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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un 28. 2020

1917

#61. moviesketch


이유 있는 도전

영화가 오랜 기간 관객과 소통해 온 주요한 방식은 주인공과 감정을 공유하는 겁니다. 인물과 나를 동일시할 때 관객은 캐릭터에 애정을 지니고 작품에 더 깊게 몰입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경험을 내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3D, 4D의 등장으로 영화의 태도는 조금 변했습니다. 예전처럼 이야기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특수효과로 더 생생한 체험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죠.


<1917>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 정공법으로 물리적 제약이 많은 전쟁 이야기를 롱테이크로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고프로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CG 보다도 신기하고 끊김 없는 촬영은 극강의 몰입감을 선사하죠. 감정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습니다. 관객은 대체로 주인공의 행복을 바라지만 주인공이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더 감정 이입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600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질러야 했던 스코필드의 이야기는 촬영과 완벽히 짝을 이뤄 극이 흘러갈수록 더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1917>은 주인공 스코필드가 다른 부대에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라는 미션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스코필드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 건 사소한 우연 때문이었습니다. 스코필드의 동료 블레이크가 전언을 전할 부대에 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임무를 맡게 됐고 스코필드는 그 옆에 누워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명령을 함께 수행하게 된 거죠. 스코필드는 처음부터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수동적이던 인물이 진짜 주인공이 되는 건 블레이크가 죽고 나서부터입니다. 부여받은 미션에 주체적인 동기가 없었던 스코필드는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의 유언을 짊어지게 됩니다.





블레이크가 죽자마자 스코필드는 살기 위해 다른 부대원들과 합류합니다. 상사에 대한 불만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는 그들은 좀 전에 친구를 잃은 스코필드의 사정과는 별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전쟁을 견뎌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슬픔과 타인의 일상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완벽한 타인처럼 보였던 그들도 스코필드의 미션이 실패했을 때 1,600명의 병사가 죽는다는 사실에는 말을 잇지 못합니다. 1,600명의 목숨들이 자신들과 같은 처지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짧은 침묵 속에 강렬한 유대감을 나눈 부대원들은 다시 길을 떠나는 스코필드가 건넨 행운마저도 그를 위해 돌려줍니다.


스코필드는 리셋된 게임 속 주인공처럼 퀘스트를 차례차례 깨 나갑니다. 미션 달성을 위한 그의 의지가 강해질수록 관객의 몰입도 높아지죠. 냉정하게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는 폭포 씬조차도 <1917>을 보는 동안에는 주인공이 무사하길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1917>은 가장 화려한 불꽃을 영화의 마지막에 쏘아 올립니다. D부대를 겨우 만난 스코필드가 돌진하는 병사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장면은 눈앞에 둔 1,600명의 목숨과 그간의 고생, 잃어버린 친구를 향한 마음 등이 응집되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리고 겨우 마주한 D부대의 장군은 이 모든 일에 놀랄 여유도 없을 만큼 지쳐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또 한 번 목숨을 연장시켰을 뿐입니다.



스코필드는 불가능한 미션을 완성했지만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수고했다 말하는 사람조차 없죠. 영화는 시작과 똑같이 푸른 잔디밭에서 나무에 기대어 쉬는 스코필드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눈감은 스코필드는 그가 거쳐온 시간이 믿기지 않으만큼 평화로워 보입니다.


++영화의 변곡점마다 영국 간판 배우들이 고위간부로 등장합니다. 적절한 캐스팅이라기보다는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는 관객을 위한 팬서비스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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