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movie sketch
조커가 아니었더라면...
조커는 인기 있는 빌런이자 유례없이 강렬한 캐릭터입니다. 단순한 행위를 넘어서서 죽이더라도 끔찍하게, 훔치더라도 화려하게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르죠. 그리고 그것이 순전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그를 더욱 두려운 존재로 만듭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에게 주는 고통에도 무감각합니다. 제대로 된 백 스토리가 없음에도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는 행동들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조커는 악행의 잔혹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다크 나이트>는 어느 정도 조커의 계보를 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조커가 스스로 밝히는 자신의 기원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우는 부인을 웃게 해 주려 입을 찢어버린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사가 실제로 벌어진 일이냐 아니냐 와 상관없이 그 말을 내뱉는 조커의 광기는 코믹스의 조커와 유사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요. 토드 필립스 감독이 연출한 <조커>는 그간 보아왔던 조커와는 다릅니다. 조커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조커라는 캐릭터가 알려진 세상에서 그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인물의 드라마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 인물이 궁지에 몰리며 광기를 띄워가는 과정을 그리기는 하지만 이분법에 가까운 논리로 선과 악을 나누고 (조커 캐릭터의 매력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철학으로 흑백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조커가 된 모습보다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야기가 1인칭으로 진행되다 보니 지극히 자기 연민이 가득한 이야기가 되었죠. 차라리 시점이 중립적이었다면 인물이 더 안쓰러워 보였을 텐데 영화가 100% 조커의 입장만을 대변하려다 보니 그 외의 인물들은 모두 악인이 되어버립니다.
불쌍한 조커는 종종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합니다. 궁지에 몰리고 정신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의 행동에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커가 죽인 인물들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상징적인 권력자들도 아니고 총 맞을 정도의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작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에 불과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조커의 살인에 어떤 쾌감을 느낍니다.
원작의 고담 도시는 도덕성이 사라져 정의가 설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조커의 우발적 살인이 일상의 놀이처럼 수면으로 올라오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타락한 고담시티의 배경이 필요합니다. 그런 배경 설정 없었다면 조커의 총질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영화는 <조커>를 기존 캐릭터의 프리퀄로 그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조커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해 결정하지 못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새로운 조커라 하기엔 이전의 설정과 상황들을 가져와 그대로 사용을 했고 그렇다고 프리퀄이라 하기엔 결이 너무 다른데 영화 속 추종자들은 벌써 코믹스의 조커를 받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조커가 토크쇼에 나가 호스트를 죽이자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더욱 크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연결고리도 없죠. 호스트의 무례함은 아서밖에 알지 못했는데 성난 시민들은 그 행동의 어떤 부분에 공감을 한 걸까요? 심지어 아서가 호스트를 죽이는 과정도 그의 정신병력 없이는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그래서 저는 <조커>에 대한 다양한 해석중 영화 전체가 조커의 망상이었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정신병원에서 아서가 흑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 초반에 흑인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던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녀가 일기 쓸 것을 요구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서의 모습도 같죠. <조커>는 영화 속에서 아서의 망상과 실제를 모호하게 섞어 놓았습니다. 망상 속에서는 대체로 그가 원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현실은 언제나 곤란한 상황들이 벌어졌습니다. 아서가 정신병원에 갇힌 자신을 상상 할리는 없다는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그의 실제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차 위에서 군중의 환호를 받는 장면은 클럽에서 능숙하게 공연하는 자신을 향해 여자 친구가 환하게 웃어주는 장면처럼 망상일 가능성이 높겠죠. 영화가 정신분열 중인 조커를 보여준 것이라면 프리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