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movie sketch
물 밑의 백조처럼
<아이 엠 러브>의 개봉 당시 루카 구아다니노는 유명한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완성도와 탁월한 감각적 연출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세 번째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마에스트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 감독들은 대체로 자기만의 연출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의 영화를 퍼즐처럼 쪼개 구조를 만들어내는 감독과 새로운 관념을 제시하는 감독, 영상으로 신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야망에 가득 찬 감독들 사이에서, 루카 구아디노는 초연하게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는 고전적인 감독입니다.
모든 영화가 감정을 다루지만 그의 영화가 좀 더 특별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야만 인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기에 때때로 화려한 CG나 구구절절한 대사, 극단적인 상황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 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신기하게도 이 부분을 굉장히 쉽게 해내는 감독입니다.
<아이 엠 러브>는 완벽한 집안의 가족들을 통해 인간에겐 완벽함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외치는 영화입니다. 높은 프라이드만큼 어떻게 보일 것인지에 집착하고 출신성분으로 유리천장을 만드는 그곳에서 엠마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과 단절돼 있던 그녀에게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는 오랜만에 보는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을 겁니다.
루카의 영화 속 인물들은 굉장히 사랑스럽습니다. 라이벌의 생일에 케이크를 만들어왔다가 대접받지 않고 도망가는 안토니오나 대저택의 안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뻐기지 않는 엠마,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딸과 겸손하고 선한 아들까지. 그들은 상냥하고 순수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훌륭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설득력이 있죠. 그는 뛰어난 비주얼리스트입니다.
<아이 엠 러브>는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습니다. 주인공 엠마의 과거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 안토니오는 어떤 유년기를 보내왔는지 등.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감정을 시각화하는 연출은 관객에게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엠마와 안토니오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너무 갑작스럽기도 합니다. 몇 번의 스쳐가는 짧은 만남으로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관계를 만들어내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는 동안은 그들의 만남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엠마는 낯선 도시에 주소 하나 없이 안토니오를 만나기 위해 찾아갑니다. 아무리 좁은 동네라 해도 처음 간 도시에서 그를 발견했다는 것은 지나친 우연이지만 그 장면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엠마가 그를 찾아 나설 즈음은 관객도 엠마만큼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는 음흉한 감독입니다. 하나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공들였는지 티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이 왜 좋았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그는 결코 우연에 기대는 감독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할 뿐이죠.
안토니오는 짧은 만남마다 엠마에게 특정한 자극을 줍니다. 첫 만남에서는 아름다운 케이크로 시각적인 자극을 두 번째 만남에서는 요리를 알려주며 촉각을 세 번째 만남에서는 훌륭한 음식으로 미각을 자극합니다. 그는 엠마의 오감을 차례로 자극하며 갇혀 있던 본능을 깨워냅니다. 이야기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겹겹이 쌓여가는 사건 속에 인물과 관객은 한순간 어떤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영화는 마침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자연과 함께 그려냅니다. 안토니오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흔들리는 나뭇가지, 바람소리, 뜨거운 햇살, 두 인물의 땀방울까지 세세하게 담아내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 풍경들처럼 이 끌림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백 스토리가 없음에도 인물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건 순간의 장면이 제공하는 정보가 많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가 엠마와 사랑을 나누기 전, 그녀의 옷과 액세서리를 하나하나 벗겨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엠마는 값비싼 액세서리들을 스스로 착용하며 대저택의 가족모임을 준비했었습니다. 그것들은 재벌가 안주인의 지위와 행복을 보장하는 동시에 삶을 구속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안토니오가 의식을 치르듯이 모든 것을 벗겨내자 엠마는 족쇄가 풀린 사람처럼 무척 행복해합니다.
<아이 엠 러브>는 사랑이 자유를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대가는 엄청나죠. 감독은 주인공의 열망에 답하기 위해 흠 없는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신이 관장하는 세상처럼 감독이 만든 세계에서 인물들은 반응하고 움직입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 에도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엠마는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과감한 감독의 결단에 답하듯 엠마는 용기를 내어 집을 떠나게 됩니다.
<아이 엠 러브>의 촘촘한 이야기에 설득당한 관객은 인물들의 감정에 깊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깊은 공감은 관객의 개인적인 상념을 끌어내죠. 어떤 감정을 느끼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겁니다. 타인의 이야기에서 나의 기억으로, 나의 기억에서 다시 타인의 감정으로. 그래서 루카 감독의 영화는 유독 오랜 기간 마음에 남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