찾아 떠나야 하는 막막한 새들과 나는,        



                                                                                                                                                                                                                                                                                                                                                                                                                





배진성 시인의 세상 읽기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뒤표지)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들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세상에 대하여, 너무나 분노한 사람들과, 한 때의 실수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산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그들의 아픈 가슴에도,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자연의 큰 거울 앞에서, 희망을 되찾은 그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 할 길, 겨울이 깊을수록, 더 잘 보이는 길, 실패한 사람을, 함께 이끌어주고, 넘어진 사람을, 함께 일으켜 세워주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을, 우리들이 함께 풀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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