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movie sketch
돌아갈 수 없는 그때
이창동은 한국의 귀한 감독 중 한 명입니다. 봉준호와 더불어 한국인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기도 하죠. 박찬욱이나 김지운의 영화에서 (<밀정>과 <JSA 공동경비구역>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데 비해 이창동이나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만이 알고 있는 정서가 묻어납니다. (누가 더 낫고 별로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감독의 성향 차이일 뿐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현실에 없는 이야기로 현실을 표현하느냐, 아니면 현실로 관념을 표현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대표작인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를 생생하게 그려 낸 듯한 영화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짧은 시간에 급격한 변화를 자주 겪었습니다. 전쟁, 한강의 기적, 쿠데타, IMF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언제나 희생자를 보듬지는 못했습니다. 쫓기듯 변화에 대응해야 했던 개개인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거나 현실을 외면하며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박하사탕>은 혼란스러운 현대사 한가운데서 살아갔던 한 남자 ‘영호‘의 이야기입니다. 역순으로 흘러가는 시간 구성은 상당히 낯설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신기하게도 주인공 ’영호‘가 현재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이해가 갑니다.
설경구가 연기한 영호는 어딘가 뒤틀려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하는 행동은 다른 등장인물은 물론 관객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묻어나는 광기를 감출 길이 없는 사람이죠. 관객은 이유도 모른 채 계속해서 그의 기행을 지켜볼 뿐입니다. 다만 영화 초반부에 병실에 누워있는 문소리를 보며 진심으로 슬퍼하던 영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도 감춰진 진심이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하지만 영화가 시간을 꽤 거슬러 올라가도 영호가 지닌 광기의 원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그의 과거는 너무 짧고, 현재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한 인물의 순수했던 시절이 망가진 현재 모습보다 슬프게 느껴지는 건, 그의 삶이 뒤틀린 이유가 단순히 자기 잘못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호와 바람을 피우던 사무직 여직원은 그에게 박하사탕을 권하며 먹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번 물든 삶은 잠깐의 환기로 나아지지 않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 한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죠.
저는 설경구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었습니다. <박하사탕>으로 순식간에 연기파 대표 명사가 된 그였지만 <해운대>, <감시자들>, <그놈 목소리> 같은 영화에선 명성에 걸맞은 연기력을 보기가 어려워 늘 의아했죠. <박하사탕>을 보고 나서야 그에게 배우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절반이상을 끌고 가는 광기품은 영호 연기도 대단하지만 마지막에 잠깐 등장하는 순수한 영호의 모습은 ‘배우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빛마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설경구 배우의 열연이 없었다면 관객은 영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린 주인공은 현재의 삶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너무도 멀리 떨어져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절망합니다. 기찻길 아래서 절규하는 영호를 지켜보며 눈물 흘리는 동창생은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