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디어

#41. movie sketch

by Yearn


불행을 막을 수 없다면



<킬링 디어>는 혈족 살인을 소재로 한 그리스 신화 <이피게네이아>를 레퍼런스로 사용한 영화입니다. 신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숲에서 사슴을 잡은 아가멤논 왕은 자신이 여신보다 뛰어난 사냥꾼이라고 자만하다가 신의 노여움을 삽니다. 분노한 아르테미스는 트로이 전쟁을 앞둔 그리스 함대가 출발하지 못하도록 바람을 앗아가죠. 왕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피게네이아를 불쌍히 여긴 아르테미스는 제물을 사슴으로 대체하고 그녀를 신관으로 삼습니다. <킬링 디어>의 원제는 <The Killing of a Sacred Dear>로 절대자와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 그리고 대신 희생당하는 죽은 사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킬링 디어>는 해석이 필요한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저도 영화를 보고 여러 비평을 찾아보았는데 그중 가장 공감한 표현은 ‘차세대 라스 폰트리에’입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분명히 주목받는 감독이지만 아직은 그 정도의 평가가 적당한 것 같아요. 두 감독 모두 비주얼에 강하고 전복적인 관념을 제시하는 이야기가 많으며 독특한 연기톤을 만들어냅니다. 관객을 위한 영화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을 그대로 재현해내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들은 관객을 차근차근 설득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관을 불친절하게 제시하죠.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때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그래서 뭐? 온갖 폼을 잡아놨는데 자세히 보니 설득력이 전혀 없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요르고스 영화에 대한 저의 감상입니다. <랍스터>와 <킬링 디어> 모두요. 그러고 보니 <도그빌>을 보고 난 후에도 저 생각이 떠올랐었네요. '아니 그래서 뭐?'



<킬링 디어>



<킬링 디어>의 시작은 무척 좋았습니다. 오프닝은 생생하게 뛰는 심장과 웅장한 장송곡으로 이 영화가 관객의 기분을 상하게 할 거란 걸 바로 알려주죠. 영화의 초중반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감정을 알기 어려운 연기, 맥락을 알 수 없는 대사들. 주인공은 왜 시계를 사줬을까. 왜 찾아오지 말라고 한 걸까. 마틴이라는 신비한 소년은 영화를 한층 더 모호하게 만들었고 스티븐과의 미스터리 한 관계는 극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중반을 지나 주인공들이 각자의 역할에 정착하자 이야기는 힘을 잃습니다. 아빠뻘의 남성에게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감정을 드러낼 것처럼 보였지만 복수라는 이름 아래 단순해져 갔습니다. 심지어 마틴과 아버지의 관계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죠.



마틴 역의 배리 케오간



그리스 신화는 영화에 적합한 스토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화에는 개연성이 필요 없거든요. 절대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킬링 디어>는 그것을 영화의 중심 소재로 삼았습니다. 이유 없는 불행,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존재. <킬링 디어>에서는 두 명의 신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스티븐 가족에게 저주를 내리는 마틴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 한 명은 죽여야 하는 스티븐.



스티븐 역의 콜린 파렐



현대에 가장 신과 같은 권력을 지닌 인간은 의사입니다. 생명을 관장한다는 점과 일반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요. 스티븐은 음주 수술로 마틴의 아버지를 죽게 만듭니다. 신의 영역인 생사의 문제에 손을 대고 만 것이죠. 그것이 마틴의 저주를 불렀고 유일한 해결 방법은 희생양을 정하는 것뿐입니다.


마틴이 저주의 예언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모호했던 영화는 선명한 도돌이 표가 됩니다. 저주는 간단히 이루어지고 가족들이 그 불행에 적응할 무렵 두 번째 저주가 일어납니다. 마틴은 더 이상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빈약한 이야기를 안고 복수를 이어가는 누군가의 아들이 됩니다. 판타지 영화를 볼 때처럼 이 영화의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해리포터를 보면서 어떻게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있냐고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심각한 주인공들과 관객의 온도차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심해집니다. 불행에 반응하는 한 가족을 그린 다는 건 놀라운 설정이지만 요르고스 감독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은 인물의 복잡한 심경을 관객이 느낄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무거운 배경음악은 영화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만 깨닫게 해 주죠. 그러다 보니 극 중 인물들은 심각한데 관객은 그 일들이 전혀 상관없게 느껴집니다.



<킬링 디어>



스티븐은 가족에게 내린 저주를 풀기 위해 한 명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차마 희생양을 고르지 못하고 방을 빙빙 도는 그를 보고 있자니 차라리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감추어둔 내용을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숨은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 풍부하게 읽힙니다. <킬링 디어>는 신화를 재해석한 솜씨와 보기 드문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작품을 스스로 설명해야 하는 것만큼 창피한 일이 있겠습니까.


<킬링 디어>는 안개로 가득 차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을 때가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마틴 역할의 배우 배리 케오간도 인상적이지만 늘 같은 듯 조금씩 다른 모습을 익숙하게 선보이는 니콜 키드먼이 정말 놀랍습니다.



연기 장인 니콜키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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