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movie sketch
태워야만 하는 것
<버닝>은 2018년에 나온 한국 영화 중 유일한 기대작이었습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연이은 성공으로 영화에 킬링타임 이상을 기대하는 관객은 몇 년째 방치되어 있었죠. 무려 8년 만에 찾아온 이창동의 신작은 이야기를 바라던 사람들에겐 가뭄 속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실력이 어느 수준에 오르면 정체되는 경우는 있어도 떨어지진 않는다고 합니다. 한번 올라간 안목은 더 나은 걸 바라지 낮아지려하진 않으니까요. 작품을 평가할 때 우수하다고 하는 건 평균보다 높은 안목을 제시했다는 뜻일 겁니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작품입니다. 그의 전작에 비해 굉장히 젊은 영화지만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어 현상만을 바라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창동의 색이 묻어납니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원작 일본 소설의 은유적 표현을 그대로 활용한 영화는 주인공들의 표면적인 대화만 봐서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관객이 적극적으로 행간을 읽어야 해요. 대사 밑에 숨겨진 의도-서브 텍스트-를 읽어야만 진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브텍스트란 실제 하는 말 아래 숨어있는 의도나 생각, 감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평소 사이가 안 좋던 친구가 내가 산 물건을 보고 '이거 실제로 쓰면 불편하다던데'라고 말을 걸어왔다면, 그 친구는 단순히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나에게 (넌 별로인 물건을 샀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나친 왜곡일 수도 있죠. 그래서 서브텍스트는 그간 쌓여온 관계와 이야기 속에서 풀어야만 더 정확할 겁니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서브텍스트를 추측하는 건 인간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관객의 참여도를 높이고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버닝>은 시작부터 혜미의 가짜로 귤을 까먹는 팬터마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전달합니다. 신기해하는 종수에게 그녀는 말하죠. '간단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영화 속 주인공 세 명은 모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들입니다. 종수, 혜미 그리고 벤까지 그들은 변화 없는 삶의 권태로움을 견디는 중이죠. 각자의 방법으로 탈출구를 발견하지만 그것 역시 그들의 깊은 절망을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모두 살아있지만 죽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벤은 연고도 없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혜미 같은 여자들을 찾아 차례로 태워버리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비닐하우스를 주기적으로 태우듯이요.
<버닝>은 벤이 나타난 순간부터 혜미가 갑자기 사라진 후까지, 모든 과정을 종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불안한 심경을 전달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인 종수는 벤의 수상함을 빨리 알아챕니다. 하지만 벤과 함께 누리고 싶은 게 있는 사람들은 그의 진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죠. 혜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걸 맞추려고만 합니다. 혜미는 벤을 통해 얻어갈 게 있었어요. 하지만 그에게 바라는 게 전혀 없는 종수의 눈에 벤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혜미를 무시하고 그녀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이기적인 상대였습니다. 그리고 벤은 그런 종수에게 자기의 살인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죠.
<버닝>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종수의 시골집으로 찾아온 벤이 자기 취미 생활을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종수에게 주기적으로 방치된 비닐하우스를 몰래 태운다고 말합니다. 불법이긴 하지만 어차피 쓰이지 않고 사라져도 신경 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가끔은 비어있는 비닐하우스들이 자기가 태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하죠. 이 상황에서 혜미는 집안 소파에 잠들어 있고, 벤이 말하는 취미가 살인을 뜻한다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관객과 종수가 벤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불안함을 느끼는 건, 그가 묘사한 비닐하우스와 영화 앞부분에 보인 혜미의 삶이 상당히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고살인은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 혜미는 갑자기 사라지고 행방을 묻기 위해 벤을 찾아간 종수는 혜미-1처럼 보이는 여성이 이미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혜미와 고양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종수에게 벤은 묻습니다. '그 고양이 진짜 있었던 거 맞아요?' 순간 영화는 첫 장면에서 혜미가 선보인 팬터마임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비닐하우스가 사라진 것처럼 혜미가 없다는 사실만 잊으면 종수는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버닝>의 원작 소설 제목은 <헛간을 태우다>입니다. 종수는 벤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아니라 사라져야만 하는 걸 태우기로 결심합니다. 마지막에 죽어가는 벤의 얼굴은 그 역시 누군가 삶을 끝내주기를 바라온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무의미를 견디지 못한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끝을 맞이합니다.
<버닝>은 기존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비해 캐릭터와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안 되는 한국어로 애를 쓰는 스티븐 연의 발음 때문일 수도 있고, 뻔하디 뻔한 벤의 부자 캐릭터 때문일지도 모르죠. 사실 벤은 일본 영화에서 많이 그리는 전형적인 악인입니다. 보는 내내 <버닝>이 일본 영화였다면 벤 캐릭터가 덜 어색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식으로 풀어내면서 패치 오류가 발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칸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데 비해 국내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던 이유도 이 때문인 거 같고요. 자막으로 <버닝>을 접하는 사람들은 스티븐 연의 한국어 연기를 들어야 하는 한국인의 심정을 모를 테니까요.
원래 감독은 벤 역할에 강동원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 캐스팅하지 못하고 새로 찾은 인물이 스티븐 연이라고 하죠. 한국 관객에게는 오점으로 남을 스티븐 연의 연기지만 그래도 강동원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티븐 연의 자연스러운 존재감 덕분에 기능적인 벤 캐릭터가 한결 중화됐으니까요. 강동원이 벤을 맡았다면 적역인 만큼 인물이 더 가짜 같아 보였을 거예요.
이창동은 국내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감독 중 한 명입니다. 칸에서 각본상을 받은 작품 <시>가 영진위 지원사업에서 시나리오 점수 '0'점을 맞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버닝>역시 칸에서 경쟁 부분 사상 가장 높은 별점을 받는다거나, 칸의 대부라 불리는 자문위원에게 특별 코멘트를 받아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였지만 이렇다 할 기사조차 발견할 수 없었죠. 그가 8년간 영화를 찍지 못했던 게 자의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버닝>의 흥행실패와 현재 한국영화의 상황을 보면 감독의 다음 영화를 언제 보게 될지 불안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정성스러운 영화에 보는 내내 감격스러웠습니다. '맞아 이렇게 좋은 한국영화가 쏟아지던 때도 있었지.' 8년을 쉬었어도, 아무리 유행이 바뀌어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