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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Apr 08. 2020

버니

#60. moviesketch


전부 다
더한 것



<변신>의 프란츠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기 위한 도끼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이 들수록 딱딱해지는 머리와 뻔한 일상은 절로 변화를 거부합니다. 현실에서 권태로운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일조차 귀찮기도 합니다. 요즘은 영화 하나를 제작하는데도 만장일치를 얻어야만 투자가 들어간다고 하죠. 내려치는 도끼처럼 날카로운 작품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충격적인", "지금까지 본 적 없는"을 광고 문구로 내세우는 영화들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는 이미지를 좀 더 가공한 익숙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가끔 요란 떨지 않고 딱딱해진 머리를 반으로 가르는 작품을 만날 때면, 영화를 보는 짧은 순간이 무수히 쌓인 일상보다 가치 있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링클레어 감독의 <버니>는 지금까지 당연하다 믿었던 상식을 통째로 흔드는 도끼 같은 영화입니다.





<버니>는 미국 텍사스 동부의 작은 마을 카시지에 있었던 실제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는 시간순서대로 사건을 재현하는데 이야기 중간에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를 넣어 살인자 버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잭 블랙이 연기하는 주인공 버니 티드는 카시지 출신도 아니고 대단히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진심으로 상대를 위로할 줄 알았습니다. 오래된 마을일수록 사람들의 평판이 중요하죠. 버니는 카시지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버니가 카시지 마을의 최대 수혜자였다면 그가 살해한 과부 마조리는 마을의 유명한 마녀였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가족마저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최대 부호였지만 잘 보이기 위해 줄 서는 사람조차 없었죠. 사람들은 마조리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그녀를 싫어했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알게 해 줍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카시지 마을 주민들은 버니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조리를 살해하고 난 뒤에도 그녀의 재산을 펑펑 쓰면서 천연덕스럽게 마조리가 요양원에 입원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는데도 말이죠. 마을 주민들의 버니를 향한 믿음은 마치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교인 같기도 합니다. 영화는 최대한 공정한 태도로 버니를 보려 하지만 그를 향한 주민들의 태도가 거의 같아 중립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리처드 링클레어 감독은 개봉 후에도 버니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지나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잡히자마자 죄를 자백했고 배심원들의 후한 평가 때문에 지역을 옮겨가면서까지 재판했는데도 평균보다 무거운 형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N번 방으로 시끄러웠던 주인공은 포토라인에서 본인의 혐의와 관계없는 이름을 나열하며 자기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습니다. 하지만 범행 사실을 인정하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빠르게 묵비권을 행사했죠. 황당할 정도로 가볍게 열리던 입이 불리한 상황에서 굳게 닫히는 걸 보고 저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한 일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백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범행을 빠르게 인정한 버니의 태도는 그를 향한 주민들의 평가가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살인은 무거운 죄입니다. 모두가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죠. 하지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마조리 부인의 죽음과 감옥에서도 누군가의 도움이 되는 버니를 보자면, 죄를 짓지 않은 걸로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하긴 어려운 거 같습니다. <버니>는 관객에게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살아온 삶도 함께 봐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카시지 마을 주민들은 버니가 감옥에 가자 계속해서 탄원서를 보냈고, 그는 모범수로 생활하다가 2014년 보석으로 조기 석방되었습니다. 삶은 총량으로 평가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되겠죠. 영화처럼 찜찜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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