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movie sketch
꿈꾸었던 이들의
서글픈 자화상
‘방황하는 10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마치 방황이 10대의 전유물인 것처럼 그 시절의 혼란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말이죠.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는 10대들의 성장담을 다룬 청춘영화입니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생활은 낯간지러운 대사를 쏟아내는 뜨거운 청춘영화처럼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 안은 사회와 똑같이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서열 사회니까요. 그래도 학창 시절 계급은 사회보다 알기 쉽습니다. 운동이나 공부를 특별히 잘하거나 타고난 신체조건이 좋은 학생이 우수 집단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비주류가 됩니다. 그걸 영화는 '되는 놈'과 '안 되는 놈'으로 표현했죠. 뭘 해도 되는 놈과 뭘 해도 안 되는 놈.
두 집단은 학교라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철저하게 분리된 생활을 합니다. 요시다 다이히치 감독은 리얼한 학교 풍경을 배경으로 철저한 계급사회가 펼쳐지는 영화 뒷면에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인 '꿈'을 새겨 넣습니다. 얼핏 10대들의 활극으로 보이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는 사실은 꿈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10대들만 공감하는 청춘 영화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꿈을 찾지 못해 대해 방황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는 소박한 제목처럼 화려하지 않은 일상의 조합으로 이야기를 짜 나갑니다. 특별히 대단한 사건은 나오지 않고 학교에서 일어날 법한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가 떠올랐습니다. <엘리펀트>는 총기난사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평범하고 일상적인 학교의 풍경으로 그려낸 영화입니다.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날을 자세히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려 하죠.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지만 누구의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평범한 학생들이 차례로 주인공이 되어가는 과정은 우울하고 싱겁기도 하지만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미세한 변화와 갈등을 심심하게 그려내지만 왠지 뭉클합니다.
영화를 이끄는 주된 사건은 극 중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키리시마의 부재로 생겨납니다. 되는 놈 중 가장 잘난 놈, 계급사회의 정점에 있는 키리시마가 사라지자 견고했던 작은 사회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설정 탓에 별것도 아닌 일로 요란 떠는 영화라고 평하는 글도 있었지만 저는 오히려 그 부분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거는 게 10대들이니까요.
단단히 구축해 왔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친구와의 다툼, 실연, 성적 하락 등 사소한 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게 학창 시절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고민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엔 매일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친구의 한마디에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그런 시기였던 거 같습니다. 학교라는 작은 세상이 인생의 전부였던 거죠. 영화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그들의 순간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영화 속에서 늘 붙어 다니는 주인공들은 서로 친구를 가장하고 있지만 언제든 관계에 금이 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입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 사건은 학교 안 학생들의 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칩니다. 키리시마와 가까운 히로키와 여자 친구 리사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다음은 히로키의 여자 친구이자 리사의 절친인 사나가 심기 불편한 두 사람의 영향을 받죠. 그다음은 사나와 같은 무리인 카스미와 미카가 까칠해진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반대로 키리시마의 부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안 되는 그룹에 속한 영화부 마에다와 관악부 사와지마는 키리시마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키리시마와 관계가 없을뿐더러 같은 그룹에 속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도 간접적인 영향은 받습니다. 사와지마는 히로키를, 마에다는 카스미를 좋아하기 때문에 키리시마가 그들에게 준 영향이 이들에게도 전해지죠. 영화는 키리시마가 사라진 사건을 중심으로 두 그룹 각자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진행합니다.
안 되는 그룹의 대표주자인 마에다는 영화 내내 수모만 당합니다. 전교생에게 영화 제목으로 비웃음 당하고 촬영을 하려 할 때마다 다른 동아리에게 밀려 매번 무시당합니다. 참다못한 마에다는 영화 후반부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두 그룹은 경계를 허물고 처음으로 진심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야구부를 그만둔 히로키는 빡빡 민 머리가 다시 자랐지만 여전히 야구부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주인공들은 담임선생님이 나눠준 진로진학서에 아무것도 적지 못하죠. 10대는 당연히 꿈을 꿔야 하는 나이로 여겨지지만 막상 그 시절에 꿈을 지닌 학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나에게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를 서서히 판단할 수 있는 때입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대>에는 사건의 이유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히로키는 왜 야구부를 그만뒀는지, 키리시마는 왜 갑자기 종적을 감췄는지, 사나의 언니는 어떻게 죽었는지 등등. 그러나 영화 속의 작은 퍼즐을 맞추다 보면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게 됩니다. 나 또한 겪었던 시절의 이야기니까요. 야구부를 승리로 이끌지 못하는 주장은 히로키를 볼 때마다 다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합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밤새 연습도 하지만 결국은 이기지 못하죠. 주장은 안 되는 그룹입니다. 키리시마 없이 대회에 나간 배구부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코이즈미는 키리시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단기 그들은 결과를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옥상에서 마에다를 마주한 히로키는 영화감독이 될 거냐고 묻습니다. 마에다는 영화감독이 되긴 어려울 거 같다고 말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영화를 찍냐는 히로키의 질문에 마에다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건넵니다. 그 대사를 들은 히로키의 표정을 보면 그도 한 때 꿈을 지녔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꿈도 있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영영 불가능한 꿈도 있습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을 접한 10대들의 좌절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