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moviesketch
정치란 무엇인가
영화감독을 직업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건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몇몇 스타 감독들을 제외하면 감독이라는 직업은 설사 전작이 흥행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다음 스케줄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꾸준히 작업한다는 건 감독이 얼마나 잘 나가는 감독인지를 보여주는 지표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무려 50년간, 매해 한 편 이상의 작품을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흥행시킨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그의 영화들이 폭넓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언제나 대중친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필버그 영화 속 주인공은 행복할 때 활기찬 음악과 함께 환하게 웃고 슬플 때는 직접 자기 사연을 구구절절 들려주며 그만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까지 울 곤 합니다. 스필버그는 50년간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루어 왔지만 표현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중을 향한 배려로 상업영화의 정점에 섰지만 어떤 때는 그 방식이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실제 인물을 다룬 <링컨>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필버그는 역사적 인물 링컨을 늘 하던 방식(긴 대사와 직접적인 감정 표현)으로 그려냅니다. 게다가 소재가 정치다 보니 평소보다 더 지루하죠. 하지만 <링컨>은 정치란 무엇인가를 너무나도 성실하게 잘 표현해 냈습니다.
영화는 남북전쟁 당시 종전과 노예해방을 두고 고민했던 링컨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개혁 성향이 강했던 링컨은 어떤 대통령보다도 국민에게 사랑받으며 재신임되었지만, 그래서 고민도 많았습니다. 국민 모두의 동의를 얻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실제로도 링컨은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데다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하죠. 링컨 역은 촬영장에 영화 속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로 유명한 또 다른 기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맡았습니다. 덕분에 스필버그는 링컨이 살아있을 당시 느꼈을 철저한 고독감을 더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죠.
링컨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병으로 아들도 잃었죠. 아들을 잃은 부인은 신경증에 걸려 평생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링컨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또 잃을 수는 없다는 아내의 간곡한 부탁에 장남이 군대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죠. 영화는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막힘 없이 나라를 운영해 갔던 대통령이 아니라 개인사로 고통스러워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상대당 의원들을 매수해야 했던 링컨을 보여줍니다.
링컨은 길게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의미 없는 전쟁으로 자식을 잃어야 했던 국민에게 종전을 막은 그는 나쁜 대통령일 수도 있습니다. 흑인의 인권만큼 개개인의 목숨도 중요하니까요.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노예제 폐지가 사실은 대통령으로 역사에 업적을 남기고자 한 욕심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이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고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저는 <링컨>을 보면서 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도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어진 지금, 사람들은 더 엄격해졌습니다. 대중 앞에 서는 사람에게 순도 100%의 도덕적 완벽함을 바라죠. 정치는 월드컵 경기와 비슷합니다. 모두가 지켜보며 왜 저거밖에 못하냐고 하지만, 실제 축구장 위를 뛸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은 많지 않고 축구장 안은 앉아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곳입니다. 아마도 링컨이 21세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는 수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정치는 결과가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대중은 남을 망가트리면서까지 목적을 이루려는 직업 정치인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사실은 그게 정치의 민낯입니다. 모 정치인은 말했습니다. 좋은 정치인이란 공적 헌신성이 사적 욕망보다 2% 큰 사람이다. 그 말을 해설한 모 배우는 정치인의 사적 욕망이 50%를 넘어선 안 되지만 40% 이하로 떨어져도 정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교나 시민 활동을 해야 한다고 했죠. 정치인은 협상과 타협이 주 업무입니다. 티비 토론에서는 서로 으르렁 거려도 실제는 모 대학 동기에, 운동권 선후배에, 무엇보다도 같은 정치를 업으로 한다는 동질감 아래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링컨>은 그 옛날 정치 모습도 근본적으로는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기주의가 충돌하는 곳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걸 발견하는 사람은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링컨의 비전인 노예 해방은 사람들이 상상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흑인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흑인의 삶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이루는 게 흑인 노예들 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도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결정으로 아직까지 회자되는 대통령이 되었죠. 어느 한 부분이라도 현실보다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비전이 있다면 그건 희생을 무릅쓰고 할 만한 일인 거 같습니다. <링컨>은 실존했던 한 인물에 대한 고증이자 그가 몸담았던 정치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뻔한 방식으로 소재의 핵심을 이토록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걸 보며 역시 50년간 일이 끊기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