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36. movie sketch

by Yearn


벗어나지
못 하는 것에 대한 공포



조롱과 혐오의 대상으로만 남은 로만 폴란스키. 그의 추문과 도피 행각 덕분에 남긴 영화들까지 언급하기 불편해졌지만 로만 폴란스키가 뛰어난 영화감독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는 어떤 명작을 만들어내도 개봉시키기 어렵겠지만 말이죠. <유전>은 그의 명작 중 하나인 1968년작 <로즈메리의 아기 : 악마의 씨>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명작이라 해도 시대가 바뀌면 상황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알게 모르게 고전을 답습한 많은 현대 영화들에 노출된 세대들은 당시 새로웠다는 문법과 시도들을 지루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반대로 예전의 업적을 뛰어넘을 만한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시대를 타지 않겠죠. <로즈메리의 아기>는 제게 그런 영화입니다. <유전>은 일어난 사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리액션(반응)으로 공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로즈메리의 아기>와 닮았습니다. 그러니 상상력이 좋고, 쉽게 공감하고, 불행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영화가 몇 배는 더 무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악마의 씨 : 로즈마리의 아기> - 로만 폴란스키 작품



관객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물들의 표정으로 벌어진 일의 무게를 파악하게 됩니다. 좁은 화면에 인물들의 리액션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그 방에는 누가 있거나, 주인공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상태입니다. 이 방식은 직접적으로 상황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냅니다. 영화는 가짜이기에 '짜잔'하고 보여주면 깜짝 놀라고 말 일입니다. 하지만 보여주지 않으면 관객은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영화 안에 참여하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를 공포로 몰아넣는 거죠.


스포일러가 있어요!!



hereditary04.jpg <유전> - 찰리



<유전>의 많은 장면들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찰리의 사고 후, 피터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관객은 정확히 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는 피터를 보며 그 공포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영화 속 상황과 보여주는 장면을 다르게 해 충격을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피터는 차 안에 놓인 동생의 몸만 싣고 돌아왔기 때문에 가족들은 찰리의 머리를 볼 수 없었습니다. 찰리의 사체를 보고 애니가 절규하는 순간 화면에 나타나는 찰리의 머리는 관객에게 단순한 사고 이상의 불행을 느끼게 합니다.



hereditary07.jpg <유전>



그리고 이 불행에는 전조가 있습니다. <유전>은 복선을 쌓아가는 영화입니다. 찰리의 목이 잘리기 전 새의 목을 자르는 장면이 나온 것부터 우연히 방문한 이웃집에서 엄마가 지니던 것과 똑같은 방석이 등장하는 것, 제목이 유전이라는 점 등등. 영화는 아무런 사건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암시합니다. 찰리의 저주가 걸린 수첩은 그것을 태우는 사람에게 불을 붙입니다. 애니는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고 싶다며 남편에게 수첩을 태워달라고 하죠. 그때 불현듯 영화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주술에 빠진 찰리 할머니의 피가 섞이지 않은 남자가 누구일까. 역시나 남편이 불타 죽게 됩니다.



MV5BYjVlNjhmYTktMWQ4MC00ZGQ0LTg3ZjgtZGFmMTM1YzVmNjQ2XkEyXkFqcGdeQXVyNjQ4ODE4MzQ@._V1_SY1000_CR0,0,1500,1000_AL_.jpg <유전> - 불운한 남편의 아이콘(가브리엘 번)



<유전>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성장에 선천성이 20프로 후천성이 80프로라고 하지만 대체로 이어받은 유전자는 같은 일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유전자뿐만 아니라 길러진 환경은 자녀에게 같은 영향을 주죠. 애니는 오컬트에 심취한 엄마와 끊임없이 불행이 이어지는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몽유병으로 자식들을 죽일뻔한 애니와 그런 엄마에게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아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며 지독한 말을 내뱉습니다. 꼭 악령의 기운을 이어가는 가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전자를 나누어 받은 가족끼리 하는 흔한 행동이죠. 너만은 달랐으면 하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해보지만 결국은 같아지는 대물림 앞에 좌절하게 됩니다.



MV5BYWU3ZjQ0M2QtOGQzNy00NDUyLTk3NGQtMzMwOWE2MzNlZGYxXkEyXkFqcGdeQXVyNzAwMTc4OTY@._V1_.jpg <유전>



<유전>은 오컬트 공포영화이지만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는데, 마지막 30분이 되면 그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피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아들을 죽이겠다고 벽에 붙어있지를 않나 목을 좌우로 썰지를 않나. 공포의 실체가 드러나자 앞에서 취해왔던 방식을 한 번에 허물고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답답했던 영화에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고자 하는 감독의 서비스 정신은 눈물겨우나 덕분에 <로즈메리의 아기>는 여전히 왕좌를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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