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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Apr 03. 2022

가까운 죽음

#15. 자글자글

나이가 들수록 겁이 많아진다. 원래도 간이 작은 편인데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무서운 게 늘어간다.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건강에 대한 공포인데 30대 중반을 맞아 급격히 떨어진 체력과 피곤하면 나타나는 특정 증세들이 불안을 키웠다. 처음엔 사소해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증상도 세 달, 네 달 낫지 않으면 무서워진다. 병원에 가봐도 뾰족한 답이 없고 불편함이 계속되면 큰 병의 징조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다. 몸의 변화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나이 먹었다는 걸 실감한다. 어릴 땐 생리하는 게 너무 싫어서 빨리 폐경이 오면 좋겠다고 노래 부르지만 막상 정말 그때가 가까워 오면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처럼 말이다. 나의 건염 증상은 해를 넘길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그 시발점이 된 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이은 장례였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주일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그전까지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를 잃는 슬픔도 알지 못했는데, 1년 전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나니 죽음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름 아쉬울 것 없는 보통 삶을 사셨지만 돌아가시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할머니의 암 투병은 꽤 길었다. 첫 번째 항암 후 몇 년을 건강하게 지내셨지만 다시 재발했을 땐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인분들은 암에 걸려도 신진대사가 빠르지 않아 퍼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느리다고 한다. 그래서 말기암 상태라도 3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경우는 잘 없고, 고령에는 오히려 수술이 더 부담이라 암을 발견해도 그냥 두는 게 명을 더 늘리는 방법인 거다. 암이 재발했을 때 할머니는 80 중반이었는데 문제는 항암을 하지 않으면 장이 막혀 돌아가실 상황이었다는 거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수술은 살기 위한 게 아니라 덜 고통스럽게 죽기 위한 거였다. 활동적이고 자존심도 셌던 할머니는 아프기 전에도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죽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가끔 할머니네서 자고 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제일 먼저 일어나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게 하루 이틀 아프다가 죽게 해 달라는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들려왔다. 암이 재발한 할머니는 그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수술 후 섬망이 와서 몇 달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할머니가 일부러 정신을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할머니가 처음 암을 발견한 게 80대 초반이었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견디고 마주한 결과가 제대로 죽기 위한 수술이었으니, 모든 걸 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수술 이후엔 아예 움직이질 못해서 집안 병원 침대에 꼭 갇혀 지내셨는데 효심이 지극한 고모들이 번갈아가며 씻기고 먹이고 변도 갈았다. 곧 정신이 돌아온 할머니는 그렇게 2년 정도를 더 사셨다. 병원에서도 기적에 가깝다고 했었다. 수술 덕분이었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바깥공기 한번 쐬지 못했고, 욕창에 시달리며 딸과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때가 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이라 나중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딸, 며느리, 요양보호사님과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지냈다. 아기처럼 몸을 맡긴 채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고 가족들이 찾아오면 예전보다 몇 배는 더 반가워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하루하루를 귀하게 보냈던 거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할머니의 병이 가족들의 화두였기에 90이 다 된 할아버지는 항상 혼자였다. 할아버지도 나이가 들어 아픈 곳이 늘고 치매도 진행 중이었지만 병의 경중 때문에 언제나 두 번째로 밀려났다.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할머니에 비해 할아버지는 아직 혼자 많은 걸 할 수 있으니까. 가벼운 치매가 오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는 성격도 조금 괴팍해졌다. 생전 내지 않던 화를 내거나 판피린 같은 진통제 류 약을 하루에 몇 병씩 몰아 먹어 피가 굳지 않을 정도로 몸에 이상이 오기도 했다. 같이 사는 고모와 다투는 날이 늘었고 나이 든 노인분들이 그러하듯이 밑도 끝도 없이 버럭 성질을 낸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손녀인 나나 며느리인 엄마가 오는 날은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그건 할아버지의 마지막 이성이자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너무 늙어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기억이 사라져 간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자꾸 타박하는 자식들에게 화를 내고, 비틀거리며 다닐 바에야 나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외출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 가장 오래 사셨기 때문에 사실 나가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가족들이 할머니 침대 옆에서 남몰래 눈물 흘릴 때도 할아버지는 방안에 혼자 누워있었다. 