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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an 27. 2020

아사코

#59. moviesketch



욕망의 주인공


<아사코>는 평범한 사랑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선남선녀가 눈을 감고 몸을 기댄 포스터는 뻔한 멜로 냄새를 풍기며 이 영화가 사랑이야기라는 확신을 줬죠. 멜로나 로맨스 같이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장르는 대중이 공감하기 쉽지만 작품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관객이 장르에 기대하는 부분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전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아사코>는 멜로가 분명한데도 이례적으로 평론가들의 평점이 무척 높았습니다. 무언가 다르구나 싶었죠. 궁금증으로 보게 된 영화는 익숙한 재료로 만든 전혀 다른 요리였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이야기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죠. <아사코>는 사랑이야기이자 한 여자의 내면에 집중하는 여성영화입니다. 


<아사코>



<아사코>를 여성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주인공인 아사코가 마지막에 온전히 자기 욕망에 충실한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불특정 대중을 향하는 미디어는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체로 기존 방식을 유지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특히 로맨스에서 보여주는 남녀 관계나 성별에 따른 캐릭터는 지겨울 만큼 한결같았죠.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여자 주인공과 다 갖추고도 한 여자만 사랑하는 남자의 현실성 없는 판타지는 오랜 기간 여성 캐릭터의 성장을 막았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체적일수록 빛이 납니다. 로맨스 장르 속 여자 주인공들은 언제나 수동적인 태도로 남자 주인공만을 위해 존재해 왔기에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녀들은 마치 욕망이 없는 사람처럼 남자 주인공의 곁에서만 행복해했습니다. 그의 성공이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원하는 건 쉽게 내려놓았죠.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남자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일 뿐이었어요.



<아사코>



청순가련한 캔디형 다음으로 등장한 캐릭터는 왈가닥에 자기주장이 강한 엽기적인 그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달리 근본적으로 자기 욕망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박따박 자기 할 말 다하는 여성 캐릭터가 독특하다는 인식 자체가 여자 주인공은 자기주장이 없어야 한다는 편견을 더 심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심지어 왈가닥이던 그녀들은 극 중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 다시 청순가련형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의 태도는 외피만 바뀌었을 뿐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아사코>



<아사코>의 아사코는 요즘 보기 드문 오래된 여성 캐릭터입니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수수하고 청순가련한 외모에 말수도 적고 사랑에 순종적이죠. 모든 사랑이야기엔 각자가 만들어낸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추억을 미화한 과대 포장 일수도 있지만 가끔은 정말로 운명처럼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죠. 아사코와 바쿠의 독특한 첫 만남은 그들의 관계를 더 특별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바쿠. 그가 남긴 한마디로 아사코의 이별은 계속해서 연장됩니다. 머리로는 이별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에는 언젠가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거죠.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을 두고 다시 현실을 살아갑니다. 



<아사코>



바쿠가 사라지고 시간이 한참 흘러 아사코는 새로운 사랑을 만납니다. 도쿄에서 우연히 알게 된 료헤이는 운명의 장난처럼 바쿠와 똑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난 아사코는 바쿠 없이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료헤이와 평범한 행복을 이어가며 결혼을 앞둔 그때 영화는 잊고 있던 바쿠의 존재를 꺼냅니다. 풍문으로 들리는 바쿠의 소식만으로도 영화에는 긴장감이 생겨납니다. 관객이 아사코가 바쿠를 기다렸을 세월과 감정을 이해하기에 함께 불안해하는 겁니다. 



<아사코>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에 아사코는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의 껍질을 벗습니다. 똑같이 생긴 두 남자를 동시에 마주한 거짓말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약혼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쿠를 따라나섭니다. 아사코는 자기 욕망을 따랐기에 바쿠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자기감정에 충실했습니다. 만약 아사코의 새로운 연인 료헤이가 변변치 않은 사람이었더라면 그녀의 선택은 덜 신선했을 거 같습니다. 오히려 료헤이가 너무 괜찮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사코의 선택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사코는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그 결정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아사코>



욕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성은 항상 소외되었습니다. 남성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이야기는 차고 넘치지만 여성의 욕망은 논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왠지 모르게 쉬쉬해야만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욕망을 실현시키기 어려운 상황에 오래 놓였던 여성 캐릭터들은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알기 어려웠죠. 그리고 자기 욕망을 내세우는 여성은 유별나게 여겨졌습니다. 젠더 문제를 떠나 현실에서도 자기 진심을 최우선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들 책임과 두려움을 핑계로 조금씩 타협하며 살아가죠. 아사코의 행동은 무책임하지만 진심이었을 거 같습니다. 



<아사코>



하지만 결국 그녀는 바쿠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시간은 너무 많이 흘렀고 '고속도로는 지났어?'라는 말의 데자뷰 속에 아사코는 진짜 사랑이 누구인지를 깨닫습니다. 기다렸던 바쿠가 상상 속 욕망의 대상이었다면 료헤이는 평범한 현실에서 진짜 감정을 쌓아온 존재였던 겁니다. 사랑과 감사는 다르다고 하지만 함께 쌓아온 시간은 잠깐 타오르는 불꽃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사코는 그토록 기다리던 료헤이와 똑같이 생긴 남자 옆에서 불현듯 그가 료헤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처럼 자신의 욕망에 솔직히 답하기 위해 다시 료헤이를 찾아갑니다. 



<아사코>



<아사코>는 결국엔 사랑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특수한 상황이라도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죠. 같은 얼굴을 한 두 남자와 아사코의 사랑이야기는 다소 극단적이지만, 관객에게 자기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던 주인공의 심정을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과거의 내가 쌓여서 생겨난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인가 현재의 새로운 나인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때 나는 과연 그 사람이 좋아서 좋았던 걸까 아니면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어떤 사람과 비슷해서 좋아하게 된 거였을까. 과거의 내가 현재에 영향을 주었다 하더라도 현재의 나는 과거와 다른 사람일 겁니다. <아사코>는 여성영화이자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방황하는 아사코는 불안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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