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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an 21. 2020

아이리시맨

#58. moviesketch


이토록 고요한 인생사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하죠. 나이 들어 일정한 지위가 생기면 존경받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살아온 세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지 존경은 아닌 거 같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건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살아온 삶으로 존경받는 사람도 있고 이루어낸 성취물이나 뛰어난 혜안으로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결국은 평가받으려면 일정 기간 축적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짧은 이력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리시맨>의 감독과 배우들. 오른쪽 위부터 (마틴 스콜세지 감독, 조 페시, 하비 케이틀,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영화 <아이리시맨>에 참여한 감독과 배우들은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기 능력을 증명해 온 사람들입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출세작인 <택시 드라이버>가 1976년, 알 파치노의 <대부>가 1978년, 조 페시의 <나 홀로 집에>가 1990년 작품입니다. 이들은 20년 전에 품질보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드니로는 30대에 이미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죠. 한 분야에 30년 이상 몸 담았다는 건 진심으로 그 일을 사랑한다는 뜻 일 겁니다. 평균 경력 30년 이상인 영화 장인들은 예전에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왔지만, 최전선에서 반보 밀려난 후에도 성실히 업을 이어왔습니다. 대신 각자 자기 성을 쌓은 거물이 되면서 한 영화에서 협업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몇십 년이 지나고 노년기에 이르러 <아이리시맨>으로 다시 만난 이들은 영화계의 전설답게 또 한 번 명작을 만들어냅니다. 



<아이리시맨>



<아이리시맨>은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계보를 잇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험한 동네에서 자란 본인의 경험을 살려 여러 편의 갱스터 장르 영화를 연출했었죠. 당시 스콜세지 감독의 페르소나는 로버트 드니로였습니다. <분노의 주먹>,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등 명작 속의 명연기가 이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젊은 배우가 필요하자 감독의 파트너는 디카프리오로 바뀌었습니다. <갱스 오브 뉴욕>, <디파티드>, <셔터 아일랜드>등 여전히 장르 성격이 강했지만 정통 갱스터물에서 벗어나 연출범위가 넓어졌고, 디카프리오가 안정적인 페르소나로 자리 잡으면서 드니로와의 협업은 한동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니로 두 사람의 재회만으로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그런데 거기다 <대부>의 알 파치노까지 캐스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이리시맨>을 향한 기대는 더 높아질 수 없을 만큼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완성된 결과물은 그 기대마저 뛰어넘더군요.



<아이리시맨>, 세월을 돌린 배우들
<아이리시맨>, 왼쪽 영화의 키맨 조 페시



러닝타임 3시간이 넘는 <아이리시맨>은 마피아 조직원인 프랭크 시런의 일대기를 다룬 논픽션 작품입니다. 언제나 이방인 이야기를 다뤘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아일랜드 출신인 마피아 프랭크의 삶을 통해 미국사의 곪은 부분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프랭크의 삶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굵직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죠. 유명한 역사적 사건 뒤에는 기록에도 남지 않을 거물들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건 한 인물의 인생이 피었다가 지는 과정입니다. <아이리시맨>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랭크의 과거에서 현재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젊은 프랭크가 등장하는 전반부는 익숙한 연출과 30대 로버트 드니로의 등장으로 스콜세지의 초기작을 떠오르게 하죠. 러닝타임이 반정도 지나 익숙한 영화 한 편이 끝난 느낌이 들 때 본격적으로 후반전이 시작됩니다. 노인이 된 갱들의 현재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죠.  


<아이리시맨>



실제로 70이 넘은 배우들은 인물의 30대부터 70대까지 전 연령대를 연기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감독은 나이에 맞춰 걸음걸이나 움직임에 차이를 달라고 요청했고 배우 머리에 테니스공을 달거나 스크린 앞에 세우는 대신 진짜 공간에서 렌즈가 여러 개인 카메라로 촬영해 연령대에 맞게 얼굴을 합성했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 고집이었죠. 덕분에 어색한 대역 없이 전 연령대 최상의 퍼포먼스가 나왔고 극 중 인물이 배우의 실제 나이와 가까워질수록 영화는 더욱 깊은 맛을 내게 됩니다. 



<아이리시맨>, <대부 2>와의 묘한 데자뷔
<아이리시맨>, <대부 2>와의 묘한 데자뷔



 주인공 프랭크는 음지의 권력가 러셀 밑에서 양지의 권력가 지미 호파를 돕고 두 보스의 거래를 조율하는 중간자였습니다. 지미 호파는 실존 인물로 당시 미국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유명하다 할 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죠. 그런 그가 케네디 일가에게 마피아들 마저도 혀를 내두를만한 배신을 당하자 프랭크는 말합니다. '내가 뭔가를 놓쳤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장면은 같은 갱스터 장르인 <대부>에서 노년의 마이클이 여동생에게 한탄하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평생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힘썼지만 올라갈수록 내 손만 더 더러워지는구나.' 어찌 보면 호파는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래된 관계를 믿었고 베푼 호의가 그대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갱들의 세계는 심플합니다. 내 편과 적 둘로 나누어 한배를 탄 이들에게는 한없는 호의를 베풀지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죠. 그 거래에 금이 가면 그땐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이리시맨>


도청에 시달리는 마피아들에겐 그들만의 암호가 있습니다. 서로를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고 '살인'이라는 단어 대신에 '페인트칠'이라는 말을 사용하죠. 극의 설정에 맞물려 중의적인 표현으로 오가는 대사들은 <아이리시맨>을 더 영화답게 만들어줍니다. 프랭크가 러셀과 함께 떠난 가족 여행은 지미호파의 페인트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행의 종착지에서 오래된 친구를 페인트칠하라는 미션을 받고 프랭크는 당황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어쩔 수 없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는 러셀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러셀은 페인트칠을 위해 떠나는 프랭크에게 선글라스를 맡기고 가라고 합니다. 지미는 프랭크에게 좋은 친구였지만, 러셀은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였습니다. 몇십 년 동안의 우정을 몇 시간 만에 끝내고 돌아온 그는 한때는 그걸 끼고 보이는 게 있냐고 비웃었던 선글라스로 눈을 가립니다.


<아이리시맨>


프랭크는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죽고 난 후에도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노년의 프랭크가 스스로 관을 고르고 무덤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장면은 한때 그가 마피아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쓸쓸하고 평범했습니다. 단란했던 가족은 흑백사진으로만 남고 유독 호파를 따랐던 딸은 프랭크와 인연을 끊습니다. 요양원에서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프랭크이지만 그는 끝끝내 방문을 완전히 닫지 못하죠. 


<아이리시맨>은 일생의 무게가 담긴 영화입니다. 마피아는 아니지만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영화 장인들의 노년기가 기록된 작품이기도 하죠.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이 길고 성의 있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시맨>은 <대부>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한 시대를 가장 화려하게 마무리한 작품으로 기억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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