티비도 보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데 깜깜한 방에 그냥 계속 누워만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픈 할머니보다도 더 죽고 싶어 했던 거 같다. 노인들은 돌아가실 때가 되면 스스로 식사를 끊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밥을 먹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식욕이 좋아서 천장만 보고 누워있다가도 정확히 밥때가 되면 거실로 나와 밥을 달라고 했는데 말이다. 원래도 많이 먹지 않던 할아버지가 꼬박꼬박 세끼를 챙겨 먹는 게 치매 때문이라고 판단한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꽤 오래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하루아침에 밥은커녕 물도 먹지 않게 된 거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찰나, 갑자기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다. 귀가 어둡고 하루 종일 방에만 있던 할아버지는 그날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할머니 장례 중에도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 어른들이 교대로 장례식장과 집을 왔다 갔다 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할머니를 찾지도 않았다.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 가족들이 할아버지 댁에서 다 같이 잠들던 날, 새벽부터 할아버지의 상태가 이상했다. 할아버지가 곡기를 끊은 후 유일하게 자식들을 찾는 건 화장실 갈 때뿐이었는데, 혼자서는 갈 수 없었고 마지막까지도 기저귀 차는 걸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새벽에 한두 번이던 할아버지의 부름이 2분 간격으로 몇 시간 동안 계속됐고 새벽까지 이어지자 아무도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식들을 부르는 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엄마 잃은 아이처럼 애절했다. 불려 간 아빠나 삼촌이 조금 전에 화장실을 가서 나올 것도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 봐도 소용없었다. 침대에 눕히고 돌아서면 몇 분 후 다시 목놓아 아빠와 삼촌의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그날이 정확히 할머니 장례를 마친 날이었다. 장례의 슬픔과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아빠와 삼촌은 불려 갈 때마다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보통 노환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은 죽기 전에 발바닥에 보라색 멍이 생긴다고 한다. 새벽에 할아버지 방에 다녀온 사촌동생이 조그맣게 "근데 할아버지 발바닥에 보라색 자국이 있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소랑 다르게 뭔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평소보다 더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죽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부축을 받으며 변기에서 일어설 때도 수건걸이를 잡고 바들바들 떨면서 손을 놓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이상행동에 아버지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삼촌은 결국 화를 냈다. 평생 부모님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한적 없는 아들이었다. 아빠와 삼촌은 겨우 할아버지를 진정시키고 거실에 나와 각각 다른 허공을 보며 말없이 서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날 돌아가시진 않았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고 각자 사는 지역으로 직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모두 할아버지도 곧 돌아가실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되던 날 데자뷰 같은 전화를 또 받았다. 한 달에 장례만 두 번이라 슬픈 와중에도 회사에 말하기가 머쓱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어 그토록 싫어하던 병원에 실려 간 후 잠들다 돌아가셨다. 호상이라면 호상이지만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내면서 죽는 과정이 무섭다고 느꼈다. 마지막의 마지막엔 철저하게 고독하고 완전하게 혼자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오래 건강하게 사셨고 자식들에 둘러싸여 돌아가셨다. 젊은 날에 갑작스레 사고나 말도 못 할 범죄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많다. 두 분의 죽음은 평균적으로 좋은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부터 나는 죽음을 좀 더 가깝게 느낀다. 소중한 사람의 순서대로 그들이 죽었을 때 내가 받게 될 충격과 슬픔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나조차도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삶이란 생각이 든다. 마음속에 죽음의 공포가 들어서 버린 거다. 죽는 날은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얼마가 남았는지 안다 한들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 없어 갑작스러울 거다. 태어난 사람은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살던 때가 좋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다들 조금씩은 슬픈 얼굴을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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