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22. movie sketch

by Yearn


견디는 삶에 대하여



“차라리 관광객을 데리고 우주에 가는 편이, 다시 그 시대의 관습이나 편견, 엄격한 예의범절, 그 화려함과 불행, 그리고 당시의 문화와 무지 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상상하기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공주들>에서 발췌-


<순수의 시대>는 멜로의 공식을 따른 로맨스입니다. 통속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너무나 익숙한 설정이지만 지금 보아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주인공의 사랑이 단지 개인의 감정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고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뉴욕 사람들이 보수적인 문화를 만들어나가던 1870년대의 상류사회입니다. 주인공인 아처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보수적인 가문의 가장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서 관습에 맞추어 사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어머니와 여동생을 든든하게 받치는 헌신적인 사람이죠.



2200002.jpg <순수의 시대>



그런 아처와 관습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메이는 배타적인 상류사회에서 그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실한 아처는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여인 엘렌과 사랑에 빠집니다. 엘렌은 자유를 원하는 적극적인 인물입니다. 남자에게서 해방되고 뜬소문에서 해방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아처는 뉴욕 상류사회에서 그녀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아처에게 엘렌은 그의 숨통을 틔워주는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엘렌에게도 아서는 뜬소문만 가득한 상류사회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지지해주는 상식적이고 상냥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순수의 시대>는 전형적인 멜로 구조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느껴집니다.



2200003.jpg <순수의 시대>



영화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연기입니다. 부제목을 이성의 시대라고 달아도 될 만큼 주인공 세 명은 모두 인내합니다. 유혹에 견디고 책임감을 견디고 주위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죠. 연기중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장면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아처는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알았을 때에도 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에도 메이나 엘렌에게 자신의 감정만을 퍼붓지 않습니다. 개인의 감정보다도 더 커다랗게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밖으로 뿜어내지 않고 삭히는 억눌린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굉장히 훌륭합니다. 메이가 엘렌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나 자신의 외도가 들통났을 때, 메이의 임신 사실로 손발이 완벽하게 묶여 버린 때까지 그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미세한 표정과 행동으로 삼키며 연기해 냅니다.



2200005.jpg <순수의 시대>



그러나 이 영화는 누가 뭐라 해도 여성들의 영화입니다. 두 여배우는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굉장히 주체적인 인물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살고자 하는 엘렌은 거절합니다. 결혼생활에 불성실했던 남편의 돈을 거절하고 뉴욕의 뜬소문에 스스로 해명하는 것을 거절하고 때로는 아처의 유혹마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처를 잊지 못하게 되자 모든 비난과 소문은 견딜 것을 각오하고 그의 곁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2200004.jpg <순수의 시대> - 미셸 파이퍼



엘렌의 태도는 사랑에 빠져 감정적으로 변한 아처와 대조됩니다. 그녀는 현실적입니다. 마차 안에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자는 아처에게 그런 곳은 없고 당신은 견딜 수 없을 거라고 말하죠. 당시에도 둘의 관계가 들통 난지 오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처뿐 엘렌은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메이는 다른 의미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한길밖에 모르는 고지식함은 때로는 아처를 힘들게 하고 자식들과도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없게 했지만 그것이 그녀를 가장 강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세계 외의 다른 것은 전혀 들이려 하지 않았고 굉장히 좁은 범위 내에서 가짜라면 가짜이고 진짜라면 진짜인 그런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엘렌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며 우회적으로 남편을 설득하는 메이를 보면 정말 무서운 여자다 싶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삶 역시 인정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200006.jpg <순수의 시대> - 위노나 라이더



메이는 정공법을 사용합니다. 그녀가 엘렌을 찾아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냈더라면 이 이야기는 흔하디 흔한 막장 드라마와 같았을 겁니다. 메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메이는 엘렌에게 그녀가 아처를 의지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엘렌이 어떻게 떠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마음마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엘렌을 향한 아처의 마음이 자기를 향한 것보다 더 큰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메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곁에 남아준 남편에게 죽을 때까지 고마워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그녀 나름의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2200007.jpg <순수의 시대>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아처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의 두 여인 엘렌과 메이가 원하는 삶을 이루어간 것에 비해 그는 책임을 거부할 용기도 내지 못했고 메이처럼 현실 내에서 만족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메이의 마지막 유언은 최고의 찬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포기하고 견뎌내 준 것에 대한 감사. <순수의 시대>라는 제목은 역설적이기도 하지만 제목 그대로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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