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movie sketch
1 급수 영화
<청설>은 2009년 작품입니다. 거의 10년 전 영화가 다시 개봉한다는 건 그만큼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았다는 뜻 이겠죠. 영화는 의외로 유행에 민감한 곳이고 특히 남녀 이야기를 다룬 장르는 당시의 시대를 더 리얼하게 반영합니다. 가장 눈에 띄게 확인할 수 있는 로맨스 장르의 변화는 키스신이 어디에 등장하냐입니다. 예전엔 키스신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이었으나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초반 몇 회 안에 애정씬이 나오지 않으면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하죠. 그래서 더 이상 멜로가 먹히지 않는 시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남녀 간의 만남이 캐주얼해진 요즘 평생 동안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만 기다리는 내용의 순애보가 이제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재개봉을 맞아 보게 된 <청설>은 추억에 잠김과 동시에 잊고 있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순수한 영화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세련된 영화들도 있습니다. 고전 중엔 현대 영화들보다도 훨씬 쿨한 작품들도 있고요. <청설>은 그런 영화는 아닙니다. 10년 전 영화답게 촌스럽고 투박하고 아주 풋풋합니다. 예전의 로맨스 공식대로 남자 주인공은 첫눈에 반하고, 키스신은 영화가 끝날 무렵 한번 나올까 말 까죠. 평범한 일상을 담는 화면과 다소 과장된 연기, 도덕책을 갈아 넣어 만든 듯한 인물들의 행동이 요즘의 것은 아닙니다. 딱히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만듦새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매력이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감동을 받을 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청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수화를 사용합니다. 음성 대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공간음 소리를 들으며 배우의 표정과 자막을 읽는데만 집중해야 합니다. 내레이션과 배경 음악 없이 공간음이 영화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는 드뭅니다. 청각장애를 다룬 영화도 많지 않고요. <청설>은 이 소재를 무겁게 그리기보다는 젊은이들의 만남을 통해 보편적으로 풀어가려 합니다. 이 시도는 상업적이지 않은 소재를 보는 관객에게 영화의 문턱을 낮춰주고 우연히도 <청설>의 단점을 가려주기까지 합니다.
사실 <청설>의 이야기는 개연성이 높지 않습니다. 내용 전개의 필요에 따라 복선도 있고 사건도 발생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아요. 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하게 대사가 가능한 주인공 티엔 커는 가끔 자신의 속마음을 독백으로 드러냅니다. 영화 속에서나 할 법한 문법체로 구구절절 감정을 내뱉죠. 만약에 영화 전체의 대사를 배우들의 음성으로 들어야 했다면 <청설>의 가치는 훨씬 더 떨어졌을 겁니다.
다행히도 대사는 대부분 수화로 표현되기에 문법체의 딱딱한 내용도 배우들의 표정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소리로 듣는 언어보다 더 집중하게 되기도 하고요. 말이 사라진 영화는 많은 자막을 읽어야 하지만 어딘가 간결하게 느껴집니다. 한 채널로만 들리는 단순한 소리도 복잡한 머리를 맑게 해 주죠.
<청설>은 나름 탄탄한 복선을 지닌 영화이기도 합니다. 오프닝 장면부터 소리가 나는 알람시계를 사용하는 것까지. 조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도록 반전을 곳곳에 심어놓았습니다. 최고의 씬스틸러인 주인공 부모를 소개할 때도 엄마의 따뜻한 성격을 계속해서 보여주죠. 주인공이 청각장애 여자 친구와의 교제를 허락받으려 할 때 관객이 부모의 결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요.
<청설>의 낯선 소재는 관객의 편견을 시험합니다. 우리 모두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청설>의 반전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수화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말을 못 할 거야'라는 생각. 수화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인데 말이죠. 두 자매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청정지역이어서 거짓말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이게 됩니다. 피아노 소리가 좋냐는 언니의 물음에 밤새 울었다는 양양의 고백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요.
<청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확실한 방법은 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저런 얘기가 어딨어?' 이 한마디를 떠올린다면 절대로 영화를 즐길 수 없습니다. 이제는 많이 잊혀진 가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젊은 영화. 세상은 바뀐 듯 바뀌지 않았기에 <청설>도 더 오랜 기간 사랑받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