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moviesketch
작고 깊은
마음의 구멍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합니다. 개봉 20년 만에 복원되어 재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는 흔하디 흔한 사랑, 심지어 불륜을 다룬 작품이지만 가벼운 키스신이나 노출 한번 없이 에로티시즘(= 인간의 성적 본능이나 사랑에 대한 욕구 등을 자극하는 암시적인 성질이나 경향)을 전하면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잃지 않는 작품입니다. <화양연화>가 칸에서 상영할 당시 한 평론가는 이렇게 아무 내용 없는 영화에 자기가 감동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합니다. 미장센이 뛰어난 왕가위 감독답게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장면들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고 여전히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그의 작품들 중 단연 최고작입니다. 이후에 많은 영화들이 <화양연화> 스타일을 답습했지만 이 영화만큼 감동을 준 작품은 없었습니다.
원래 <화양연화>는 더 노골적이고 평범한 불륜영화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튜브를 뒤져보면 양조위와 장만옥이 침대 위에서 낄낄거리는 삭제씬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숙성시켜가며 만드는 감독의 성향 탓에 (칸 영화제 첫 상영이 가편집본일 정도)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탄생했고 이 정도라면 불륜이라도 누군들 이해 못 해줄까 싶은 아련한 러브스토리가 되었습니다. <화양연화>는 신기한 영화입니다. 미장센이 저 정도로 뛰어난 영화는 많은 거 같은데, 이런 사랑 내용도 익숙한데, 양조위보다 카메라를 잘 받는 배우가 하나쯤은 있겠지 싶지만 <화양연화> 이상으로 유기적인 경우는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N차 관람의 숫자가 높아질수록 이 완성도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화양연화>는 기본적으로 시선에 대한 영화입니다. 모든 영화가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화양연화>는 그걸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영화의 반 이상이 차우와 첸 부인의 클로즈업으로 구성된 건 이 작품이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는 이야기라는 뜻이죠. 끊임없이 감정을 숨겨야 하는 인물들은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거울 너머로 바라봅니다. 모텔에서 차우와 첸 부인이 번갈아가며 서로를 거울로 훔쳐보는 장면은 그 어떤 정사씬보다도 인물의 욕망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화면 윗부분을 가림막으로 가리거나, 멀리 레이스 커튼 뒤에서 비치는 인물의 실루엣을 보여주는 촬영 방식은 관객이 변해가는 그들의 감정을 관음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죠.
<화양연화>는 대사도 많지 않습니다. 빙빙 돌려 말하는 두 사람의 이상한 재현과 실제가 섞여 헷갈리기도 하죠. 그들은 가능한 진의는 감추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입을 다뭅니다. 생략된 대사를 대신 채우는 것은 양조위와 장만옥의 연기입니다. 첸 부인과 짧은 만남 후 회사로 돌아가 상념에 빠진 양조위의 표정이라던가, 이별연습 도중 진짜 이별을 실감하고 장만옥이 팔을 움켜쥐는 장면은 구구절절한 대사보다 감정을 더 풍부하게 전달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왕가위는 자신이 바라는 연기란 배우에게 맞춤 제작 옷을 입히는 것이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각 배우의 타고난 성질을 살리고 싶다고 했죠. 그래서인지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양조위와 장만옥의 염문설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만옥이 결혼하고 난 후에도 이어진 소문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화양연화>를 본 사람들의 희망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양조위는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토록 모호한 영화가 관객에게 제대로 감정을 전할 수 있었던 건 두 배우가 보여준 인물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양연화>에는 숨은 내용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시간의 변곡점마다 정확히 년도와 장소를 보여주는데, 영화가 끝나갈 즈음 프랑스 드골 장군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인파의 환영을 받는 뉴스 장면이 나옵니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분량도 짧아서 예전에 <화양연화>를 볼 때는 이 장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주인공이 캄보디아로 향하는 상황을 알리기 위한 중간다리 정도로 생각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부분은 영화 전체를 함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던 캄보디아는 해방 후에 더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종주국이던 프랑스에 우호적인 감정을 지녀 드골 장군의 방문에 유례없는 환영인파까지 생겨났던 겁니다. 영화의 배경이자 왕가위 감독이 자라온 홍콩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됐지만 영국의 식민지령 아래 누렸던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차오와 첸 부인이 잠시 길을 벗어났던 그 짧은 시간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듯이요. 그렇게 생각하니 <화양연화>의 첫 아이디어가 원색적인 불륜영화였던 게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결국엔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거죠. 20년이 지난 지금도 <화양연화>가 여전히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수정한 내용이 맞았던 거 같습니다.