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자글자글
나의 오래된 두려움 중 하나는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온건한 집안의 막내로 자란 나는 안전한 곳에 무리 지어 생활하는 초식동물이었다. 늘 긴장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느렸고 경쟁심도 없었다. 고모들은 지금까지도 모이기만 하면 어릴 적 내가 얼마나 답답했는지를 얘기하며 치를 떨지만, 인내의 아이콘인 엄마는 그게 타고난 성질이라고 생각해 다그치지 않고 늘 기다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무리하는 일 없이 적정 속도로 자랄 수 있었다. 평화로운 유년시절은 엄마에게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가며 겪은 대부분의 어려움도 여기서 생겨났다.
어린 나는 겁이 많고 소극적이었지만 다행히도 눈치가 빨랐다. 눈치가 빠른 건 겁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친 바깥세상에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선 빠른 상황 판단이 필요했던 거다. 부끄럼도 많아서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정말로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낯을 가린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듣다 보면 학교에서 전교회장을 한 적이 있고 무슨 수련회에 가서 춤을 췄단다. '음...' 나의 낯가림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낯선 친구가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비켜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알아채 줄 때까지 서있었다. (진짜다) 12년간 학창 시절이 무탈했던 건 순전히 운이었다.
친구는 잘 사귀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거의 매해 선행상을 받았고, 중학교 때도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친해지고 싶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친구가 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담임선생님이 상담 중에 너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친구들이 좋아해서 신기하다고 했다. 인기쟁이였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관계에 서툴렀다. 다만 적이 없었을 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더라라는 말이 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괜찮았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튀지 않아서 지적받는 일도 없었다. 단체 생활은 언제나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하기 싫은 걸 무리하게 한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나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조용히 견디기만 하면 모든 건 지나갈 일이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먹히지 않기 시작한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였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영화 <주토피아>에서 나무늘보가 일하는 장면은 그렇게들 웃어주던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동물들은 타고난 개성대로 살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듯했다. 사회생활이 가능한 동물은 맹수, 재주 부리는 원숭이 아니면 뱀이나 쥐새끼뿐이었다. 그 안에 속하지 못했다면 결국은 나를 감추고 사회에 맞춰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성실한 편이다. 꾸준히 해야만 남들과 비슷하게 할 수 있고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곧 실수하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과도 잘 지내려고 한다. 그래야 나중에 덜 혼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보통만큼 하기 위해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왔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아 과거를 여러 번 뒤돌아 보기도 했었다. 연차가 쌓일수록 사회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기는 하지만 사회는 언제나 예상보다 많은 걸 바란다. 끊임없이 능력을 증명해야만 유능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의 엄청난 노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저렇게 치열하게 살았어야 하나 싶어서. 예전에 많이 좋아했던 모 배우는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냐는 질문에 타고난 거라고 했다. 자만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노력으로도 안 되는 건 있다. 그런데 얼마큼 노력했는데?라고 물었을 때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타고난 대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크게 성공한 누군가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노력으로 되는 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