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ROMA

#49. movie sketch

by Yearn


백합화 하나만큼의
훌륭함



살다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인생 참 별거 없다'라는 허무한 푸념이 아니라, 국가,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비슷한 고민을 안고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될 때 삶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는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의 유년시절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얽히고설킨 경험의 파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림을 다 맞추고 나면 마치 한 시대를 고증한 영화처럼 현재에도 선명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누군가의 경험이 수많은 사람에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마도 우리네 삶이 조금씩은 겹치기 때문일 겁니다.



<로마> - 알폰소 쿠아론 감독



<로마>는 감독이 유년 시절 가장 사랑한 가정부 클레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멕시코 내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젊은 가정부입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가장 먼저 그녀의 인생이 담긴 집을 소개합니다. 클레오와 고용인 소피아 부부,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죠. 소피아 가족과 클레오는 생김새부터 사용하는 언어, 재산과 사회적 위치까지 모든 게 다릅니다. 그녀를 가장 따르는 막내 페페는 클레오가 다른 가정부와 민족어로 말할 때면 못 알아듣게 말한다며 서운해합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그들의 차이를 알지 못하죠. 하지만 그들의 삶은 다릅니다.



<로마>



클레오의 부모님은 땅을 뺏기고 갈 곳도 없는 빈곤층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부모님을 찾아가지 못하는 그녀도 마찬가지죠. 클레오의 남자 친구는 그녀가 남긴 콜라를 몰래 마실 정도로 여유가 없습니다. 대저택에서 클레오와 친구가 머무는 공간은 아이들 방 보다도 좁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함께 운동하고 웃고 잠에서 깨는 모습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죠. 누워있는 클레오와 자고 있는 거울 속 친구의 모습은 너무 비슷해서 마치 클레오가 거울에 비친 거 같아요. 그들의 삶은 동일합니다. 소피아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클레오는 그곳의 가정부들과 교류합니다. 저택에서 주인들의 파티가 한창일 때 계단 아래에서도 그들만의 파티가 열립니다. 그들은 분명 다르지만 삶의 모습은 비슷하죠.



<로마> - 클레오



영화에서 소피아 가족과 클레오의 관계는 높이 차이로 표현됩니다. 일단 신체조건부터 다른 데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인 클레오와 소피아는 항상 눈높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죠. 한 명은 앉아있고 한 명은 서서 이야기를 한다던가, 가정부인 클레오는 바닥에서 아이를 보고 소피아는 소파에 앉아있습니다. 클레오는 분명 소피아 가족의 일원이지만 TV를 볼 때 혼자만 방석에 무릎을 꿇고, 의자에 자리가 모자라면 서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녀들의 차이는 각자 삶에 비정한 파도가 치고 난 후 조금씩 좁혀집니다. 임신하고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클레오와 바람난 남편에게 버려진 소피아. <로마>는 여성들이 삶에서 흔히 겪는 불행을 마주한 두 여인이 연대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죠. 의리의리 하면서 무리 생활을 중시하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내 가정이 생기면 자기의 모든 걸 바치고 그 외의 관계에서는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내 가족, 내 남편, 내 자식 등 때로는 이기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요. 그래서 여자들의 우정은 별거 아니라고도 합니다. 언제든 자기 울타리가 생기면 그 속에 갇혀 나오려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여성들은 그 모든 이기주의와 개인성을 뛰어넘는, 오직 여자만 할 수 있는 출산이라는 경험으로 서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몸속에 아기를 품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불리한 입장이 되어버리는 그런 상황. 그녀들의 삶은 많이 다르지만 여성으로 마주하는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서로에게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로마> - 클레오와 소피아



<로마>에서 자동차는 남성의 역할, 부재중인 아빠로 표현됩니다. 또 소피아 남편의 캐릭터를 가장 간결하게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하죠. 소피아 남편이 처음 영화에 등장할 때 관객은 단지 주차하는 장면을 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장면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죠. 그는 주차할 때 1mm의 틀어짐도 원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에, 문 앞에 달려 나온 가족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집을 떠나고 소피아는 남편 대신 차를 모는 걸 어려워하죠. 남편처럼 빈틈없이 주차하지 못하고 자동차 사면을 벽에 긁혀가며 엉겁결에 떠맡은 그의 빈자리를 겨우 메꿔나갑니다. 남편 동료를 찾아가 하소연도 해보고 아이들과 클레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힘겹게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로마>



답답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던 영화는 중반부를 기점으로 변화합니다. 아기용품을 보러 간 클레오는 건물 바깥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시위 진압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남자 친구였던 그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용역이라는 걸 알게 되죠. 동시에 양수가 터져 병원으로 실려간 그녀는 아이를 낳게 되지만, 태어난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불행이 지나가고 소피아는 새 차를 삽니다. 그녀에겐 버겁던 남편의 큰 차가 아니라 주차가 쉬운 소형차를 마련하죠.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홀로서기로 결심한 겁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걸 보고 여행하고 경험하게 될 거라고.



<로마>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은 파도에 휩쓸려 갑니다. 수영을 못하는 클레오는 파도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아이들을 구해내죠. 이 장면은 <로마>의 하이라이트이자 그녀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입니다. 클레오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갈 때는 거센 파도가 가는 길을 방해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갈 때는 응원이라도 하듯이 파도가 그녀를 모래사장으로 밀어줍니다. 모래사장에서 부둥켜안은 소피아 가족과 클레오는 처음으로 다 함께 같은 높이에서 마주합니다. 그리고 클레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소피아에게 고백하죠. 소피아는 아무 말 없이 우리는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새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주저앉은 그들의 마음은 한 곳으로 모입니다.



<로마>



<로마>는 여성들의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진짜 여성영화입니다. 남성 중심 문화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감독 또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영화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진짜 현실에서 여성들이 마주한 문제를 그들이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 연대하며 회복해 나가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클레오는 오자마자 아이들의 심부름과 짐 정리에 정신이 없죠. 하지만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의 모습을 담아 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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