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movie sketch
낯선 공포감
어릴 적에 컴퓨터로 봤던 <에어리언>은 치가 떨리게 지루한 영화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처럼 극장이 아니면 느낌이 잘 전달되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프닝의 부유하는 우주선과 하나씩 생겨나는 알파벳이 조그마한 컴퓨터 화면으로 무슨 감흥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스토리가 먼저냐 비주얼이 먼저냐는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 드라마, 연극은 비슷해 보이지만 제작부터 상영되는 환경까지 차이가 있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다릅니다. 아직까지 영화관이 영상 비주얼을 가장 근사하게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영화의 비주얼은 무척 중요하죠. 비주얼 그 자체가 스토리 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개인적으론 스토리가 지루한 영화는 어떤 근사한 비주얼이 붙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2시간은 생각보다 길거든요.
<에어리언>을 다시 보며 깨달은 건 이 영화가 의외로 비주얼에 강한 영화라는 겁니다. 광활한 오프닝부터 냉동된 우주인들이 깨어나는 장면까지. 첨단기술(당시에는 더욱 참신했을)에 대한 상상력과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곳곳에 존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어리언>은 비주얼이 스토리가 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복잡한 호스로 둘러싸인 우주선 내부는 에어리언의 몸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선원들이 에어리언을 찾아 나설 때 선체의 일부분만 보아도 긴장하게 됩니다. 무채색의 우주선 내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는 공포감을 더욱 극대화시킵니다.
<에어리언>은 비주얼 스토리텔링에 교과서적인 영화입니다. 이후 다른 영화들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익숙한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 , <그래비티> , <컨텍트>등 그 외에도 제임스 카메룬, 캐서린 비글로우, 루카 구아디노 감독 등이 나는 <에일리언>에 영향을 받았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죠. (물론 그전에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가 있습니다만.)
<에어리언>이 현재 조금 지겹게 느껴지는 건 이제는 신기하지 않은 SF 비주얼과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속도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은 <에어리언>이 - 설사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해도 - 외계인의 대표 명사 같이 익숙한 단어가 되었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를 상상해보면 황당할 정도로 낯선 존재였을 겁니다. 관객은 영화 속 선원들과 똑같이 에어리언의 실체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낯선 이야기에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체험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이 조금 지겹긴 하지만 상황과 분위기를 쌓은 영화는 끝날 무렵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게 됩니다.
<에어리언>은 비주얼 못지않게 스토리도 탄탄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 사소한 사건들은 선원들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우주에서 깨어나자마자 보너스 얘기를 꺼내는 정비공을 시작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료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 , 공격당하는 리플리를 감싸는 캡틴, 공포에 질려 제비뽑기를 하자는 여자대원까지. 한계가 명확한 단체 생활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흑인 정비공 파커(배우 야펫 코토)에게 시작과 끝이 다른 캐릭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그의 캐릭터는 전형적으로 할리우드가 소비하는 흑인의 이미지였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거칠고 단순한 인물. 반면에 백인 캡틴은 정의로운 리더로 위기의 순간에 자신보다 팀원들을 먼저 생각하죠. 그러나 캡틴은 영화의 초반부에 죽고 에어리언의 공격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선원들을 지키는 것은 흑인 파커입니다. 아직도 이 정도의 흑인 캐릭터가 참신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영화 속 인종차별은 여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두 군데입니다. 숙주에서 태어나는 에일리언과 과학 장교가 로봇으로 밝혀지는 장면.
3D로 만든 캐릭터가 실제 인물과 거의 차이가 없는 요즘에 비하면 짜치기 그지없는 특수효과들이지만 상황 자체가 워낙에 특수하기에 충분히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 낯선 존재의 등장에 인간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고양이와 고양이의 시점 샷도 흥미로왔습니다.
<에어리언>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이 낯선 존재로 인해 표면 위로 드러나는 광경을 그린 영화입니다. 누군가를 숙주로 삼아 살아가고, 상처를 입으면 산을 내뿜어 공격한 상대에게 몇 배는 더 큰 타격을 주는, 지독한 생존 본능을 지닌 존재는 오래된 특수효과에도 여전히 공포감을 선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